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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지진 역사로 본 조선과 한국의 정치사

by 성공의문 2016. 10. 6.

지진은 과학의 영역인 동시에 정치의 문제다. 갑자기 닥치는 천재지변보다 무서운 것은 인재지변과의 경계를 허무는 정치다. 과학의 시대에 국민의 안전을 자연의 선처에 맡기는 정치는 그 자체로 재앙이다. 최근 연쇄 지진으로 한반도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사실이 다시 입증됐다. 원자력발전소 밀집지를 지진이 타격해 대참사를 부를 수 있단 우려에도 정부와 에너지 당국은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서기 2년부터 2016년까지 왕조시대와 근현대의 사료들, 지진 관련 보고서 등을 토대로 ‘지진을 대하는 당대의 통치와 정치’를 살폈다.


“땅은 고요한 물건이온데.”

예조판서 남곤이 임금께 아뢰었다. 1년 뒤 기묘사화(1519년 11월. 조광조 등 신진사림 숙청)를 주도하고 그는 좌의정이 될 것이었다.

“그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고 진동하니 이보다 큰 변괴가 없사옵니다.”


임금(조선 중종)이 남곤에게 일렀다.

“오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재앙은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인데 내가 어둡고 미련해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노라.”



용상이 크게 흔들렸다

군신이 변괴를 논하는 중에 변괴가 다시 왔다. 임금이 앉은 용상(정무를 보는 평상)이 크게 흔들렸다. 사람이 손으로 밀고 당기듯 요동했다. 대궐이 오르내리고 흔들리기를 작은 나룻배가 풍랑에 얹혀 전복되는 것 같았다. 고요해야 마땅한 땅에서 임금과 신하가 격동에 싸였다. 네 번째 지진이 찾아왔다.


1518년 6월22일(중종 13년) 유시(오후 5~7시)에 세 차례 강한 지진(진도 8~9)이 있었다. 소리가 성난 우레처럼 컸다. 사람과 말이 놀라 쓰러졌고, 대궐 담장이 넘어졌으며, 사당의 기와가 떨어졌다. 나란히 있던 옹기가 서로 어깨를 부딪쳐 깨졌다. 당황한 도성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압사를 면했다.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본래 4월에 지진이 있으면 오곡이 익지 못해 사람이 굶주렸고, 5월(해당 지진 발생일은 음력 5월15일)에 지진이 오면 사람이 거처를 잃고 떠돌았다. 노인들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라며 앞날을 걱정했다. 기절하는 자가 많았다. 팔도가 마찬가지였다.


네 번째 지진이 잦아들어 용상이 떨기를 멈췄다.

“우의정 안당 입시옵니다.”

유시의 지진 직후 임금은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부름을 받은 대신들이 도착 순서에 따라 임금 앞에 엎드렸다. 안당이 아뢰었다.

“오늘의 큰 변은 아마도 신 때문이 아닌가 하옵니다. 신처럼 용렬한 사람이 정승 자리에 있으니 어찌 재변이 없기를 보증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밤이 2경(밤 9~11시. 늦은 시간까지 지진 수습 논의)을 지나며 깊어갔다. 대간(감찰·간언하는 관리)들이 광화문 밖에 모여 임금 뵙기를 청했다. 유문(열어둘 때가 아닌데도 대궐문을 열어둠)하여 들어오게 했다. 대사헌 고형산이 아뢰었다.

“사람들이 모두 깔려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있사옵니다.”


6월23일 영의정 정광필이 거듭 청했다.

“하늘이 어제 지진을 보임은 헛되이 일어난 일이 아니옵니다. 주상께서 ‘원통한 옥사가 있는 것인가’ 물으셨으나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사람 쓰는 것이 마땅치 않은 까닭 아니겠사옵니까. 신이 정승 노릇을 잘하지 못한 탓이니 해직하여 주소서.”


1518년 하루 3~4차례 지진나자 

“정승 노릇 못한 탓, 해직하소서” 

“임금인 내가 훌륭하지 못해서다” 

전례 없는 강진의 원인을 군신은 

자신의 무능·부덕에서부터 찾았다 


왕조시대는 지진을 하늘의 계시로 

재해빈발을 정치 불안정으로 해석 

‘사람 탓’ 사상은 성찰의 근본이자 

질서유지·정적제거 논리로도 활용 

역사서는 서기 2년에 첫 지진 기록


왕이 명했다.

“내가 훌륭하지 못하고 하늘과 땅의 마음에 맞추지 못해 그런 것이다. 어찌 대신이 직책을 다하지 못해서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이날도 지진이 세 차례 있었다. 6월25일 임금이 조광조(부제학)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번 재변을 두고 식자들은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하옵니다. 아래위가 진실로 심신을 닦으면 재변은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는 백성의 짐을 덜어줄 것도 청했다.

“백성들이 앵두·자두·황도·능금 등을 바치기를 매우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감할 만한 것은 감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이 따랐다.


전례 없는 강진의 원인을 군신은 스스로의 무능과 부덕에서부터 찾았다. 며칠에 걸쳐 수습책(<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지진대책 논의가 가장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대목)을 논했다. 재앙은 사람에게서 오므로 하늘이 노할 소인배를 해직하고 등용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했다. 과중한 형벌과 조세가 없는지도 살폈다.


6월24일에도 은은한 우레 소리를 내며 지진이 도성으로 왔다. 6월25일 묘시(오전 5~7시)에도 지진이 있었다. 6월26일 평안도에서 지진 발생 보고가 올라왔다. 6월28일 개성에서 지진이 일었다. 지진 없는 날이 없다가 그달이 끝나서야 그쳤다.

중종은 반정(연산군 폐위)으로 왕이 됐다. 개혁을 바랐으나 개혁에 따른 기존 통치기반의 붕괴를 두려워했다.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훈구 대신들의 기묘사화를 승인했다. 조광조가 임금에게 고한 ‘조만간 일어날 일’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기묘사화가 있던 해 스물여덟 차례의 지진(중종 실록)이 조선을 찾았다. 조광조가 죽자 제자 양산보는 자연에 묻히겠다며 1530년 소쇄원(전남 담양군 남면)을 지었다. 그해에도 지진이 있었다. 하늘에서 피비가 내려 사람과 말의 발자국을 지웠다.



재해의 빈발은 군신의 무능 탓”

왕조시대는 지진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음이 양을 누를 때 지진이 온다고 믿었다. 신하가 강성해지거나, 왕비가 전횡을 일삼거나,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범하면 지진의 징조(중종 13년 6월25일 좌의정 신용개)로 쳤다. 재해의 빈발은 정치 불안정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했다. ‘재앙이 사람 탓’이란 사상은 정치적 성찰의 근본이었다. ‘질서 유지’와 정적 제거의 논리로도 활용됐다. 사관은 서기 2년에 첫 지진 기록을 남겼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기원전 17년 계비 치희(다른 계비 화희와의 다툼으로)가 떠났다. 치희를 그리워하며 ‘황조가’를 지은 유리명왕(고구려 2대 왕)은 17년 뒤(서기 1년) 나이 스물도 안 된 첫째 아들을 잃고 통곡했다. 이듬해 8월 지진이 났다. 서기 3년 유리명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유리에게 왕권에서 밀린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와 남하해 나라를 세웠다. 백제의 시조가 된 지 31년째 되는 해 5월(양력 3~4월) 지진이 났다. 6월에도 지진이 따랐다. 온조왕 37년(서기 19년 3~7월)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졌다. 참새 같은 작은 새들이 맞아 죽었다. 한강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가구였다. 그들이 국경을 넘은 고구려에선 두 달 전 지진이 국내성을 때렸다.


93년(백제 기루왕 17년) 9월 횡악(서울 삼각산 추정)의 큰 돌 다섯 개가 동시에 떨어졌다. 그해(파사이사금 14년) 11월 신라 경주에서 지진이 났다. 108년 가뭄과 홍수로 삼국이 굶주렸다. 백제의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3년 뒤(기루왕 35년) 3월과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거듭된 지진과 자연재해를 당대가 평안하지 못했던 징표라고 후대는 해석했다.


268년 신라에 비가 없었다. 미추이사금(13대 왕)이 신하들을 모아 정치와 형벌 시행의 잘잘못을 물었다. 298년 11월 고구려 봉상왕이 궁실을 증축했다. 왕의 집은 사치스러운데 백성들은 주리고 궁핍했다. 신하들이 간언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객성(일시적으로 보이는 별)이 달을 침범했다. 귀신이 봉산(서울 은평구 구산동과 경기도 고양시 경계의 산)에서 울었다. 300년 1월 천둥이 치고 지진이 났다. 2월에도 지진이 있었다. 8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 491년 8월 백제(동성왕 13년)의 주린 백성 600가구가 신라로 도망했다. 그들이 당도한 신라도 이듬해 가물었다. 신라 왕(소지마립간 14년)이 스스로를 책망해 평소 먹던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660년 봄 백제(의자왕 20년) 도읍(부여)에서 우물에 핏빛이 섰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뭍으로 올라와 죽었다. 개구리와 두꺼비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올라 버글댔다. 그해 백제가 멸망했다.


756년 봄 상대등(신라의 재상) 김사인이 근년에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난다며 왕(경덕왕 15년)에게 시국 정치의 잘되고 잘못됨을 상세히 글로 아뢰었다. 왕이 받아들였다.


“왕은 근심하지 마옵소서.”


673년 김유신이 문무왕(5년 전 삼국통일)에게 아뢰었다. ‘요상한 별’이 황룡사와 월성(경주시 인왕동) 사이에 떨어졌다. 우려하는 문무왕 앞에서 김유신이 자책했다.

“지금의 재앙은 저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니옵니다.”

문무왕이 일렀다.

“그와 같다면 과인이 더욱 근심하는 바다.”


그해 김유신이 죽었다. 106년 뒤(779년)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일어 김유신의 묘소까지 미쳤다. 짙은 연기와 안개가 시야를 가려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때는 혜공왕 15년 3월이었다. 경주에 대지진이 났다.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삼국사기>에 구체적 숫자가 기록된 최대 지진 피해)이 넘었다.


혜공이 왕(765년)이 됐을 때 여덟살이었다.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했다. 즉위년 봄에 지진이 있었다. 이듬해 두 개의 해가 하늘에 떴다. 768년 호랑이가 궁궐 안에 들어왔다. 769년 겨울 치악현(황해도 연백군 온천면 추정)에서 쥐 80여마리가 평양을 향해 갔다. 767년, 770년, 777년 지진이 잇달았다. 779년 큰 지진(진도 8~9)이 일었을 때 태백(금성)이 달에 들어갔다. 임금이 100개의 자리에 고승을 모시고 부처의 말씀을 들었다.

“혜공왕이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노는 데 끝이 없었다.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다.”

땅이 무너진 원인이 무너진 정치였다고 고려왕조의 김부식은 썼다. 지진 이듬해 상대등 김양상이 왕을 죽이고 선덕왕이 됐다.



왕권·권력 다툼의 재료로도 소환

1036년(고려 정종 2년) 7월 개성, 경주, 상주, 광주 등지에 지진(진도 8)이 났다. 많은 가옥이 훼손됐다. 경주에선 사흘이 지나서야 지진이 멎었다. 불국사 남쪽 계단의 부속 시설과 행랑 시설 등이 훼손됐다. 석가탑은 붕괴 일보직전(2016년 9월 지진 땐 다보탑의 상륜부 난간석 일부 이탈)이었다.


1134년(인종 12년) 6월 지진이 있었다. 광주에서 붉은 비가 내렸다. 1년 뒤 서경 천도가 좌절된 승려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 김부식이 평정했다. 묘청이 왕도를 삼고자 했던 서경(평양)에서 3년 뒤 지진이 났다. 고려 멸망(1392년·공양왕 4년) 전해엔 세 차례의 지진이 기록으로 남았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조선 세종 즉위년(1418년) 10월에 하늘에서 첫눈을 뿌렸다. 신하들이 축하했다.

“내가 오늘 어찌 첫눈을 기뻐하리오.”

신하들이 올리는 축하를 임금은 받지 않았다. 그날 대구에서 지진이 있었다. 1436년 5월20일 세종이 궐을 나와 능을 참배했다. 경성·경기·충청·전라·경상·황해·평안도에서 땅이 진동(진도 8)했다. 영의정 황희와 참찬 신개 등이 주정소(임금이 거동 중에 잠시 들러 수라를 들던 곳)에서 술을 드시기를 권했다.

“능을 참배한 뒤에는 마땅히 음복하셔야 하옵고, 오늘은 세속 명절(단오)이오니 술을 드시기 원하옵니다.”

임금이 거절했다.

“지금 지진이 있어 재변이 거듭하는데 어찌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겠는가.”

황희 등이 거듭 아뢰었다.

“옥체가 새벽 기운과 안개를 쏘이셨사옵니다. 지금 술을 드시지 않으시면 병이 나실까 염려되옵니다.”

어진 임금은 천재지변을 맞아 백성의 곤란을 살필 줄 알았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백성들에게 본받게 하고자 함이다. 재변을 두려워하는 뜻에도 합당하다.”

신하들이 울면서 청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과학 발전에 힘쓴 임금은 천재지변을 논할 때도 과학적으로 사고했다. 1432년 경연에서 군신은 천재지변의 경중을 따졌다. 임금이 말했다.


“지진은 천재지변 중의 큰 것이다. 경전이 지진은 번번이 기록했으나 우레나 번개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우레나 번개는 보통 있는 일인 줄 알겠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경상도(당시에도 경상도의 지진 피해가 컸음)에 더욱 많다. 오랑캐의 변란이 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모든 자연재해를 ‘하늘의 뜻’으로 푸는 논리도 경계했다. 권채(1433년 대사성 임명)가 견해를 냈다.

“반드시 어느 일을 잘하였으니 어느 좋은 징조가 감응하고, 어느 일을 잘못하였으니 어떤 좋지 못한 징조가 감응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사옵니다.”

임금이 동의했다.

“경의 말이 그럴듯하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여러 선비들이 천재지이설(천지이변이 인간사회의 길흉을 예언한다는 이론)에 빠져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은 내 채택하지 않겠다.”


1506년 8월 연산(제10대 왕)이 지진 보고를 받았다. 지진의 책임을 임금의 실정에서 찾는 대신들에게 연산이 명(1506년 8월)했다.

“이런 재변은 상달하지 말라. 이미 전교를 내렸는데 반포하지 않았느냐?”

그해 연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왕에 올라 중종이 됐다. 지진은 왕권과 권력 다툼의 재료로도 소환됐다.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하온데 전하의 사돈인지라 은혜를 주신 것 아니옵니까.”

세종의 선왕 태종 8년(1408년) 사간원에서 민무구·무질(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동생)의 죄를 청하며 상소했다. 형제는 1년 전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이용해 권세를 꾀했다는 이유로 유배됐다. ‘1차 왕자의 난’(1398년) 때 이방원을 도와 훗날 태종이 될 길을 튼 형제였다. 상소는 주청했다.

“무질·무구의 반역은 전하께서 사사로이 처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지금 여름철에 서리가 내리고, 안개가 끼며, 지진이 일고, 바람이 찹니다. 신 등은 전하께서 형벌을 잘못하시어 그런 것 아닌가 두렵사옵니다. 옛적에 성군이 죄인을 잡으매 하늘이 바람을 돌리고 풍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가 현저하지 않사옵니까.”


2년 뒤 4월18일 지진이 땅을 울렸다. 다음날 대신들이 민씨 형제의 사사를 청했다. 지진 사흘째 태종이 형조정랑 김자서 등을 제주(유배지)로 보내 무구·무질을 자결하도록 했다.



1518년 6월22일(중종 13년) 유시(오후 5~7시)에 세 차례 강한 지진(진도 8~9)이 있었다. 

임금이 대궐로 신하들을 불러들여 변고의 원인을 논하는 중에 네 번째 지진이 왔다. 

임금의 용상이 사람이 손으로 밀고 당기듯 요동했다. 지진 없는 날이 없다가 그달이 끝나서야 그쳤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고하지 않은 죄를 추국하소서”

1455년 1월15일(단종 3년) 경상도 초계 등 3곳, 전라도 전주 등 29곳, 제주 대정 등 2곳에서 지진(진도 8~9)이 났다. 담과 가옥이 무너졌고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단종이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전염병이나 천재지변을 해소하려 지내는 제사)를 행했다.


문종이 죽자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노렸다. 숙부의 동태를 주시하는 어린 임금에게 지진은 공포를 자극하는 괴이한 변고였다. 흉흉한 정세 속에서 단종은 지진이 날 때마다 제를 올렸다. 즉위년(1452년)에만 6월10일, 6월19일, 9월16일, 10월5일, 10월17일, 12월6일 지진이 났고 해괴제가 거행됐다.


“한양에 지진이 난 것은 이변 중의 큰 이변이다. 내가 왕위에 구차하게 눌러앉아 있어 하늘의 노여움이 이른 것이다.”

선조(재위 27년)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신료들 면전에 던졌다. 1594년 7월 지진이 계속됐다. 1일 경상도 각 고을이 흔들렸다. 13일 밤 1경(오후 7~9시)에 북서에서 일어난 지진이 남동으로 향했다. 19일 충청도의 지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렸다. 경상도에선 북에서 남으로 내려갔고, 전라도에선 남에서 북으로 올라갔다. 전국에서 지진(진도 8)이 일어 하늘이 무너지는가 했는데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이튿날(20일) 그간의 지진을 거론하며 선조가 선언했다.

“내가 빨리 물러나야 천심과 인심이 안정될 것이다. 경들은 빨리 처리하라.”

대신들은 언제나처럼 만류했다. 영부사 심수경이 받았다.

“마땅히 수양하고 반성해 하늘의 견책에 대응하면 그뿐이옵니다. 어찌 그러하십니까.”


신라 혜공왕 때 경주서 100명 사망 

세종, 지진 따른 백성 고통 살피며 

하늘 뜻으로 받아들이는 논리 경계 

지진, 왕권·권력다툼 재료로도 이용 

보고 소홀히 하면 추국으로 죄물어 


2016년 지진으로 재확인되는 사실 

대재앙 경고 보고서 비공개하며 

국민 안전보다 ‘원전 정치’를 중시 

최고권력자가 재난을 남탓만 할 때 

지진은 권력 없는 국민만 찾아갈 뿐


임진왜란기(1592년 발발)의 지진은 천인감응론과 물려 선조의 ‘양위(임금 자리를 물려줌) 정치’에 이용됐다. 7년 전쟁 동안에만 선조는 15차례 양위 파동을 일으켰다. 선조가 양위를 선포하면 대신들이 말리느라 진을 뺐다. 민심을 잃은 임금은 양위 선언을 되풀이하며 불안한 왕위를 다졌다.


1545년 7월6일 명종이 열한살의 나이에 보위에 앉았다.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다. 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을사사화(같은 해 8~9월 윤임 일파 숙청)를 일으켰다. 외척이 득세했다. 10월27일 4경(오전 1~3시)에 지진이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번졌다. 날이 밝자 사화를 주도한 ‘공신들’이 땅과 노비를 하사받고 감사를 올렸다.


“공로는 크고 상은 가벼웠다.”

공신들을 치하한 왕후가 지진을 두고 말했다.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태로워 걱정이 크다. 지난밤의 변괴는 더욱 민망스럽다.”

이듬해 6월20일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 강원도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 경상도 청도엔 큰비가 왔다. 민가 한 채가 산사태에 파묻혀 세 명이 압사했다. 사관이 실록을 쓰다 자기 목소리를 넣었다.

“지진이 일어났다. 윤원형이 나랏일을 맡아보면서 임금을 무시하고 정사를 어지럽혀서다. 음기가 성해지고 양기가 미약해지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1557년 11월11일)


“권문귀족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여 정치가 개인의 가문에서 나오므로 염치의 도리가 없어졌다. 천재지변이 이 때문 아니겠는가. 대간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말도 꺼내지 못한다. 가치 없는 말로 책임만 메우고자 하니, 될 일인가.”(1557년 12월20일)

천재지변이 흥하고 정치가 부패할 때 백성의 곤란은 하늘을 찔렀다. 쇠백정 출신 임꺽정이 일어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휩쓸었다.

“죄가 장 80대에 해당합니다.”


1456년 가을 한양에서 지진이 있었다. 서운관 관리가 궁궐 보루각(세종이 표준시계를 설치한 경복궁의 전각)에서 징과 북을 쳐 알리지 않았다. 사헌부가 형벌을 내릴 것을 주청했다. 세조가 태 40대를 명했다.

지진의 연원을 고하지 못하는 것은 용인됐으나 지진 보고를 소홀히 할 때는 엄한 추국(임금의 명에 따라 의정부가 중죄인을 신문)이 따랐다. 1674년 11월에도 간밤의 지진을 보고하지 않은 관리를 임금(현종)이 죄주었다. 1686년 12월엔 영의정 김수항이 지진 보고를 잊은 입직 관원의 치죄를 임금(숙종)에게 청했다.



국민 고통에 감응하지 못하는 정치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을사조약)했다. 그해 인천에 지진계가 설치(한반도 지진 관측 시작)됐다. 1929년 평양에서 “처음 보는 지진”이 났다.

“12월27일 새벽 3시14분 평양부(일제강점기 평안남도의 부) 내 전반을 통하야 지진이 잇었다. 약 1분 동안이나 땅이 움즉였다. 긔차(기차) 지나가는 소리 가튼(같은) 것이 나며 시렁에 언젓든(시렁에 얹은) 물건도 떨어질 정도였다. 밤중에 시민은 모다(모두) 깨게 되었는데 이는 평양에서 처음 보는 지진이엇다더라.”(1929년 12월29일 <동아일보>)


1936년엔 쌍계사 쪽에서 발생한 “희유의 지진”이 총독부에 보고됐다.

“지난 4일 오전 6시2분 남조선 지방을 엄습한 희유(흔치 않은)의 지진피해에 대하야 진원지의 중심이라고 보이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고찰 쌍계사의 국보진감선가의 대공탑이 뒤가 부러져서 문허젓고(무너졌고) (…) 참담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판명되었다는데 총독부에서는 근간 조사원을 파견하야 자세히 조사할 터이라 한다.”(1936년 7월11일 <동아일보>)

1978년 10월 오후 6시19분 충남 홍성에서 폭발 소리가 났다. 폭격이나 ‘이리역 폭발 사고’(1977년 11월11일)의 재현으로 오인한 주민들이 저녁을 먹다 말고 뛰쳐나왔다. 홍성 동쪽 3㎞ 지점에서 규모 5.0의 지진이 있었다. 진동으로 2명의 상점 직원이 떨어지는 병에 맞아 다쳤다. 갈라진 벽 틈으로 새어나온 연탄가스에 ‘여공’ 4명이 중독됐다. 홍성 주택의 절반인 2840여채에 균열이 갔다. 전국적인 지진관측망 구축의 계기가 됐다.


“포항 남동쪽 동해가 아니라 경주 남동쪽 6㎞ 지점이었다.”


1997년 7월2일 기상청이 엿새 전의 발표 사실을 수정했다. 재확인한 진앙지는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15㎞ 떨어진 지점이었다. ‘원전 대참사’ 우려가 커졌다. 양산단층 활성화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1년 전 양산단층대에서 55회의 지진이 관측된 사실도 보도(1997년 7월4일 <한겨레>)됐다. 지진 규모도 축소(4.0으로 발표했으나 디지털 장비를 가진 자원연구소와 미국 지질조사연구소는 4.3으로 측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에너지 당국은 “양산단층이 활성단층이란 증거가 없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진행 중이던 월성 3호기(1998년 준공)와 4호기(1999년 준공) 건설도 강행됐다.


“(활성단층 위에 원전이 건설됐는지 여부는)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2016년 9월21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보고했다. 이재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말했다.

“지진이 아니라 장관의 태도가 공포스럽다.”


2016년 9월 경주에서 지진(12일 5.1→ 12일 5.8→ 19일 4.5)이 잇따랐다. 19년 전 경주의 상황이 두려움의 규모만 키워 복사하듯 되풀이됐다.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12일 5.8)이 월성원전에서 28㎞ 거리에서 끓었다. 세계 최대의 원전밀집지가 지진과 조우했을 때 발생할 참사를 우려하며 온 국민이 떨었다.


원전 인접 단층 2개(고리원전과 5㎞ 떨어진 일광단층, 월성원전에서 12㎞ 거리의 울산단층)가 활성단층이란 정부 보고서(2012년 소방방재청 ‘활성단층지도 및 지진위험 지도 제작’)가 4년 전 나왔지만 비공개됐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였으나 추가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사이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승인(2016년 6월)됐다.


지진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시대에도 지진 발생을 알려 위험을 경고하는 일은 막중했다. 보고하지 않은 책임은 죄로 다스렸다. 대재앙을 경고하는 연구 결과를 얻고서도 과학의 시대는 근거 자료를 서랍에 가두고 원전을 확대했다. 지진 규모 6.5~7.0까지 견디도록 설계돼 걱정 없다는 주장만 정부는 되풀이했다. ‘원전 정치’가 국민 안전보다 앞서는 땅에서 원전이 만개하고 있다.


예로부터 재앙은 왕과 고관대작이 아니라 백성의 곁에 있었다. 감시와 비판을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폭로성 발언들”(박근혜, 9월2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로, 감시자와 비판자를 “불순세력과 사회불안 조성자”(박근혜, 9월9일 청와대 안보상황점검회의)로 규정하는 정치는 국민의 재난에 감응할 수 없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과학 그 자체보다, 과학의 쓸모를 정하는 정치와, 그 정치를 이끄는 사람의 자세란 사실을 2015년간의 지진 기록은 확인시킨다. 지진은 평등하지 않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재난을 남의 탓으로만 돌릴 때 지진은 오직 권력 없는 국민을 찾아다닐 뿐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참고·인용자료: <삼국사기·삼국유사로 본 기상·천문·지진기록>(기상청) <한반도 지진역사 기록>(기상청)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이락정집> <용천담적기> <고려사> <불국사 서석탑중수형지기 묵서지편>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 지진발생의 시·공간적 특성’(윤순옥·전재범·황상일).

출처: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