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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조선 세종 시대] 농업과 '농사직설' 농법

by 성공의문 2018. 6. 10.

1. 농정책農政策의 시행


조선왕조 국가의 기본적인 생산활동은 농민이 수행한 농업 생산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 있던 농민들은 대부분 피지배층 신분에 속해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과 가족의 기본적인 재생산을 이루어내고 또한 농업생산의 증대를 위하여 농사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들의 농업생산이 사라지는 순간 조선사회도 존립할 수 없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농민의 사회적 생산활동인 농업에 대하여 ʻʻ농農은 천하국가의 대본大本이다ʼʼ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농사짓기가 천하天下의 근본이기도 하고, 국가의 근본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또한 세종은 권농교문勸農敎文을 통해 ʻʻ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의식衣食의 근원이고, 왕정王政에서 앞서 해야 할 바이다ʼʼ라고 규정하면서 나라와 백성과 농사짓는 일이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contents.history


조선의 지배층은 농업생산력의 발달을 농업기술의 측면에서 성취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조 개창 초기부터 부세수취의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어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업생산의 안정과 확대가 절실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농업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 중농정책을 펼쳤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로부터 태종을 거쳐 세종대에 이르게 되면, 조선 왕조의 체제유지의 기반인 농업생산을 잘 유지해나가기 위한 여러 정책을 세우고 시행하는 모습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조선왕조가 농업생산의 안정과 증대를 위하여 추진한 여러 가지 농업생산에 관련된 정책을 농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 농정農政은 조선의 지배층이 우선해야할 정책과제였다. 따라서 왕조의 체제를 정비한 세종대에 이르러 농업생산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농정책의 수행도 제자리를 잡아 나갔다. 세종은 농본을 적극 강조하면서 농사권장과 농업장려를 실행에 옮겼다. 실제 권농을 포함한 농정책 수행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로 외방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었다. 감사와 수령은 자신을 보좌하는 권농勸農과 감고監考 등의 직임을 두어 농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권농의 일환으로 농사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수리시설로 제언을 쌓는 것을 추진하였고, 농우農牛의 도살을 처벌하는 금령禁令을 시행하였으며, 농지를 늘리는 개간을 장려하였다. 


세종은 감사와 수령을 동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농사를 독려하고, 농형農形과 우택雨澤을 파악하는 감농監農을 적극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감사와 수령은 한 해의 농사를 시시각각 독려하고 살피는 책무를 짊어졌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단계인 기경, 파종 시기부터 감농이 실제 수행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농작업 가운데 특히 파종은 적시에 실행하도록 독려할 대상이었다. 파종에 들어가기 전에 종자를 나누어주면서 농사 시작을 독려하였다.


수령과 감사는 실제 농작물의 성장 상태, 그리고 비가 내린 상황 등을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농형 보고와 우택 보고는 최종적으로 국왕인 세종에게 미쳤고, 결국 한해 농사의 풍흉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세종은 수령과 감사의 견문에 근거한 보고뿐만 아니라 조관朝官을 활용하여 각지의 농사 작황에 대한 정보를 수합하였다. 이러한 농작 독려와 농형 파악이라는 과정은 농사 감독의 긴밀함과 농형 파악의 일상성이라는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세종대의 황정荒政은 자연재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늘상 수행되었다. 


재해와 흉년에 대한 대비와 대응을 당시 황정이라고 불렀는데, 황정은 조선왕조가 수행한 농정책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었다. 황정은 크게 볼 때 흉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흉년을 막기 위한, 또한 흉년에 대비하는 행위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흉년이 실제로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내는 방책의 측면을 더불어 갖고 있다. 가뭄 등의 자연 재해에 대해서 천심이 경계를 내린 것으로 이해되었고, 이에 따라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경계로 받아들였다. 


세종은 가뭄이나 재해가 닥쳤을 때 구언 교지를 반포하여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을 묘책을 신하로부터 얻고자 하였다. 세종은 구황을 수행하기 위해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해서 작황 등을 파악하였다. 그런 다음 흉년이 확실할 때 기민飢民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세의 감면 등을 실행하였다. 이후 황정의 구체적인 단계인 구황救荒은 외방의 관찰사와 수령이 담당하였다. 또한 조관 가운데 구황 책무를 띤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진제賑濟를 도와주고, 감사와 수령을 독려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끓여 나누어주기 위해 진제장賑濟場이 곳곳마다 설치되었다. 진제장은 대개 흉년이 든 해 다음해 정월부터 설치되어 양맥兩麥이 성숙할 때까지 운영되었다. 또한 의창곡을 활용하여 환자還上를 분급하였다. 환자는 글자는 환상還上이지만 읽기는 ʻ환자ʼ라 하는데, 봄철에 곡물을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철에 되돌려받는 것이었다. 이른바 진제장이 무상 구제라면, 환자는 유상 구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의창을 통한 구황의 실제는 결국 종량種糧 즉 종자와 양식의 분급이었다.


종량의 분급이란 한편으로는 조선왕조의 농민이 담당한 농업생산의 일부를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와 농민 사이의 관계가 상호부조와 상호보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구황의 실제 수행 과정에서 곡물을 군현 사이에 또는 도 사이에 이전하거나 기민의 일시적인 이주를 허용하는 방안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2. <농사직설農事直說>의 편찬


조선왕조가 개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태종대에 <농서집요農書輯要>라는 농서가 편찬되었다. 태종대까지 고려말 이암이 도입하여 고려말 복간된 <원조정본농상집요元朝正本農桑輯要>를 활용하고 있었다. 이 책은 중국 원나라에서 편찬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경상도 합천에서 복간한 것이었다. 고려말 이후 조선 개창 이후까지 복간한 <농상집요>를 이용하다가, 태종대에 이르러 <농상집요>에 수록된 농업기술을 조선의 농업여건 속에서 활용하기 위하여 <농상집요>의 주요 기사를 뽑아 이를 번안한 초록서가 편찬되었다. 이 초록서가 바로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편찬된 농서인 <농서집요>이다.


세종은 풍토의 차이에 따라 농업생산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농사직설>이 편찬되기 전부터 토로하고 있었다. 1424년에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매월마다 해야 할 농가의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붙여서 자신에게 올리게 지시하기도 하였다. 세종 스스로 경계를 삼으려는 의도에서 <시경詩經>의 빈풍豳風과 무일無逸의 뜻을 이어받아 권농을 잘 수행하려는 의도를 비친 것이었지만, 결국 풍토의 차이에 따른 농업기술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 <농사직설>은 1429년(세종 11)에 편찬되었다. 


세종은 1428년(세종 10) 윤4월에 경상도 관찰사에게 왕명을 내려 평안도와 함길도에 전습시킬 만한 농법을 노농을 탐방하여 그 내용을 추려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7월에는 충청도관찰사와 전라도관찰사에게도 동일한 내용을 명하였다. 하삼도下三道 관찰사가 농법을 종합하여 올린 보고서를 기반으로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이 이듬해 편찬한 결과물이 바로 <농사직설>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농사직설> 편찬작업을 수행한 정초와 변효문은 소극적인 편찬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농사직설>에 수록된 농업기술은 기본적으로 하삼도 관찰사가 만들어서 올린 보고서에 수록된 것이고 결국 하삼도 지역의 노농의 지혜와 경험이었기 때문에 정초와 변효문이 한 일은 농업기술의 내용을 세목별로 분류하고 정서하는 작업이었다. 


정초는 「농사직설서農事直說序」에서 ʻʻ들추어보면서 참고하여, 중복重複을 제거하고, 절요切要한 것을 취하여 하나의 편목編目을 찬성撰成하였는데 이름하기를 농사직설ʼʼ10)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정초와 변효문은 중복을 제거하고, 절요한 것을 취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농사직설>의 편찬을 정초나 변효문의 개인적인 업적으로 파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농사직설>의 내용은 삼남 지역 노농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것이었다.


<농사직설>의 서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오방五方의 풍토의 차이는 농업기술을 따로 정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인이었다. 세종은 <농사직설>을 편찬한 후 곧바로 다음해인 1430년(世宗 12) 2월에 제도 감사, 주부군현, 경중京中의 전현직 2품 이상 관원에게 <농사직설>을 나누어 주었다. 세종은 <농사직설>의 보급대상을 우선적으로 팔도 전체로 잡아 놓고 있었다. 물론 세종은 <농사직설>을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 보급시키려는 의도를 잠재우고 있지 않았다.


1437년(세종 19) 2월에 양도 감사에게 왕명을 내려서 <농사직설>에 의거하여 경종耕種하도록 권장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 세종은 가을에 수확한 정도를 따로 보고하도록 지시하면서 그 실제적인 확인 작업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농사직설>에 수록된 내용은 주요 작물의 경작법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곡물의 종자를 간수하는 법, 기경起耕하는 법, 황지荒地를 개간하는 방법 등도 담고 있었다. <농사직설>에 담긴 주요 작물은 삼麻, 벼稻, 기장黍, 조粟, 콩大豆, 팥小豆, 녹두綠豆, 보리大麥, 밀小麥, 참깨胡麻, 메밀蕎麥 등이었다. 앞서 살펴본 조선 전기 벼 경작법이나 잡곡 경작법의 주요한 내용은 바로 <농사직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사회의 농민이 농업생산의 실제 현장에서 적용하던 생산기술은 처음부터 문자로 정리되어 전승된 것이 아니었다. 농사일에 평생을 바친 노농의 손끝과 머릿속에 차곡차곡 축적되어 있다가 노농老農과 소농少農이 같이 농사일을 해나가면서 몸과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생산기술의 전승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노농의 지혜와 경험의 결정체인 당대의 농법은 문자향유층인 지배층 일부의 관심 속에 점차 문자화되어 농서로 정리되었다. 조선 초기 1429년 세종의 왕명으로 편찬된 농서인 <농사직설>은 처음으로 조선의 특유한 농법을 정리한 관찬官撰 농서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농사직설>은 한국 농학의 발달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농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대 ʻ농경의 시작ʼ으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수세기에서 수십세기에 달하는 시간적인 범위 속에서 어느 시점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그 이후에 통용되게 된 각기 층위가 다른 농법을 수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적으로 각기 다른 시대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15세기초 당대의 농업생산현장에 그대로 통용되던 농법이 <농사직설>에 아무런 시간적인 차이에 대한 설명 없이 수록된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농사직설>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조선시대에 편찬된 농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농사직설>을 검토할 때 이 책 속에 여러 시대의 농업기술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을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이다. 



3. 수전水田 농법과 한전旱田 농법


조선 초기 세종대에 농민들이 활용한 수전농법 즉 벼 재배법은 경종법耕種法을 중심으로 몇 가지 방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종법이란 농사의 시작에서부터 파종과 파종 직후의 작업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작업을 가리키는데, 수전의 전토 상태에 따라서 기경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기경한 이후의 숙치熟治, 마평摩平의 형태도 달라지게 된다. 또한 파종 직전의 상태로 정리된 전토의 특성에 따라서 파종법도 또한 변한다. 따라서 수전의 경종법은 벼를 경작하는 여러 가지 경작방식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독자적인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농업기술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농사직설>에서도 3가지로 경종법을 나누고 있었다.


<농사직설>에 기록된 경종법은 수경과 건경, 그리고 삽종 즉 이앙移秧이었다. 수경과 건경은 곧 수경직파와 건경직파를 가리키고 있다. 세 가지 경종법 가운데 15세기 수전농법에서 일반적으로 채택하고 있던 경종법은 바로 수경직파법이었다. <농사직설>에서 수전에서 벼를 재배하는 경종법 가운데 수경직파법을 첫머리에 올려 서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시 수경직파법이 가장 지배적인 경종법이라는 위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수경직파법은 조도早稻와 만도晩稻 양자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수경직파법에서 수경水耕이란 물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논을 기경한다는 뜻이고, 직파直播란 벼가 자라날 논에 종자를 뿌리면 그 자리에서 벼가 자라나도록 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수경직파법이 15세기에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가장 일반적인 재배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벼 경종법 가운데 오늘날 모내기법, 이앙법으로 알려져 있는 삽종법이 <농사직설>에 세 가지 경종법 중의 하나로 수록되어 있었다. <농사직설>에 소개되어 있는 이앙법의 기술 내용을 살펴보면, 모판의 관리, 이앙의 구체적인 방식 등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 기술내용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려후기 14세기 후반에 이미 이앙법이 알려져 있었고, 일부 농민들이 이앙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편찬된 <농서집요>도 이앙법 기술을 수록하고 있다. <농서집요>는 중국 황토고원에서 수도水稻를 재배하는 방식을 옮겨놓으면서 문맥을 바꾸면서 당시의 농업기술, 즉 이앙법으로 번안하였다.


<농사직설>은 삽종揷種 즉 묘종苗種이라는 명칭으로 이앙법의 기술체계를 소개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 벼 경종법에 관심을 기울일 때 중요한 점은 이앙법이 존재하였는가, 또는 이앙법이라는 기술을 당시 농민들이 적용하였는가 여부가 아니라 언제부터 이앙법이 점차 보급되고 확산되어 나갔는가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앙법은 모내기법으로 모판에서 모를 키우다가 본답에 옮겨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근현대 벼 경종법에서 당연하게 여겨진 모내기 법에 대하여 <농사직설>의 편찬자는 이앙법을 설명하는 항목 맨끝 부분에 제초에는 편하지만 큰 가뭄이 들면 실수하게 되어 농가의 위험한 일이라고 단서를 붙여 놓았다. 


이러한 이앙법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조선의 기후조건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초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이앙을 한다는 것은 시기를 잘 맞추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태종대에는 이앙법에 대한 금령禁令까지 내려져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15세기 무렵에 이앙법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지적에서 채택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수경직파법과 이앙법 이외에 건경법乾耕法, 즉 건경직파법이라는 방식도 벼재배 경종법으로 실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건경법은 만도晩稻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었고, 한해로 말미암아 수경직파법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시행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또한 건경직파법은 많은 노동력의 투하가 요구되어 쉽게 행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따라서 때이른 가뭄으로 말미암아 수경水耕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이앙하기 위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때 보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15세기 세종대에 밭에서 잡곡을 재배하는 방법은 먼저 작물을 재배할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농작업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잡곡 재배방법은 기본적으로 기경起耕, 숙치熟治, 파종播種, 복종覆種, 제초除草, 시비施肥, 수확收穫 등의 농작업을 적절한 시기에 적당하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전토를 다스리는 작업과 파종작업을 묶어서, 더 나아가 복종작업까지를 한데 모아서 경종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15세기 밭작물 경종법을 <농사직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각 작물별 경종법은 아주 간략하게 서술된 대두大豆, 소두小豆 등 두과豆科 작물의 경종법의 경우까지도 기경부터 시작하여 복종에 이르는 작업이 일련의 연속작업으로 수행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종의 여러 단계를 재를 주로 이용하는 분전 즉 거름주기와 결합시켜서 수행하고 있었다. 


먼저 한전旱田을 기경하는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전 기경의 기본적인 원칙으로 <농사직설>은 ʻʻ경지는 천천히 하는 것이 적당하다. 천천히 하면 흙이 연해지고, 소가 피곤하지 않게 된다. 춘하경春夏耕은 얕게 하는 것이 적당하고, 추경秋耕은 깊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ʼʼ 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봄여름갈이는 얕게 하고, 가을갈이는 깊게 하라는 것은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농서에 등장하는 기경의 원칙이었다. 봄작물, 가을작물에 연결되는 기경작업에 얕고 깊은 차별을 두어서 갈기의 깊이를 각각 규정한 것은 봄철과 가을철의 토양의 조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조선전기 한전 농법의 주요한 특색을 여러 가지 밭작물의 구체적인 경작방식의 측면에서 살필 수 있다. 조선후기의 밭작물과 경작방식과 조선 전기의 그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한전의 밭작물 경작방식은 양맥을 중심에 놓고 검토할 수 있다. 보리와 밀인 양맥을 재배하는 방식은 파종시기에 따라 2가지로 나뉘는데, 가을에 파종하는 방식과 봄에 파종하는 방식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전작물과 달리 가을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거두는 다른 밭작물과 양맥을 연결시켜 재배하는 경작방식이 실현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전기 <농사직설>에 보이는 밭작물 사이의 연결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 전작前作이란 앞서 재배하는 작물이고, 후작後作이란 뒤이어 재배하는 작물을 가리킨다. 그리고 맥근麥根은 단순히 ʻ맥의 뿌리ʼ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ʻ맥을 경작한 전토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맥근전과 서로 통하는 용어이다. 여기에서 양맥의 후작으로 점물곡속占勿谷粟, 강직姜稷, 대두大豆, 소두小豆, 호마胡麻 등을 경작하는 관계가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양맥의 후작으로 경작하는 작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먼저 점물곡속과 강직은 둘 다 만종晩種하여도 조숙早熟하는 품종이었다. 따라서 양맥근의 후작으로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속粟과 직稷을 경작하는 방식이 채택된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대두와 소두를 맥근전에 경작하는 경우를 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어 있었다. 바로 대두와 소두의 만종晩種에 해당하는 품종을 재배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조종早種하는 대두와 소두는 도저히 맥근전에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마胡麻는 애초에 황지荒地에 재배하는 것이 적당한 작물이었다. 그런데 비옥한 밭일 경우라야만 4월에 맥근의 후작으로 호마를 경작할 수 있었다. 호마를 맥근전에 경작하는 것은 상당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농사직설>에 보이는 양맥을 중심으로 설정된 작물 사이의 연계관계를 1년2작이나 2년3작의 경작방식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인 방식의 한전작물 경작방식은 각 작물을 1년 1작식으로 경작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