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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다양성을 통한 안정성 -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필수적 속성

by 성공의문 2021. 10. 26.

나는 박사 과정 시절, 여러 과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수업 중 하나가 물리과에서 개설한 시스템 생물학이었다. 아무래도 물리과에서 개설한 과목이다 보니, 다소 수학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치중한 코스웤이긴 했지만, 그래도 게임 이론, 생태학, 비선형 동역학, kinetic Monte carlo (KMC), synthetic biology, biological/neural signal trasduction 등 굉장히 흥미롭고 다채로운 개념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컴퓨터로 구현하며 익혔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도 몇몇 방법론은 지금도 내 연구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어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KMC는 시스템 생물학뿐만 아니라, 원래 Daniel Gillespie가 1970년대에 개발했던 확률론적 알고리듬이 주요 목표로 삼았던 chemical reaction network와 연결되어 bio-chemical reaction network 모델링도 가능하고, photonic sensor array signal transduction에 대한 stochastic modeling에도 적용될 수 있다. 표면에서의 adatom의 adsorption-surface dissufion-aggregation-clustering 등을 설명하는 surface dyamics 역시, 이러한 adatom이 많지 않을 경우 stochastic framework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한데, 그 경우 KMC가 잘 응용될 수 있다.

시스템 생물학에서 배우는 비선형 동역학 (nonlinear dynamcis)은 기본적으로 Lotka-Volterra system의 변용인데, 이 과정에서 아주 간단한 생태계 모델링도 하고, 특히 계의 spatial dimension이 한정되어 있을 경우 predator-prey dynamics가 equilibrium point를 형성하여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는지도 관찰할 수 있다. 게임 이론은 주로 유전학이나 진화 이론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생체 신호 전달에서는 neural network에서의 신호 전달 과정에 관여된 화학 생물학에 대한 수학적 모델링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과목의 main instructor는 당시 MIT 물리학과에 갓 임용된 젊은 조교수인 Jeff Gore라는 교수였다. 이 사람은 Computational systems bio를 연구하며 흥미로운 결과들을 많이 쏟아 내었는데, 자신의 원래 백그라운드는 전자공학이고, 학부과정에서 경제학, 물리학, 수학 등을 복수 전공하면서 UC Berkeley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한 천재 같은 사람이었다. Gore 교수는 자신의 다양한 배경과 경험에서 비롯된 정말 흥미로운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개념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단지 물리학이라는 학문적 경계에서 학문의 코스를 밟아 왔다면 그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학생들에게 전달해주기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공학 백그라운드를 기반으로는 Neural network signal transduction에 대한 신호전달 모델링을, 경제학 백그라운드로는 게임이론 기반의 evolutionary dynamics of multi-cellular system을, 수학과 물리학 기반으로는 비평형 동역학 기반의 생태학을 다룰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수업에서 몇 차례 강조한 것은 자신이 이렇게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학부 과정에서 어떤 과목을 듣든, 어떤 코스를 따라가든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캠퍼스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고, 학교에서 전공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MIT도 물론 좋은 학교지만, 버클리만큼 다양한 전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공학과 과학 중심인 학교이므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예술과 체육 등에 대한 전공 학문 분야는 제한되어 있다. 특히 MIT는 사립대인데 비해 버클리는 주립대이므로 재학생, 교수진 모두 더 많고 더 다양하다.

버클리가 최근 몇 년 간 캘리포니아 주 재정의 압박으로 많은 훌륭한 교수진들이 떠나고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학문적 다양성이 축소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주립대로서 버클리 같은 거대한 공립대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대학이자, 이러한 학문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사실 다양성이라는 것은 시스템의 안정성 관점에서 볼 때, 그저 옵션만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시스템에서든 그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속성이다.

생태학에서 다루는 다양성은 크게 네 가지 개념으로 정리된다. 일단 그 생태계의 player인 종의 다양성 (diversity of species)이 보장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두가 predator라면 그 player들은 굶어 죽을 것이고, 모두가 prey라면 그 player들은 견제세력이 없어 자손은 번성하는데, 시스템 안에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결국 자원의 소모로 인해 굶어 죽을 것이다. 즉, predator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prey가 너무 많아도 안 된다. 또한 predator가 한 종류만 있어서도 안 되고, prey 역시 한 종류만 있어서도 안 된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이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해 조건이 바뀔 경우, 그 종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두 번째 diversity 개념이 바로 유전적 다양성 (Genetic diversity)다. 예를 들어 어떤 종의 인구 집단이 매우 작다면 (즉,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친척 관계일 정도로), 유전적 결함에 대해 그 종은 매우 취약할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 종의 population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일정 확률로 mutation에 의한 genetic variation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 개념은 생태계 자체의 다양성 (Ecosystem diversity)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종들이 살 수 있으려면 그 조건들이 충분히 다양해야 한다. 산만 있어도 안 되고 평야만 있어도 안 된다. 강도 있어야 하고 호수도 있어야 하고 비도 내려야 하고 온도도 주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가끔씩 지진이나 해일 같은 위기가 닥쳐도 이렇게 시스템의 다양성에 대해 적응된 생태계는 그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각 종들은 기능적 다양성 (functional diversity)가 있어야 한다. 같은 종의 새라고 해도 어떤 새는 부리를 이용하여 먹이를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새는 발톱을 이용하여 먹이를 해체하여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모두 부리로만 먹이를 먹게 되면 부리에 병이 드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종에 속한 새 인구 집단은 멸망할 수 있다.

내 전공이 생태학이 아닌데도, 이렇게 10년도 더 된 기억을 굳이 끄집어낸 이유는 새삼스레 학문적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특히 학문적 생태계의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고등 교육과 연구를 동시에 담당하고 있는 대학이다. 모든 대학이 'University'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university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기관이라면 이미 그 안에는 이러한 학문적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기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자연적 생태계의 다양성에 네 가지 층위가 있듯, 학문적 생태계를 보존하는 대학이 지켜야 하는 다양성에도 네 가지 층위가 있다. 일단 종의 다양성에 대응되는 전공의 다양성이다. 최근 어떤 대선 후보는 인문학을 폄하하는 실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공학이든, 일정한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전통이 보존되어 온 분야라면 그 전공에 대한 성립 판단을 외부에서 강제하면 안 된다. 자연적으로 학맥이 끊겨서 없어지는 전공은 어쩔 수 없지만, 학맥이 이어지는 전공이라면 그 전공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경제학에서 시작된 게임 이론이 생물학, 공학, 물리학으로 번져나갈 수 있듯, 전자공학에서 시작된 신호 전달 이론이 신경과학과 딥러닝으로 번져갈 수 있듯, KMC에서 시작된 화학반응 네트워크 모델이 표면 반응과 유전학, 생태학으로 번져갈 수 있듯, 다양한 학문적 종의 다양성 보장은 학문적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새로운 학문의 탄생의 맹아가 될 수 있다.

두 번째가 유전적 다양성에 대응되는 전공별 학자의 숫자 보존이다.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일정 수 이상의 인구 집단이 필요하듯, 학문적 유전적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각 전공 별로 일정 수 이상의 학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가 비슷한 분야만 공부하고 연구한다면 단기적으로는 그 분야의 발전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성장동력을 위한 혁신의 범위가 제한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세 번째는 시스템 자체의 다양성이다. 대학이라는 기관이 그때 그때 유행하고 잘 나가는 전공에 맞춰 대학의 자원을 몰아주면 결국 재정은 제로섬이므로, 다른 전공에 대한 지원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태계의 최소 기능을 보장하기 위한 환경적 조건의 하한선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공 현판만 내리지 않는다고 그 전공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그 전공이 최소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지원, 그리고 대학 내부에서의 시스템을 멈추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기능적 다양성에 대응되는 학문의 변용 다양성에 대한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화학공학을 예로 들어 보자. 대략 두 세대 전에는 비료공업과 석유화학공업이 한국 화학공업의 주요 학문 분야였다.

그 시절에는 한국의 산업 발전의 기조가 중화학공업에 대한 집중 투자였으므로, 당연히 그에 맞춰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전공 분야의 교수진과 후학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가 한 세대가 지나자 조금씩 석유화학공업에서 신소재, 촉매, 고분자, 바이오공정 등으로 무게추가 옮겨 갔고, 다시 한 세대가 지나자 이제는 에너지 신소재, 스마트 공정 등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다. 같은 종의 새라고 해도 먹이를 먹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듯, 같은 전공이라고 해도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학은 이러한 학문 내적, 외적 변화를 품을 수 있는 flexibility가 보장되는 기관이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전공의 상전벽해급 변화가 일어나는 것마저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학문적 생태계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공간으로서의 대학이 존재하려면 당연히 기본적으로 학문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다양한 학문이 융성할 수 있는 재정적 토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고급 교육이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음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며, 대학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그 사회와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나라의 세금으로 대부분 운영되는 공립대의 경우, 존재 목적 자체가 국민에 대한 교육과 연구 가치 공유이므로, 이러한 학문적 다양성 보장은 더없이 소중한 기치가 된다. 국립대이므로 손해를 보든 말든, 인기가 없든 말든, 유행을 타든 말든, 수요가 쏠리든 안 쏠리든, 최소한의 population과 최소한의 변동 가능성, 최소한의 환경적 지원과 조건의 합치가 지원되어야 한다.

학맥이 끊겨서 어쩔 수 없이 전공이 축소되고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국립대라면 그 전공이 그냥 사라지게 나두어서는 안 된다. 어떤 학문이 생태계에 뿌리내리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 그 생태계에서 멸종된 학문을 다시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장화 속의 작은 진흙이라고 하더라도, 그 진흙에서 싹이 날 수 있다면 장화를 치우면 안 된다. 그리고 씨앗이 없다면 외부에서 받아서라도 다시 키워내야 한다.

국립대는 이렇게 학문적 생태계 보존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 만약 비인기 전공이라고 해서 그 학문의 최소한의 유지마저도 대학이 보장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한국 고대사 전공 분야가 점점 학맥이 끊기고 대학에서도 그 학문 존속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다하지 않아 마침내 그 분야가 소멸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 두 세대 후 한국의 청소년들, 대학생들은 국사를 배울 때 한국 고대사 부분은 일본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자료에 기반한 교과서로 배우게 될 것이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로켓 발사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끊기고 그 학문을 공부하려는 후학이 끊겨서 대학에서조차 그 전공에 대한 존속이 불가능해지면 어떻게 될까? 2030년대 이후, 6G 이동통신, 2040-50년대 즈음의 7G 이동통신을 위한 저궤도 위성들을 쏘아 올릴 로켓 기술의 명맥이 끊기게 될 것이고, 외국의 눈치를 보면서 외국의 발사체와 외국의 발사장, 그리고 외국의 인력에 의존하여 겨우겨우 위성을 쏘아 올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학문 분야에서 미치도록 잘 나가고 있는 딥러닝이 한 때 이러한 위기에 놓여 있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른바 몇 차례에 걸친 딥러닝의 겨울은 그 학문 분야의 존속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멀게 갈 것도 없이 1970-1990년대 사이, 이러한 딥러닝 학문 분야의 겨울은 깊고 지독하게 찾아왔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자들이 분야를 포기했거나 떠났다.

새로운 이론의 제시도 씨가 말랐고, 이미 제시된 이론을 구현할 컴퓨터 기술도 무르익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데, 그 학문을 지속할 동인을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딥러닝이 끝까지 살아남아 2010년대 들어 그야말로 융성하고 꽃을 피우게 된 것은 그 길고 긴 겨울 동안 딥러닝의 맹아를 죽지 않게 품어줄 수 있었던 대학이 그야말로 학문의 최후 보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대학들에 재직하던 학자들은 이론이나마 꾸준하게 연구하고 공유하면서 학문이 그냥 죽게 놔두지 않았고, 2000년대 후반 들어, GUGPU라는 때를 만나 딥러닝의 이론들은 마침내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만약 그 긴긴 겨울 동안 대학이 학문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딥러닝의 융성 시대는 한참 뒤에나 출현했을 것이다.

이제 국립대 법인으로 전환된 지 10년이 된 서울대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국립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Seoul NATIONAL University’라는 교명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대가 지난 반 세기 넘게 한국 사회에서 차지해 온 위상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대'라는 상징성이 있기에, 이 National이라는 표현을 교명에서 떼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National’이라는 상징성이 주는 프리미엄은 크다. 이러한 서울대에서 최근 인기학과-비인기학과에 대한 정원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기준은 직전 3년 간의 지원율인데, 이것이 85%에 못 미치면 정원을 10% 감축하는 것이고, 감축한 정원은 인기 전공의 정원을 늘리는데 활용된다. 말이 좋아 정원 재배치지, 사실상 이는 비인기 전공 학문, 특히 기초과학과 인문학 같은 기초 학문에 대한 사망 선고나 다를 바 없다.

비인기 전공은 그렇지 않아도 전공생 숫자와 정원이 작다. 많아 봐야 20-30명 내외다. 이러한 상태에서 매년 10% 감축이 정말 현실화되면 10년 안으로 대부분의 비인기 전공은 그야말로 자연 소멸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기계적으로 소멸하도록 대학이 좌시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재차 언급컨대 학문의 세계에서 마태 효과는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줄어든 전공생 숫자만큼, 그 학문 분야의 분야 내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고, 줄어든 다양성만큼 그 학문 분야에서 새로운 학문이 출현할 가능성은 더 낮아질 것이며, 더 낮아진 혁신의 가능성만큼, 그 학문이 다시 학맥을 이어갈 가능성은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지 않게 어느 순간에 스톱 버튼을 누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대학, 특히 국립대이며, 그렇게 지켜낸 학문적 다양성은 결국 그 나라 전체의 학문적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서울대 내에서도 구성원들이 이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 충분히 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 시작된 정원 조정이라는 미명 하의 구조조정은 학문적 생태계를 고사시키는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제 서울대를 필두로 점점 더 많은 대학들이 이러한 전공 TO 구조조정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인기 과목은 수강신청 1분 만에 정원이 금방 마감되는데 반해, 어떤 비인기 과목은 최소 수강생을 못 채워 폐강되는 일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어떤 과목은 정원 외로 타과생에게도 개방해 달라는 압력이 높아지는 반면, 어떤 과목은 그 과목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 수강생들의 수요에도 불구하고 개설이 안 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점점 더 많은 비인기 전공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분야를 바꾸든지 다른 전공에 편입하라는 압력을 내외부적으로 받을 것이며, 그 학자들에 길러내는 후학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공을 떠나 다른 인기 전공에 편입하여 겨우겨우 학문의 길을 지속할까 말까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뿌리 학문들이 고사하게 될 것이고, 고사한 학문에서 열매가 맺히는 일은 이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고사한 학문이 다시 재가 되어 그 땅의 거름이나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저 말라버린 사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풀뿌리가 겨우 자리를 지키던 들판이 사막이 되면 나무는 물론, 동물도 못 살고 사람도 못 사는 죽은 땅이 된다. 그러한 땅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라에서 세금으로 만든 연구-교육 기관이 바로 국립대이며 공립대다. 국립대가 적어도 사립대와 차별화되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비인기 전공들, 기초 학문들, 기초 과학에 대한 영속성 보장이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미 한국은 재앙적인 출산율과 더불어 인구절벽이라는 결말이 끝이 정해진 책처럼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방에 있는 크고 작은 국립대들은 점점 더 거세지는 전공 통폐합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미 국립대에 설치된 많은 기초과학 전공들이 고유의 명칭을 잃어버린 채, 각종 융합 전공, 연합 전공으로 대체되고 있는지 오래이며, 이 변화 속도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지거국이라 불리는 국립대에서도 물리학과라는 명칭을 유지하는 학교가 점점 적어지고 있고, 문사철 대학원은 사실상 대학원 박사 과정이 폐쇄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수익에 민감하고 입학생 관리에 더 민감할 사립대는 더더욱 이러한 전공 구조조정에 집중할 것인데, 당연히 정원을 못 채우고 학교 랭킹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전공에 대한 정리가 1순위가 될 것이다. 학교 랭킹은 대부분 이른바 좋은 논문 숫자와 인용 수로 대표되는 연구력, 기술이전으로 대표되는 수익 창출 등으로 정량 점수가 매겨지는데, 사실 대부분의 비인기 전공은 이러한 지표 향상에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구조조정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출현한 지 겨우 반 세기가 넘어가는 한국의 학문적 생태계는 조금씩 정리되어 갈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파훼될 것이고, 그 과정은 슬프게도 비가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이제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국립대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개별 학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학맥을 인위적으로 끊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기초학문 생태계는 그 소멸 속도가 인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비가역적으로 진행되는 학문적 생태계의 고사를 부추기는 주된 동인이 된다.

반복하여 언급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양성이 파손된 학문적 생태계는 결국 생태계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다. 이는 심지어 같은 인기 전공 내부에서도 학문적 다양성 파손은 부익부 빈익빈 형태로 증폭되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기계공학의 경우, 이제는 전통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젊은 학자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데, 이는 전통적인 기계설계나 기계공학을 전공할 경우, 좋은 논문을 많이 쓰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학문의 진도가 어렵게 나가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잡 시장에 민감한 후학을 확보하는 것도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반면 바이오메카닉, 소프트 로봇, 자율주행차 등의 전공 분야로는 사람과 연구 과제가 몰리고, 또 그것이 거름이 되어 더더욱 패권이 강화된다. 당연히 분야를 확실히 정해 두지 않으면, 결국 신규 교원 임용에서도 이러한 이른바 잘 나가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이 자리를 갖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아지며, 이는 후에 다시 양의 피드백 (positive feedback)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화학공학도 마찬가지다. 이제 석유화학을 전공하여 신규로 임용되는 젊은 교원을 찾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세계적 추세 자체가 화석 연료 사용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설정되고 있기도 하려니와 (물론 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은 맞다), 이 분야의 학문적 maturity가 한계에 달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학공학에서 석유화학공학을 가르칠 수 없다면, 한국이 보유한 산업단지의 석유화학공업은 한 세대 후에는 외국의 엔지니어링 회사와 인력, 그리고 로열티에 다시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한국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수많은 석유화학공업 기반 소재 생산 역시 기술적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 재료공학의 경우 야금학 (metallurgy)를 전공한 젊은 학자를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야금학을 도외시하면 정작 사회에서 필요한 다양한 합금이나 철강, 금속 재료 생산기술의 맥이 끊기고, 결국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재료공학 분야 중 하나는 high entropy materials이라는 분야인데, 이 분야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에너지 신소재를 위한 촉매재료, 혹은 구조재료로 활용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분야의 학문적 원류를 따라가면 야금학이 나온다.

다양한 성분을 조절하여 금속의 물리 화학적 특성을 조절하는 것을 연구하는 분야가 바로 야금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야금학을 제대로 있어간 젊은 학자들이 드물다 보니, 예전에 야금학에서 이룩한 많은 성과들이 re-invent the wheel 하는 시행착오를 다시 겪고 있는 모양새가 곳곳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학문의 맥이 제대로 이어졌더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시행착오였을 것이다. 사실 가장 큰 학문적 위기에 몰린 공학 분야는 원자력 공학이다.

국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이 탈원전으로 정해지면서 이미 많은 후학들이 지원을 꺼려하고 있고,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면서 신기술 개발에 대한 동기가 사라져 학문적 발전의 동력이 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공학의 경우 이 추세가 지속되면 아마 한-두 세대 후, 한국의 원전 기술은 신규 건설은 언감생심이고, 아마 최소한의 유지보수마저도 결국 외국의 인력과 엔지니어링 회사 (아마도 중국이 될 것이다)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있다는 공학 같은 전공 내부에서도 결국 이렇게 세부 전공별 마태 효과는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다시 각 전공 분야의 세부 뿌리들이 고사하고 나면 분야 내부에서의 다양성도 그만큼 감소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분야 내부에서의 다양성 축소는 그 학문 분야 전체의 다양성 약화로 이어지며, 이는 그 학문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는 요인이 된다.

생물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손을 못 남기고 멸종할 수 있는데 학문이라고 예외여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당연히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한 때 융성했던 학문이라도 근거가 희박해지거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사라지는 경우는 인류의 역사에서 수 없이 반복된 이벤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대학이 설치된 이후, 다양한 학문들의 생태계가 그 학문의 쓸모 여부에 따라 강제로 조정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어 왔다.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에서라면 이러한 강제 조정은 여전히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이다.

설사 자연적으로 어쩔 수 없이 소멸의 궤도에 들어간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대학은 그 학문의 최소한의 기록과 흔적을 레거시로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그 학문이 필요할 때 소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확보해 돌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며, 그것을 확보할 수 없는 대학은 학문적 다양성을 지킬 수 있는 기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앞서 언급했던 MIT 물리학과의 Jeff Gore 교수는 MIT에 부임하기 전, 2009년 Nature에 ‘The yin and yang of nature’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게재했다. 그 논문을 시스템 생물학 수업 시간에 언급하면서 왜 이 논문의 제목에 Yin and Yand (음과 양)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게 되었는지의 일화를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생물계에서 관찰되는 시계 (timekeeper)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의 피드백 (Yang)과 음의 피드백 (Yin)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자신이 학부 과정에서 배운 동양철학 교양 수업에 착안한 작명이었다고 설명했다.

동양철학 (아마도 도교)의 음과 양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화를 이루는 요소들이고, 어느 한쪽이라도 더 커지면 그 균형이 깨짐으로써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처럼,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지배하는 time-keeping에는 음과 양의 피드백이 모두 필요하며 그중 어느 한 피드백이라도 제대로 구현되지 않으면 생명체의 time-keeping이 부정확해져 결국 생명체의 존속 가능성이 낮아짐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왜 학생들이 학생 시절 다양한 학문을 접해 보아야 하며, 다양한 학문에서 영감을 얻어야 하는지를 힘주어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고어 교수가 학생 시절, 다양한 학문 분야를 접할 수 있는 대학이라는 환경에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물리학과 수학만 공부했다면, 다양한 영감의 원천을 충분히 발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자공학의 신호 이론이 Neural network의 신경 신호 전달 모델의 기반이 되고, KMC의 방법론이 이차전지 dendrite dynamics의 모델이 되고, 경제학에서 탄생한 게임 이론이 genetic landscape의 fitness function 설계의 기본 알고리듬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배경의 학문들이 한 군데에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대학이 ‘UNIVERSE’ITY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뿌리 학문들의 최후의 보호자이자 보루, 그리고 최소한의 양분과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bed가 되어야 한다. 사립대도 마찬가지이지만, 국립대마저도 이러한 기본 responsibility를 저버리기 시작한다면, 결국 한 나라의 학문적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학문적 다양성이 축소된 학문적 생태계라는 네트워크는 결국 일부 노드들만 강하게 연결된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변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양성이 제거된 네트워크는 외부의 변동에 취약하며, 충격이 급속도로 전파되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조용히 사회의 기저에서 사회 변혁에 대한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해 주던 기초 학문과 전공들이 사라진 그 자리를 다른 인기 전공으로 채운다고 해도, 결국 비슷비슷한 학문들만 클러스터링 된 거대한 집단이 될 뿐이고, 유전적으로 비슷한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순식간에 소나무 병충해에 집단 감염되어 소멸되듯, 외부 변화에 취약해진 거대한 집단은 언제든 크고 작은 외적 변화로 인해 붕괴될 수 있다. 학문이 붕괴된 자리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크고 작은 싱크홀이 되고, 싱크홀을 품고 있는 사회는 언제든지 비 몇 번에 기반이 무너지는 큰 재앙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학문의 생태계는 키우는 것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없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멸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부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적어도 우리 사회의 국립대가 최후의 보루라는 고유 가치를 잃는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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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에 있을때는 Alexander van Oudenaarden 이라는 젊은 교수가 시스템 및 합성 생물학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화공과에서 포닥을 하던 제가 그룹미팅에 와도 좋다고 하여 눈동냥 귀동냥 했습니다. 그때 정말 천재들은 이렇게 연구하는구나 하며 많이 배웠습니다. 학생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연구 다양성 확보 방안으로 경계 없는 연구 환경을 구축하는것이 중요한것 같습니다.

출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