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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애니메이션 영화 - '쿵푸팬더'를 통한 철학적 깨달음

by 성공의문 2013. 6. 14.

예사롭지 않은 애니메이션 영화, '쿵푸팬더'를 통한 철학적 깨달음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PC)

 

제가 이제껏 가장 인상 깊게 본 허리우드 애니메이션은 단연 ‘인크레더블(Incredible)’였습니다.

그 다음은 ‘슈랙’ 이었습니다. 메시지는 없지만 인크레더블의 그 충격적인 재미는 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입니다. 

 

‘인크레더블’은 픽사(Pixar)가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리고 디즈니가 작품배급을 담당하고 있고, 작품의 소유권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즈니사 수입의 40%를 픽사가 벌어주고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토이스토리, 벅스라이프, 인크레더블,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주식회사, 라따뚜이”에 이르기까지 픽사 애니메이션 스토리의 정교함은 기가막힐 정도로 대단합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복선이 있고 다른 장면과 빈틈없이 짜여져 있습니다. 케릭터들도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에 놀랍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있어, 언제나 대박을 터트립니다.

 

그러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의 차원에서 그동안 많은 비판과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단순한 이분법적 선악대립구조와 흑백논리를 가장 비판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디즈니의 영향력이 세계적인데 비해, 백인중심 특히 미국중심의 가치관을 은연중 확산시키고, 백마탄 왕자를 기다리며 순종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지고지순의 미덕으로 강조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주의, 그리고 고전동화의 스토리를 심하게 왜곡시키는 해피엔딩에의 집착 등입니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케릭터로 돈을 버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점차 사람들은 식상해하고 있습니다.

 

드림웍스를 만든 카첸버그는 본래 디즈니의 핵심인물이었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드림워크라는 영화사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을 책임을 맞고 있습니다. 디즈니와 픽사의 것은 어린이를 명확한 타겟으로 하지만 드림웍스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이 그 특징이지요.

 

슈렉(Surek)에서 이미 드림워크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잘 나와있습니다.

디즈니의 법칙과 상식을 모두 깨는 것만이 아니라, 디즈니의 케릭터를 모두 망가뜨리기까지 하면서 못생긴 주인공을 내새우며 디즈니의 해피앤딩과는 달리 결말을 만들곤 해서 ‘슈랙’은 정치적 올바름(PC)이 잘 드러난 애니메이션으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가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을 상징하는 펜더를 주인공으로 했고, 중국의 특징인 쿵푸를 소재로 하여 엄청난 상업적 이득을 노린 것이라고 하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대부분 영화가 정말 재미있고 잘 만들어졌으며,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아이디어, 그리고 감탄할 만한 영상에 감동한 글들 만 있더군요. 거기에 나오는 철학적 메시지에 대한 분석이 별로 없어 써봤습니다. 

 



첫번째 : 우연은 없다 (There are no accients)

 

이 영화에서 “우연은 없다(There are no accients)”는 대사가 5번 정도 나옵니다.

용의전사를 뽑는 자리에서 큰사부 우그웨이는 예정되어 있는 5전사들이 아닌 뚱뚱한 팬더곰를 용의 전사로 낙점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지요. 

이를 보고 걱정하며 한탄하는 시푸(Sifu)사부에게 우그웨이 대사부(거북이)가 ‘우연은 없다’고 말합니다.

 

또 주인공 팬더 ‘포’가 과자를 먹으려고 아무도 없는 방의 높은 선반에 다리찟기까지 하며 올라갔을때 시푸사부가 어떻게 올라갔냐고 물으니까 ‘포’가 ‘우연’이었다고 말하자.

시푸는 ‘우연이란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스승에게 들은 말을 다시 제자에게 합니다.

 

‘우연은 없다’는 말은 무슨말일까요. 우연이란 원인이 없는(알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삼라만상 우주 만물의 이치는 모든 것이 그물망처럼 연관되어 있는 인연(因緣)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모든 현상과 행위는 인연과 (因緣果)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홀로 생기는 것은 없으며, 언제나 원인(因)과 조건(緣)과 그에 따른 결과(果保)가 따르며, 그 과보가 다시 원인이 되어 이어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인 것이지요.

모든 세계의 현상은 이 인연의 조화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다시 그 거북이 대사부는 복숭아 나무를 보면서 말합니다.

‘복숭아씨를 심으면(因) 사과나 오랜지(果)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말이지요.

 

결국 인연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포’(팬더)가 지목된 것도 쿵푸에 대한 큰 열망과 의지가 그 인(因 원인)이 된 것이며 시푸(Sifu)가 너무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바람에 타이렁(악당)이 삿된 야욕을 갖는 것을 발견하지도 막지도 못하여 결국 이런 비상의 상황(緣 조건)이 되어 인(因)과 연(緣)이 만나 지금 ‘포’가 용의 전사가 되는 결과(果)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우연은 없어’, 인연에 따른 과보일뿐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는 ‘우연은 없다’는 말을 일반적으로 "운명이나 숙명"정도의 의미로 오해 할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숙명(Destiny)라는 말이 여러번 나오곤해서....

 

우연(偶然 원인이 없는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 인연(因緣 원인이 있는 (원인에 따른) 사건)을 말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우연은 없다’는 말은 모든 현상이 연관되어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처럼, 내 앞에 닦친 현재의 상황도 내가 받을 만해서, 나에게 일어날 만한 원인과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현재 닦친 자신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여 거부하거나 피하지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현재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이런 깨달음의 내용이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어 문제의식 없이 대강보면 운명론처럼 받아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이러한 깨달음을 비교적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두번째 :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There is no good or bad)

 

시푸 (작은사부) : 사부님, 아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 Master, I have a very bad news)

우그웨이 (큰사부) : 시푸, 그냥 소식이 있을 뿐일세,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 (Sifu...There is just news, There is no good or bad)

 

실제 사실에 있어서 좋고 나쁜 것이란 본래 없습니다.

단지 좋고 나쁜 것이 있다는 관념(생각)이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좋고 나쁜 것이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좋은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니며 나쁜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건은 그야 말로 사건입니다. 행위는 그냥 행위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만약 학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관상보는 사람이 당신은 장사를 하면 잘 될 것이라는 사주가 나왔다면, 그 사람에겐 좋은 사주가 아닐것입니다. 

혹은 어떤사람에게 부인이 3명이나 될 것이라는 사주가 나왔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기구한 불행한 팔자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4명까지 부인을 둘 수 있는 중동에서는 좋은 사주일겁니다.

 

좋고 나쁜 것은 본래 없고 단지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것’이라는 인식과 ‘나쁜것’이라는 ‘인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공(空’)하다라고 합니다.

비어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고정된 상황이나 존재는 ‘없다’는 의미이지요.

본래 모든 것이 공(空)한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 좋고 나쁜것이 본래 없다는 것이 바로 공(空)사상의 핵심입니다.

공은 ‘허무’를 뜻하는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을 적극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지요.

 

반야심경에는 그래서 ‘불구부정(不垢不淨 -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부증불감(不增不減, 늘어나고 줄어듦도 없다)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에겐 자신에게 설령 어떤 피해나 손해가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사건’이 있었을 뿐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로 분별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의 즐거움에 휜쓸려 빠지지도 않지만, 나쁜 일이라고 해서 불행한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지요.

 

세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은 이미 좋고 나쁜일이 있다는 분별을 전제하하고, 좋은일이 나쁜일이 될수도, 나쁜일이 나중에 좋은 일이 될수도 있다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좋은 일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일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러면 “좋고 나쁜 것은 없는거냐? 그러면 이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살수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과 절망은 모두 감정의 기복입니다. 그러한 기복없이 언제나 평상심, 언제나 여여로운 마음, 언제나 항상심을 갖고 있어 감정이나 분별에 휩쓸리지 않을때 모든 것을 두루두루 크게 살피면서 지혜롭게 눈 맑은 안목을 갖고 사는 것이 정말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지요.

  



세번째 :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네 (You just need to believe)

 

타이렁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용의 전사’로 낙점된 팬더 ‘포’가 이를 막을 가망이 전혀없어 낙담하고 있는 시푸 사부에게 우그웨이 대사부는 말합니다.

 

Maybe it can, If you are willing to guide it, to believe in it

할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그를 믿고 자네가 그를 기꺼이 지도할 의지만 있다면...

"You just need to beleive" 자네는 단지 믿어주는 것이 필요해

"Promise me Sifu, Promise me you will believe it" 나와 약속해주게, 시푸, 그(그것)를 믿겠다고

You must believe. 자네는 (그를) 믿어야 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또다른 단어는 믿음(Believe)입니다.

사실 기본기도 안되고 수련도 안된 쿵푸 초보를 도대체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믿을 근거가 있어야 믿는건데 도저히 믿을 만한 근거가 없지만, 사실 이 황당한 설정을 그럴듯한 상황으로 만드는 대사가 바로 이 장면이지요. 그래서 시푸 사부는 그를 믿고 훈련을 시킵니다.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에 맞게 먹는 것을 이용하여 맞춤형 훈련을 시작합니다.

 

이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교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은 부모가 “믿는 만큼 행동한다”고 합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지요. 확실하게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긍정의 힘은 그를 계속 더 잘하게 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지요.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도 있습니다. 감기환자에게 물을 주고 좋은 약이라고 하면 실게 물을 먹고도 낫는다는 개인의 신념과 마음이 실제 변화를 이루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팬더‘포’에게 타이렁이 왔다고 알려주자 무서워 계단 밑으로 도망하는 그를 스승인 시푸가 막아서자. 

‘포’는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하면서 내려갑니다. 

그러자 시푸 사부는 “사부의 명령을 따르고, 스스로를 믿는다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 믿음(Believe)의 사용은 몇가지 성격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잘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지요. 이것은 역사에 대한 믿음 시간에 대한 믿음, 정의에 대한 믿음, 선에 대한 믿음... 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두번째는 제자 팬더‘포’에 대한 믿음입니다. 시푸사부가 뚱뚱한 펜더를 ‘믿어 줘야’한다는 것이지요.

대사부는 계속 그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실제 믿는사람의 믿음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포숙아는 어떠한 어렵고 나쁜정보가 들어와도 관중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래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나왔지요.

이것은 실제 사람관계를 맺는데 자녀를 키울때 그를 ‘믿어주는’것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에 대한 믿음은 믿을만한 일을 했을때 믿는 것은 실제 믿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일을 했을때 그것이 정말 ‘믿음’입니다.

 

세번째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스스로를 믿는 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발견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자기열등감,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은 모두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심리적 억압의 요소들로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누군가 자신을 무시했을때 기분이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상대 때문에 기분나쁜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상대가 무시하기 전에 실은 내가 먼저 나를 무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것입니다. 

만일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누군가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해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팬우리의 주인공 팬더‘포’는 용의 두루마리를 보면서 확고해집니다.

“결국 내가 문제로구나. 나의 문제로 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은 거지요

  



네번째 :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 gift)이다.

 

역시 우그웨이 대사부가 ‘포’에게 하는 선문답입니다.

“Yesterday is history. 어제는 (지나간) 역사이고

Tomorrow is a mystery. 내일은 (알수 없는) 신비로운 것

Today is a gift. 오늘은 선물이다.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그래서 그것을 Present(현재or선물)이라고 부른다네.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네

 

이 말은 예전 많은 선사들이 이용했던 말입니다.

대부분 이 영화속의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다네, 단지 현존일념 지금에 집중할 뿐”이고 말을 자주해왔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대는 과거를 헛되이 새기지 말고 미래에도 희망을 걸지 않게 하라. 그 대신 스스로 통찰력을 계발하여 매 순간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도록 하라.

확신을 지니고 굽힘 없이 동요 없이, 무상의 진리를 매 순간 알게 하라. .(밧데까랏따 숫따)“

 

사람을 가장 약하게 비참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잊지 목하여 괴로움속에 삽니다.

과거를 현재에 끌어들여와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장래 어떻게 될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두려워하고 괴로와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여 스스로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돈을 많이 벌려는 것도, 보험을 들려고 하는 것도 이런 미래, 노후에 대한 두려움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는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장악되어 있는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때문에 괴로워하고 미래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이것이 큰 분별입니다. 과거에 대한 열등의식과 피해의식 상처와 고통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스스로를 갉아먹고 잡아먹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현재에 살기 보다는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라는 현존일념(現存一念)이라는 말이 불가에서 아주 중요한 마음공부의 가르침입니다.

 

절집의 마루기둥에는 조고각하 (照顧脚下)라는 글이 붙여있습니다.

'조고'는 관조고려(觀照顧慮)의 약자로 '조심하다' '주의하다'는 뜻입니다.

'각하'는 바로 '발 밑'이라는 뜻입니다.

즉 '발 밑을 조심하라' 지금 네가 한발 한발 딛고 있는 그 발을 살피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발을 벗을 때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신발은 가지런히 벗어놓습니다.

 

예를 들어 신발을 급히 여기저기 던져 널부러진 것도 모르고 황급히 방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신발을 벗는 그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을 놓친 것입니다. 마음은 미래에 가있는 거지요. 이미 방안에 먼저 마음이 들어 가있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고통은 과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불안은 미래에서 오는 것이지요.

이 두 경계가 끊어진 경지... 현존일념現存一念)의 경지가 바로 해탈의 경지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이지요.

오직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미래는 현재의 삶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미래는 불안해 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온전히 꼭꼭눌러 다져나가다 보면 그 현재가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미래인 것입니다.

 

선물(Gift)은 기쁘고 행복하고 좋고 신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라고 말한거지요.

‘현재’는 과거에 내가 바래온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다섯번째 : 비밀재료는 ‘없어’ (The secret ingredients is "Nothing")

 

타이펑이 쳐들어와 난리가 난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갑니다.

마을에서 유명한 국수가게를 하던 펜더‘포’의 아버지는 난리통에 혹시 헤어질지도 걱정되어,

마지막으로 자식에게 대대손손 내려오던 가문의 비밀국물조리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속직히 털어놓는 아버지의 말은 너무도 황당한 것입니다.

 

The secret ingredients is "Nothing" 비밀재료는 ‘없어’

Don't have to, To make something special, you just have to believe it‘s special .

그럴 필요가 없지. 단지 특별하다고 믿으면 특별해지는 거야

 

 

이미 팬더 ‘포’가 용의 전사로 낙점되었고 최종적으로 사부로 부터 그 징표인 ‘용의 두루마리 (dragon scroll)을 받습니다.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순간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문서에는 고수중에 고수가 되는 쿵푸의 비전(비전)기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빈 비단이었고, 자신의 얼굴만 비치는 헝겁두루마리일 뿐이었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자신도 마을사람들과 같이 피난을 가려는 ‘포’에게 아버지의 그말....

‘비밀은 없어, 특별하다고 믿으면 특별해지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놀라 다시 그 용의 두루마리를 펴봅니다. 

아무 글자도 없는 고급비단에 자신의 얼굴만 비칩니다.

이때 눈이 번쩍뜨이는 깨달음(확철대오 廓徹大悟)을 얻습니다. 그래서 돌아가 타이렁과 싸우러 갑니다.

 

둘이 치열하게 싸우는 도중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그 용의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타이렁은 “Nothing???"하며 기겁을 합니다.

그러자 팬더‘포’가 말합니다.

There is no secret ingredient, It's just you. (“비전(전수할 비밀기술)은 없어, 비전은 단지 너자신이며, 너의 마음에 있을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한 도(道)를 올라선 사람의 말이지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말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말로 단순화시켜 오해되고 있기도 합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며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모든것 다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다음의 말을 보시면 이해가 쉬워질 것입니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 부터 오는 줄 착각(illusion)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절, 이 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그것은 안심입명의 도는 밖으로 찾아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空)”한줄 알면 모든 괴로움을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생각에 사로잡혀 올다 그르다 모양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든다.

한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정토 수행문)

 

그래서

“결국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것같지만, 안으로 살펴보면 ‘내가 옳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므로 모든 법에는 본래 옳고 그름이 없음을 깨달아 ‘내가 올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을때 모든 괴로움을 사라지고 온갖 업장은 녹아나는 것이다.“(정토 참회문)

 

증오와 미움, 행복과 불행, 괴로움과 희망은 객관적 상황이 그래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행(修行 닦을수 행할행)은 행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그래서 항상 ‘마음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경계(불편하고 행복하고, 괴롭고 춥고 덥다고 생각하는 구분짓는 마음)가 다 ‘마음공부’하는 좋은 자리인것이지요

 

지금은 대입시험에 국어, 영어, 수학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계와 기술을 이용할 능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요. 이런 능력이 요즘 사람의 평가기준입니다. 그러나 과거 조선시대의 인재를 등용하는 시험은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주고 시를 짓게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등용했습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종합적 인격평가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예전의 공부의 개념이 다릅니다. 지금의 공부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등 지식적 기능이지만 본래의 의미의 공부는 지식과 기술뿐아니라 인격과 수련, 수양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 그리고 정신과 육체적 단련과 수련이 얼마나 종합적으로 잘되어 있는가를 파악하는 전인격적이며 통합적인 지혜의 습득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태권도(跆拳道), 유도(儒道), 합기도(合氣道)가 모두 도(道)입니다.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길(道), 방법인 것이지요

그래서 쿵푸는 소림사 권법의 이름이 아니고, 불가의 득도를 위한 마음공부(工夫)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공부(工夫)의 중국식 발음이 ‘쿵푸’이지 않습니까?

  



여섯번째 :  너무 사랑한 나머지 네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구나... 


이 애니메이션은 나름대로 철학적 공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며 애지중지키웠던 타이렁이 오히려 악의 화신이 되어 자신을 죽이려는 위급한상황에서 타이렁에게 시푸사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너무 자랑스러워 했고 나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네가 너를 보지 못한거야

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한것이다.

결국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은 나이다.

용서해다오."



1) 안다는 생각이 '더 깊이 알기'를 방해한다.


이 부분이 다른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들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 마음(집착)에 사로 잡혀 아들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실제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부인, 혹은 남편, 아이, 동생....들은


'내가 잘안다'는 마음. 바로 그 생각에 '갖혀' 더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가장 모르는 것이 그녀의 남편이고, 아이들을 가장 모르는 것이 그들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어린시절 '그 아이는 이러이러한 아이였잖아'라는 상상과 생각이 각인되어 변화된 그를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내가 나를 모르기도 하지만, 가까운 가족일수록, 각별한 애정(혹은 미움)이라는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잘안다는 생각'에 막혀 오히려 그 사람을 잘 모르는 것이지요. 실제로 집안식구들이 가장 나를 몰라 주잖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은 언제 '멀리 떨어뜨려 놓고 남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그 사람을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새로운 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만날 수 있지요.


2) 악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참회하면서 악을 구원하려는 마음(?)


또한 아마 디즈니나 픽사의 애니메이션이라면 이런 장면이 굳이 필요없을 겁니다.

훙악하고 사악한 타이렁을 악마로 규정하고 초절정 끝내기 싸움으로 마무리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대목에 약간 속도를 늦추고 사색의 시간을 줍니다. 


그가 악의 화신이 된 것을 단순히 타이렁의 자신탓만으로 전가하지 않고 사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참회하고 악마 같은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까지 합니다. 상대를 증오나 탓하며 미워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을 돌아보는 방법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지요. 


이것도 결국 ‘인연’에 의한 ‘과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참 아름다운 장면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곱번째 : 마음이 고요하면 더 선명한 지혜를 얻게 된다.


이 영화의 앞부분인데, 우그웨이 대선사가 시푸에게 타이렁이 올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시푸 사부는 그럴리 없다면서 감옥의 경계강화를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당황해하는 시푸사부에게 우그웨이 대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Mind is like this water, My Friend!'    마음은 이 물과 같다네, 친구여.

'When it is agitated... it becomes difficult to see, 산란한(동요하는) 마음으로는 잘 보기 어렵다네 (물을 흐트리면서),

but if you allow it to settle, the answer becomes clear'

그러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으면, 선명한(지혜로운) 대답이 보인다네. (투명한 바닥이 보이면서)..


마음이 흥분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요동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넓게 두루 살피는 마음이 생겨 그 만큼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분노하거나 화나는 마음, 반대로 기분좋고 들뜬 마음은 모두 ‘산란한 마음’이기 때문에 그 순간은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내려놓고 고요한 마음, 평정심과 여여한 항상심을 갖으면, 차분하게 두루두루 살펴 넓고 깊게 생각할 여유가 생기며 지혜로운 판단을 하게 됩니다. 슬기로운 판단은 '누가 더 넓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누가 더 많은 것은 고려하면서 판단하는가'로 판가름 나잖습니까...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분노하면서 열받는 일, 매사가 기분좋아 언제나 붕붕 떠 다니는 것, 모두가 안정된 마음이 아니지요. 평상심, 항상심, 여여로운 고요한 마음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하는 아주 좋은 비유인 것같습니다. 




나가면서 : 

 

아무튼 신자유주의의 세계속에 미국식 사고방식과 허리우드의 자본의 논리가 투영된 애니메이션...

그것도 중국과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하여 만들어 대박을 노린 영악한 드림웍스의 돈벌이로 만든 애니메이션으로 비판의 관점에서보면 또 할 것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좋은 마음 공부거리를 찾아 보려고 한것이지요.

지금까지 읽으신 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좋은 ‘쿵푸’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일상이 바로 좋은 ‘쿵푸’가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1363971&code=62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