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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전문가가 꾸린 상품 보따리 받아보는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화장품에서 식품·의류 등으로 확산, 도시와 농촌 잇는 '제철꾸러미'도


벨이 울린다. "택배 왔습니다." 광고에서 그러듯 LTE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면 미스터리한 박스가 문 앞에 놓여 있다. 잡지를 구독하듯 박스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미리 구독료를 지불했지만 박스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미리 알 길 없다. 이번주 무슨 기사가 실렸나 가슴 두근대며 < 한겨레21 > 포장지를 뜯듯, 어떤 물건이 왔나 박스 테이프를 뜯는 순간은 박스 구매기의 절정이다. 테이프를 뜯었다. 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 담겼을까, 열어보는 재미


올해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을 가장 뜨겁게 달군 것은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다. 매달 일정 금액을 내고 시중가보다 싸게 상품을 정기구독하는 서비스다. 미국에서 2010년 4월 론칭한 '버치박스'가 이런 물품 거래 형식을 제안한 이후 이를 벤치마킹한 수다한 사이트들이 등장했다. 국내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는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시박스'다. 


2011년 5월부터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글로시박스 코리아는 월 1만6500원의 구독료를 받고 그달에 제휴한 화장품 여러 종류 중 5~6개를 구매자들에게 발송한다. 글로시박스는 한 달에 1500~2천 명 수준으로 신규 가입 회원이 느는 등 세를 확장하고 있다. 서비스 초기에는 대부분 유행에 민감한 20대 초반 여성들이었지만 지금은 25~30살 여성이 메인 타깃이다.


할인율은 70% 정도다. 글로시박스 김현화 마케팅팀장은 "박스당 보통 5만~8만원, 특별한 경우 11만~12만원어치의 제품을 담는다. 정품 또는 미니어처 증정품으로 구성돼 있으며, 글로시박스 구매자가 많아지자 증정품을 제조하지 않는 회사도 따로 미니어처를 제작해 공급할 정도다"라고 밝혔다. 


글로시박스는 한 달 전부터 예약을 받고, 매월 1일 제휴한 제품을 공개함과 동시에 예약자들에게 박스를 발송한다. 제품이 공개되고 나면 5~6일 사이에 거의 다 판매될 정도로 호응도가 높다. 새로운 콘셉트를 내세운 스페셜 박스는 구매율이 더 높은데, 9월에 내놓은 '빅콜라보레이션 박스'는 4일 만에 완판됐단다.


잡지에 실릴 큰 주제는 예측 가능하지만 시시콜콜한 문장은 미리 알 수 없듯,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계절에 따라 보습·색조·안티에이징 등 큰 주제를 내놓긴 하지만 구매자들은 박스를 열기 전까지 자신에게 어떤 제품이 올지 알 수 없다. 제공자는 구매자가 회원 가입을 하며 기록한 데이터를 참고해 전혀 생뚱맞은 제품이 가지 않도록 조절하지만, 랜덤한 박스는 실망과 반가움의 경계에 있는 구매자들에게 재미로 작용하는 듯하다. 


매달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를 이용한다는 대학생 김지연(23)씨는 이렇게 말했다. "박스 안에 어떤 품목들이 구성돼 있을지 궁금한 점도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를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예요. 미리 돈을 내기는 했지만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시초가 된 버치박스, 글로벌화한 글로시박스가 그렇듯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시장의 품목은 대부분 화장품으로 채워져 있다. 홍보에 가장 많이 기대는 화장품 업계와 쏟아지는 신상품이 궁금한 얼리어답터의 욕구에 맞아떨어지는 판매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에 구독자 정보를 세밀하게 받아 잘 맞는 제품을 보내주는 것을 내세운 'W박스', 여성·남성·아기용 화장품 등 다양한 구성을 선보이며 구매층을 넓히고 있는 '미미박스', 3만5천원의 비교적 높은 구독료 대신 정품 제품을 한 가지 이상 꼭 포함시키는 '보보박스'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 화장품 서브스크립션 커머스가 운영 중이다. 


이런 시장의 흐름에 대형 온라인 쇼핑 사이트들도 뛰어들었다. 11번가에서는 전문 MD 20명이 엄선한 남성 화장품 패키지 '맨즈 뷰티박스'를 800개 한정으로 내놓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옥션은 11월5일 'ABC박스' 2종을 내놓고 판매를 시작했다. 옥션 뷰티팀 이영해 대리는 "ABC박스는 50~60%의 할인율을 보이며, 잘 알려진 브랜드 위주로 각각 13개 제품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높은 할인율+전문가 안목


화장품 시장이 치열해지자 업체들은 틈새를 노린 다양한 상품을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서비스 형태로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주크박스'는 화장품을 비롯해 간식, 과일, 연극·뮤지컬 공연 정기구독권을 판매한다. 사이트에서 가장 재구매율이 높은 것은 과일박스, 간식박스다. 2만5천원에 구독 가능한 과일박스에는 시중가 5만~6만원 상당의 과일이 담겨 있다. 각 지역의 영농조합과 직접 거래해 구매자들에게 제공한다. 간식박스는 직장에서 단체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단다.


지난 10월 문을 연 '헤이브레드'는 빵 배달 서비스를 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잡지를 골라 집에서 받아보듯, 구매자가 빵을 고르면 다음날 아침 일찍 전날 구운 신선한 빵을 받아볼 수 있다. 한 달 1천 명 가까이 신규 회원이 늘고 있다고 한다. 헤이브레드는 인터넷이나 매체의 후기, 입소문을 바탕으로 좋은 빵집을 선별한다. 정보를 찾고 선별하는 과정을 구매자 대신 하는 셈이다. 


유원상 헤이브레드 고객영업팀장은 "기존의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서비스처럼 파격적인 할인율을 내세우진 않지만 식품첨가제가 들어가지 않은 천연 재료로 만든 건강한 빵, 장인이 손수 구워낸 빵을 구매하려고 발품을 팔아야 했던 불편함을 덜었다"며 "전날 낮 11시부터 당일 낮 11시까지 주문을 받아 빵집에 의뢰를 하고 다음날 아침 6시에 고객이 빵을 받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11월 현재 4곳의 입소문 난 동네 빵집과 제휴를 맺고 있으며 앞으로 관계 매장을 더 늘릴 예정이란다. 유기농 버터, 치즈, 수제 잼 등도 판매할 계획이다.


패션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성 '그루밍족'을 위한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사이트도 인기다. 남성 화장품 박스를 판매하는 '맨즈박스', 화장품을 비롯해 속옷·양말 등 남성 생활용품을 한 박스에 담은 '맨킷', 넥타이·간식·콘돔·의류·다이어트도시락 등을 제공하며 남성 직장인을 타깃으로 한 '덤앤더머스' 등이다. 


이외에도 임산부용 내복과 태교 동화책, 수유 패드 등 임신부터 출산까지 10개월을 따라가며 물품을 판매하는 '텐박스', 젖병, 이유식용 유기농 제품 등 아기와 관련한 '베베엔코' 등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시장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주크박스 전용재 본부장은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를 이렇게 설명했다. "티몬, 쿠팡 등 소셜커머스에 이은 새로운 전자상거래 형태다. 공동구매를 통한 할인을 내세운 소셜커머스와 다른 점은 높은 할인율을 제공받음과 동시에, 제품 큐레이팅에 따른 정기구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정보 사이에서 물건을 고를 시간이 없는 구매자들을 위해 상업이 변화한 것이다."


사실 판매자가 구매자 대신 박스를 채워 보내주는 상거래 방식은 온라인보다 먼저 부엌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서브스크립션 커머스와 결이 다르긴 하지만 농촌과 도시 사이에는 일찍이 보따리가 오갔다. 2000년대 후반, 산업화한 농업에 반기를 든 소비자와 구매자가 뭉쳐 지역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거래하는 물꼬를 텄다. 


이른바 '제철꾸러미'라는, 농산물로 채워진 박스다. 전북 완주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거래로 공급하는 '건강밥상꾸러미', 여성 농민들이 운영 주체로 나선 '언니네텃밭', 직영 농장과 회원 농가에서 직접 지은 수확물을 모아 보내는 사회적 기업 '흙살림'의 꾸러미 등이 대표주자다.


생산자, 소비자 관계도 회복시켜


농산물 꾸러미 시장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형성됐는데, 1950~60년대 환경오염으로 인한 공해병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자 1970년대부터 농수산물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활동)가 조직됐다. 이어 미국에서는 1986년부터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운동이 시작됐고, 유럽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광우병과 구제역의 공포 속에서 지역 먹거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농산물 꾸러미 서비스는 대부분 회원제로 운영된다. 지역 공동체와 소비자가 관계를 맺고 매주 또는 격주 단위로 생산자가 보내는 꾸러미를 택배로 받는다. 제철 농산물, 유정란,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 등 구성은 대부분 비슷한 편이다. 여기에 운영 주체에 따라 농가에서 직접 담근 장아찌, 감주, 밑반찬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서브스크립션 커머스처럼 랜덤한 제품을 보내는 것은 아니고 구매자가 식단을 짜는 데 유용하도록 농산물을 미리 공개한다.


2009년 3월 강원도 횡성군 여성농민회 5가구가 서울의 21가구에 택배로 농산물을 보내 제철꾸러미 사업을 시작한 '언니네텃밭'은 여성 농민들을 주축으로 운영된다. 현재는 농민 140명, 회원 수 1500여 명이 관계를 맺고 거래한다. 언니네텃밭은 특정 산지를 선호할 경우를 제외하고 소비자와 거리가 가까운 산지의 연결을 원칙으로 한다. 더불어 텃밭 방문을 회원 의무 사항으로 지정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를 도모한다. 


생산자는 자신이 보내는 먹거리의 주인을 직접 대면해 관계를 맺고, 소비자는 농번기 일손을 돕는 등 자신의 식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채워지는지 몸으로 깨치고 확인한다. 관계를 맺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언니네텃밭 윤정원 사무장은 "얼굴을 서로 알게 되면 꾸러미를 보낼 때와 받을 때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단순히 제철 농산물을 집에서 편하게 받아보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같이 짓고 식탁의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세속적 가치를 실현하는 소비사회에서 소비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윤 사무장은 더불어 "제철꾸러미 사업을 하며 그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도 노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농민들이 일에서 보람을 찾고 있다. 거래자와 소비자가 직접 소통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엔 어떤 상자가 나올까


초인종이 울리고 논과 밭이, 옷과 화장품이, 내일 먹을 빵과 도시락이 박스에 담겨 날아왔다. 바쁜 일상, 넘쳐나는 제품 정보,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구매하고 싶지만 일일이 경험해보기 힘든 현실에 착안한 서브스크립션 커머스는 한동안 세를 불려나갈 태세다. 구매자의 욕구에 예민한 시장은 다음에 어떤 상품을 상자에 담아 벨을 누를까.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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