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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문]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마틴 니묄러(1892년-1984년) 목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다. 나치가 특정 집단을 하나씩 차례로 지목해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차지할 때, 저항하지 않고 침묵한 독일 지식인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마틴 니묄러는 1892년에 독일 리프슈타트에서 태어난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니묄러는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히틀러의 등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국가의 우월성을 종교처럼 주장하자, 니묄러는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를 반대하는 독일 성직자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니묄러와는 달리 독일의 성직자들은 나치의 위협에 굴복했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니묄러를 매우 싫어하여 그를 체포했으며, 결국에는 작센하우젠과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에 감금했다. 니묄러는 연합군에 의해 1945년에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독일에서 성직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국민들을 참회와 화해를 이끄는 대변자로서 활동했다. 그의 시는 잘 알려져 있고 자주 인용되며, 흔히 특정의 조장된 두려움과 함께 시작되어, 이윽고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 집단적인 적의를 띰으로써 나타나는 정치적 무관심의 위험성을 묘사하는 데 인기가 있는 본보기이다.



이 시는 독일에서 몇 년동안 수행했던 인터뷰를 기초로 하여, 밀턴 마이어에 의해 1955년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They Thought They Were Free)》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인용은 1960년대말 미국의 사회운동가들에게 널리 퍼졌다. 이 시의 정확한 원본은 불명확하며, 적어도 한 명의 역사가는 이 시가 니묄러 사후에 생겼다고 잘못 암시했다.[1] 최근에 조사된 연구에 의하면, 이 시에서 표현된 취지를 담은 연설이 니묄러에 의해 1946년에 행해졌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기원, 그리고 이 시의 여러 버전에서 언급되는 집단들의 이름과 순서에서, 이 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46년 연설에서, 니묄러는 공산주의자, 불치병에 걸린 자, 유대인 혹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연설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점령당한 국가의 국민을 언급한다; 인터뷰를 통해 한 독일인 교수가 기록한 1955년 문서에서, 그 목록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또는 학교, 언론, 유대인 등등' 이며, 마지막엔 '교회'로 끝난다. 그러나 리처드 존 뉴하우스가 2001년 11월에 인용하면서, 인용구의 정확한 버전에 대해 1971년에 니묄러에게 물었을 때, 그는 그렇게 멋진 말을 했던 때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버전을 선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 . 그들이 내게 왔을 때 . . .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1965년, 재즈 뮤지션 찰스 밍거스는 그가 작곡한 "Don't Let it Happen Here"에서 이 시를 차용했다.

2006년, 미국의 펑크록 밴드 Anti-Flag는 그들의 앨범 For Blood And Empire의 노래 "Émigré"에서 이 시를 언급했다.

2003년, 미국의 펑크록 밴드 NOFX는 앨범 War on Errorism의 노래 "Re-gaining Unconsciousness"에서 이 시를 차용했다.

2007년, 영국의 작사가 빌 프린스는 그의 앨범 "Peace And Freedom"에서 이 시에 기초를 둔 "None Of My Business"를 녹음했다.

2007년, ABC 방송의 위기의 주부들 에피소드 "이웃의 한계"(Art Isn't Easy)에서 이 시를 언급했다. 극중에서 리 맥더못(케빈 람이 연기)은 리네트 스카보(펠리시티 허프먼이 연기)에게 변형된 버전의 이 시를 암송한다.

2006년 아일랜드 포크록 가수 크리스티 무어는 이 시를 기초로 한 Yellow Triangle를 녹음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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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여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헨리 죠지 Henry George

진보와 빈곤, 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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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호 평전- 사회변혁을 꿈꾼 민중경제학자의 삶

조용래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경제민주화 주장’ 유인호 교수, 평전으로 기리다

20주기 기념 추모집도 발간… 민중경제학자의 삶 재조명


“어느 날 목사님들이 모여 ‘유 교수는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얘기한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 망하지 않은 걸 보니 거짓말 아니냐’고 농을 걸었습니다. 교수님은 되레 ‘목사님들은 예수 재림을 20년 가까이 주장하고 있는데 내가 한 것이 무슨 대수냐’는 위트를 보여줬어요. 자본주의 위기가 세계적 규모로 퍼지고,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니 교수님의 예언에 가까워진 셈입니다.”


김병태 건국대 명예교수는 민중경제학자 일곡 유인호 전 중앙대 교수(1929~1992)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5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는 유 교수의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330㎡(약 100평) 규모의 행사장은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가득 들어찼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박형규 목사, 한승헌 변호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추모식에 이어 고인의 삶과 사상을 집대성한 <유인호 평전>과 지인들의 추모사를 엮은 <진보를 향한 발걸음>(각 인물과사상사)의 출판기념회도 함께 열렸다.


무엇이 오랜 세월을 지나고도 그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경제민주화를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가 바로 유 교수였다. 재벌을 비롯한 소수 1%의 정치·경제적 장악력이 강해졌고, 중소상공인·자영업자·노동자·농민의 생활이 어려움을 더해가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평전을 집필한 조용래 박사는 “한국경제는 유 교수가 본격적으로 주장을 펴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줄곧 제기해 온 문제군(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당면 과제로 경제민주주의 실현을 꼽았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 ‘서울의 봄’이 일어나자 유 교수는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제 기본권 7가지 규정’을 제기했다. 여기에는 ‘국가 권력은 경제력 집중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사상은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낸 고도성장의 허상을 지적하는 데서 비롯됐다. 유 교수에게 당시의 성장은 자본과 기술, 시장을 외국에 의존한 ‘종속적’인 성장에 불과했다. 수출과 국민총생산(GNP)이라는 숫자 증대에만 매달리면서 재벌을 비롯한 일부의 배만 불리고 대다수를 피폐하게 만드는 허깨비뿐인 성장이었다. 대신 유 교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활경제의 풍부함”(김종걸 한양대 교수)을 이야기했다. 그는 ‘민중’ ‘민족’ ‘민주’의 경제학자로 불렸다. 대다수 민중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민중경제’, 세계화 시대에도 강력한 국내 자본을 육성하는 ‘민족 경제’가 돼야 하고, 그 모든 것을 추진하는 데 ‘민주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벌어진 뒤 박정희 군부세력은 정유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당시 동국대에 재직하던 32살의 유 교수에게 계획안을 맡겼다. 유 교수는 외자를 일절 배제하고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건설할 것을 주장했으나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안에 밀려 채택되지 못했다. 훗날 1970년대 유신경제가 수출은 16억달러에서 150억달러로 늘었지만, 외채를 220억달러나 도입해야 했으며 무역적자도 136억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유 교수의 혜안을 보여준다.


유 교수는 ‘국내 자원 활용 주도형’ 경제 발전을 주창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기업농’ 육성책에 반대해 ‘농업 협업화를 통한 농민들의 연합’을 주장했다. 농민들이 일정한 토지와 농기구를 공동 소유하고 생산의 결과를 나눠가지는 방법이다. 유 교수는 새마을 운동을 농업 협업화의 방향으로 전개하자고 박정희 정부에 건의했으나 정치적 목적을 우선한 집권세력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는 재벌을 소규모 기업들로 해체하기보다 재벌의 소유를 ‘총수’로부터 ‘사회’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을 국유화시켜 관료들에게 맡기는 방법이 아니다. 농업 협업화처럼, 공장도 구성원들에게 운영을 맡기는 소유의 민주화를 뜻한다.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한 유 교수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구소련식의 계획경제가 아니었다. 

계급이 사라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는 사회에 가까웠다.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일곡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료하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 1974년 10월 한 일간지에 ‘연료정책의 모순’이라는 칼럼을 쓰기 위해 연탄공장을 찾은 유인호 교수. 유 교수는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 인물과사상사 제공


유 교수는 자신의 최대 연구과제가 “나와, 겨레와, 인류의 가난과 슬픔과 비참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했다.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1980년에는 민주화를 촉구하는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가 신군부가 만들어낸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추모집에서 “민중을 위한 스스로의 학문적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고행의 길을 살다 간 용기있는 사람”이라며 “그 발자취가 역사의 한 구석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황경상 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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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고,
많은 분들이 당선을 믿어 의심치 않던 지역구에서 노회찬 씨가 아닌 홍정욱 씨가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걸 지켜보던
형이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왜 고양이가 쥐 생각 해주길 바라는 걸까?'
글쎄 뭐 그 형이 '쥐'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치 같은 거 뭔가 복잡해 보이고 재미도 없고 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하고 궁금하고 그랬어요.

이 책은
그 유명하신 촘스키 아저씨와 '언어학 전쟁'이라고 불리는 대논쟁을 일으킨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인지언어학' 을 창시한 조지 페이코프 아저씨가 쓰셨는데요.
이 책에서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이 왜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코끼리로 상징되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지를 분석한 뒤 미국의 진보를 위해 프레임을 어떻게 조작하고 작동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한다>고 누가 하네요. ^^;;
저한테 내용이 어려워서 잘 이해를 못했어요. ㅠㅠ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일었던 물음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구요.
속시원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모델은 흥미로웠어요.
정치적 은유와 수사에 대해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되었구요. ^^
별점을 주자면,
★★★☆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영어를 비롯한 일부 언어에서는 시간에 대해 말할 때 '시간을 낭비하다', '시간을 절약하다', '시간을 투자하다' 등의 표현을 쓰는데 그 근저에는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적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돈'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빌린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은유 이론을 정치학에 적용하여 미국 정치를 언어적으로 분석한 『Moral Politics』(『도덕의 정치』, 손대오 옮김, 생각하는백성, 2004)라는 책을 집필했다."
- 224쪽에서 225쪽 옮긴이 후기 중에서
"이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도덕의 정치』에서 전개한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민주당 지지자와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엮어낸 간략하고 실용적인 지침서이다."
- 225쪽 옮긴이 후기 중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가 한창 사임 압력을 받던 당시의 일입니다. 이때 그는 TV에 나와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닉슨은 전국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화는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프레임의 기본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상대편의 언어는 그들의 프레임을 끌고 오지, 결코 내가 원하는 프레임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 24쪽 1부 1장 「그것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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