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중국의 비밀결사

by 성공의문 2014. 7. 30.

중국의 비밀결사

   

1.  삼합회 

삼합회는 천지회, 첨제회(添弟會), 삼점회 등 여러 명칭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삼합회의 전신인 천지회가 복건성에 있었다는 소림사의 오조를 교주로 하여 강희 13(1674)년에 창립되었다고 말해져 왔으며 광동, 광서, 복건에서 강서, 호북, 호남, 운남으로 확대하여 건륭말기에서 청말에 걸쳐 여러 차례 큰 반란을 일으켰고 태평천국 당시에는 삼합회의 일파인 비수회(匕首會)가 상해 점령에 성공했고 손문의 가로회와 함께 협력했다.  태평천국에서는 가로회는 증국번의 상군에 투신하여 보수적, 반동적 입장에 섰지만 손문 혁명운동에서는 오히려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삼합회의 역사상 최초의 반란은 건륭 52년의 대만에서의 임상문의 난인데 道光시대에 들어서자 끈질긴 발전을 이룩했다.  즉 도광 11(1831)년 5월에는 광동, 광서, 복건 ,절강, 운남, 귀주, 호남, 호북에 걸쳐서 세력을 펼쳤다.  그리하여 당을 五房으로 나누고 복건을 장방, 광동을 이방, 운남을 삼방, 호남과 광동과 광서를 사방, 절강을 오방이라 하고, 방마다 두목을 두어 五色으로 기치를 구분하고 입회 자에게는 구호를 주었다. 


도광 30(1850)년 광서에서 일어났던 태평천국의 난은 15년에 걸쳐서 17성을 석권했는데 처음 삼합회의 두목의 한사람으로 홍수전에게 귀의했던 자가 있었으나 교의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탈했다. 

홍수전은 삼합회의 목표인 「반청복명」은 강희년 때에는 의의가 있었으나 2백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는 반청만으로 좋고 복명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므로 대중의 지지를 못 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삼합회는 태평천국 난에서는 태평군에서 독립하여 별개의 행동을 취했다.  삼합회의 일파인 비수회라는 이름의 일단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함풍 3(1853)년 9월7일 돌연 상해현성을 탈취하여 17개월 동안 확보했다.  당시 광동, 복건성인은 상해에 약 14만 명이 있었고, 그 대부분은 삼합회에 속하여 각 현성를 습격하고 지현을 살해했다. 

비수회가 상해를 점령했을 때 남경의 홍수전에게 보고하여 그들과 연락하려 했으나 홍수전은 당파 근성이 있어서 거절했다.  홍수전은 태평천국 난을 전중국의 민란이 종합적 의지의 표현이라는 시야에서 파악할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삼합회는 이듬해 함풍 4년에 광동, 광서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광동의 조경(肇慶), 불선(佛仙), 동원(東莞)  등 각지를 점령하고 珠江일대를 장악했다.

그리고 광동 호상의 함대와 싸워 크게 이기고 광동성도 거의 함락지경에 이르렀으나 영국군의 청군 원조에 의하여 함풍 5년에 패퇴했다.  비수회가 점령하고 있었던 상해에서도 동년 2월 17일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에게 포위되어 현성은 함락되고 비수회원 약 50명만이 도피했을 뿐 1천 8백여 명은 참살 당했다. 


광서에 들어서 삼합회는 12년에 惠州府 寧山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광서 24년에는 광서성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열 몇 달 동안 석권했다. 그리고 최후로 삼합회는 두목 鄭子良이 광서 26년에 손문의 흥중회가 일으켰던 혜주반란에 참가하여 그 사상적 영향을 받고 신해혁명에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중국 비밀결사의 특수성은 회원상호간의 평등제와 두목의 독재제와의 양면을 겸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결사의 색채가 짙은 삼합회에 그런 특색이 강했다. 


삼합회의 기원은 일원적이지만 연대가 흐름에 따라 지방적으로 분화되어 전국적인 중앙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창립 당시에는 五大公所를 설립하여 각 공소에 몇 개의 성을 분산해 주재시켰는데 세월과 함께 공소의 존재도 애매하게 되고 대집회의 개최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회원은 공소의 수령을 대총리 또는 원수, 또는 大哥라고도 불렀다.

그 다음의 두목을 香主 또는 二哥, 二位의 두목을 백선(白扇) 또는 先住, 혹은 三哥라고 했다.  그 다음은 先鋒, 그 아래는 홍곤(紅棍, 회원의 형벌을 집행하는 직위), 그리고 아래 회원은 초혜(草鞋)라고 불렀다.  입회는 엄중한 의식을 거쳐 시행되었다.  자격은 부자, 학자, 관리, 농부, 상인, 병사, 도적, 걸인 등 구별 없이 충의의 뜻을 지니고 반청복명을 염원하는 자는 아무라도 입회를 허용했다.


입회식에서의 향주(二哥)는 다음 두 가지를 선언했다. 

1.  우리는 마땅히 길흉을 함께 함으로써 天地萬有之明의 회복을 구하여 청조를 섬멸함으로써 眞命을 기다린다. 

2.  능히 명나라를 회복하고 원수를 갚아 설욕함으로써 천하태평을 건설하며 이를 다스리는 자 있으면 왕후로 봉하니 자손은 역대만세 길이 영광되리라. 


이와 같이 삼합회는 반청복명을 근본 신조로 한 반역적 단체였으며 평소 회원은 상호 부조하는 생활을 기능적으로 실천했다.  일단 입회한 자는 모두 홍형제이며 동생동사를 맹서하고 회의 경서 및 율법에 있는 36서 21칙, 10금 10칙에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규율은 국가의 형법 이상의 형벌과 위압으로 실행되었다.  회원의 친근과 정애에 대해서는 중국의 도덕인 가족제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규율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홍문에 들어간 후는 너의 부모는 나의 부모이며, 너의 형제자매는 나의 형제자매이며, 너의 처는 나의 형수이며, 너의 자질은 나의 자질이다.  부모형제가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는 회원에게는 다른 회원이 출자하여 장례를 완료해야 할 것, 형제의 처를 간음하고 그 자녀와 사통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부모를 효경하지 않는 자는 태형 108에 처함.」


또 회원의 상호부조의 규칙에는

「형제가 은전과 재물을 기탁했을 때는 충실히 보관해야 하며 그것을 갈취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형제의 재물을 탈취하거나 강매, 사취하여 돌려주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 형제가 궁핍하여 돈을 빌리려는 것을 모욕하고 또는 거절하는 자는 두 귀를 자를 것, 형제와 사업을 공영하여 제 마음대로 낭비한 자는 태형 108에 처할 것.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써서 형제의 재물을 편 취한 자는 중하면 사형, 경하면 태형 72에 처할 것.」


또 회원간의 규율에 관하여는

「타지방의 형제가 강호의 객으로 찾아왔을 때는 사농공상을 불문하고 하룻밤 유숙케 하고 두끼 이상을 대접할 것.」


비밀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회의 비밀은 부친도 자식에게 전할 수 없고, 자식도 부친에게 전할 수 없으며 형제, 일가친척, 친구 등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것으로 위반자는 만인의 칼 아래에 죽어야 할 것.  형제의 우환 시에는 는 필요한 부조를 아끼지 말 것.  형제가 포박되거나 또는 멀리 출타했을 때는 그 처자를 도와 줄 것.  현상금을 얻기 위하여 형제를 밀고한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반란에 관한 규칙에는

「회원은 봉기할 때는 다 함께 군화양초를 내어 일동 협력해야 하며 두 마음을 품는 자는 萬刀 下에 죽음을 당할 것.  起義 時에 몸을 피하여 나오지 않는 자는 두 귀를 자를 것.  다른 성에서 형제를 부르는 문서가 왔을 때 숨어서 응소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


등등의 규율이 있다.  삼합회는 반청복명을 명분으로 조직된 결사였지만 청말에 이르러서는 손문의 흥중회와 결합하게 되면서부터 근대적인 사상결사가 되어 신해혁명까지 가로회와 함께 그 양 날개로 활약했다.  삼합회야말로 근대중국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혁명적 비적의 하나이다. 

 


2.  가로회 

가로회는 삼합회와 마찬가지로 손문혁명의 일익을 담당하여 신해혁명에 활약했던 비밀결사이며 혁명 비적의 가장 진보적 집단이다.  기원은 백련교의 계통에 속하고 건륭시대에 복건지방에서 부활하여 발생한 반관료적 결사이며, 사천성을 발생지로 한 비밀결사이고 정치원칙은 삼합회와 마찬가지로 반청복명이다.

가로회는 태평천국 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태평천국이 멸망한 이후에 활동이 시작되었다.  즉 증국번이 지도한 상군이 해산되자 생계의 길을 잃은 병사와 난중에 발생한 유민의 대다수가 가로회에 들어오고 나서 세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태평군 후기의 명장 이수성이 자기가 패망할 것을 각오하고 복건, 강서의 형제를 상군에 투항시켜 두었기 때문에 그 투항병이 상군 해산 후에 가로회에 합세하여 세력이 증강된 것이라고 한다.  가로회는 호남과 절강에서 가장 번성했고 양자강 유역의 각 성에서도 꽤 번창했는데 거의 전국에 만연하여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가로회는 삼합회에 비하면 한결 약탈도적에 가까운 회당으로 도적질을 무차(武差)라 하고 도박을 문차(文差)라 했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부호를 습격하는 것을 방침으로 내세웠다.  가로회의 조직원칙은 대체적으로 삼합회와 비슷하다.  삽합회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총본부가 없고 각 지방의 중요한 회원집단을 모모산(某某山)이라 불렀다.  그런 산이 전국에 수백이나 있었다.  각 산의 수령을 五龍頭, 그 다음을 부룡두라 하고 그 밑에 五堂이라는 다섯 가지 직위가 있었다. 


입회에 관한 특색은 삽합회와는 달라서 그 출신이 결백하지 못한 자, 즉 노예나 천민은 입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발사, 교자 꾼, 배우도 입회를 못한다.  회원을 권자(圈子) 또는 좌현(左玄)이라고 하고 외국인을 馬子, 귀사가(貴四哥) 따위로 부른다.  회원은 외국인과의 교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가끔 대회를 개최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開山이라 하여 깊은 산중의 고묘(古廟)에서 黃道吉日을 택일하여 거행한다. 


모택동이 호남에서 광동으로 잠행하는 도중 광동, 강서성 경제의 산중에서 비적 신회원의 입회식에 참석하여 결의 형제의 축배를 나누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비적의 두목 원자재(袁子才)와 주문(周文)은 아마 가로회의 한 유파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택동이 유명한 추수봉기를 치른 뒤 정강산(井崗山)이라는 산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자재 등 비적의 도움에 힘입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모택동이 산중의 사당에서 입당자에 대하여 비적이 하는 식으로 입당의 의식을 거행하고 선서를 시킨 것도 모택동과 비적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흥미롭다.


가로회의 정치 활동사를 간단히 적어보면

1.  광서 17년에 일어난 밀튼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가로회에 입회한 이풍(李豊)이라는 회원이 6만 량의 은으로 해관(海關)에 근무하는 영국인 밀튼에게서 반란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 홍콩에서 진강(鎭江)으로 수송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이풍은 옥사하고 그의 일가족은 자살했으며 이풍을 지휘하던 가로회의 두목 관희명(關熙明)도 형을 받고 죽은 사건이다. 

이풍은 태평천국을 배신하고 청조에 항복했던 이소수(李昭壽)의 아들이다.  부친이 청조에 항복했음에도 사형을 당한 사실에 원한을 품고 원수를 갚기 위하여 가로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양자강 연안의 인심은 더욱 배외적이 되고 영사관과 세관에 방화하고 외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발했다. 

2.  광서 18년에는 강서, 호남의 성 경계지 예릉(醴陵)에서 가로회의 두목 두 명이 관헌에게 피살되고 다른 두 명이 체포되어 투옥된 것을 천여 명의 회원이 봉기하여 옥을 부수고 구출했다. 

이 사건 후 얼마 안되어 광서 23년에 이르러서는 가로회와 손문 일파의 제후가 밀접해지고 삼합회와 함께 손문혁명의 양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3.  광서 26년은 의화단 사건의 해, 가로회 일파인 동구회(同仇會)의 두목 마복익이 당재상(唐才常)과 함께 호남에서 폭동계획을 세웠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당재상은 한구에서 장지동(張之洞)에게 살해되었다. 

4.  광서 30년에는 호남에서 황흥(黃興)이 마복익과 모의하고 광서의 각 수령과 연락하는 한편 삼합회, 청방, 백방 등을 결합하여 혁명단체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때를 같이 하여 회원의 한사람인 육아발(陸亞發)이 광서에서 거사하고 柳州를 공격하여 총 5천 정을 탈취하고 마복익에게 호남에게 거병하도록 권했다.  그리고는 10월 10일 각처에서 동시에 봉기할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9월 15일에 두목 여러 명이 체포되고 마복익도 잡혀서 참형을 받았다. 

5.  광서 32년에는 강서성 평향(萍鄕)의 광부들이 조직한 가로회의 일파인 홍강회(洪江會)가 폭동을 일으키고 호남의 예릉 및 유양(懰陽)을 함락, 승승장구하여 장사를 습격했다.  이때 관군병사 속에 가로회와 내통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관군은 공중을 향하여 총을 쏘고 그 총을 버리고 도주했다.  호광(湖廣) 총독은 필사적으로 방비하여 교전 20여 차를 치른 뒤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며 반란군은 탄환이 떨어져 궤멸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각지의 가로회는 독자적인 명칭으로 활약했다.  쌍용회(雙龍會), 九龍會, 千人會, 白布會, 평진당(平津黨) 등 다수의 명칭을 내세워 활동했으나 그들은 모두 청말 이후는 손문의 영향을 받고 그들과 연락을 취하여 제휴했다. 

2차대전 전의 홍방(紅幇)은 신해혁명 후 탈락했던 가로회, 삼합회의 일부가 합류하여 태평천국 난의 조직을 흉내내어 홍수전의 洪자를 紅으로 바꾸어서 조직한 것이다.  이 조직은 선주와 선원으로 구성되었고 統領, 老師父, 師父, 師徒, 弟子 등 淸兵과 비슷한 위계를 갖추고 있었으나 청방(靑幇)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다.  보통은 각조의 두목을 통령이라 부르고 그 아래는 위계질서도 문란했다.  청방에 비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조직된 단체였다.



3. 청방(靑幇) 

청방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여러 번 언급했으나 淸門, 安淸幇, 淸門羅敎라고도 하여 청방의 기원은 그들의 전설에 의하면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초기에 강소성의 양주에서 북경 부근 통주(通州)까지의 대운하에서 미곡을 운반하는 권리를 한민족 회유책의 하나로 한인의 전(錢), 옹()翁, 번(瀋)이라는 세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세 사람을 두목으로 조직한 비밀결사가 청방이라고 한다.

청방은 처음부터 반체제 측에 섰던 것이 아니고 체제옹호의 입장을 취하고 생겼다.  따라서 청방의 본시의 이름은 안청방이라 하여 청조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 후 「안청방」의 안을 빼고 「淸」자를 「靑」으로 고쳐서 홍방의 「洪」자를 「紅」과 바꿨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 「靑幇」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청방은 19세기의 중엽에 대운하의 교통이 두절되자 육지에 올라가 객기를 부리는 불량배가 되었다.  시가지에 세력권을 형성하여 교통노동자, 수공업자, 상점원, 하급경찰관 속에 세력을 부식했다.  중화민국이후 그들은 아편굴, 도박장, 창녀촌을 경영하여 재미를 보았으며 간혹 정계, 재계에까지 진출하여 1927년의 공산당 탄압의 쿠데타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총알을 퍼 붇는 일까지도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청조이래 장개석 정권에 이르기까지 체제 측의 입장에 섰고 중국공산당 성립 후에도 모택동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등 지금도 상해에서 청방의 세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청방의 조직은 매우 복잡하고 엄격하여 여러 층의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다.  먼저 계급은 단계적으로 大字班, 通字班, 悟字班, 學字班의 순서다.  그리고 입문하는 자의 의식에 입회하는 사람의 수와 입회인의 직위, 그리고 입문자의 인품 등으로 의식의 격이 각각 달라진다.  그 의식은 네 종류로 구분된다.  최하급의 의식을 小善堂, 다음은 大善堂, 그리고 開善門, 최고급은 閉善門이라고 불려 거행된다. 

입문자가 입문할 깨에는 먼저 제단을 만들어서 그 위에 「天, 地, 君, 親, 師 之位」라고 적은 위패를 모시고 위패를 뒤로 세 사람의 사부가 나란히 선다.  제단을 향하여 왼편에 전도사, 가운데 본명사(本命師), 오른쪽에 引見師와 세 사람의 사부가 줄지어 서고 그 앞에 입문자가 무릎을 꿇고 배례를 한다.  포권두(抱拳頭)라 하여 오른손 엄지를 안에 넣어서 주먹을 쥐고 그것을 왼쪽 손바닥으로 감싸쥐고 무릎을 굽혀서 엎드려 절한다.  주위에는 동문의 「同繕」이라고 하는 오자반 계급에 속하는 자가 둘러서서 입회인이 된다.  그리고 위패 옆에 동문인 ꡔ통자반ꡕ의 老師父가 몇 사람 입회한다.  또한 입문자의 인망 여하에 따라서 ꡔ대자반ꡕ의 최고계급에 있는 사람이 입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각설하고 일동의 참석이 끝나면 입문자가 배례하고 있는 앞에서 전도사가 엄숙한 소리로 ‘아무개는 幇의 규약을 준수하여 이제 입문식을 거행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삼국궁(三鞠躬)」의 의식이 시작된다.  먼저 사부의 전도사가 큰 소리로

“하늘을 보고 삼국궁!”

하면, 입문자는 본명사 후면의 위패를 향하여 주먹 쥐어 팔짱을 낀 두 팔을 들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  다시 전도사가

“땅을 보고 삼국궁!”

하고 소리를 지르면 입문자는 전과 같이 배례 한다.  이런 식으로 천, 지, 군, 친, 사의 다섯 위패에 세 번씩 「삼국궁」의 예배를 하고 그리고는 본명사, 인견사, 전도사에게 전도사의 호령에 따라서 「삼국궁」의 배례를 하고 다음에 또 입회인인 「대자반」이나 「통자반」의 선생에게 같은 예배를 세 번씩 하고 마지막에는 주위에 둘러서 있는 「오자반」의 門徒일동을 향하여 예배한다.  이것이 끝나야 비로소 입문을 허용 받아서 「학자반」이라는 최하급의 도제가 된다. 

한번 청방이 되면 「가라(家裸)」 또는 「좌가라(左家裸)」라 하며 서로를 동선(同鐥)이라고 부르며, 의형제를 맺는다.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다는 혈맹의 형제가 되는 셈이다.  대, 통, 오, 학의 네 계급 위에 또 「예자반(禮字班)」으로서 「老大師翁」이라고 하는 초계급적 계층이 있는데 실재하지 않는 존재다.


그들은 서로 혈맹을 맺은 형제이므로 한번 입문하면 서로 도와야 한다.  어디로 가나 一宿一飯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일례를 들면 죄를 벌하여 잡혀서 고문을 받게 된 경우, 고문하는 관리가 청방조직에 들어 있는 자로서 범죄자가 청방인 줄 알면 고문을 안 한다.  용의자가 고문의 고통을 못 이겨 저도 모르게

“三老師小救我那! (세 사람의 스승이여, 불쌍한 나를 구해주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면 만약 그 관리가 청방이면 곧 알게 된다.  그리고 곧 고문을 중단한다.  관리는 세 스승의 이름을 묻고 어는 계급에 속하는지를 따져 본다.  범인이 명확히 대답을 하면 고문을 중지하고 하급관리면 몰래 도망시키든지, 상급관리면 무죄로 꾸며서 석방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과거 중국의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일종의 사회연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청방을 기원으로 발생한 체제옹호 측인 청방도 다른 일면에서는 반체제적인 사회의 연대적 유대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청방의 조직은 현재에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화교 사이에 큰 세력을 이루고 각지방의 재계를 주름잡고 있다.  물론 재미 화교계에도 청방조직은 침투되고 있으며 본국의 상해에서도 상공업계속에 비밀결사로서 상호 연대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 공산당원 속에도 청방의 비밀결사에 속해 있는 자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중국은 아마 이 청방의 해외에서의 조직을 교묘히 이용하여 국가세력의 신장을 위하여 힘쓰고 있을 것이다. 

청방의 이데올로기는 불교의 임제종(臨濟宗)에서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충, 신, 의를 표방한다.  실천방법으로서는 ‘사리를 꾀하지 않고, 어려움을 구하고 위태함을 도와서 늙은이를 구휼하고, 빈자에 동정하고, 의를 보면 용기 있게 행하며, 기꺼이 즐겨 베푼다.’ 고 하는 의협 적인 풍습을 갖는다.  

교의가 통속적이고 단순하므로 서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하기야 방원(幇員) 가운데는 부정을 행하는 자도 있어서 도적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청방의 행동은 정치혁명, 지방동란, 노동운동에 대하여 항상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그들은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913년 그들은 혁명파에 호응하여 하남성의 白狼匪와 협력했지만 이듬해 혁명군이 실패한 후는 원세개의 북양군벌에 이용되어 양자강 남부의 행동에 참가하고 있다.

1924년 손문의 소련의 후원을 얻어 광동에 혁명군을 조직하자 장강 유역의 청방은 다시 이에 협력했다.  혁명군이 광동을 출발했을 때 방원은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여 혁명군의 북상을 도왔다.  당시의 상해경비사령 양호동(楊虎東), 진군(陳群) 등은 유력한 방원이었다. 


중국이 열강 제국주의에 의하여 반식민지화 됨에 따라서 상해의 청방은 조계의 경찰당국과 내통하고 시정노동자의 공급권을 손아귀에 쥐었을 뿐 아니라, 그의 수령들은 남경정부의 중심인물과 결탁하여 비밀리에 갖가지 특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청방도 유산계급의 무기로 변하여 진보적 민중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반공운동에 있어서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의 조력은 대단했는데 이 공진회는 상해지방에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청방의 영수 장소림(張嘯林), 두월생(杜月笙), 이징오(李徵五) 등이 조직한 것인데, 상해위수 백숭희(白崇禧)를 원조하여 멸공에 힘썼다. 

장개석도 청방에 가맹하고 있었다.  1927년 4월 상해총공회(上海總工會)에 대한 장개석의 쿠데타에 청방이 협력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방의 포용력은 넓었다.  빈농과 도박꾼 기타 무뢰한뿐만 아니라 토비, 비적도 받아 들였다.  미국의 갱과 흡사하다.  미국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나 갱 세력은 파쇼정책을 위한 유력한 무기 구실도 했다.  마적과 토비는 전시대의 유물임은 사실이며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소멸될 운명에 있었는데 새로운 공업사회는 그 대신으로 소위 갱단이 그 속에서 자라나고 활약할 토양을 제공했다.  근대중국 대도시에 차츰 대두되고 있었던 갱의 모체도 또한 마적이나 토비는 아니고 청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위의 설명처럼 손문혁명에 청방이 협력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은 없다.

<중원에 부는 바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