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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노예'로 키우는 노예 교사들을 쓴 현직 교사는 절망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학교의 참상을 말한다. 그것이 학교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지칠 줄 모르고 뺨을 후려갈기는 동영상 속 여교사의 뒷모습에서 엉뚱하게도 권태감을 보았다. 무심한 발길질은 지금도 꿈에 나올까 무서운 군대 시절 ‘말뚝’ 선임하사의 몸짓과 신통하게 닮았다. 같이 간 친구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데도 놀이공원에서 더 놀려고 마음먹었던 배짱 좋은 녀석들치고는 너무나 고분고분하게 폭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료 교사의 침묵은 여교사의 ‘분열된 교권’을 단호하게 지켜주었다. 버스 안에서 두려움과 분노가 넘쳤다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냉소·무관심 혹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더 크지나 않았을까.


고통은 인간을 대오각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로마 제국과 바리사이(Pharisees)의 폭압 속에서 예수는 부활했다. 10대 여공의 싱싱한 폐를 순식간에 폐품으로 만드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불타올랐다. 사법연수원 출신끼리 밀어주며 힘 없는 자의 비명 위에 부를 쌓아가는 신성 불멸의 가족 가운데서 김두식 교수가 튀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삼성의 구조본에서 김용철 변호사는 거짓이 번번이 이긴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본다면 성인이 열 명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중·고등학교 교육 현장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교사들은 이미 그만뒀거나, 명예퇴직 연한이나마 채우려 이를 악물고 견디는 중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육 관료나 교장·교감은 자기도 뜻을 모르는 얘기를 끝도 없이 해댄다. 아이들은 중요 부품이 빠진 로봇처럼 기이하게 굴고, 학부모는 점점 염치와 예의를 잃어가는 속에서 멀쩡하던 많은 교사가 맛이 가버린 곳이 바로 학교다.

 

ⓒ한성원 그림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생각의 나무, 2011년)을 쓴 황주환씨는 절망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학교의 참상을 말한다. 작은 읍내의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사의 폭력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부모의 이기심 탓에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교가 곧 우리 사회의 축약판임을 깨닫는다. 경쟁과 효율의 신화로 자기 배만 불리는 권력과 자본까지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지금 학교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만 고민했던 그는 누구를 위해 가르치는가로 질문을 바꾸면서 절대로 다시는 굴종의 길로 들어설 수 없게 된, ‘깨달은 자’의 반열에 들었다.


아이들이 괴물이 되어가는 까닭


그렇다. 요즘 아이들 정말 이상하다. 저자에 따르면 몇몇 일탈 학생보다도 무관심·무책임·무력감으로 무장한 대다수 아이들이 교육 현장을 더욱 스산하게 한다. 아이들은 웬만해선 손가락도 까딱 않는다. 금세 쓰레기를 버리고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 몰염치에는 할 말을 잊는다고 한다. 따뜻한 말로 훈시를 해보지만 아이들과의 간극만을 확인할 따름이다.


교사와 어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 ‘건조한 인성’은 따지고 보면 숨 막히는 경쟁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은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이 황주환 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비겁하게 사태의 결과를 원인으로 바꾸어 면죄부를 가지려 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타락해서 수업을 못한다지만, 사실은 학교가 강요한 교육 때문에 아이들이 망가진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 하기 나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동안 아이들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공감할 수 없는 괴물로 변해간다.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지음생각의 나무 펴냄


그는 학교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책으로, 책에서 학교로 종횡무진 이동하며 얘기를 전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괴물처럼 변해가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괴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겪어왔지만 여전히 교무회의 자리가 불편하다.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에, 굴종과 침묵이 범벅되는 이런 풍경을 그는 10년 넘도록 무던하게 넘기질 못한다. 혼자 떠들고 나올 땐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벌거벗은 채로 언덕에 홀로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든다. 회식 술자리의 낭자한 분노와 교무회의 자리의 기묘한 침묵의 간극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학교뿐 아니라 관청이든 회사든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곳에 무겁게 깔리는 이 침묵이 동서고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교사들은, 아니 우리네 민초는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큐를 닮았다. 날품팔이꾼 아큐는 주변 인물들에게 모진 멸시와 폭행까지 당하면서도 ‘노려보기주의’와 ‘정신승리법’으로 형식적으로만 패배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는 힘 있는 자들에게 내면적으로만 승리하는 인물이다.


유태인 학살 실무총괄 담당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그린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시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이히만은 도덕이나 이상 따위의 말을 많이 사용했으나 그것은 그냥 사용하는 상투어였을 뿐이고 그에게는 진정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없었다. 나치가 주입한 생각과 어휘로만 그는 말했고 당연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한나 아렌트가 ‘평범한 악’이라고 이름 붙인 그를 보면서 황주환씨는 좋은 말로 가득한 학교장의 훈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온 나라를 뒤덮은 ‘중도, 실용, 서민, 법치’라는 말이 왜 도무지 와 닿지 않는지 이해한다.


저자는 말에 유난히 민감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대로 말하지 못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조종당하는 대로 말할 뿐이다. 대중은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문화적·도덕적 가치를 프로그래밍화된 사회 시스템을 통해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학습받기에, 자신이 지배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지배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학교와 언론이다. 놀랍게도 학생들에게 체벌에 관해 논술을 하라고 하면, 체벌당했던 당사자까지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가혹한 경쟁에 휘말려 자살로 내몰린 KAIST 대학생 상당수가 서남표 총장의 조처가 학교 ‘개혁’을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배 권력이 불의할수록 아큐나 아이히만 같은 자들처럼 대중은 자기 언어를 잃고 비굴하게 타락한다. 이를 방치하면서 오로지 학교만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저자가 볼 때 환상에 불과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부려 먹기 좋은 노동자, 손쉽게 자를 수 있는 노동자를 학교 시스템을 통해 기르는 데만 혈안이 된 이 나라의 자본과 권력은 몹시 불의하다.


학교에서 십수 년 교과서를 가르치며, 학생을 지도하며, 교장과 부딪치며, 그리고 정치 권력에 눌리며 그가 깨달은 것은, 교사는 그리고 우리 사회 힘없는 이들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예인 내가 또 다른 노예를 ‘제작’하고 있었을 따름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나약한지라 어느 시대 어느 땅에나 패배한 정의가 나뒹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진실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라고 그는 믿는다.


그에 따르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아름다운 말로만 쓰인 책은 모두 쓰레기이다.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그는 내가 교육 현장이나 책으로 만났던 수많은 교사 중에서 팔이 안으로 굽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차 없이 질문을 던지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굴종하지 않으려면, 자유로워지려면 숙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는 학교에서 참 많이 외로웠겠다. 그의 책에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 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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