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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책]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 - 한국 만화가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

by 성공의문 2008. 12. 18.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 - 한국 만화가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
장상용 (지은이) | 크림슨

<18: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의 개정판. 첫 출간 당시 사정상 포함되지 않았던 박인권, 김동화, 장애인 만화가 지현곤이 추가되었다. 이현세의 서문이 추가되었으며, 출간 이후 세상을 떠난 고우영, 박봉성에 관한 내용들이 수정 및 보완되었다.

김동화, 고우영,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지현곤, 황미나, 신일숙 등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의 인생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았다.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 노력했던 시절의 에피소드, 만화가로 성장한 사연, 만화가 하찮은 취급을 받을 때 만화계에 몸을 던진 이들의 고난과 역경 등이 담겨 있다.


책속에서

고행을 시작한 박인권은 꼬이고 또 꼬이는 운명이었다. 한 번 추락한 이후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그는 1987년3명의 문하생을 데리고 춘천 소양강 파로호로 들어갔다. 밤섬이라는 무인도를 물색해 로빈슨 크루소 같은 생활에 돌입했다. 무인도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생활은 5월부터 9월까지 장장 5개월 동안 계속됐다. 낮에는 자고 저녁 무렵이면 정적만 흐르는 가운데 작품을 만들며 지냈다. 이들은 배가 멀리 보이면 러닝을 매단 낚싯대를 산 봉우리에 박아놓았다. 사람이 그립기도 하고 배고 고프기도 해 뱃사람들에게 제발 들려 달라며 보낸 신호였는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배가 오지 않아 섬에 고립되기도 했다.
배가 고팠던 이들은 어느날 야산에서 흑염소를 발견했다. 무인도의 동물과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나름대로 사냥을 해 흑염소를 잡았다. 배를 두드리며 오랜만에 포만감을 느끼던 이들에게 어느날 한 사람이 찾아왔다. 무인도에 흑염소를 방목해 키우는 업자였는데 한 마리가 없어진 걸 알고 탐문 수사를 한 것이었다. 2만원의 보상금을 내고 사건은 일단락 됐다. - 본문 136-137쪽, '박인권' 중에서

" 난 참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 난 굴비가 그렇게 비싼 생선인 지 몰랐어. 왜냐하면 어머니가 막 집어다 밥 위에 갖다 놓았으니. 신촌에 아주 큰 굴비 덕장이 있었어. 거기서 제일 좋은 굴비는 아이들에게 먹인 거야. 옷은 못 입혀도 서울서 제일 좋은 굴비를 먹였어. 그게 어머니의 자존심이었던 거야."
공갈빵의 추억이야 말로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신촌 시장에서 야채를 팔기도 했는데 토마토 같은 걸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당시 중국집 창문에 쌓여있던 공갈빵이 무척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공갈빵은 어른 주먹보다 훨씬 커서 양이 많아 보였지만 실제론 속이 텅 비고 두께는 1mm에 불과해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크게 맘 먹고 공갈빵 하나를 샀는데 한 입 깨물자 마자 유리 깨지듯 와사삭 부서져 내렸다. 김동화 모자에겐 그 소리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김동화는 어른이 된 뒤로 공갈빵만 보면 꼭 사서 어머니와 함께 먹었다. - 본문 103-104쪽, '김동화' 중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도 허수아비는 특별히 또렷하다. 한 번은 경남대 부근의 동네 논밭을 따라 다니는데 거기 서 있는 허수아비가 너무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고 옆을 지나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어린 시절 그토록 무서웠던 허수아비가 그립기만 하다. 그 허수아비를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는 아예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다. 그는 사인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을 허수아비로 표현한다. 허수아비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틈틈이 그리는데 지현곤의 허수아비는 사랑이 충만한 시선으로 바람 술렁이는 황금 논밭을 바라보는 낭만 허수아비다. 키스 마크를 찍은 편지를 물고 가는 새가 허수아비의 주위를 맴돌고, 햇빛에 음영이 진 농부와 소는 멀리 물결치는 논밭의 풍경이 되어 안정감을 더한다. 지현곤이 바라보는, 꿈꾸는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이다. - 본문 297-298쪽, '지현곤' 중에서


누구보다도 힘든 인생을 경험한 강력한 내공의 소유자들

모두가 힘들다고 한다. 경제는 그 바닥을 모른 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바 있지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희망이라는 단어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요즘이다.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에 등장하는 만화가들은 모두가 ‘절망과 고통의 달인’들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처절한 인생을 경험하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자들이기 때문이다. 만화가라는 직업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시대에 펜과 종이만을 가지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한 만화가들... 어쩌면 현재의 위기는 그들이 이미 겪고 그려낸 종이 한 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만화에 대한 일념 하나로 버텨온 자들의 이야기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는 2004년 <18: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 상, 하>를 새롭게 펴낸 개정판이다. 한국 만화계에서 빠져서는 안 될 인물들이지만, 첫 출간 당시 사정상 미처 포함되지 않았던 박인권, 김동화, 그리고 장애인 만화가 지현곤이 추가되었다. 그 외에도 이현세의 서문이 추가되었으며, 출간 이후 세상을 떠난 고우영, 박봉성에 관한 내용들이 수정 및 보완되었다.

시련을 거듭한 내공의 소유자들에게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일화들이 넘쳐난다. 무인도에서 문하생 세 명을 데리고 오개월간 로빈슨 크루소처럼 사냥을 해가며 고립된 생활을 한 만화가 박인권. 머리를 빡빡 깎고 이들은 무인도에서 흑염소를 잡아먹기도 하며, 간혹 그 곳을 찾는 낚시회 동호회원들을 통해 원고를 서울로 보내고 가끔씩 라면도 얻어먹었다고 한다. 철따라 품목을 바꿔가며 행상을 하면서 가정을 어렵게 꾸려나가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큰맘 먹고 공갈빵을 사드셨는데, 한입 깨물자마자 와사삭 부서져 땅에 떨어질 때 모자(母子)에게는 마치 그 소리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는 만화가 김동화의 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때 찾아온 척추결핵으로 40여 년 동안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발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신체조건으로 만화가의 꿈을 키워온 장애인 만화가 지현곤. 이들의 이야기는 절망이라는 감옥에 갇힌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열쇠를 쥐어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어봐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만화는 더 이상 하찮은 장르가 아니다. 하지만 만화가 하찮은 취급을 받을 때 만화계에 몸을 던진 이들의 고난과 역경이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한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현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내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만화가들의 이야기는 절망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사람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