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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은이), 이소연 (옮긴이) | 민음사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독서기.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등의 고대 작가에서부터 스탕달, 톨스토이, 플로베르, 발자크를 비롯해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 보르헤스 등의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의 고전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글을 모았다.

1950년대부터 198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간지 서평이나 책의 서문 혹은 연설문으로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총 서른여섯 편의 에세이들은 대부분 채 몇 페이지가 되지 않는 짤막한 글들이다. 칼비노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열네 가지를 설명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정전(正典)으로 삼았던 작품들을 안내한다.

칼비노라는 한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작가들에게 바치는 열렬한 찬가이자, 그들과 나눈 격의 없는 대화를 담은 이 책은 작가가 아닌 '독자로서의' 칼비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독서 편력을 따라가 봄으로써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하 리뷰

왜 고전을 읽는가—이탈로 칼비노

독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그 동안 읽은 책들을 떠 올려 보면 기억의 창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리라. 나 역시 잡다하게 책을 읽은 것 같지만 영혼을 뒤흔든 책이나 애정이 가는 책들이 많지 않다. 갈증을 해소해주는 이상을 나에게 남긴 책들이 빈약함을 탄하면서 왜 이런 식으로 밖에 책을 읽지 않았나 하고 후회도 든다.

누구나 그렇듯 유년시절의 독서 체험이 평생을 지배하는 것 같다. 만일 초중고 시절 책을 멀리했다면 대학을 가고 사회생활을 할 때도 책을 읽지 않을 확률이 높다. 책읽기는 습관이 지배하는 부분이 크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초중고 때 독서가 주는 환희를 장년이 된 후에는 맛보기 힘 들다는 것이 된다. 나 역시 독서를 통해 받았던 감동이 어린 시절을 뛰어 넘지 못함을 실감한다. 내가 다녔던 시골고등학교는 3층짜리 도서관이 있었다. 방과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일상이었다. 2층은 개가식 열람실이었는데 한쪽 벽만 제외하고 서가가 쭉 둘러져 있었다. 장서의 대부분은 하드커버였고 먼지가 책갈피를 풍화시켜 그윽한 서향이 났다. 아, 그 시절 서가에 꽂힌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은 얼마나 위로 받았었던가?  나 는 그 때 톨스토이와 스탕달과 세익스피어들을 읽었다. 읽지 않았지만 낭만적인 책 제목도 생각난다. 헤밍웨이의 <강 건너 숲속으로> 라는 책이다. 읽어야지 하면서도 지금껏 읽지 못한 책이다. 내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갈 때 환하게 등불을 밝혀준 책들의 무덤인 도서관은 언제나 가지런히 책을 메워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그 책들의 겉장만 흘끗거릴 뿐이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같은 책은 죽을 때까지 나를 놔두지 않을 것이다. 요즘 고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기억의 창고를 아무리 뒤져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벌> 처럼 나를 옴쭉달싹 못하게 만든 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비노의 이 책 <왜 고전을 읽는가>를 샀는지 모른다. 요즘 나는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테>에 푹 빠져 있다. 초등학생용 축약본이 아닌 완역본을 읽는다.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합하면 1400 쪽이 넘는 대작이다. 밀란 쿤데라가 일년에 한번씩 <돈 끼호테>를 완독한다며 인류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쿤데라의 페이소스와 풍자는 세르반테스에 탯줄을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언컨대 근대소설의 첫 장을 열어제낀 <돈끼호테> 만한 소설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년 소녀들이여, <돈 끼호테>를 읽어라!  사랑과 우정, 모험과 고독, 행복과 불행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 <돈 끼호테> 완역본을 읽지 않은 자는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다.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 는 그의 독서편력기 이다. 나는 그의 소설을 아직 읽지는 않았다. 그가 애정을 갖고 평생을 읽었던 책들을 회상하면서 써 내려간 독후기들을 읽다보면 시샘이 난다. 작가의 모든 것을 알 정도로 깊이 있는 독서를 한 것이 눈에 보인다. 허나 이 책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정도가 되야 쉽게 이해할만큼 난해한 부분이 있다. 아직 국내 번역본을 얻지 못한 책도 많이 나온다. 나는 책의 들머리에 있는 표제작 <왜 고전을 읽는가> 부분만 서점에서 읽어도 좋다고 본다. 지금 눈을 감고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 보라!  무슨 책이 스치고 지나가는가?  그 책이 바로 고전이다. 칼비노가 고전에 대한 정의를 14 가지로 요약했다. 다음과 같다.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만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12. 고전이란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13. 고전이라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으로 물러나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이란 배경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대한 글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포카라-


목차

서문 7

왜 고전을 읽는가 9
<오디세이아> 속의 여러 오디세이아 21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34
오비디우스와 우주의 인접성 43
하늘, 인간, 그리고 코끼리 61
네자미의 일곱 공주 78
티랑 로 블랑 89
<광란의 오를란도>의 구조 98
아리오스토의 명시선 111
지롤라모 카르다노 121
갈릴레오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129
달나라의 시라노 140
로빈슨 크루소와 상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관한 일기 148
<캉디드>의 서술 속도에 관하여 155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 162
자마리아 오르테스 171
스탕달과 먼지구름으로서의 지식 180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의 새로운 독자들을 위하여 199
발자크와 소설로서의 도시 209
찰스 디킨스의 <우리 서로의 친구> 217
플로베르의 <세 편의 이야기> 226
톨스토이의 <두 경기병> 230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236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 24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해변의 별장> 249
콘래드와 선장 256
파스테르나크와 혁명 263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의 아티초크와도 같은 세계 290
가다의 <메룰라나 가(街)의 무서운 혼란> 294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시 「어느 날 아침」 304
몬탈레의 절벽 317
헤밍웨이와 우리 세대 323
프랑시스 퐁주 33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344
레몽 크노의 철학 356
파베세와 인간 희생 제의 381

편집자 주 387
옮긴이의 말―칼비노의 문학 지도를 따라서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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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

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싶은 책이었는데,

영화가 개봉한단 소식에 그렇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읽어야겠다 - 책으로 읽은 거 영화로 봐서 만족스러운 경우는 드무니까-라고 미루어왔는데 어쩌다보니 개봉 직전 그냥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영화는 못 보겠다, 이건... 책으로 읽었으니까라는 이유가 아니라 너무 우웩~스러울 것 같아서.  지저분한 오물 천지 묘사며, 시체가 썩어나는 거리며... 너무 상상하며 읽었나보다. 결말부분이 차이가 있는 모양이라 좀 궁금하긴 한데...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선 며칠동안 밥도 못 넘기는 건 아닐까.... 뭐,내 식탐이 그 정도에 굴할  없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날 한 남자가 아무 이유없이 시력을 잃는다. 그 후 그 남자가 - 볼 수는 없지만 -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실명이 전염되고, 전염된 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염된다.

정부는 실명한 그들을 철거예정이던 정신병원 건물에 모아놓고 관리한다.

"정부는 정부의 정당한 의무로 간주되는 행동을 긴급하게 이행할 수밖에 없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위기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주민을 보호가기 위한 조치였다."라고 거듭 방송하지만 사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고, 전염이 두려워 아무도 접근해서 연구할 수도 없으니, 실명바이러스(?) 보균자들의 사망과 함께 실명병도 사라지길 바랐던 것일게다.

그러니 그 건물 안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만 모여서 지내게 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사람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 그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속속들이 관찰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믿고 있고, 자신도 보이지 않으니 마음대로 행동하고 수치심을 잃어간다. 그런데 오히려 앞이 보이는 그녀는 그 모습을 보기가 민망하고 고통스럽고 처참한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보이는 나를 봄으로써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는 이야기인가.

여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이 나타나고, 인간답기 위해선 그에 저항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있는 병실인 우병동 1호실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순하게 그들이 소설의 준주인공이니까... 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 아내의 시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시선이란 꼭 육체적인 시각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터.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들은 첫번째 눈먼 사람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어떤 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 작가는 자신의 집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자 비어있던 그 집에서 현재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지내고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작가라며 자신조차 볼 수 없는 글을 남기는 무의미한 짓을 한다. 자신은 비록 시력과 함께 이성도 잃은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빼앗겼지만 현재 사는 집의 주인이 나타나자 원주인과 타협하여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할 생각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이성을 기대하고 눈먼 육체에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걸까. 그게 바로 자신을 보는 시선의 유무가 아닐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보는 눈. 그것은 아마 눈멀었어도 눈멀지 않을 수 있는 모양이다. 이 소설대로라면 극히 일부 사람의 경우에만.

그냥 한번 너희들을 시험해본 거야...라는 듯이 모두들 이번엔 아무 이유없이 눈 멀었던 순서대로 앞을 보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된 후 한 시기동안 이런 실명상태를 거치게 되고 그동안 남을 믿고 의지해야하고, 다른이들은 이런 시기를 거치는 사람을 도와야만 한다면 어떨까? 이타심과 배려심이 깊어지지 않을까?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전이라고해야하나... 그런 것이 있는데(우리나라에선 예술의 전당에서)  아주 캄캄하게 해놓고 시각장애인들의 상황을 겪어보도록 만든 전시이다. 경험해보면 꽤나 느끼는 것이 많다던데 그런 느낌을 위한 재앙이었던 걸까? 이 재앙 후 사람들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그런데 꼭 실명이 아니더라도 '인생 끝'이라는 느낌의 고통스런 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지만 그 시기를 지난 후 성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망가져버리거나 악해져버리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쓸데없는 상상같기도 하다.

작가는 볼 수 없었다가 다시 보게 된 사람들이 어떠하리라 묘사해 줄 지 궁금해진다.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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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책은 항상 흥미롭습니다.
역사를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더더욱.

전쟁기획자들이라는 책을 오늘부터 읽고 있습니다.
시장과, 분쟁, 정치의 삼각관계를 이야기 합니다.
전쟁도 결국 권력문제고, 그 근원은 경제적 요인이 크다 라는 이야길 하고 있는데,
꽤나 괜찮아 보입니다.

음모론을 꺼내는건 뭐 문제가 있겠지만...
정치적인 권력 구도로 보는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빌더버그든, 삼각위원회든, 프리메이슨이든,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라...
국가간의 권력 관계와, 그 아래 기저에 깔린 돈문제를 보자는거죠.

베이스로,
기본적인 역사 이해가 필요하고,
경제적 매커니즘을 어느정도 아는게 좋습니다.
이 책 생각보다 설명이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서 보단 쉽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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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 & 하이에크

 

요즘 케인즈가 무덤에서 불려 나와 제 2의 전성기를 맞는 모양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대부격인 하이에크나 그의 사상적 제자 뻘인 밀턴 프리드먼은 부관참시도 모자랄만큼 비난을 받고 있다. 하이에크의 경제학에서 사상사적 족보를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가장 잘 보살필 것이라며 자유주의 입장을 내세웠던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를 스승으로 하며 시카고 학파의 산파인 밀턴 프리드먼에게 의발을 건네며 법맥을 전수한다. 하이에크의 경제사상을 받아들여 나라를 운영한 대표적인 이가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라는 좌판을 깐 정치인들로 작금의 경제공황을 야기시킨 자로 지목된다. 노동 유연화만이 살길이라며 노조를 부정하고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았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며 부유한 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행위가 기업을 살리는 길이라며 옹호했던 자들이다. 레이건과 대처는 일시적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작금의 사태를 야기한 뿌리로 지목되면서 그들 역시 죽어서도 맘 편하지 못한 상황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는 보수 양아치 떨거지 새끼들 수효를 세자면 수십 트럭 분량은 나오겠지만 멘 앞에 복거일이라는 떠중이가 있음을 부기한다. 나는 존경하는 고종석이 도대체 복거일의 어떤 면이 존경스럽다고 그를 인정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부분일 것이다) 설사 그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더라도 복거일의 사고 '틀' 자체가 틀려 처먹었는데 어느 빛나는 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를 인정할 수 있는가, 하고 의아심이 들곤 한다. 복거일의 쌍판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케인즈와 헤이에크 사상을 대비시키면서 시장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극명성을 좇아간 이 책은 출판사 ‘김영사’에서 기획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는 상당히 참신한 기획물이라고 본다. 대학생이나 교양에 목 마른 일반인들, 고등학생 수능대비서로도 손색이 없다.

 

 

케인즈 -- 인간은 장기적으로 죽는다!

 

케인즈 사상은 말하는 것은 너무 진부할 만큼 알려져 있지만 핵심은 “ 정부 개입의 옹호” 이다. 세이라는 경제학자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했다. 물건을 만들어내면 누군가 사게 된다는 것. 고전학파 시각이다. 고전학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수급의 균형을 자동으로 맞춘다고 주장한다. 케인즈는 이를 전면 부정한다. 공급 과잉으로 대공황이 온 부분을 고전학파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고전학파 자유주의자들은 공황이 오더라도 시장이 균형점을 찾아갈 때까지 그대로 놔두면 된다고 말하며, 심지어 어떤 덜떨어진 경제학자는 ‘공황은 좋은 것이여’ 하며 예찬론을 내놓기도 했다. 이 때 케인즈가 그들에게 톡 쏘아 부친 말이 있다. “장기적으로 인간은 모두 뒈진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시장이 균형을 찾아서 공황을 해결할 때까지 기다릴만큼 인간의 삶은 장기적이지 못하다는 것. 정부가 나서서 구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나서는 어떤 상황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반대의견을 제출한다. 정부의 개입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노예의 길>로 들어선다며 극단적 자유주의론을 옹호했다. 밀턴 프리드먼 역시 하이에크 못지 않다. 프리드먼은 나쁜 약을 제조해서 팔아도 그걸 막으면 안된다는 극단적 비유를 통해서까지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시장이 나쁜 약을 척결하도록 놔두는 것이 규제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내야할 인간의 자유가 과연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로널드 레이건이 멍석을 깔고 밀튼 프리드먼이 이론적 뒷받침을 했으며 전쟁광집단인 네오콘들이 정신적 자양분으로 받아들였던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파토 내버렸다. 그들은 금융산업간 규제를 풀고 헤지펀드들이 난장을 칠 수 있도록 모든 규제의 장벽을 제거했다. 이제 세상은 그들이 그렇게 옹호했던 '자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누구를 위한 자유였던가?)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깨버린 판을 설거지하러 불려온 자가 다시 케인즈라는 것도 씁쓸하다. 과연 정부는 판쓰리 지경까지 와 버린 경제를 추스려서 똑바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정부는 자본가들의 로비와 이익추구 앞에서 초연하고 공평무사하게 행정할 능력이 있는가?  대공황 탈출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시절의 케인즈주의와 지금의 케인즈주의는 너무도 다른 환경을 갖고 있지 않은가?  월가 자본가들의 헌금으로 대통령이 된 자가 월가의 이익을 배반하면서 서민들의 이익을 옹호해줄 수 있는가?  오늘 박노자 선생의 한겨레 칼럼 “오마바 당선을 별로 반기지 않는 이유” 에서 의문부호를 찍는 부분이다.

 

“ 과연 명문고교-컬럼비아대 학부-하버드대 대학원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별 어려움 없이 거친 중산계층의 흑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백인(7%)보다 거의 세 배 가까운 빈곤율(20%)을 보이는 흑인사회 전체의 비참한 상황이 약간이라도 개선될 수 있겠는가? 미국도 우리처럼 빈곤이 대물림 되는 사회인데, 학력·경제력이 약한 부모를 둔 탓에 출발점부터 불리해 아무리 발버둥쳐도 출세할 수 없는 이들의 고충을 해결하자면 빈민가 공립학교의 수준 향상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붓는 등 복지주의 정책을 활발히 펴야 할 것이다. 오바마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제너럴 모터스(GM)나 포드 등 거대 재벌들이 공황의 파도에 떠밀려 정부 지원책이 있지 않고서는 파산으로 치달을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 말이다. 최고 통치자가 흑인이 돼도, 미국의 사회·정치 구조상으로 ‘기업 복지’와 ‘민중 복지’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할 때 늘 전자를 선택하게 돼 있다.”

 

 

자본주의 이후는 없는가?

 

현재 경제상황 타개는 케인지언의 손을 빌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규제와 정부개입이 당연시 되고 있다. 국민들이 지갑을 닫고 있는데 정부라도 나서서 돈을 뿌려야 한다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정부의 취로사업만이 공황을 타개할 유일한 길인 셈이다. 이 책 <케인즈 & 하이에크>는 자본주의 체제를 위기에서 일으켜 세우려는 자(케인즈)와 전체주의와 맞서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자 (하이에크) 간 논쟁이다.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책이다. 일독할만하다. 책을 읽고도 개운치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는 과연 위기에서 구해낼만한, 옹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체제의 대안은 없는 것인가?  무덤에서 불려 나온 케인즈가 자본주의를 수술한다 한들 땜빵 밖에 더 되겠는가?  지금 상황에서는 땜빵이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비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앞으로 다가올 한 겨울이 두려울 뿐이다.       

-포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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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분야의 최고 기업인 Google 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분야에서 다양한 종류의 혁신적인 서비스들을 제공했던 구글은 세계의 모든 책을 온라인상으로 옮겨놓으려는 Book search project 를 시행중에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Google book search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책을 검색하고, 이 책의 일부분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곳과 열람 할 수 있는 곳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를 위해서는 판권획득이 필요했습니다. The McGraw-Hill, Pearson Education, Penguin Group, John Wiley & Sons and Simon & Schuster 등은 2005년 말에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구글이 제공하려는 서비스를 위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무려 3년간 지속된 소송끝에 구글은 미국 출판사 협회(AAP) 와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 합의를 통해 구글은 수많은 미국의 주요 도서관들의 컬렉션으로 부터 판권이 있는 수백만권의 책들과 그 밖의 자료등에 온라인으로 접속할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합의를 위해 구글은 무려 1억 2500만달러 (1800억원) 를 지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합의와 관련된 정보는 구글의 도서검색 화해계약 페이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글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현재 약 700만권 이상의 도서가 서비스 대상에 있고, 2만여명의 발행자와 저자들과 파트너 관계를 맺어, 이들의 저서를 구글에서 미리보거나 이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양한 도서관들이 소유하고 있는 도서들에 대해 검색을 하고, 저작권 비보호 도서는 전문을 읽거나 다운로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온라인 도서관을 꿈꾸는 구글의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성공을 바탕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다는 점은 한편으로 부럽기까지 합니다. 과연 다음번에는 어떤 재미난 서비스를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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