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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간 '윤회' 연구한 美 정신과 의사, 최면치료중 알게된 인류의 미래 

브라이언 와이스 Brian Weiss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와이스 박사는 콜롬비아대 화학부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이후 예일대학과 피츠버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마이애미대 의료원 정신과 주임 교수가 됐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이미 40여 편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해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철저하게 과학에 입각한 사고와 연구 방법으로 사물과 질환을 대했으며 영혼, 윤회 등 비과학적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1982년 ‘그날’이 오기까지 적어도 그는 철저한 ‘과학자’였다. 


1982년, 마이애미대 불면증 치료센터를 담당하고 있던 와이스 박사는 최면 치료를 받고 있던 캐서린이라는 환자를 만났다. 일면식도 없던 캐서린은 최면 상태에서 와이스 박사의 가족사에 대해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와이스 박사는 소름이 돋았다. 부친의 히브리어 이름과 희귀한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사망한 아들에 대한 일은 가까운 가족만 아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캐서린은 와이스 박사의 의학계에 대한 인식과 딸의 이름을 지은 경위 등도 말했다. 


깜짝 놀란 와이스 박사는 캐서린에게 누가 이 사실을 알려줬는지 물었다. 그녀는 “신들입니다. 나는 86회 윤회를 했습니다”고 대답했다. 최면 치료를 받은 캐서린은 자신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 모든 질환의 증상이 개선됐다. 와이스 박사는 이 일을 계기로 기존 과 다른 연구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전생 연구에 뛰어들다

난생 처음으로 윤회와 전생, 영혼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과의 접접을 찾기 시작했다. 라이스 박사는 먼저 도서관에 틀어 박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어느새 가치관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관심사도 물질과 육체에서 정신으로 옮겨갔다. 


아래는 와이스 박사의 이야기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알게된 바로는 나는 윤회하면서 불교도, 힌두교도, 카톨릭 교도로서 수행했다. 현세에 중국에 가본 적은 없지만, 먼 옛날 중국에서 태어난 적이 있다. 당시는 불교가 중국에서 한창 활발하게 전파되던 때로 선종이 중국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시 불교 수행자로서 선종의 창립에 다소 관여했다. 이외에도 5~6명의 도가 수련자와 함께 수련을 한 적도 있다.


이런 전생의 경험이 현재의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현대 과학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초능력자로 알려진 한 사람은 나에게 “당신의 몸에는 두 개의 인간 영상이 보인다. 하나는 나이든 중국인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도사로서 중국에서 살았을 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동양의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나는 신중하게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과학적 논리를 지킨다는 전제 하에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나는 일반적인 학자들과 다를지도 모른다. 양전자 단층 촬영술(pet)로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대에 성립된 정신세계에 관한 이론을 이해하고 활용하기도 한다. 


사실 고대 불교 안에는 수많은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원자 이론, 소립자, 다차원 공간에 관한 기술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현대 과학과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단지 시대와 문화가 달라 기술 방법와 용어가 다를 뿐이다. 고대의 종교와 학문에서 기술한 정신 영역과 우주에 관한 현상들이 현대 과학에 의해 실증됐다.


천문학자와 물리학자의 최신 이론을 접하면서 그들의 연구와 나의 연구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그들은 동시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공간과 팽창하는 우주,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는 내가 최면 치료 중 만난 환자들이 말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단지 환자들의 진술에는 복잡한 수학 공식이 없을 뿐이다. 


천문학자들이 인정한 다차원 공간의 존재는 전생과 현세, 내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될 수 있다. 단지 현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최면 상태의 환자들이 말한 사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기존에 생각지도 못했던 양자 물리학이나 초끈 이론, 최신 천문학적 발견은 전생과 윤회가 결코 비과학적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은 얼음같은 존재

최면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꿈을 연구했다. 일부 사람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에서 미리 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현상을 겪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미래에 관한 것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꿈속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최면 상태에서도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최면을 통해 미래에 관한 언급을 수집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의식은 어떻게 장래를 알 수 있나?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어떤 종류의 힘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는지? 양자 이론이나 초끈 이론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지? 이러한 문제는 과학자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영역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추측으로는 일정한 차원의 생명이 되면, 의식은 마치 하나의 감각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는 그 차원의 생명의 모습을 기술할 적절한 단어가 없다. 한 가지 재미있는 비유를 들어 보겠다.


모든 사람을 크기도 모양도 다른 딱딱한 얼음덩어리로 가정해 보면, 차가운 물에서 이 얼음은 서로 떨어진 상태로 떠다니게 된다. 하지만 열을 가해 얼음이 녹으면 모두 물에 녹아 하나로 되어 버린다. 이 때 이미 얼음이라는 생명은 이전과 다른 형태다. 계속 열을 가하면 물은 수증기로 바뀔 것이고, 육안으로 수증기에서 얼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얼음을 구성했던 물질이 수증기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이는 비유로서 사람을 얼음 덩어리에 비유하고 육신이 없어지고 수증기처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옮겨 가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를 설명할 언어가 우리에게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얼음덩어리 차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단지 얼음 덩어리에 불과하며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에너지가 아니라 사랑과 같은 정신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마치 얼음 덩어리가 녹아 물이 되는 것처럼 진동 에너지가 한층 더 높은 차원에 이르면, 우리들은 수증기처럼 된다. 수증기를 넘은 차원은 더욱 멀고 더욱 높은 차원으로 형용할 수 없다. 반대의 과정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높은 에너지 세계의 생명이 그 에너지가 서서히 낮아지고 낮아져 더욱 낮아지면, 마지막에 얼음, 즉 인간이 된다. 나는 우리 인류가 가장 저능하고 가장 완만한 진동, 마치 물 분자의 가장 늦은 진동 형식인 얼음 덩어리와 같다고 본다.


최면치료중 알게된 인류의 미래

최면 치료를 받은 많은 환자들은 일상 생활 속의 불안과 공포감을 없앨 수 있었고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게 됐다. 이 중 상당수는 지구의 미래를 보았다. 이들이 최면 중의 본 지구는 앞으로 대략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제1 단계는 지금의 시기다. 이 단계는 자연적인, 혹은 인위적인 각종의 재난에 휩쓸려 비참한 사건이 많이 발생하지만, 아직 전 세계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 단계에서 독을 가진 것이 더욱 더 많아지고 인구 증가로 문제가 발생한다. 또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가 진행된다. 아직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황이다.


제2 단계는 인류의 두 번째의 ‘암흑 시기’다. 왜 이러한 암흑 시기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인류를 정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이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이 시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은 것 같다. 많은 인류는 그 영혼이 승화하고, 지구상 인류의 일부는 보다 높은 차원의 공간으로 전생할지도 모른다.


그 후 제3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지구의 모든 것은 순결하고 소박하게 변해 만물에 활기가 흘러 넘치고 세계가 평화롭고 온화한 환경이 된다.


수천 건의 최면 치료 사례에서 영혼의 윤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구는 마치 시끌벅적한 교실 같아서, 많은 영혼이 이곳에서 태어나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고 소박한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면 그러한 세계가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우리가 지구에 태어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생명은 이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바쁜 일상에 쫓겨 진짜 목적을 잊어 버렸다.


나는 20여년에 걸친 정신과 영혼에 대한 연구로 이전보다 인간 관계를 더욱 소중히 하게 됐다. 부와 명예보다는 자신의 진정한 생명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알게 됐다. 나는 이전에는 육체가 사망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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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윤회론
 
다음은 <윤회의 진실(1981)>의 저자 지나 서미나라(Gina Cerminara)가 전통 기독교의 이론과 윤회론을 대비시켜 써놓은 글인데, 내가 기독교와 연관지어 쓰는 것보다 저자의 글실력이 탁월하므로, 옮겨적는다.

아주 설득력있게 왜 윤회론을 믿는 것이 가장 지적으로 진보한 자들의 사상일 수 밖에 없는지, 기독교의 우스운 교리들에 대한 조소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특히 몇 년 전 이 책을 읽고, '바보 원숭이'에 대해 설명하던 부분은 참 통쾌하고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참고로 이 책은 절판되어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 사실 저자가 1984년도에 영면하기도 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 - <천국과 지옥>
  
상당히 개방적인 개신교 목사가 한 분 있었다. 윤회론을 꽤 깊이 연구한 그는 마침내 그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목사님은 설교중에 윤회에 대한 말씀을 하시나요?"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글쎄요. 아주 가끔씩, 조심스럽게 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윤회에 관해 설교했을 때는 지옥론과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결론은 신자들 스스로 내리도록 했습니다."

나는 이따끔 그 목사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는 인류의 생각이 본질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실 기독교 사회에서 윤회와 같은 이단적인 낱말을 주저없이 입에 올리는 목사가 있다면 가차없이 지탄과 분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어쩌면 대다수의 교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교구에서도 쫓겨날지 모른다. 실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교회에서든 윤회라는 말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다.

더 이전의 옛날에는 윤회와 같은 이교적인 관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예 머릿속에 자물쇠를 채워야 했다. 만약 겁도 없이 윤회론을 지껄이고, 심지어 윤회론을 기독교 교리와 똑같이 지적 탐구의 대상에 올려놓는다면 그 사람은 불명예의 낙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감옥행이나 죽음까지도 면치 못했다. 교회와 성서가 정통이라고 인정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의문을 품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걷잡을 수 없이 변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통적인 교리가 못박아놓은 것을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하고 떠받들고 있지만, 이제 그러지 않는 사람의 수도 만만치가 않다. 우주시대의 숱한 발견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어떤 영역에서는 제 구실을 못하며 또 어떤 부분에서는 철저히 무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성서가 그것을 베끼고 해석한 사람들과 정치적인 성직자들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최초의 내용과 멀어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리 시대에 비해 사고의 제약이 훨씬 심하던 시대에 만들어졌으므로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진정한 영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되었다.

나아가 아예 넌더리를 내며 종교란 종교는 죄다 무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것은 그들이 종교가 썩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착취만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보릿겨 더미 속이라도 잘 여문 알곡 몇 톨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른바 과학정신의 특징인 열린 마음과 호기심을 갖고 종교적인 신념에 접근하고 있다. 신도들에게 지옥론과 윤회론을 동등한 이론으로 생각하고 각각의 장점을 저울질해보자고 제안한 목사의 경우는 이러한 태도를 대표할 만하다.

이렇게 특별한 인류 역사의 전환점에서,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론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결코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다른 생물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일상의 행위, 사적 또는 공적으로 내리는 결정들, 그렇게 해서 짜이는 우리의 운명과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의 운명은 바로 우리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보느냐 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천국이나 지옥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죽고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은 널리 받아들여진 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그리고 지식인들은 이러한 설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의 초점을 앞서 목사가 제기한 문제에 맞추고 싶다. 윤회론을 기독교인들의 사고에 뿌리박힌 지옥론과 비교하고 싶은 것이다.

불과 심판이 있는 지옥이라는 영원한 장소가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각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고 지옥론에 저항해왔다.

흔히 생각하듯 신이 '사랑의 신'이라면 어떻게 한 영혼을 여원한 고통의 구렁덩이로 보내버릴 수가 있겠는가? 어떤 어머니가 이토록 몰인정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이 어머니보다도 동정심이 없단 말인가?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지옥의 불과 유황에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기본적이고 정말로 중요한 모순들을 몽땅 무시해버리고, 지옥과 천국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꽤 심각한 난점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민다. 윤리학적이고 심리학적인 탐구정신을 가지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다 보면, 우리는 먼저 '선택'이라는, 좀더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심판'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죽은 뒤에 아무개는 어디로 가게 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동양의 우화 중에, 스승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던 한 원숭이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스승이 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침 파리들이 날아와 잠을 자고 있는 스승의 얼굴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원숭이는 '저 파리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놈들은 스승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땅바닥에 있던 커다란 나뭇가지를 집어 스승의 이마를 힘껏 후려쳤다. 파리들은 몽땅 죽었다. 그리고 그의 스승도 죽었다…

그 원숭이는 스승에게 지극히 충실했다. 스승에 대한 배려가 지극히 깊었다. 지극히 자상했다. 그리고 지극히 어리석었다…

흔히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이와 같이 상식이 부족해서다. 물론 선한 동기는 악한 동기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동기가 자칫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불행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 베드로가 천국의 문 앞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어떻게 그 인간의 영혼을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원숭이처럼 선한 의도를 갖고 있지만 비참한 실수만 연발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말이다. 그 영혼의 선한 의도를 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초래한 불행한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하는가?

선한 의도를 보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해야 한다면, 천국은 온통 선한 의도를 가진 수백만의 바보로 넘쳐흐를 것이다. 이들은 선한 의도에 행동까지 지혜로운 영혼들에게는 함께 있기 괴로운 동료들일 것이다. 반대로 결과를 보고 인간의 행위를 심판해야 한다면, 수많은 순수한 영혼들, 즉 때묻지 않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실수만 연발하는 영혼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길과 유황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것이 확실히 불공평한 운명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론이 직면하게 되는 기본적인 윤리적 어려움의 하나로,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인 신앙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냥 넘겨버릴 수 없는 난제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더욱 가공할 어려움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필수적인 자질이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천국에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그 친절은 정확히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알다시피 사람들은 자신이 어머니에게는 친절하지만 낯선 사람들에게는 불친절하다. 만일 낯선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다면 그것은 자기와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에 한해서다. 아니면 사람에게는 대개 친절하지만 고양이나 다른 동물들을 학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해도 오직 그 행위가 자신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을 때에 한해서만 그렇다.

천국의 문을 지키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온갖 등급과온갖 색조의 친절이 가슴 속의 여러 심성들과 진흙탕처럼 뒤엉켜 있는 우리 인간들보다는 확실히 더 예민해야 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가 공평하고 한결같은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판단할 어떤 기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천국행을 결정하는 저울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심리학자들의 저울을 빌리면 어떨까. 즉, 각 개인의 미덕에 등급을 매겨서 0점에서 10점까지의 점수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베푼 친절이 여느 등급에 해당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겠는가? 1, 2, 3, 4점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최소한 5점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중간 정도의 친절), 친절 점수가 5점인 사람은 점수가 6, 7, 8, 9, 10점인 동료들보다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다소 찜찜할 것이다.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때문에 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좌절감과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문제를 심리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금방 성 베드로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직무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국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된 기록들, ibm 카드 시스템, 정밀 저울, 컴퓨터 따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누구는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고 누구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 심판들은 아무리 예민한 기준으로 평가했다 하더라도 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은 육체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오직 두 가지 대안밖에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복잡하고 정도나 단계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그것을 다 수용하려면 그와 똑같이 복잡하고 단계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다.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을 세번째 대안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복잡한 본성을 다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극작가나 소설가라면 누구나 복잡미묘한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기 마련이다.

모든 인물을 선인과 악당으로 가르는 것은 삼류 영화나 TV멜로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은 어린아이의 눈에만 그럴듯하게 보일 뿐, '우주를 쓰는 작가', 즉 하느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복잡하고 단계 또한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거기다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원인까지 한몫 단단히 거들 고 있는 형편이다. 그 원인들의 역동적인 작용에 따라 현재의 내가 만들어진다. 유전 요인, 인간성, 문화적 배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라면 이런 문제들을 심리학적으로 통찰해야 하지 않겠는가?

슬럼가에 사는 타락한 알코올중독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다 자랄 때까지 글자도 깨치지 못한 사람은, 교양있는 가정에서 훌륭한 시민의 책임을 다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보다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모든 문제를 감안하고 나면 지옥론은 천국론과 더불어 우리의 이성적인 정신에 실망만을 안겨다줄 뿐이다. 비록 사람들에게서 겁을 주어서 착한 행동을 하게 하는 장점은 있다손치더라도…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과 운명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여기 고대로부터 내려온 개념이 있다. 놀랍게도 현대에 와서 문학과 철학뿐 아니라 마음을 다루는 실험을 하는 중에 불쑥 재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윤회에 대한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생각이며, 천국 지옥론과는 달리 이론을 실증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증거도 확보하고 있다.

윤회론은 인간의 영혼이 오랜 세월동안 연속되는 생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화를 한다는 이론이다. 진화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윤회론 역시 타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윤회론은 다음의 두 가지 주장을 통해 기존 진화론의 지평을 확장한다.

첫째, 외적 형태뿐 아니라 의식도 진화한다. 둘째, 각 생명체는 종의 진화만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진화도 한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는 그 신체적인 구조가 진화할 뿐 아니라 심리적이고 영적인 요소도 진보한다는 말이다.

윤회는 물리학의 법칙과 똑같은 어떤 일정한 법칙 아래서 작용한다.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카르마 또는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이다.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전생에 지니고 있던 성격상의 장점과 단점에 상응하는 유전적인 성향을 물려받으며, 또 그런 성향에 알맞은 일련의 상황들이 갖춰진 어떤 삶 속으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인도의 속담 그대로, '인간은 자기가 만든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어떤 영혼이 비록 선한 의도에서였다고는 하지만 실수만 연발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치자. 윤회론에 의하면 이 영혼은 유황 냄새 고약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지지 않는다. 그 대신 지구로 다시 보내져서 자신이 도리어 누군가가 저지른 어리석은 실수의 피해자가 도미으로써 어느 정도까지가 상식적인 행동인지를 깨닫게 된다. 아니면, 다시 삶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에 부딪치고 그것들을 극복함으로써 점차 더 낭느 판단을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음이 친절한 정도나 어떤 성격상의 다차원적인 특성은 절대로 이원적인 잣대로 잴 수가 없다. 처음부터 양쪽에 불공평한 무게가 올려진 한 대의 접시거울로 영원한 심판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윤회론은 인간의 정신을 점진적으로 성장해가는 의식의 특정한 단계로 보며, 모든 성장하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미래는 바로 현재의 성장 상태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윤회론은 천국, 지옥론과는 달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질과 능력에 맞게 자신을 조금씩 펼쳐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윤회론은 복합성과 다양성, 그리고 원인을 고려한다. 논리적인 궁지에 몰리거나 윤리적인 못누을 낳지도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터무니없는 부조리도 초래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윤회론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운명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든 가능한 이른 중에서 가장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특히 기독교 세가 강한 서양에서 윤회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약간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윤회론이야말로 정통 기독교의 교조적인 교리보다는 훨씬 덜 미친 듯한 주장인데도 말이다.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만 보면 윤회는 알코올에 비교할 수 있다. 누군가가 술을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술은 감기를 낫게 하는 좋은 치료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가장 유쾌하게 실패하는 치료제는 된다." 인간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하는 회의주의자들이나 유물론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죠. 그럼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당신 말대로 윤회론이 이론으로서 실패한 것이라면, 적어도 그것은 가장 합리적으로 실패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윤회론의 타당성을 지지해주는 요인은 합리성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서구의 수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윤회론이 지닌 합리성만을 보고 윤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금세기에 들어서 윤회론을 실증해줄 만한 상당한 증거들이 나타났다.
 


전생에 대한 실제적 증명 
  
현대 심리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로 인간의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인정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무의식을 온갖 기억들이 모여있는 쓰레기장으로 본 것처럼, 서구의 과학이 정립한 무의식이란 일개 기억의 '대용량 저장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온갖 트라우마와 유아기의 성적 결핍이 모여있는 것이 프로이트가 이해한 무의식이었다.

반면, 프로이트를 박차고 나온 신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인, 알프레드 아들러와 칼 융은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독자적인 주장을 해왔다. 아들러의 경우는 보다 유물론적으로 의식의 힘이 크다는 것을 주장해왔고, 칼 융의 경우에는 '집단 무의식'의 개념을 (개인) 무의식에 추가하여 인간정신의 원형은 바로 무의식에 있다고 역설해왔다.

이것은 프로이트와는 각도가 완전히 다른 의견이었다. 칼 융의 주장 또한 현대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문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으나, 이 포스트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그의 철학이 더 [보편적 진리]에 가까워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각, 무의식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나머지 부분이라 했고, 융은 의식을 바다에 떠 있는 섬, 섬을 제외한 나머지 바다가 무의식이라 했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평생을 두고 반복된다고 했고, 융은 태고 때부터의 경험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기억이나 의식에 없는 것을 무의식으로, 융은 거기에 더해 태고 때부터 지금까지 내 기억이나 의식에 없는 것을 무의식으로 본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융은 창조적인 것으로 봤다.

우리가 '전생'이라고 하는 흔히 매스미디어에서 흥미거리로서 다루는 것에 불과한 주제를 더 심도있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바로 인간의 근원이 담겨져있는 이 무의식의 비밀을 이해해야만 한다. 인간이 의식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영속하며, 무의식으로서 근원과의 유지를 끓지 않는 것은 인간의 물질과 정신 모두를 유지하는 것과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음이 들어날 것이다.

증거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여기서는 증거를 가득 실도록 하자. 단지, 내가 제시하는 증거란 꼭 실험실에서 원자들을 분석하는 실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야기를 진행해감에 따라, 무의식이 왜 중요한 키워드인지 언급하게 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천성 
 
먼저 가장 일반론적인 미스테리에서부터 차츰 영역을 넓혀나가보도록 한다. 우리의 천성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있다면 어떻게 똑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는 이란성 쌍둥이들과 형제자매들은 왜 그토록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각각의 인간의 개성은 아주 유아기 때 초기부터 발견된다.

아기가 커감에 따라 울음소리나 행동양상만 주의깊게 살펴봐도 그들이 본래 내향적인지, 외향적인 성격인지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천성을 단지 DNA 구조의 결과로 보기에는 모든 인종, 인류, 문화집단의 개성이 뚜렷하다는점에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이것은 "DNA 염기배열 자체는 어디에서 유래됬는가?" 하는 생명의 본질적인 기원에 대한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물론 심리학자들은 일란성 쌍둥이의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양육되었다 해도, 그들 쌍둥이들이 놀랄 정도로 비슷한 성격과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윤회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 일란성 쌍둥이들이 유전학적, 정신적으로 모든 면에서 흡사한 것은 그들이 영혼이 비슷한 '트윈 소울'이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입증할 근거는 희박하지만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영혼이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며, 아주 오래 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사람마다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훨씬 쉬운 설명이 되어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유전자 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약 2만 5,000개에 불과하며 이는 아주 극히 적은 숫자이다. 생명공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적어도 10만개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던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는 풀 종류인 아기장대나 C. 엘리건스라는 선충과 비슷한 수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이처럼 적은 수의 유전자를 갖고 어떤 생물체에도 뒤지지 않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진화론도, 그 어떤 이론도 이 미스터리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결국 요는, 23쌍에 불과한 DNA가 생명의 다양성을 이토록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매일 보는 동식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론적인 추산만으로도,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곤충은 무려 80만 종이며, 그 밖에 살아 있는 생물은 약 25만 종에 달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소수라 한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생명체를 다 합하면, 아직은 대부분 분류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무려 500만 종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생명의 다양성이 단지 몇 가지 유전적인 코드의 배열에 의한 것으로 설명이 될까? 
 
 
기시감
 
기시감은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데자뷰(Déjà Vu)라고 한다. 이것은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무의식 속 문제라고 한정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데자뷰는 그저 기억의 착오 현상일 뿐이다. 이 문제는 천성에 대한 문제에서 한발 더 나아간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왜 인간은 어릴 적부터 특정한 국가나 종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까? 그것을 순수하게 환경적인 것, 또는 DNA적인 구조로만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나의 경우만 봐도, 나는 스스로가 전생에 주로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살았다는 확신이 있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 문화가 상당히 낯익기 때문이다. 반면, 아프리카 문화는 현대문화가 소수민족들의 문화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감안한다해도, 낯설기 짝이 없다.
 
 
동성애
 
동성애의 인권적 문제는 아주 분명하다. 왜냐하면 근래의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동성애란 '본질적'으로 자연발생적이지,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후천적으로 동성애자들이 된 사례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의 경우는 선천적으로 이미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회를 믿었던 플라톤이 기술한 '영혼의 짝' 개념을 상기해볼 수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먼 옛날의 신화 세계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옛날에는 세계가, 남자와 여자가 오늘날같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남자와 남자가 또는 남자와 여자가, 그 밖에도 여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등이 맞붙어 있어서 서로 마주 보지는 못하고, 서로 등짝이 딱 붙은 채 살아가는 세 종류의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애당초 인간은 오늘날과는 달리,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붙어 있게 만들어졌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모두 만족하고 아무 탈 없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칼을 써서 그 모든 사람들을 반쪽씩 두 사람으로 갈라놓았다. 모든 사람을 두 조각으로 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칼에 맞아 생긴 일직선으로 된 흔적이 등짝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요행히 제대로 자기 짝을 찾게 되면 해피엔딩의 사랑이 되지만, 영영 찾지 못하거나 찾았다 싶어 결합했는데 아니다 싶으면 다시 영원한 이별이 된다.

그 결과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만이 있게 되어서, 사람들은 원래 한 몸으로 붙어 있던 반쪽을 찾아 우왕좌왕하면서 인생을 보내게 되었다. 매력적인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 사실이기도 하다.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을 부정하는, 동성애를 악으로 보는 가장 전형적인 논증이 윤리학적 논증이다. 칸트에게 동성애는 종의 번식이라는 자연의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에 부도덕한 행위였다. 이 논증은 "남녀가 짝을 짓는 것"이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논증과는 달리, '종의 번식'이라는 목적으로 동성애의 부도덕성의 주장을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간학적 특징을 띤다.

호모포비아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들의 악감정에 근거를 주고 싶을 때 흔히 사용하는 논증이 바로 이것이다. 즉 동성애는 '종의 번식'이라는 인류의 목적에 위배된다. 따라서 동성애의 확산을 허용했다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존속을 위해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금지되어 마땅하든 얘기다.

소위 '자연주의적 논증'이라 부르는 이 주장은

(1) 먼저 동성애가 마치 "선택의 문제"인 양 착각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동성애는 결코 행위를 선택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성향의 문제다.

아울러 이 견해는 (2) 종의 번식이라는 '류'의 목적을 곧바로 '개인'의 목적으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라는 개인이 '인류의 존속'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아가 (3) 자연의 목적, 즉 종의 번식에 복무하지 않는 성행위를 모두 부도덕하다고 주장할 경우, 쾌락을 위한 성, 다양한 종류의 피임, 종교적, 세속적 이유에서 행해지는 독신 등도 마땅히 부도덕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의 교리에 근거한 판단 또한 반자연적이다.
 
사실 인류역사, 아니 서구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다수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동성애를 윤회론적 또는 선천적 증거로 보는 데 심정적으로 유력한 방법론이다. 고대 서구철학의 대표격이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미소년을 찬미하는 동성애자들이였고(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동성애를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으로 보았다), 중세 '르네상스'의 역사를 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또한 동성애자들이였으며, 근대 철학사를 새로 쓴 버트런트 러셀과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 역시 동성애 관계였다고 보여진다.

이밖에도 동성애 문인들로는 안데르센, 앨리노어 루즈벨트, 앙드레 지드, 마루셀 프루스트, 트루먼 카포티, 버지니아 울프, 미셸 푸코가 있고 음악가로는 바그너, 슈베르트, 차이코스프키, 번스타인이 있고, 행위예술가로는 앤디 워홀, 지아니 베르사체, 루돌프 누레예프를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로 거론할 수 있다. 공학과 수학 쪽으로도 컴퓨터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과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존 내쉬 주니어를 예로 들 수 있다.  

간호사로는 나이팅게일이 있었다. 현대의 연예인들 중에서도 제임스 딘, 록 허드슨, 리처드 버튼, 알랭 드롱, 제임스 딘, 타이론 파워, 앨턴 존, 프레디 머큐리 등은 자신이 동성연애자들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혔으며, 토니 커티스, 버트 랭카스터, 율 브리너, 로버트 와그너, 말론 브랜도, 엘비스 프레슬리, 톰 존스, 빅 모로,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실베스터 스탤론 등은 비밀스럽게 거론되는 이름들이다.
 
유명한 서구 동성연애자로는 아르튀르 랭보와 폴 베를렌느,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라스, 장 콕토와 레이몽 라디게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굉장히 어린 나이부터 인생과 문학에 대해 조숙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 역시 동성애자들의 지능이 높다는 하나의 예시라 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동성애자들이 일반인들보다 지능이 높다는 일반론적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로스차일드가의 당주, 빅터 로스차일드의 경우에도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또한 재미있다. 사실 카이사르나 알렉산더 대왕, 또는 고려의 공민왕이 동성애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 탁월한 군인들 사이에서의 동성애 현상이 있었음이 명백해진다.

1960년대부터 동성애에 대한 세간의 흐름이 관용적이 된 것도 빅터 로스차일드의 재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음모이론가인 데이비드 아이크에 따르면, 이러한 동성애와 순수 혈통 가문 유지 전통이 있는 국제유태자본의 경우, 체제 유지를 위한 악마적 의식을 위해 동성애를 하는 풍속이 있다 한다.

미국 해병대에서 대령 이상으로 진급하려면 거의 대부분 동성애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군인으로서 약한 여성보다 강한 남성을 좋아하는 심리도 수긍이 간다. 예일대의 Skull & Bones와 프린스턴대의 Cap and Gowns와 같은 비밀 단체에서 미래의 지도급 인사들을 양성(마인드 컨트롤)하고, 동성애에 눈을 뜨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나치 독일의 고위인사들의 동성애 전통이 미국으로 유입되어 엘리트계층의 상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CIA의 MKUltra 세뇌 프로젝트에 희생당했던 Cathy O'Brien가 <The Trance-formation of America>라는 책에서 폭로했다. 설령 이러한 이야기가 가설에 불과할 뿐이라 해도, 정녕 당신은 이들 기득권의 일부가 되고 싶은가?
 
어찌 되었던 20세기가 서양의 세기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많은 재능있는 인물들이 서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계획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동성애가 보편적이고 선천적인 현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화를 들여다보아도 좋다. 동양에서도 동성애 전통은 있어왔다. 가령 명나라 시대 때는 연동(주로 관리를 항상 따라다니며 일을 보던 문지기로, 명나라 중기 이후에 나이 어린 연동으로 바뀌어서 주로 남총을 겸하여 주인의 성적 오락의 대상이 되었다)과 소창(술자리에서 놀이 상대가 되어 어울려 노래하며 동성애 행위시 수동적인 배역으로 충당되는 남창 역할을 하였다)이 개인과 귀족들 사이에서 흥성하였다.
 
동성애는 인간들 사이뿐만의 현상이 아니라, 펭귄들을 비롯하여 자연계 전체에서 관찰되는 흥미로운 특성이다. 즉, 인간의 영혼이 정기신(精氣神)의 삼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이 맞다면, 플라톤이 말한바와 같이 이 세상은 삼단계의 성적 기호(즉, [남자-남자], [남자-여자], 그리고 [여자-여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아가 동성애의 선천성과 보편성은 단순한 유전학적인 성적 호르몬의 차이로 보기에는 그 근원적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으며, 인간영혼의 윤회론을 도입하면 문제가 쉽게 풀린다. 인간은 자기 영혼을 진보시키기에 적합한 환경, 즉 남성으로도 태어나고, 여성으로도 태어나며 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칼 융이 말한 것으로, 남성의 내면에는 고유의 여성성이 내재해있고, 반대로 여성의 내면에는 고유의 남성성이 내재해있다)는 바로 이것을 은유로서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우주의 카르마적 관점에서 보자면, 만약 어떤 남성이 평소에 여성을 하찮게 여겼다면, 후생에 그 남자는 여성으로 태어나 차별받고 살 가능성이 있다.
 
 
선천적 천재와 영재
 
공립과 사립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학급 내에서 성적의 서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 서열은 학급 내에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교로 확대되어 석차가 정해진다. 나는 암기식 공교육에 아주 많은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서열이 제대로 인간의 지능을 적용한다고 보지 않는다. 단지 일체의 제도권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단기간의 암기를 얼마만큼 잘 하였는가] 하는 것을 측정할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러한 석차의 차이를 기억력의 차이로 단순화하여 말하는 편이 주제를 설명하는 데 보다 용이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 사람들마다의 지능차이와 기억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어떤 학생들은 자신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비상한 기억력이나 지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큰 주눅이 들게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천재나 영재가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를 물을 수 있다. 가장 한심한 과학자들이 잘 써먹는 방법이 바로 '유전자의 작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과학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진화론과 같이 그들은 인간의 천성, 성적 기호 그리고 뚜렷하게 다른 재능들을 '유전자' 하나만으로 쉽게 다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유물론적 과학자들에게 "왜 남자와 여성의 비율은 50:50에 가깝게 만들어져있는 것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왜 우주가 균형법칙을 유지하려고 하는 지는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냥 유전자가 그렇게 만들었겠지."하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근본적인 미스테리는 왜 하필 남성과 여성의 출산비율이 거의 동일하게 조절되게끔 유전자가 만들어져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학자 프레드 호일의 지적과도 같이, 과학자들은 '어떻게'를 설명하지만 '왜'는 묻지 않는 것이다. 우주는 빅뱅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과학자들은 그저 어물쩡거릴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에 뚜렷하게 존재하는 재능의 차이, 그 극단적인 경우로서, 거의 한 학급에 한명 정도는 있는 기억력이 비상하게 좋은 학생이 왜 발생하는지 유전자로는 답을 알 수 없다. 왜 전 시대에 몇 명 정도는 손꼽을 수 있는 각 분야의 천재들이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우연에 의해서 특정한 돌연변이들(선천적 천재들과 영재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음악가 모짜르트의 경우는 6살 때부터 작곡을 해왔다. 이러한 답답한 문제 또한 윤회론을 대입하면 어느정도는 쉽게 풀린다.

인간은 윤회를 하며, 언제나 소수의 인류가 진보를 해왔기에, 언제나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월등한 사람들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병자들의 비율이 역사적으로 일정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공평무사하게 본다면, 이들의 이런 능력 또한 전생에서부터 습득한 환경적인 결과일 뿐이지, 완전히 타고났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는 그러면 이러한 예를 뒷받침해줄 몇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일 좋은 예가 언어학적 천재들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가령 영국 <더 선>지에 따르면, 10세 타이완 소녀가 10개 언어를 구사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런 류의 기사는 심심할 때면 나타나기 때문에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기사를 인용해본다.

보도에 따르면 이 소녀는 타이완에서 태어난 후 영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현재 영국 스톡포트시의 그린뱅크 예비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처음 영국에 갔을 당시에 이미 중국어, 일본어, 영어 세 개 언어와 중국의 방언 민난화(闽南话)를 구사했다.

이 '언어 천재' 소녀는 또한 총 5000명의 학생이 참가한 스톡포트시에서 열린 말하기 대회에 참가해 언어 지식 테스트와 새로운 언어 학습 능력을 테스트 받았는데, 몇 주 안에 루간다어를 배우는 도전에 참가해 루간다어를 배웠다. 이 소녀는 예선에서 이미 카자흐어와 포르투갈어를 습득했다. 이 소녀는 그 밖에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씩은 구사할 수 있다.
 
이것보다 더 극적인 사례도 있다. 4살 나이에 13개 국어를 하는 천재소녀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기네스기록협회는 "인도의 한 도시에서 13개의 언어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소녀가 발견됐다"며 "놀라운 것은 이 소녀의 나이가 겨우 4살인 것이다"라고 전했다. 남 샬리니라는 이름의 소녀는 자국의 주요 언어인 힌두 어와 타밀어, 말라얄람어, 칸나디 어 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알파벳을 읽고 쓸 수 있다. 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루두 어에 공용어인 영어도 가능하다.

샬리니의 언어적 능력은 2살 때 발견됐다. 샬리니의 어머니가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아주 짧은 시간만 지나도 글을 읽고 썼던 것이다. 샬리니의 모친은 "아이에 언어를 한 번 알려주면 7시간 안에 글을 익혔다"고 전했다. 샬리니의 부모는 아이의 능력을 적극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과외 수업을 가르칠 만큼 넉넉치 못한 샬리니의 부모는 인터넷을 통해 다른 나라의 글자를 프린트해 샬리니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선천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10세 이전의 천재적인 언어습득 기능은 기존의 언어학적 이론으로도 쉽게 설명이 안되며, 그렇다고 노엄 촘스키의 '보편언어'설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반론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소녀의 잠재무의식이 다른 언어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고 말할 수 있거나 소녀의 언어학적 기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비상하게 발달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MRI나 fMRI를 통해 입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교회나 뉴에이지 그룹에서 전생에서 습득한 것으로 보이는 방언과 고대어를 내뱉은 사례들이 많이 기록된 것처럼, 몇 가지 사례들은 유전학적으로, 뇌과학적으로도 도저히 증명이 안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차린 소녀가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대신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인터넷 판이 보도한 기사다. 이 신문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남부 크닌이란 마을에 사는 한 소녀가 최근 학교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꼬박 하루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혼수상태에 빠졌던 소녀는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소녀는 유창한 독일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발음과 문법까지 완벽한 독일어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소녀가 자신의 모국어인 크로아티아 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소녀는 의료진과도 독일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소녀의 부모에 따르면 소녀는 학교에서 독일어 수업을 들었으며 쓰러지기 전 독일어 책을 읽고 독일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등 어느 정도 독일어를 할 줄은 알았으나 절대 지금과 같은 유창한 원어민 수준은 아니었다고 알려졌다.

예전에도 의학계에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환자 중 극소수가 평소 사용하거나 들어본 적도 없는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례가 종종 보고된 바 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고대 이집트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되거나 포르투갈의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방언을 그대로 흉내 내는 사례가 있었다.

정신분석학자 미조 밀라스 박사는 "예전에는 이런 현상을 기적으로 치부했으나 의학계는 이런 현상에 어떤 과학적 설명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면서 결국 의사들이 대답을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가장 초반에 언급했던 인간 무의식에 저장된 모든 기억의 개념을 상기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범한 의식이 아닌 어떤 특수한 계기를 통해 지각하게 되는 무의식에 우리 영혼의 모든 기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방금 예를 든 사례는 기존의 의학계의 설명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 아이가 독일어를 접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한 증거로서 이야기될 수 있다. 오직 인간은 전생윤회를 하기 때문에, 영혼 자체는 그 기억을 내면에 간직한 채, 계속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저 크로아티아의 아이는 전생에 독일인으로 살거나, 독일과 인접한 유럽권 국가에 살았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극적인 효과를 주는 언어학적 사례들을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동일한 무의식적 원리가 모든 천재들에게 적용된다. 일류의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종종 평범한 의식이 아닌 모든 기억들이 저장되어있는 원천인 무의식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사례들을 많이 이야기한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로 평가받는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존 레논 그리고 일본의 히사이시 조는 모두 영감과 직관의 중요성을 말하고 거기서부터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명작들이 나왔음을 이야기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OST를 만들며 '3관편성(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파고토 각각 2개씩의 기본형에 파생 악기를 곁들인 것)'의 풀 오케스트라 곡을 열흘 만에 11곡이나 만들어낸 기적을 히사이시 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작곡은 신이 내 몸속에 들어왔다고 여길 만큼 이상적인 작업방식 속에서 이루어졌다. 단 매번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어투의 말들은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음악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고, 과학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상상은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으며, 현대문학가 중 최고로 평가받는 프란츠 카프카도 <시골의사>라는 단편을 쓰며 "앞으로는 이렇게 영감을 받아 똑같은 작품을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한 바 있으며, 일본 최고의 문인인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미지를 연상하며 글을 쓴다고 에세이에서 밝힌 바 있다.
 
거의 모든 일류의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경험해보본 이 '무의식의 힘'은 인간 정신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하나의 개념이란, 이 우뇌의 무의식에 모든 의식의 근원이 있고, 모든 영감의 원천이 있으며, 윤회의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앞으로 갈수록 계속 반복될 중요한 명제이다.
 
 

윤회의 두가지 증명 방법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상적 대화'의 형식을 탈피하여, '학문적 틀'을 통해 어떻게 윤회를 증명할 수 있을지를 고찰해본다. 나는 이것을 문명비판론의 과학철학론에서 다뤘다. 가장 주요한 두가지 방법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첫번째 방법은, 직접적인 무의식의 계발을 통해 윤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객관적 정신에 이르는 것이므로, 자기 스스로가 증명의 심판자가 되어야한다. 물질세계에서 설령 깨달음을 얻은 요기의 뇌파를 측정한다 해도, 뇌파측정기인 EEG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인 랄프왈도 에머슨은 천국이 하늘에 있는 신비로운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완벽한 의식의 상태'라고 정의했듯이, 형이상학적 체험을 형이하적인 방식으로 묘사할 수는 없다. 체험만이 가장 확실한 답이 될 것이다.
 
두번째 방법은, 물질세계에서 정신 조차 물질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는 환원주의적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윤회나 인간정신의 비일상성에 대한 연구가 전 세계적으로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각기 다른 역사적, 자연과학적 토대들의 보편성을 연구하다 보면 정신적 공통분모가 발견될 것이고, 그것이 곧 편협한 주관의 믿음에서 벗어나는 객관적 진리에 이르르는 길이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 주관과 주관 사이의 공통성)' 연구라 하도록 한다. 영어권에서는 상관분석(Correlation) 연구라고 종종 말한다.
 
이러한 간주관적 개념을 두루 살펴보면 보면, 윤회는 지난 역사동안 오랫동안 고대인들의 신념 체계를 형성해왔다. 그것을 단순히 공포를 두려워하는 원주민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볼지, 아니면 진정한 진실로 볼지는 아직도 더 연구해야할 사례가 있으니 확정짓지는 않도록 한다. 문제는, 사람들은 흑백논리에 익숙해져 있어서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다룰 간주관적 연구는 [역사적 연구], [인문학적 연구], 그리고 [자연과학적 연구]로 한정하도록 한다.
 
 
역사적 연구
 
윤회론은 거의 모든 고등종교와 원시종교,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리로서 발견된다. 먼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윤회와 카르마라는 개념은 사실 불교 전통의 교리가 아니라, 드라비다 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윤회론은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쿄, 조로아스터교, 티베트 밀교, 일본의 신도, 중국의 도교 등 수많은 아시아 종교들의 주춧돌이다.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집단들, 예컨대 아프리카 부족들, 아메리카 원주민들, 신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들, 플리네시아의 카후나(주술사)들, 브라질의 토속종교 옴반다 신도들, 갈리아족, 드루이드(켈트족의 사제) 등에서도 유사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파타고라스, 오르페우스, 플라톤 등의 중요한 학파들이 이런 믿음에 동의했다. 에세네파, 바리새파, 카라파, 그 외 여러 유대-반 유대 집단들도 윤회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한 윤회는 중세 유대문화의 카발라 신학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신플라톤주의자와 영지주의자,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지학회 회원들, 인지학회 회원들, 그리고 일부 영성가들도 전부 이 목록 안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교에는 윤회 신앙이 없지만, 초기의 교인들은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성 제롬(340~420)에 따르면, 윤회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선택된 엘리트들만 접할 수 있었던 비전의 가르침이었다. 1945년에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를 통해 잘 알려진 영지주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윤회 신앙이 절대적인 요소였다.

<신앙의 지혜>로 불리는 영지주의 문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한 생에서의 실패가 어떻게 다음생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한다. 요컨대 다른 사람들에게 욕지거리했던 사람은 새로운 삶에서 "마음에 근심이 끊이지 않게"되고, 거만하고 방자했던 사람은 불구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밖게도 초기의 기독교 경전, 또는 신비주의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윤회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예수의 말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성경>의 초기 기록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단지 흑백논리에 입각하여 신도들에게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가면, 불신하면 지옥에 간다는 교리는 유치하여 초등학생들도 믿지 않는다. 진리에 기반하지 않은 현대의 기독교는 그러므로 교리에 기반해 있으므로, 윤회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들의 유일한 교리를 담은 경전인 <성경>에 어긋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형력과 공평성에 기반하여, 우주가 '카르마'라는 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각기 책임감을 갖고 살게끔 한다고 믿는 것은 그 자체로 고등적인 종교적 교리가 아닐 수 없다.
 
카르마를 믿는다는 것은 곧 인류의 역사 또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순환하는 역사였다는 것을 전체적론적인 시야에서 이해하게한다.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 또는 카르마가 적용된 예를 보자. 먼저 신사적이고 예의범절에 까다로운 나라로 대다수 사람들이 인식하는 영국의 과거를 보면 대단히 야만적이었다. 영국의 역사를 공부해보면 금방 왜 그렇게 영국인들이 신사적이고 예의범절에 엄격할 수밖에 없었는는지를 알 수가 있다. 본래 영국에는 이베리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몸에 그림이나 무늬를 그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몸에다 그림 그린 사람'이란 말인 '피테아스'가 전파되었는데, 여기서 영국의 이름이 유래한다(내 편견일지는 몰라도 벌써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야만적이다). 영국의 초기 거주인들인 이베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영국에 뿌리를 내딛은 이들이 바로 켈트족들인데, 이들이 현재의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방의 거주민들이다.

켈트족들은 사실 영국의 전지역에서 거주했는데, 이들이 이런 지방으로 쪽박난 까닭은 바로 야만적이고 난폭하기로 소문한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앵글로색슨 족은 데인족, 노르만족과 함께 현재의 잉글랜드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데인족은 783~793년 포악하기로 유명한 덴마크 지방의 바이킹이 침입한 이후 들어온 민족이며, 노르만족은 프랑스에 합법적으로 얹혀살던 덴마르크의 다른 바이킹들의 1066년 영국침략에 의해 다시 한번 섞이게 되었다. 결국 잉글랜드 본토에 거주하는 이들은 야만족끼리 죄다 섞인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영국의 앞선 예의범절도 조상의 난폭한 성질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영국에 최초의 의회와 민주주의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도 워낙 이 나라가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나라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최초의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영국은 아직까지 노동자 계급, 중산층 계급, 상류 계급 등이 구분되어 있어서 암암리에 끼리끼리 모여산다. 비근한 예로 영국에서는 같은 장소라도 계급마다 사용되는 화장실의 어휘가 다르며, 대중술집은 pup이라 불러 각 계층마다 자리가 나뉘어져 있다.

영국의 술집은 가장 난폭한 축구팬인 훌리건의 고향이며 전세계를 휩쓸며 가장 난폭한 술주정을 하기로 유명한데, 그런 나라가 '신사의 나라'로 불리우니 웃기는 일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라틴족과 켈트족 게르만족으로 섞인 민족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오래 전부터 하나의 단일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갈리아-로마 문화로 융화된 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단합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초기부터 왕들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오로지 귀족들만이 출세의 길을 달릴 수 있었고 평민들은 출세의 길이 막혀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에 반목이 생겨 오랫동안 불평등한 사회를 겪어왔으므로, 1789년 프랑스의 대혁명은 이러한 오랜 억눌림의 역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즉, 프랑스에서는 왕이 너무 강력하여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호강을 누리다가 혁명을 겪게 되나 영국에서는 왕이 약한 까닭에 귀족을 누르기위해 젠틀맨, 요먼을 키워 계급 사이에 반복이 생기지 않아 혁명을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그 모든 혼란과 억눌림과 민중의 고통이 종식된 후 뒤늦게 평등 사상이 싹튼 것이었다. 영국 또한 처음부터 신사적이고 예의범절이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워낙 난폭한 기질을 가진 조상들과 항시 혼란스런 시국 정세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면, 동양에서는 비록 가부장적이고 진부한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다고는 하나, 질서와 조화를 중시여겨 몇백년 동안 왕조가 유지된 적이 비일비재했다. 결국 그러한 것이 종국에 가서는 허울만 좋은 관료주의를 싹트게 했고, 탐관오리들로 인해 나라를 병들게 했지만 말이다. 

해서, 서양인들이 콧대를 높이며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할 때는, 역시 우습게 느껴진다. 14세기 이전까지는 서양이 동양보다 못살았으며, 결국 서양 사회에서 합리주의 철학이 싹틀 수 있었던 것도 중세 이슬람의 도움이 크기 때문이다. 문화의 상보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서양사 자체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모든 것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이치가 따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나고 좋은 제도는 없다. 서양인들이 왜 그렇게 깨끗하고 향수를 좋아하는 민족인지도, 역사에서 그 기원이 유래된다. 유럽 사람들은 중세부터 근래까지 목욕을 풍기문란의 온상으로 보아 하지 않았고(745년 성 보니파스가 금지령을 내렸다) 그대신 향수가 발달하여 악취를 제거할 수 있게된 것이다. 

그럼으로 인류의 역사는 카르마의 작용(작용과 반작용)으로 도덕적, 정치적으로 막판을 달리는 문명은 새로운 문명으로 엎어진 역사의 반복이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믿음처럼, 세계사는 절대정신(이성)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고, 카르마는 그 주요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야만적인 문명이 다시 진보한 문명이 되고, 진보할 필요를 못느낀 '이미' 진보한 문명은 몰락하는 순환의 반복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순환론적, 또는 윤회론적으로 역사를 보는 법이다. 다음의 글을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학문적 접근과 함께 보면 유익할 것이다.
 
 
인문학적 연구
 
이제 인문학적 연구로 와서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윤회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는 순수하게 전생윤회에 대해서만 고찰해보도록 한다. 
 
앞서 나는 전생윤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인류문화와 학계의 공통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간주관적' 방법론이 상당히 중요함을 역설했다. 마치 수학자들간에 동일한 결론이 유출되어 '진리'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듯, 아직 인간에게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는 무의식과 영혼에 대한 연구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정신의 공식을 유도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오직 '경험'에 의해 초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연구에 있어서 전생윤회에 대한 보편성은 무엇일까?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유의해서 생각해봄이 옳다. 편의상, '직접적인 체험'을 제외하고 인문학적으로 전생윤회를 입증할 수 있게끔 세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본다(방법은 훨씬 더 많아질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례연구, 투시/최면 연구, 그리고 LSD 및 환각물질에 대한 '비일상적 의식'에 대한 연구이다.
 
수백 가지의 전생 체험을 관찰하고 기록한 크리스 베이치는 "이 분야의 증거가 너무 많고 놀랍기 때문에, 환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과학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면 머저리인 것이다(Bache, 1988)."라고 말을 했다. 나 또한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I. 사례연구
 
윤회에 관련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전생체험이다.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몸을 지닌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었던 전생을 기억해낸 아이들의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보고되어 있다. 이런 기억들은 아이와 부모의 인생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아이들이 특별한 사람과 장소, 상황에 대한 기이한 반응, 별난 기질, 공포증과 같은 다양한 '전이된 병리'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치료 사례를 소개한 아동 정신의학자들의 논문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전생의 기억들은 세 살을 전후한 나이에 나타났다가 다섯 살에서 여덞 살 사이에 차츰 사라진다.
 
샬러츠빌 시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이언 스티븐슨은 전생의 기억과 관련된 3천 개 이상의 사례들을 면밀히 연구하여 자신의 저서에 실었다. 여기에는 선천적인 윤회 신앙을 가진 '미개한', '유별난' 문화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서양 나라들의 사례도 다수 포함되었다. 신중하고 꼼꼼한 연구자인 스티븐슨은 그중에서도 자신이 정한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는 수백 개의 사례만을 보고했다.

즉, 분명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 사례들만을 추려낸 것이다. 그는 가족들이 아이의 행동을 이용해서 금전적 이득, 사회적 명성과 관심을 얻은 사례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또한 진술이 엇갈리거나, 허위 기억(잠복 기억/cryptomnesia : 과거의 기억이 잊혀지고 그것이 새로운 사실로 의식에 떠오르는 현상)이거나, 의심스러운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하는 사례들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스티븐슨의 연구는 놀라운 사실을 드러내주었다. 아이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례를 제거했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검증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몇몇 아이들을 전생으로부터 기억해낸 도시나 마을로 직접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 아이들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마을의 지리를 꿰고 있었고, 자신이 살았던 집을 손쉽게 찾아냈다. 심지어는 자신의 옛 가족과 이웃을 알아보고, 그들의 이름을 알아맞히기도 했다. 또한 전생최면에서 보고되는 가장 흔한 증거는 전생에 겪은 사고나 사건의 흔적이 현생의 몸에 점으로 나타나는 경우인데, 이 역시 별도의 조사를 거쳐 충분히 확증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삶이 처음이나 마지막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자기의 배역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깜빡 잊어버린다. 하지만 간혹 막이 열릴 때,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놀란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책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한 쌍둥이 형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 아이들이 뜻 없이 그냥 웅얼거리는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 아이들이 뜻 없이 그냥 웅얼거리는 줄로만 알았다. 3년이 지나도 아이들이 계속 웅얼거리자 부모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어학자들이 그들의 대화를 청취했을 때 드러난 것은 그들이 고대 아람어로 말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 언어는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언어지만 지금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한 유고슬라비아 소녀는 병에 걸려서 한동안 의식을 잃고 지냈다. 그녀는 깨어나서도 주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이 언어는 벵갈어 사투리 중 하나인 것으로 판명됐다. 소녀는 갑자기 인도에 있는 집에 가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소녀가 말했던 그 도시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기 집을 찾아냈지만 그녀의 부모뿐만 아니라 그녀도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특히 어린이들에게 대단히 많긴 하지만 어른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 27세의 한 여인은 남편과 처음으로 독일 여행을 갔는데 놀랍게도 가는 곳마다 고향에 온 것처럼 정겨움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 집을 찾아냈고 부모와 형제들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근처의 식당에서 그녀의 가족을 알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봤는데, 그는 그녀의 가족과 말에 밟혀 죽은 딸에 관한 비극을 이야기해줬다.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받아 더 자세한 내용을 보충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
 
안제이 도니미르스키의 <우리의 삶은 한 번뿐인가?>라는 책에는 영국의 아놀드 블랙스맴이라는 정신과의사의 실험에 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그는 최면술을 이용해서 환자들을 전생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중 어떤 환자는 여섯 번의 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맨 처음 그녀는 영국에서 로마총독의 부인이었고, 다음은 유대인 대금업자의 부인이었으며, 그다음에는 파리의 어느 상인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고, 또한 스페인 카스틸리아의 어느 왕자의 궁녀였으며 런던에서는 재봉사로 살았었고 미국 어느 주에서는 수녀로 살았었다. 이 모두가 2천 년 동안 일어난 일이었는데, 역사학자들이 사건과 날짜를 꼼꼼하게 확인한 결과 모두가 사실이었다.
 
이렇게 전생윤회에 대한 엄밀한 기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소수의 인간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기본 상태는 현재의식이며, 총체적인 기억은 모두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고, 우리가 적절한 의식의 단계에 이르르면 그것을 알게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떤가?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너무 일상이 바쁘거나, 현실주의적이거나, 사고가 우둔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평생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윤회에 대해 용기있게 학자로서 탐구하면서 가장 실망했던 경험은 바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연구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 정신태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안 스티븐슨의 사진은 옹골찬 회의주의자들의 태도에 지쳐있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작고하기 전, 스티븐슨은 자신의 살아 생전에 윤회에 대한 연구가 주류학계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여전히 버지니아 대학에서는 그의 후계자가 윤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언제쯤 학계는 인간정신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될까?
 
그 때는 지금의 물질적인 것만을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하게하는 기득권층들과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난 다음의 일이 될 것이다.
 
II. 투시와 최면
 
투시(clairvoyance)와, 나이를 거슬러올라가는 최면 곧 연령퇴행 최면(hypnotic age-regression)은 전생 연구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첫번째 유형(투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미국의 영능력자 에드가 케이시다. 그는 43년에 걸쳐 놀랄 만한 행적을 남기고 1945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케이시는 금세기최고의 영능자일 것이라고 일러지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 시절의 소년들처럼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었으나, 네 살 때 사고로 죽은 할아버지의 환영과 대화를 나누거나,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는, 교과서를 머리에 베고 자면 그 내용 전부가 저절로 암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등, 무의식이 선천적으로 특수하게 발달하였었다.
 
그가 어른이 되자, 그는 점차 남의 전생을 투시해 볼 수있는 묘한 능력을 발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려있는 어떤 사람의 경우, 그 원인을 전생에서 찾아서 그것을 제거하니 병이 치유되었다. 이러한 소문은 미국 내에 크게 퍼지게 되어 불치의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들었다.

투시가 작동하는 방식은 케이시에 따르면 무의식의 리딩(reading)에 근거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의 '아카샤 기록'이라고 부르는 집단 무의식의 공간으로 접속하면 어떠한 과거의 기록이든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생각은 파동이자 곧 에너지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리딩을 통해 드러난 많은 개념들 중 가장 놀랄 만한 것은 바로 환생의 개념이었다. 리딩에서 언급된 환생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에드가 케이시는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그의 삶의 핵심이었던 정통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환생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케이시는 전생 투시를 통해 육체에 있는 병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운명상의 여러 문제까지를 밝혀 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도 물론 그것이 진실하다는 증거의 뒷받침을 받게 되었다. 케이시의 전생 투시의 건 수는 실로 30,000건 이상 이르고 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 기록은 미국 '버지니아 비치'에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적 연구를 위해 어느 때든지 열람할 수 있도록 제공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기록들을 제대로 연구해보지도 않고 그를 단순한 '사이비'로 매도하는 얼간이는 없어야할 것이다.
 
첫번째 유형, 즉 '투시'가 영적인 센서가 고도로 숙련된 사람의 경우의 것이라면, 두번째 유형인 '최면'은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여러 번 행해지기도 하였다.
 
최면퇴행은 사실 비교적 오래된 전통이 있었고(동물에 대한 최면은 아주 먼 고대로부터 성행되었고, 유럽에서는 1636년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그 해 수학자 대니얼 슈벤터는 작고 굽은 나무 토막을 닭의 부리 위에 매달아 놓으면, 닭이 최면 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간의 최면은 18세기 말에야 비로소 시도된다), 사실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인 프로이트는 그의 무의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로 이 최면학적인 사례들에서부터 얻을 수 있었다(그가 인간의 무의식을 '쓰레기'로 본 것은 커다란 착오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주류학계의 믿음과는 달리, 정신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 중의 하나, 즉 "최면 상태에 있을 때는 깨어 있을 당시 하기를 바라지 않는 행위를 시킬 수 없다는 주장"과는 모순이 되는 사례들이 최면학적으로 많이 보고되어왔다. 여전히 주류학계는 알지도 못하고서 부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최면술로 유명했던 프란츠 메스메르의 제자 퓌세기르 후작은 빅토리아 레이스라는 젊은 농부를 나무에 묶고 최면을 걸었는데, 마음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었다. 의학계에서는 계속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라 하며 무시했다. 
 
1890년 5월 15일 토마스 제이 허드슨이라는 미국의 한 신문편집자는 자기가 약 500명의 사람들을 치료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단지 두 경우가 실패했다. 이 환자들은 이상하게도 그가 치료를 해주겠다고 미리 알린 사람들이었다.

허드슨이 볼 때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자의식과 분리되어 있는 순수한 원천이므로, 자의식의 방해를 받지않는 '순수한 의지'여야 하는 것이다. 최면술사가 권위적으로 피실험자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회의론자들에게 시험을 받을 때 '영매들'이 부정적인 자의식들에 둘러싸여,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870년대에는 칼 핸슨이라는 무대 최면술사가 극적인 트릭을 선보였다. 그는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판자처럼 딱딱해질 것이라 말했고, 몇사람이 그의 배 위에 앉거나 서 있어도 몸의 중앙이 조금도 굽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것은 최면술사가 객관적 정신의 힘을 맡았기 때문이고, 만약 '당신 또한 소극적이거나 피로하지 않게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면, 흔히 초자연적인 상태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명상을 동반한 의식이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19년 5월에는 범죄사상 진귀한 일이 일어났다. 넬슨 린토트라는 57세의 남성은 남아프리카로부터 최면술을 배웠었는데, 그 후 113명의 여인을 최면술을 통해 강간하였다. 경찰은 113명 중 112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는 11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근대에도 이런 일들을 계속 일어나고 있으나, 주류 학계 역시 계속 무시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무의식에는 '객관적인 정신'이 있는 근원적 힘이 있는 것이고 이곳의 잠재성을 계발하게 되면 바로 초능력이 구현될 수도 있고, 비상한 의지의 힘이 구현될 수도 있으며, 그리고 다음 사례들에서 살펴보듯이 자신의 영혼의 전생을 알 수도 있게되는 것이다.
 
1956년에 전세계적으로 관심을 집중시켰던 브라이디 머피 사건도 이러한 '최면효과'의 유형에 드는데, 우리의 관심은 이 최면이 무의식 속 전생의 기억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 사례는 너무 유명하고, 수많은 반론들이 오고갔으며, 그 객관성을 검증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면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다음의 내용은 지나 서머리나의 <속 윤회의 비밀>을 참조했다.

1950년 누군가가 젊은 사업가 모리 번스타인에게 <강이 있다>와 <윤회의 비밀>이라는 책을 주었다. 그는 매우 흥미롭게 그 책을 읽었고 마침내 그 책들이 최면술을 통한 병의 치료를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회의 증거까지도 다루고 있음을 알고 놀라고 있었다.

이것이 허위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서 그는 그 사실이 사기라는 것을 폭로할 목적으로 버지니아 비치에 있는 에드가 케이시의 아들 휴린과 케이시와 면담, 기록의 검토, 리딩을 경험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케이시의 자료가 비록 터무니없이 보이기는 하나 적어도 정직하다는 것이었다.
 
번스타인은 푸에블로로 돌와와서 대부분 심리학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른바 연령퇴행 기술을 이용해서 실험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그는 대담하게도 어떤 여자에게 그녀의 출생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정말 출생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세기에 자신이 살았던 아일랜드의 일생에 대해 말했다. 19세기 그녀 이름은 "브라이디 머피"였으며, 그녀가 처음 기억해 낸 것은 어린아이 였을 때 철제 침대의 페인트칠을 긁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되는 최면 실험을 통해서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가 일관성 있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최면에 걸린 그 여인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전혀 모르는 낱말을 썼으며, 그 당시의 장소와 때를 가리키는 낱말들은 정확했다. 그녀는 정확히 행커치프(handkerchief)라는 말 대신에 리넨(linen)을, 쿠킹 유텐실(cooking utensil) 대신 플랫쓰 (flats)라는 말을, 그리고 파밍(farming) 대신 크로핑(cropping)을, 베리(bury) 라는 의미로 디치(ditch)를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이 표현들은 현대의 미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말들이었고, 심지어는 현대 아일랜드인들조차 모르고 있는 낱말도 있었다. 그녀는 또 어떤 장소나 사건, 화폐제도, 농작물, 문화, 서적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그것도 나중에 번스타인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임에 입증했다.
 
서둘러 인쇄된 번스타인의 경험을 담은 책은 번스타인이 너무나도 비과학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각계의 신랄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진짜 과학자들도 자료를 수집하고 결론을 도달하는데는 일생을 소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지적은 확실히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잊지 않아야 했다.
 
(1) 출판업자들이 아일랜드에서 추후 조사를 하겠다는 것에 번스타인이 합의한 가운데 매우 신념 있게 행동했다는 것과 (2)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상업을 전공한 번스타인은 자신을 과학자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번스타인은 자신을 다윈이나 루이 파스퇴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업가였다.

그는 자신의 기이한 경험의 결과가 단지 진지하고 자격 있는 과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임을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그는 그 책 마지막 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확실한 증거를 기대할 수 없는 학문 분야이다. 오히려 여기서 다룬 내용이 보다 더 철저한 고려의 대상이 되도록 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중요성이 있다 하겠다."
 
어찌되었던 책의 출판은 전무후무한 대성공이었다. 버스, 술집, 사무실, 끽연실, 식당, 비행기, 차고, 이발소, 길모퉁이, 대학가, 가정, 파티, 그리고 저녁식사 자리 등 캘리포니아와 아일랜드 어느 곳에든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존 그로버라는 이름을 가진 <로스엔젤레스 미러뉴스>의 한 의심 많은 기자는 연령퇴행 실험을 스스로 해 보았는데 놀라웁게도 자신이 14세기에 독일 함부르크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살았음을 알게 되었고, 깨어났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몇 마디 독일어도 지껼였던 것이다. 그로버의 말에 따르면 그 실험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무게의 단위로 퍼드(pud) 라는 낱말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조사결과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그 말은 그 당시 러시아의 무게 단위로써 유럽의 항구에서 무역업자들이 사용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로버가 매우 인상 깊었다는 한 또다른 면은 마치 그가 함부르크의 삶을 다시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엘베강가의 독특한 진흙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로버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이다. 윤회설을 믿는 사람뿐 아니라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그 사건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이상과열은 본래 흥미로운 심리학적 현상이다.

그것은 첫째 사후세계에 관해 가지게 되는 어떤 끊임없는 관심의 표시이다.
둘째는 최면술이 사람의 상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매력의 표시라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시대의 불확실성의 표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확실성에 대한 강력한 욕구의 표시라는 것이다.
넷째로는 수소폭탄, 비행접시, 초음속, 레이다 조절차량, 텔레비젼, 우주로켓, 인공위성 등과 같이 지난 20년 동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을 수 없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사실에 깜짝 놀랐던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윤회설이 부드럽게 해준 표시라는 것이다.
 
물론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는 그 시작에서부터 각계의 공격을 받았다. 이 문제에 있어 번스타인의 정직과 성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지만(성공적인 사업가로서 헛소리를 한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순진하고 서투르며 눈이 휘둥그런 아마추어로서 별로 잘 알려지지 못하는 분야에 뛰어들어 자기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 뭔가 숨가쁘게 지껄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종교계와 과학계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몇몇 신학자들은 격분해서 브라이디 이야기를 '악마의 행위' 또는 '사탄의 행위'라고 불렀다. 즉, 종교적 정설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이유 때문에 분노하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오랫동안 그것이 거짓임을 뻔히 알고 있었고 또 이단으로 배척해온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과학계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이 다음과 같은 논리적 이유를 들어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공격했다.
 
쉬넥크 박사(전 최면술 임상실험 협의회 회장)와 루이스 올베르크 박사(뉴욕의 심리요법 대학원 의학박사)는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으로, 그 여인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과정을 조사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것이 아일랜드에 가서 오래된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1956년 2월에 월리엄 바커(수개월 전 <포스트>지에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네 번이나 연재한 기자)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세부 사항들을 입증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갔다. 번스타인은 출판업자들에 행해졌던 원정조사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던 터였고, <덴버 포스트지> 편집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바커가 아일랜드에 체류하는 3주일 동안 그를 후원해주기로 결정했다.
 
바커의 조사는 나중에 그가 <브라이디 머피에 관한 진실(The Truth About Bridey Murphy)>이라는 제목으로 <덴버 포스트> 지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흥미롭긴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못되었다. 그가 수집한 많은 통계자료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다분히 협조적이며 많은 진실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깊은 종교적 확신 때문에 브라이디의 이야기가 진실일 수 있다는 데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조사의 결과가 입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브라이디 머피의 실존에 관한 증거를 부정적이고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커는 다른 사람들이 입증하지 못했던 브라이디 머피의 이야기를 몇 가지 입증할 수 있었다.
 
3월에는 발행 부수가 많은 미국의 어떤 잡지가 바커의 보고서에 대한 이상하게 왜곡된 기사를 실었다. 예를 들면 "데어트르의 슬픔"이라는 브라이디의 말에 대해 그 데어드르라는 이름은 1905년 이전에 나온 어느 책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커는 그 잡지가 표현한 그대로 이미 1808년에 "데어드로의 슬픔"이라고 영어와 게일어로 인쇄된 고서목록을 발견해냈다.
 
또 그 잡지는 1850년 이전에는 아일랜드에서 철제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브라이디는 분명히 어린 시절에 그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서 벗겨낼 수도 없었다고 단정적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바커는 그 당시에 이미 철제 침대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설명과 그 당시 영국 소설가였던 댁커리의 <노트북>을 참조하였다). 이런 종류의 그릇된 해석이 잡지를 통해 보도되어 일반대중으로 하여금 이 브라이디의 이야기를 불신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가장 큰 공격이 있었다. 즉 <시카고 아메리컨지>에서 "브라이디 머피는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라는 제목 하에 연재물을 실었다. 시카고 교회의 월리 화이트라는 목사는 신분보호를 위해 루스 시몬스라는 이름이 주어졌던 번스타인의 실험대상이 자신의 교회에 나오던 주일학교 학생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정신병리학자의 연구서 한 장을 읽고 루스 시몬스의 어린 시절을 철저히 연구하면 소위 브라이디 머피의 모든 기억은 그녀의 현세의 기억들을 옮겨 놓은 것임을 밝혀지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브라이디 머피의 사이사이에 끼어 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월리엄 바커가 지적했듯이 최면에 걸린 피험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며 그의 기억이 완전 무결하지도 않으며 그가 기억하는 것은 여러 다른 시기에서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경솔한 기사를 쓴 신문기자에 의해서 고의로 간과되었던 것으로써, 루스가 어릴 적에 암송했던 아일랜드의 해학적 독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독백 속에는 19세기 벨피스트에 파르라고 불리는 식료품 상인과 존 카리건이라는 채소장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도비라는 장소와 베일리 크로스라는 길이 있었다는 역사적으로 매우 세세한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도비와 베일리 크로스라는 길은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카반 지방에 있었다는 아일랜드 농부와 카톨릭 사제에 의해 실제로 그런 이름의 지역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 그 독백 속에는 그 당시에 아일랜드에서 통용된 '타펜스(tuppance)'라는 동전이 있었다는 내용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소위 전문가들이 처음에 주장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들은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자기들의 주장이 잘못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했다.) 이 밖에도 다른 많은 사항들이 아일랜드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되었다.
 
시카코에서 온 기자들과 함께 화이트라는 사람은 그가 주장하는 바를 계속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루스 시몬스는 어렸을 때 철제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낸 적이 있다.     
2. 그녀에게 이웃에서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매우 다정스럽게 "플레쯔 아저씨"라고 부르곤 하였다.
3. 그녀는 연기력이 뛰어났고 특히 흉내내는 재주가 있었으며 이따금 아일랜드 사투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4. 그녀는 가끔 아일랜드 지그춤을 추었다.
5. 루스 시몬스의 이웃 중에는 브라이디 머피 코르켈이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어렸을 적에  루스 시몬즈는 그녀의 아이들과 놀곤 했다. 그리고 코르겔 부인은 지금 시카고에 살고 있다. 이 다섯 번째 항목을 특히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브라이디 머피 드디어 발견, 그녀는 항상 시카고에 있었다"는 머릿말과 함께 코르켈 부인의 사진이 여러 출판물에 실린 것이다.
 
화이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최면상태에서 이 모든 세부적인 사실들이, 아일랜드에서 철제 침대의 페인트를 긁어내고, 정확히 아일랜드 사투리를 구사하고, 지그춤을 추고 이웃에 플레쯔 아저씨를 둔 브라이디 머피의 상상의 생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눈에는 이 사건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전국의 성직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신은 더 이상 조롱 받지 않아도 되었다. 속죄, 지옥, 부활, 구세주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그대로 안전하게 존재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더욱 기뻐했다. 뉴욕의 한 정신과 의사는 그 조사에 관해서 "멋집니다. 나는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랬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루이스 올베르그 박사는 "허황된 윤회설을 사실인 것처럼 엮어낸 르스 시몬스의 그 특수한 사건을 폭로하는데 한없이 귀중한 공"을 그 증거들이 세웠다고 말했다 브라이디 머피의 유령은 이제 잠들었다. 이 브라이디 머피의 유령이란 말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즐겨 쓰는 표현이었다. 정신의학계와 종교계는 승리의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안도의 한숨이나 승리감은 시기상조였다. <덴버 포스트>의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루스 시몬스는 <시카고 아메리칸>지가 '발견'한 것들의 진실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예를 들어 루스 시몬스 말에 따르면  그녀는 일생동안 플레쯔 아저씨라고 불리 우는 사람을 안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어렸을 때 자신이 철제 침대를 벗겨냈던 사건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흉내내는 재능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 웅변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덴버 포스트>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밝힌바와 일치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찰스톤 춤과 바텀 춤 이외의 다른 춤은 출 줄 몰랐고 아일랜드 지그춤은 추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코르켈 부인의 결혼전 성이 머피이고, 이름이 브라이디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어떤 아이도 어릴 적 소꼽동무 어머니의 이름과 처녀 때의 성을 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시카고와 같은 큰 도시에 사는 어른들도 대개는 이웃에 사는 여자의 이름이나 처녀의 성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증거들 중 더러는 짜 맞춘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지 두 삶을 나란히 비교한다는 것은 억지인 듯싶다. 예를 들어, 현세에서 그녀의 여동생이 어릴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었다는 이유로 브라이디 머피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닮은 인생은 얼마든지 존재하며, 그렇다고 엄연한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20세기 시카고에서 어릴 적 기억들이 이따금 19세기기의 기억이나 아일랜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과거의 다른 시대나 다른 인생으로 돌아간다면 흥미 있고 또한 아마 매우 교훈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급하고 피상적이며, 한 차례의 돌풍과도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브라이디 머피의 증거를 완벽하게 없엘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브라이디 머피 사건에서만 끝나지는 않는다. 미국 정신 의학계의 저명한 정신분석의 중 한 명인 브라이언 와이스 박사 또한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지독한 악몽과 공포증에 시달리는 그의 젊은 여성 환자 캐서린을 치료하던 중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여 혼란에 빠지게 된다.

증세의 원인을 찾기 위해 최면역행을 통해 그녀의 유아기 적 기억을 더듬던 중, 그녀가 느닷없이 그녀의 전생에 대해서 기억해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단지 잘 모를 뿐이지, 전생최면에 대한 사례들은 의외로 많이 있고, 객관적으로 검증할만한 부분이 있다.
 
한국의 경우, 김영우 박사의 최면치료 사례들이 잘 알려져있다. 그의 임상결과들을 해외 연구자들의 결과와 비교해봐도 공통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최면이란 무의식의 기억을 캐내는 것이므로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전생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전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전생의 복합성을 상정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때때로 우수한 환경에서 도출된 결론들은 전생을 뒷받침해주는 명백한 결과가 된다는 것을 주류 학계가 인정해야한다. 초능력의 99%가 사기라고 해서, 1%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조심할 점은, 일본의 저명한 신비주의자 다카하시 신지에 따르면, 의식의 준비되지 않은(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최면행위를 통해 무의식을 열게되면 의식에 일대 혼란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다른 세계로의 차원이 통하게 되어 빙의의 위험이 높아진다던가,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연구하는 만큼, 이 부분 또한 반드시 주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어보인다.
 
III. LSD 및 기타 환각물질의 복용
 
이 세상에는 많은 환각 물질들이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일상적인 의식상태를 기적적으로 변환시켜 사물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보게 만들어준다.
 
고대로부터 토착 문화들은 종교 의례와 영적인 삶의 주된 수단으로 강력한 의식변환 성분을 지닌 식물들을 이용해왔다. 고대 인도의 전설에 나오는 소마라든가 인도대마의 여러 가지 변종들, 콜럼버스 미대륙 발견 이전의 성찬이었던 페요테와 환각버섯(테오나나카틀), 아프리카 부족들의 의례에 사용된 신성한 관목인 이보가, 그리고 남미밀림의 양조 음료인 아야후아스카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동물계에서도 환각 성분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60년대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기자였던 조로버츠는 키포수스 푸스쿠스의 어육을 먹고 공산과학적 요소가 많은 어떤 강렬한 환각체험을 한 뒤 그에 대한 글을 썼다. 남태평양의 노퍽 섬 앞바다에 사는 이 물고기는 악몽과도 같은 강력한 환상을 자주 일으키는 것으로 원주민들에게 알려져 있다.

연구가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동물계의 환각 물질은 두꺼비 속에서 나온다. 향정신성 물질인 뷰포테닌을 함유하는 두꺼비 가죽은 중세에 마녀들이 안식일의 환상을 체험하기 위해 사용했던 음료수의 중요한 성분이었다. 60년대 말에 환각 상태를 유도하는 새로운 이상한 방법이 알려졌는데 그것은 애리조나 사막의 커다란 두꺼비인 뷰포 알바리우스의 피부 분비물을 핥는 일이었다. 이 두꺼비는 애리조나 남부에서 멕시코의 소노라 남쪽까지 퍼져 있는 소노라 사막에서만 발견된다.
 
LSD와 같이 향정신적 약을 통해 인간이 신과의 합일, 근원적 합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 역시 젊은 시절 마리화나를 피운 것을 가장 의미있는 삶의 기억으로 회상한 바 있다. 그것은 그의 현실을 보는 의식상태를 완전히 바꾸어서 인생을 '근원적'으로 보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저명한 체코계 미국 과학자인 스타니슬로프 그로프 박사는 LSD 외 다수의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한 뒤 우주의 단일성을 체감하는 사례들을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우주의식의 일환이고, 또 모든 것은 마음을 질료로서 의식이 형성됬음을 밝혀주는 증거이다. 그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케타민 체험의 특징 중 하나는 체험자의 의식이 보통은 의식이 없다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물질적 대상 및 작용과 동화될 수 있다. 그것들은 무생물이고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생명체만이 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하고 나면 여러 토착문화들의 만유정령설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여기에 따르면 동식물은 물론이고 해와 별, 바다, 산 등등 자연계의 모든 것에 의식이 존재한다. 나는 어떤 세션에서 올챙이가 되었다가 개구리로 탈바꿈을 했고, 또다른 세션에서는 나이 든 커다란 수컷 고릴라가 되어 자기 영역을 관리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체험은 끈끈이주걱이 되어 파리를 잡아먹은 일이었는데 그때의 맛은 인간적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추측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그의 저서 <환각과 우연을 넘어> 中)."
 
그로프 박사가 말하는 이러한 비일상적인 무의식의 의식 상태에서는 우주의 근원과 합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생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약물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앞서 언급한 투시와 최면의 사례와 같이 자신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각성시킴으로서 '영구적인'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전생에 대한 지각은 의식의 진보와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일 뿐이지,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 전생의 문제는 단순히 '흥미 거리' 이상의 단계에 접근하지 못하고, 연예인이나 스포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그 수준과 동일한 영역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깨여있는 지성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윤회에 대한 명백한 과학적 절차를 거쳐 발견되는 개인적 체험사례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윤회론이라는 것은 그저 죽음을 목적에 둔 사람들이 내세에 대한 갈망을 유치하게 풀어낸 학설이 아니라, 뚜렷한 우주의 이치라고 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오감과 뇌파를 통해서 우리는 느끼지만, 우리가 눈을 감아도 이미지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듯이,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자연과학적 연구
 
이상, 지금까지는 인간 무의식에 대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전생을 알 수 있는가 설명하였다. 인간의 뇌에는 기본적으로 언어와 논리를 관장하는 좌뇌가 있고, 직관과 감성을 관장하는 우뇌가 있는데, 각각 의식과 무의식으의 기능과 대응해서 생각해보면 적절히 맞아 떨어진다. 이제부터는 자연과학적 법칙들이 어떻게 윤회론을 지지하며, 어떻게 고대인들은 윤회론을 '직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는지 보도록 한다.
 
우선 유심론적으로 보면, 자연은 절대자의 외화(外化)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의 생각이기도 한데, 그는 사실 변증법의 철학을 비롯하여, 동양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자연법칙과 윤회의 법칙에 대해 기술하기에 앞서 왜 자연은 절대자의 외화인가? 헤겔에 따르면, 우주창조의 원리는 로고스, 즉 노자가 말한 도(道)로 성립되어있다.

마치 인간이 거울을 보고 싶은 것처럼, 이 절대자는 자신의 성질을 알고 싶어서, 자신의 모습을 바깥으로 투사해야한다. 그래서 자기는 곧 타자가 된다. 이 외화가 바로 자연이며, 절대자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 자연의 일부인 인간 또한 절대자의 다른 모습이며, 기본적인 상태는 주관정신이다. 따라서 동중서가 천인감응(天人感應)이라고 말하며 주관적인 정신의 인간 또한 객관적인 절대정신에 이르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또는 음-양-중)은 바로 그 과정을 나타낸 것이고 말이며, 인간이 예부터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주요 수단인 예술/종교/철학은 각각 절대자의 이념/표상/개념의 형태로 드러난다고 한 것이다.
 
이 모든 게 어찌 되었던 절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멀리서 자연을 봄을 통해, 또는 가까이서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연구함을 통해 우주법칙을 자연히 알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자연은 완전에 가까울수록 동작에 필요한 수단도 적어진다."는 말을 했던 모양이다. 결국 윤회론은 공상망상의 산물이 아닌, 이러한 엄밀한 자연으로부터의 직관적 직시의 산물이다.

개인주의가 전통적으로 발달하고, 중세 암흑시대와 지금의 무신론 시대에 빠져있는 서양인들과 다르게, 동양인들은 오랫동안 이 직관이 발달되어왔다. 자연을 하나의 순환하는 전체로 본 것이 그 예이다. 그들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자연을 관찰함을 통해, 물의 순환, 사계의 순환, 밀물과 썰물의 순환, 태양의 순환 등이 모두 직선적인 방향으로 시작되어 끝나기 않고 언제나 순환한다는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서, 자연의 상징을 매일같이 관찰하여 보면, 태양과 달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봄이 있으면 겨울이 있으며,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는데서 유추할 수 있듯, 모든 것이 양극을 통해서 발전되며 그러한 조화 속에서 모든 만물은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들은 그저 생명활동의 소산이 아니라, 무언가 더 큰 우주적 의지에 의해 알맞게 생성, 발전, 소멸의 절차를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경이로운 자연의 동력이자, 우리 신체의 71%을 유지하는 물은 그저 H2O로 상징되는 화학기호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자연의 표지로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대략적으로 물의 특성을 말해보자면, 물은 결코 아래에서 위로 흐르지 않으며, 질량이 불변하여 기체와 고체로 변형될 수 있으며, 영원히 순환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물이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며 순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아무도 물이 순환한다고하여 그것이 모습을 바꿔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은 카르마라는 불교적 개념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가 물을 절대자의 메타포로 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물질의 본성은 순수한 영질이다. 인도인들은 "입방체를 압축시키면 다른 형체로 변한다. 팽창시켜도 다른 형체로 변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변화는 물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압축시키든 팽창시키든 그 물질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나 원자의 상대적인 위치는 변한다. 물과 얼음, 수증기는 형태만 다를 뿐 똑같은 수소와 산소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물질을 수축시키거나 팽창시키는 힘은 4차원에 속한다. 이 4차원의 힘은 원자를 다르게 배치시켜 물질의 크기를 다르게 만들지만, 물질 본래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만물이 영적인 질료로 만들어진 이상, 영과 영이 만든 물질 사이에 다름은 있을 수 없다. 만물은 일체이고 만상은 하나인데 최면 상태에 빠져 있는 한 인간은 모든 것을 왜곡해서 보게 된다. 우리 인간도 수많은 생을 윤회하며 살아왔지만, 본질은 영혼이며, 신 그 자체인 것이다.
 
인생의 영원한 테마인 '삶과 죽음'의 문제 역시 그러하다. 한국 조상들의 상복이 흰색인 까닭은 검은색인 서구와 다르게 재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는 마치 태풍의 눈과도 같아, 우주의 법칙은 소립자를 비롯하여 모든 입자, 물체, 천체,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적용된다. 그래서 우주 전체가가 구(球) 모양으로 순환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의 우주는 미립자로부터 천체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소용돌이의 프랙탈 구조로 이루어져 유기적인 관계에 있으며, 조화를 기반으로 양극이 통일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자연적이고 직관적인 조상들의 지혜가 서구의 분석주의에 의해 밀리게된 것은 고작 100년 안팎의 일인 것이다.

자연과 우주의 표지라는 것은 얼마나 신비하고, 법칙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얼마나 지나쳐왔으며 무심한가? 고대인들은 이성이 아니라, 이러한 직관적 인식에 기초하여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윤회 또한 자연과학적인 결론에 불과하다. 사실 현대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열역학의 [에너지 보존법칙] 등은 사실 윤회의 개념과 얼마나 흡사한지 모른다. 이제 고대인들과 동양인들이 우주의 신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신비가 풀린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과학적 관찰을 훌륭하게 표현해낸 최상의 예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는 순간적으로 감각이 느끼는 초월적인 본질을 형용사를 동원하여 표현해낼 수 있는 적합한 도구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초절주의 시인들, 가령 윌리엄 블레이크를 위시하여 에도왈도 에머슨, 버틀러 예이츠, 그리고 아르튀르 랭보가 있는 것이다. 
 
감각의 정화에 대해 신비가이자 시인이였던 블레이크는 이렇게 중요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랭보가 "감각을 질서 있게 혼란시킨다."고 말했던 비전과도 흡사하다.
 
현존 세계는 유한하고 불결한 것이나, 감각의 기쁨을 높임으로써 세계는 무한하고 신성해진다.
그러나 우선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을 나는 지옥의 방법에 의해 행할 것이다. 부식제는 지옥에선 건강의 약이며 눈에 보이는 표면을 녹여 없애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드러나게 한다.
지각의 문이 정화되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무한의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은 동굴 속에 감추고 벌어진 틈을 통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의 무의식과 두개로 육체적/정신적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생각해볼 때, 외부의 감각기관은 내적인 인식을 밖으로 내보내는 출구이거나 통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외부의 감각기관을 무시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만약 감각기관이 손강되면 세상으로 향한 출구나 통로가 파괴되는 것이다. 전두엽 절제수술을 시행한 환자들의 부작용을 살펴보면, 뇌의 기능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뇌는 인간의식이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사실 현대과학 자체는 약간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 인간 존재의 영적 차원을 조금씩 탐색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존 에크레스 경은 "인간의 마음은 두뇌와 분리되어 있으며 마음이 두뇌를 지배한다."는 학설을 주창했다.
 
아인슈타인의 친구였던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이 또한 바로 그것을 입증하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런던 대학에 근무하는 물리학자인데 노벨상 수상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계시적인 책 <완전한 전체와 함축적 질서>에서는 자연과학과 신비주의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우주 질서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곧 카르마와 다름 아니다. 그는 이 개념을 홀로그램에 비유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시각화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즉, 필름을 잘라 토막을 낸 다음, 그 중 한 조각의 필름에 동조성 레이저 광선을 비추면 전체 영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물질의 기본 조각들도 공간적 거리에 관계없이 우주의 다른 곳에 잇는 자신의 '동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즉시 알 수 있다.
 
블레이크의 말처럼 인간이 명상을 통해 '지각의 문'을 정화하게 되면, 인간은 유한한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로부터 전생을 비롯한 자신의 본질적 지각을 이루게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해볼 때, 어니스트 허밍웨이에서부터 알베르트 카뮈, 그레이엄 그린, 그리고 새뮤엘 베커트에 이르는 현대문학의 가장 훌륭한 작가들에 의해 공감받고 있는 무신론 또는 실존주의적 인간존재의 본질(소외감, 불안감, 구역질 등)은 현실의 한 단면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험주의자 존 로크가 인간의 기억은 백지와 같아 '타블라 라사'라고 표현했던 이후, 서구인들은 인간의 두개의 속성(곧 육체와 영혼)을 무시하여 왔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또 다른 중요한 추론을 할 수 있다. 최면은 우리가 보아왔듯이, 근본적으로 무의식적 암시이다. 최면술사의 암시는 왼쪽 뇌의 의식 속에 사로잡히게 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 권태와 비관주의는 이와 같은 효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처럼 인생은 무의미하고 '인간은 쓸모없는 열정'이라고 믿는다면, 영원히 부정적인 자기 암시의 규범 상태에 있게되며, 일종의 자기 성취의 예언이 된다. 무의식의 힘에 눈을 뜨는 데에 있어, 자기 사고를 오픈 마인드로 열어두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두가지 세계관을 갖고 살아간다. 좌뇌는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의식이며, 우뇌는 정신의 본질이 깃들여있는 잠재의식이다. 이렇게 양분된 이유는 철학자 헤겔의 생각, 동양의 유불선 사상, 나아가 동서고금의 모든 비밀주의적 신비주의 영성이 내포하는 바와 같다.
 
신은 인간이 되어 '체험'을 하기 위해 현실처럼 보이는 이 육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었고,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여 분리의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 영혼의 정화작용을 위해 우리는 윤회를 하게된다.

윤회를 함으로서 순수한 절대자의 의식에 가까워지게끔 조율되는 동시에, 개인의식도 유지할 수 있게된다. 원하는 자들은 해탈의 길에 이르러서, 절대자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고, 개인의식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것이 세상이 온갖 모순들(선과 악, 남자와 여자, 그리고 신과 인간)로 분리되어 있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고, 종교적 답을 찾기도 한다.
 
우리가 직관적 연습(명상)을 통해 집단 무의식의 초월 상태로 들어가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알게된다면, 거기서부터 자신이 천복을 얻을 수 있는 운명의 길을 깨닫고 그와 상응하는 에너지장을 얻게되지 않을까 싶다.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우리가 방사하는 에너지장이 곧 사념체를 만들어내고, 그 사념체가 물질적 현실에 영향을 끼쳐 말 그대로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창조하게된다.

그렇게 생각해보았을 때, 현재의 삶이란 과거의 자신의 사념과 행동들이 총체적으로 만들어낸 인과의 결과인 것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떤 성인들은 이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의 삶은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공평해진다고 말을 한다.
 
지나 서미나라 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단히 희망적인 말로 윤회론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생이란 영원한 연속이다. 그리고 육체는 영혼을 깃들여 주고 있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인생의 경험은 나의 과거 생의 결과이며, 현재의 나의 행위는 내생을 규정짓는다. 인생은 영원히 밝은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슬픔에 잠겨 있을 이유가 없다. 인생은 영원히 성장하는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 또한 이런 말을 남겼다. "바로 이 시대에 내가 지구에 태어난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리딩 2636-1>에서 그는 '바로 "당신이 시작해 놓고서 아직 완수하지 못한 일들을 끝마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내가 전생에서부터 완수하지 못한 일 ㅡ 그것이 현생의 내가 가야할 모험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그리고 사후(死後)의 인생은 얼마만큼 차이가 나게될까?
-지평선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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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우주의 창조과정과 별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빅뱅보다 더 우수한 이론도 있다. 기존의 빅뱅은 행성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수소가스의 잔재 에너지를 찾지 못함으로서 열역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고, 또 "빅뱅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곤란한 질문에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순환우주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양자역학적 고찰과 같이 시간이나 공간 또는 물질이란 오직 마음에 의해 의식될 수 있는 성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고관을 대표하는 명석한 과학자 이차크 벤토프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가운데에 좁다랗고 긴 구멍을 가진 길쭉한 도넛과 같은 원환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표현되는 초점, 곧 의식 혹은 창조자가 있다. 창조자는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잠재된 형태로 담고 있는 씨앗과도 같다. 마치 도토리 속에 참나무의 형체가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화이트홀에서는 분사광이 뿜어나와 창조자를 둘러싸고 흐르기 시작하여 원환체의 표피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우주이다.

물질은 화이트홀로부터 분사되어 나오면서 생성된다. 처음에 그것은 분사광의 형태이다. 그것이 냉각되면 안정된 입자-양자, 중성자, 전자 등-가 형성된다. 그 다음에는 헬륨과 수소가스가 생긴다. 이것이 농축되어 별을 이루고 그 중심부에서 더 무거운 원소들이 생성된다. 별들이 모여 성단이나 은하계를 이루고 별들은 죽으면서 폭발하여 우주먼지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농축되어 새로운 별과 혹성을 이룬다. 화이트홀로부터 분사된 물질의 흐름은 점차 속도가 느려지면서 그것이 나왔던 씨앗, 곧 중심부의 근원이 발하는 중력에 의해 되끌려가 마침내 블랙홀에 흡수된다. 이것이 물질이 생멸하는 연속적 순환의 사이클이다.
 
이것을 한 순간에 폭발하여 모든 방향으로 고르게 퍼지는 빅뱅(대폭발) 우주와 대비하여 '부드럽고 지속적으로 폭발하는 우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폭발하는 우주에서는 원환체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은 물질이 생멸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시간이 생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시간은 물질과 움직임이 존재하는 곳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시간은 물질이 자신이 생겨났던 화이틀홀로부터 멀어진 거리를 재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이 거리는 물질과 그것이 지닌 의식이 그 근원으로 회귀하는 순환 과정상의 진화적 단계를 말해준다.
 
우주의 법칙이 이처럼 다시 창조되고 파괴되는 과정을 무수히 되풀이하듯이, 우리가 직선적으로 이해하는 문명사 또한 이번의 문명이 처음의 문명이 아니란 증거가 많이 있다. 소위 초고대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인류의 탐욕에 의해 머나먼 옛날 빙하 아래로 사라졌던 선사 이전의 고도로 발달된 고대 문명들을 말하는 것이다(아틸란티스, 무, 레무리아 등). 또한 인간의 삶 또한 이번의 삶이 단 한번의 삶이라고 단언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항상 생명은 더 큰 전체를 향해 게걸음처럼 천천히 나아가며 마침내 종점에 이르르면 다시 순환할 뿐이다. 새로운 별이 창조하는 곳에는 곧 오래된 별의 소멸이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주는 시작과 끝도 없이 순환하며 움직임으로서 새 생명을 창조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회는 한낱 사이비 과학이 아니라, 채 300년의 역사도 안된 근대과학보다 더 과학적 엄밀성이 있는 몇 천년간의 인류 문명의 지혜인 것이다. 고대의 상징체계로 보았을 때도 전생 윤회라 하는 것은 순환하는 우주와 자연법칙인 것이다. 


인간의 윤회의 방식은 직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직선적으로 인간이 969살을 살거나 일만년의 세월을 산다면, 그 동안 쌓인 과로와 괴로움으로 평생 얼룩진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단 한번뿐이 아니고, 시절 인연에 따라 여러번 환생하기 때문에, 괴로운 기억을 지운 채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절대자의 자비로 본다. 인간에 대한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인간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란 말인가!
 
또한 인간은 단지 무수하게 윤회를 하며 의식이 발전해가는 것 뿐만 아니라, 뇌가 명상을 통해 우주의식의 공간에 접속하게 되면 우주심(宇宙心)을 알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우주심이란 곧 우주에 저장되어있는 무수한 파동들의 기록으로서, 이 세상에 사라지는 기억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외없이 말이다. 뇌파가 시냅스를 통해 진동하면 그것이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에 기록을 남기게된다. 죽고나서도 그 기록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주에 비밀이란 없기 때문이다. 고귀한 생각들, 그리고 추잡한 생각들 모두가 기록된다.

물리학자 이차크 벤토프의 우주모델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진동하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진동하는 원자들은 대부분 허공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사고 작용은 우리 뇌를 채우고 있는 우주의 허공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 작용이란 허공, 곧 순수의식의 진동에 변형을 가하는 작용이다. 하지만 허공은 당신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며, 만인과 만물은 이 진동하는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의 사고 작용은 전파되어 모든 창조물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비밀이란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불평하기에는 때가 이미 늦어버렸다.
 
일본의 신비가 다카하시 신지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이 섞여 있는 세계인 것으로서 각자의 과거세, 전세, 저 세상에서의 생활의 기록과, 현상계, 즉 후천적 경험의 전부가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조사할 경우는, 우뇌의 상념대란 곳을 보면 일목요연해진다. 그 사람의 모든 경험, 생각한 것 까지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육체를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단계 빛의 천사·빛의 천사는, 각자의 상념대의 기록을 한 순간 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즉, 인간은 24시간 동안, 경험과, 기록의 연속인 것이다.  연중무휴이다.  에너지의 휴식은 있을 수 없다.  설사 죽을지라도 영혼은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행선지, 생각, 행동을 아는 것이다. 상념대란, 과거세의 기록과 현세의 경험의 기록집적소이기 때문에, 각자의 현상계에서의 운명은, 여기에 잡혀있게 된다. 그것은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명예적으로, 지위적으로, 다양한 면에 걸쳐서 결정되고 있다. 하지만 영적 각성을 하면 운명이 하한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고, 상한에까지, 자신의 운명을 개간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럼으로서 인간의 생이란 실로 다양한 기억과 기록들의 집합이니,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 말라.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더 많이 실험할수록 더 나아진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영생에 가깝게 윤회를 하면서,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 평생 그 상태 그대로 안정적으로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영원불멸이라는 것을 알면 더 자신감을 갖고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공허해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각자 억겁의 시간을 살며 탐구해 가야할 주제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F. 니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사랑이 깨지는 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짧은 인간의 인생에서 영원한 사랑이 있을 리가 없다. 젊은 연인들의 불타오르는 사랑은 시간이 지남으로서, 특히 결혼을 함으로서, 서서히 식게된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사랑이 아닌 '희망'인 이유는, 두 타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인 이유로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영성가 다스칼로스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현상계에서 서로 사랑을 맹약하고 동반자살한 연인이 죽고 나서 영계에서 어처구니없이 작은 일로 서로 갈라진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두 연인의 사랑, 또는 자기의 미(美)에 빠진 나르시스와 달리,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아가페적 사랑일 것이다. 그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평범한 인간들은 타인을 자기와 동일한 인간으로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별에서부터 시작해 인종, 지성, 학력, 취미, 기호 등이 모두 다르기에 인간은 타자를 동일한 주체로서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윤회를 거듭하면서 만나는 영혼의 짝들은 '운명 속에 예지된 어떤 강렬한 짜릿'함과 같이 텔레파시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악연이라고 한다해도, 카르마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만나는 연인들은, 깨질 운명임을 예감하고서도 만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소울메이트라고 신비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가인 루스 몽고메리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책을 썼던 것이고, 기시감, 동성애, 자신의 천성 등도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우연의 일치를 가장한 필연들이라고 할까나?
 
그렇다고 늘 찾아다녀야 하는 나의 ‘반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한 존재다. 다만 절대자와 합일하는 과정에서, 사랑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소울메이트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살아가면서 아주 좋은 느낌으로 만나는 사람, 우연히 마주쳤지만 그가 전해준 평온의 눈길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생에서부터 맺어진 인연 또는 그보다 더 먼 태고적 같은 곳에서 같은 *성원소에서 맺어진 인연일 것이다.
(*성원소: 다스칼로스에 따르면, 절대자를 구성하는 부분. 각각의 성원소는 수많은 빛줄기를 방사하는데 이 빛줄기는 각기 다른 원형들을 통과하여 형체를 갖게 되고 현상적 존재가 된다. 프뉴마(Phenuma)가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면 하나의 영혼이 형성된다. 같은 성원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 각별한 친근감을 갖게된다.)  
 
소울메이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심리학적으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성격이나 행동이 극히 비슷하여, 서로를 알지 못하는 다른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비슷한 인생 패턴이 나타난다. 이것을 예로 일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라고 못을 박는 경우가 있으나, 윤회론적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바로 이 일란성 쌍둥이가 전생에서부터 영혼의 성질이 비슷한 어떤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풀면, 그들이 다른 인간임에도 성격이나 행동, 지성이 매우 비슷한 것을 설명해낼 수 있는 동시에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형제들 간에 왜 성격적 차이가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형제들은 다른 윤회의 과정을 걸어온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성격과 지성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과거세에서부터 맺어진 인연 뿐만 아니라 현생에서 새로운 인연, 새로운 생각의 염체,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과거의 카르마 뿐만 아니라, 현재 만들어내고 있는 모든 의식의 총합이니까.
 
분명한 것은, 의식의 신비를 지향하는 인간의 탐구는 결국 인간이 살아있는 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의 원초적인 재미와 신비를 부정하고, 해탈만을 지향하는 신비주의적 태도는 예술가적 마음을 품은 자에게 있어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윤회라는 신비한 사실에 기반한 장르문학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괴담과 전설이 항상 명작을 이루는 하나의 신화적 요소가 되는 이유이다. 현실은 항상 비현실적 이상과 함께해야 가장 완벽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현실적 사랑에 천착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운명적 사랑을 믿는 것이며 어떤 이들은 생사의 끈을 초월하는 해탈을 갈구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천문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왔다. 저 아득한 거리에 있는 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 근원이 지구가 아닌 우주가 아닌가 생각해오며 경외감과 동경심을 품어왔다. 이는 고대 종교로 갈수록 그 연관관계가 더욱 명확해진다. <시대정신>에서도 잘 폭로된 바 있듯이, 고대종교였던 유대교의 비밀은 천문학에서부터 나왔다.

가령 예수의 출생신화에 등장하는 동박박사 세 사람부터 그러하다. '동쪽의 별'이라 함은 밤하늘에 가장 밝은 '시리우스'별인데, 이 별은 12월 24일에 오리온좌의 벨트 3성(星)과 일직선을 이룬다. 이 3성이 과거에는 3명의 왕, 즉 '동방박사 세사람'으로 불렸고, 12월 25일(동지)에 이 3성과 시리우스별(천랑성)은 모두 일출을 향해 늘어서는데, 바로 이것을 표현하여 동방박사 세사람이 신의 아들인 '태양'의 출생을 찾아 '동쪽의 밝은 별'을 쫒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또한 처녀좌와 관계가 있고, 예수의 3일 부활설은 태양이 동지 때 남하를 멈추고 3일 후 부활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본땄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대학생들은 망원경으로 천체관측을 하며 이러한 고대의 유산을 천문학이라는 '정립된 과학'의 이름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고대에 있던 신비주의적 감정은 상당 부분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고대의 영적 빈자리를 채우는 서구의 시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을 천문학적 별자리와 연관해서 보는 서양의 점성학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점성학은 내가 보기에는 [영지주의-시온수도회-장미십자단-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오컬트(채널링)]로 이어지는 서구 신비주의 전통에서 끊이지 않고 그 맥을 이어왔다. 서구의 점성학은 타로카드의 형태로 발전되기도 했다.
 
서구의 대표적 신비주의자인 에드가 케이시와 루돌프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은 죽고 나면 태양계의 행성들로 들어가 정화의식을 거친다. 이곳에 있는 각각의 행성들은 지구와 같이 어떤 특정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오면, 자신들의 생전에 했던 마음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이곳에서 받게되어, 영혼의 구성비율로서 갖게된다. 더 지성적이고, 더 용감하게 산 자들은 바로 이러한 때에 더 큰 기운을 받게된다.

가령 수성과 금성은 도덕을 주관하는 별이므로, 평소 도덕적으로 산 사람은 여기서 더 큰 기운을 얻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하자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사후에 수성과 금성의 힘을 충분히 받았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사후에 자신만의 껍질 속에 갇혀, 은둔자처럼 살게 된다고도 한다. 에드가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 수성은 마음에 속하고, 화성은 광기에 속한다. 
지구는 육신을 뜻하고 금성은 사랑을 의미한다. 
목성은 힘이며, 토성은 지구상의 모든 재난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모든 불완전한 물질이 토성으로 내팽개쳐지고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천왕성은 심령에 속하며, 해왕성은 신비에 속한다. 
셉띠무스(Septimus: 명왕성)는 의식에 속하며, 대각성(大角星: 목동자리의 가장 큰 별)은 발전에 속한다. ]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하늘엔 천상의 별, 내 마음엔 도덕률." 이라고 얘기했던 것은 놀라운 직관에서 나온 진리라고 슈타이너는 이야기한다. 우리 영혼의 아스트랄체는 말 그대로 별들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장대한 경외감, 경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비록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상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기 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별들의 세계와, 그 별들로부터 가장 고귀한 힘들을 받았던 우리 영혼의 고향에 대한 느낌이 우리 안에 일깨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률은 별들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을 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갖고 있는 영혼의 가장 크고 좋은 힘들은 바로 그렇게 별들로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 실상 보는 것은 죽음과 삶 사이에 살게 되는 영적 세계로부터 주어진 도덕률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신비에 관해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둔한 무감동과 무감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별들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라한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자질의 근원에 대해 진실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경이감을 가지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것이며 별은 곧 자신의 영원한 고향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 우리는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별들의 세계에서 산다고 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육체에서는 고기껍질에 불과할지 모르나, 죽고 나서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를 내면에 품고 있는' 위대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주를 윤회함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케이시와 슈타이너의 주장이었다.
 
혹자는 동양의 음양오행론이 서양으로 넘어오면서 서구 점성학의 발전에 보탬을 주었다고도 한다. 동양의 경우는 서구의 점성학과 달리, 음양오행이라는 일관된 체계를 이용한다. 권태훈 선사같은 경우는 지금부터 천 년 전 중국의 송(宋)나라 말엽 오성이 취규(聚奎, 규성 분야에 모임, 규성은 중국을 의미)하여 몽고족 가운데 징기스칸이 등장하고 세계를 정복, 몽고족의 위세를 떨칠 것을 예고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5성(五星, 金, 木, 水, 火, 土星)이 취두(聚斗), 두성(斗星)분야로 모이고, 두성은 28수 분야중 하나로서 지구상 위치로 우리 나라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시대가 2014년부터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육체와 정신을 묶는 의학론을 발전시킨 현성 김춘식 선생 같은 경우도, 천문학과 인간 육체에 깃든 오행의 에너지를 연관삼아 해석해왔다. 가령 2012년은 목태과(木太過)의 해로서 목기(木氣)가 불급하여, 간담이 허약해지고 따라서 신맛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줘야한다.
 
이를 보면, 인간은 케이시와 슈타이너의 태양계에서 각각의 성격을 상징하는 우주법칙인 오행(五行)의 기운을 받고(오행과 비슷한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제 4원소론이 있다), 현생을 살아가면서도 우주의 기운에 따른 오행, 섭취하는 음식의 오행의 영향을 받아 총체적으로 정신을 형성함이 틀림없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가 많기에,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하는 미개척된 한정된 현대과학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천문학적 근원과 신비의 연장선상에서, 밤하늘을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은 반드시 보아야 할 최고의 성단이다. 날이 좋으면 푸른 별 6개를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신화에 나오는 공주 7인의 이름도 여기에서부터 기인된 것은 아닌가 싶다. UFO 이야기로 잘 알려진 빌리 마이어는 이곳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물론 그가 UFO 사진을 조작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자백한 적은 있지만).

시리우스 별(Sirius) 또한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이자, 태양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별로서 알려져있다. 시리우스는 또한 아프리카 도곤 부족이 창조신화로 믿는 놈모가 온 곳으로서, 인류에게 지식을 전수해준 출처라고 믿어지는 곳이다. 이집트 대피라미드의 경우, 시리우스는 여왕의 방과 정렬하고 오리온좌의 경우 왕의 방과 일렬로 정렬하게끔 배치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국제유태자본의 영적 그룹인 프리메이슨과 시리우스 별의 관계는 반드시 필독할 만하다.
 
프리메이슨과 시리우스 별의 관계

<가이아 프로젝트>로 알려진 고(古) 장휘용 교수의 외계론에 따르면, 플레이아데스 행성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감성이 발달하였고, 시리우스 별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무적인 일을 하는 능력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자로 말하자면 동양문화권이자 여성을 상징하고, 후자로 말하자면 서양문화권이자 남성을 상징한다. 인간 영혼, 나아가 우주의 원소를 천문학적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현 인류의 기원 또한 우주의 행성들에서 윤회했다는 이론은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체과학적으로도 프레드 호일의 '범종론'을 비롯하여, 제체리아 시친의 수메르 신화(아눈나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이상의 이야기들에서 분명한 것은, 동서양 문화 모두에서 별자리 이야기는 곧 인간이 온 근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러므로 윤회를 상징하는 좋은 메타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별에서 다른 별로 끊임없이 영혼이 이동하는 그 장대한 윤회의 과정은 실제 케이시와 슈타이너, 그리고 장휘용 교수가 주장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메타포를 잘 응용한 것이, 일본에서 전생붐을 일으켰던 <나의 지구를 지켜줘(ぼくの地球を守って , 1994)>라는 작품이다. 전생과 환생으로 이어지는 러브스토리야 뻔한 것 아닌가 싶지만 이 작품은 스케일이 다르다. 다른 행성의 사람들이 지구에서 환생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방해꾼이라는 뻔한 도식의 환생이 아닌 다른 행성의 지구연구소 직원 6명이 연구소안의 그 복잡했던 인간관계를 그대로 가진 체 환생한 이야기 이고, 전생의 기억이 단편 단편 밝혀지면서 서로의 인간관계가 점점 명확해진다.

실제로 <유명인들의 전생>의 저자인 데이비드 뱅스는 한국 무인시대의 인물들을 거론하며, 그들이 집단으로서 환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고려시대 때의 무인들이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으로 다시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군인들 사이에서 크다고 말을 하며, 집단 카르마의 경우 비행기의 승객들이 전원 다 추락하는 경우가 있다 한다.


현대과학을 논함에 있어 진화론은 필수불가결한 생물학적 전제이며, 윤회론 또한 불교와 힌두교, 나아가 동양철학의 전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나는 문화 키워드의 마지막 주제로서 이것을 연관시켜 보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무신론과 유신론의 양축을 대표하는 두 사상이 되려 흡사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공통점을 논하기 전에, 차이점부터 이야기해야 논의가 쉬울 것으로 보인다. 잠깐 현대과학의 중심 사상을 비판하자면,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약육강식의 자연 속에서 각각의 생물들은 적응에 적합한 환경을 위해 진화를 해나가야 한다. 얼핏 듣기에 이 이야기는 굉장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대기업에 잘 보이려는 하청기업 직원들의 사투를 생각해보면 한결 쉬울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사실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을 정립하고, 그것이 근대에 와서 유물론으로 발전된 흐름처럼 유신론의 양축에 선 오래된 고대의 믿음이기도 하였다. 뉴턴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이 그러했고, 생명의 불완벽성을 보여준 다윈의 진화론이 그러했으며, 무의식을 쓰레기로 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러했고, 이후 인간은 '학습받은 대로만 훈련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반 파블로프와 F. 스키너의 이론들이 그러하였다. 특히 전두엽 절제수술을 시행했던 서구에서 '뇌가 없으면 의식도 없다'는 뇌과학 이론들이 그러한 유물론적 흐름에 윤활제를 넣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사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그리고 뇌사(腦死) 상태에도 기억이 유지되며,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는 뉴에이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고, 보다 세계의 현상들을 단일적, 불교적 개념으로 설명해주는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이론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또 법학자 필립 존슨이 쓴 <심판대에 선 다윈>이 보수학계에 열풍을 일으킨 바와 같이, 진화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이론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실 진화론은 자연계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惡)을 보기 좋게 설명하려고 한 허구적 시도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세가지로 압축해서 간략히 설명해보도록 한다.
 
 
(1) 시기적 문제
생물학자들은 동물과 식물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분류한다. 동물은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고 식물은 엽록소를 가지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피이며 철의 원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놀라운 녹색 요소인 엽록소는 마그네슘의 원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일부 절지동물과 연체동물, 특히 달팽이는 철과 마그네슘을 모두 갖고 있지 않으나, 그 대신 주석의 원자를 갖고 있다. 만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아주 기초적인 종류의 생명체들이 있다.
 
또 한명의 신비주의적 학자인 뒤 노위는 편조류가 그들 속에 포함된다고 서술했다. 편조류는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현미경으로 고여 있는 물을 보면 떼 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활기차다. 헤엄치고 뛰어다니며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들은 지극히 유연한 꼬리를 갖고 있으며 호흡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세포로 이루어진 몸이 부풀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눈 역할을 하는 하나의 점은 빛에 민감하며, 그래서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시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들은 마그네슘 집단에 속한다. 그들은 진화의 척도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 그들을 동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식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뒤 노위는 이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대답을 못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쨎거나 이런 저런 방식으로 최초의 유기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학자들은 정확한 순서를 알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아직도 엽록소가 없고, 대신에 남조소라는 색소가 있다. 청색 조류는 또한 무성이다. 그 다음으로 온 녹색 조류는 하나의 핵이 있으며, 번식할 때 유성 생식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능력이 있다. 녹색 조류가 성과 핵이 없는 청색 조류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설사 녹색 조류가 청색 조류에서 왔다고 해도 이런 결정적인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미경을 갖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진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 근접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들은 '어떻게' 또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말을 더듬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말처럼 유기체가 지극히 작은 박테리아에서 세포를 가진 생명체인 녹색 조류로 이행 발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친 비약이다.
 
게다가 캄브라아기에 엄청나게 다양한 유기적 다세포를 지닌 생물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는 사실은 진화론의 기계적 작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큰 문제가 있어 보인다.
 
 
(2) 구조적 문제
기계적 작용을 다루는 진화론의 문제점은 구조적인 문제에서도 명확히 들어나 보인다.
세 가지 예만 간략히 들자면,
첫번째 예로 인간은 수 천년 동안 크기와 상관없이 손목관절의 비율이 항상 일정해왔고 어떤 일말의 진화적 흔적도 찾을 수 없는데, 과연 수백만 년을 대입한다고 해서 이러한 형태가 '돌연변이'에 의해 변형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예로, 꽃 사마귀같은 종은 아이큐가 0에 가깝도록 환경인지 능력이 취약한 곤충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떻게 그는 자신의 색깔과 주변 환경을 동화시켜서 스스로를 숨길 궁리를 했을까?
세 번째 예로, 수많은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공작새는 적을 위협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복잡한 꼬리를 왜 가지고 있을까? 예컨대 공작새 수컷의 아름다운 꼬리는 천적들로부터 공격당할 가능성을 훨씬 높인다.
 
 
(3) 화석의 문제
화석문제에 관해서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왔는데, 사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도 이것은 증거가 되어주지 않고 반박할 근거가 되어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과거 종과 현재 종의 일치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선캄브리아기의 시조새와 현재의 시조새는 동종임이 판별 됐는데 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종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생물과 생물 간의 중간단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 무수하게 많은 생물들 중 진화론자들이 믿는 것처럼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된 예는 단 하나도 없다. 예컨대 박쥐는 두더지에서부터 왔다고 하고, 조류는 파충류에서부터 진화했다고 하는데 그 중간단계 화석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과학자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정립한 화석적 연대가 오류로 들어날 때마다 비과학적으로 연대를 지속적으로 수정해왔다. 루이스 리키 박사의 경우가 아주 좋은 예이다. 처음에 리키 박사는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를 발견하고 60만년 전 이상 된 것으로 계산했는데, 두개골은 450여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있어 잘 맞추어야했다. 그런데 후에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지질학자들이 연대를 다시 측정하자, 아르곤과 포타슘을 이용하는 방사화학 연대측정법으로 진잔트로푸스가 거의 175만 년 전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잔트로푸스의 두개골과 정강이뼈 하나만으로 죽음의 원인을 폐렴이라고 진단했다.

탄소연대측정법은 알려진데로 대단히 불완전하므로, 현대에 와서는 진잔트로푸스의 연대는 260만년~50만년 전의 것으로 확대되었다. 진화론의 화석적 증거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다. 과학자들은 겨우 한 줌의 치아와 두개골 몇 개, 그리고 십여 개의 턱뼈와 대퇴골을 근거로 바이덴라이히는 기간토피테쿠스(Gigantopithecus)가 50만년 전에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이 유인원 종 중 하나의 계통에서 출현했다고 하는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데르탈인의 뇌 크기는 상당히 다르며, 같은 연대의 자바원인과 북경원인의 몸 크기가 상당히 다른 바, 이것은 같은 계통의 인간이라기보다는 각각의 다른 원숭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게 더 합리적이란 것이다. 실제로, 7만 5천 년 전 지금의 이라크지역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발견된 바 있으며(이에 따라 과학자들은 자꾸 연대수정을 해나가며, 자신들의 과오를 지우려했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경우도 상당 수 있다.
 
네 번째로, 진화 또는 화석의 흔적이 많이 또는 거의 전혀 발견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물품과 사해가 발견되는 것은 인간이 각 지역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는 진화론적 연대가 불필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반박할만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경이나 진화론 모두 허구에 근거하는 것이 더 분명해보인다. 단지 최첨 과학의 이름으로 진화론을 지지한다고 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더욱 왜곡될 뿐이다. 그러면 이말인즉 윤회론과 진화론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일까? 아니다. 내가 처음에 입증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둘의 상관관계였다.

앞서 난 진화론이 허구라고 이야기했지만, 진화론 또한 얼마든지 종교를 지지하는 해석으로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과학의 이론은 유신론적으로도 자연주의적으로도 다 읽힐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 이론들은 두 가지 읽기를 위한 근거를 제공해왔다. 때로는 똑같은 개념이 성스러운 혹은 세속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조작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장 종교를 많이 침식했다고 간주되는 과학 이론들, 가령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리차드 도킨스에게 있어 다윈은 역사 상 처음으로 지적으로 만족할만한 무신론을 개진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다윈의 이론에 처음 동조했던 사람들은 찰스 킹슬리나 프레데릭 템플같은 기독교 목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킹슬리는 다윈의 이론이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훨씬 더 존경할 만한, “자기 자신을 낳는”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을 제안한다고 생각했다. 후일 영국 교회의 수장인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템플 역시 자연 법칙의 확대 적용을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자연 법칙이 도덕적 법칙을 유비적으로 지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말년에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지만, 다윈은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자주 진화론적 이론들을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 각인한 법칙들의 결과로 묘사하였다.
 
진화론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것은 무신론과 종교와의 대립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개념 역시 윤회론에 적용된다.
 
<윤회의 비밀>의 저자이자 뛰어난 심리학자였던 지나 서머리나 같은 경우 역시 진화론이 윤회의 개념에 가깝다는 점을 말하며, 지성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이 개념을 윤회 사상에 적용못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사실 다윈적 진화론은 힌두교의 믿음(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고, 인간에서 동물로 퇴보하고 하는 식의 윤회)와 티베트불교의 믿음과 동일한 가치체계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물질적 영역에서의 진화라면, 후자들의 경우는 보다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진화인 것이다.
 
사실 무신론의 영역에 있지만, 자연스럽게 윤회를 생각하게하는 서구의 무신론적 사상들은 상당히 많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말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는 비록 허구로 들어났지만, 모든 생명체가 태아기에 같은 모양에서부터 진화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세상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파타고라스의 주장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참고로 파타고라스는 윤회를 믿기도 하였다), 모든 사물은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떠오르게도 하며,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미래세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모든 사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사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헤켈의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는 니체의 영원회귀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재귀순환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다만 상기한 이들 철학의 공통점은 그들의 사상이 대체로 무신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유신론으로까지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저자인 한동석 선생이라면 이렇게 지적했을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훌륭했지만,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동양과학이라면 생명이 순환할 뿐만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다는 작용을 설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이 윤회론을 지지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고 보면, 그것은 유물론을 배제한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인간의식의 발달국면의 단계를 초개아심리학에서는 흔히 3단계로 분류하곤 한다. 대중들은 감정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가치를 강변하는 반면, 지식인들은 논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치를 강변하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신비주의자들은 통합적이고 개인과 집단의 가치 모두를 강변한다. 이를 음-양-중 이론으로 적용해보면, 지식의 단계에서는 '평균이하의 지능 - 대중 -지식인'의 3단계가 성립되며, 영성의 단계에서는 '평균이하의 영성 - 대중 - 성인'의 3단계가 성립되어 의식수준(통합 수준)과 인식수준(지적 수준)의 차이가 나뉘어지나, 중요한 것은 대중들은 언제나 이러한 차트의 평균값을 차지하며, 지식인과 성인들은 더 상위의 발달국면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3단계론에서부터, 심리학자 맨슬로우, 피아제, 콜버그, 에릭슨, 윌버 등의 위계론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개념들이고, 저널리스트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이론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을 직역해보면, 인간정신을 다루는 신비주의가 종교를 포함하고, 종교는 철학을 포함하며, 철학과 심리학이 더 하위차원인 생물학을 포함하는 구조로 우주가 만들어져 있으며, 그 역은 성립이 불가능하듯이, 우리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한 존재이나 수준차이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모든 생명체는 하위의 수준에서부터 모두 상위를 향해 진화한다. 진화를 위한 인간영혼의 윤회는 사실상 다윈의 진화론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는 점 또한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메바나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의 진화를 계속 밟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의식진화의 수준에 따라 이 세계에는 원자, 분자, 세포, 식물, 파충류, 원시포유류, 포유류, 인간, 그리고 신의 순서대로 그 계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주의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윤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죽을 때 어떤 형태의 물질적, 정신적 미련과 애증을 갖게되면 우리의 에너지체(에테르체)가 다음 생에 다시 육체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영화 <혹성탈출>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어느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처럼 원숭이가 인간사회의 일부가 되어, 나아가 지배하는 날이 올 수 있는 것일까? 또는 이러한 인간의식의 '진화의 계보'에서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 혹은 광물로 환생할 수 없는 것일까? 나의 생각은 의식의 에너지장이 다르므로, 다른 종(동물, 식물, 광물)으로 환생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가령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뚜렷한 의식수준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성, 감성 모두가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한낱 원숭이에 불과했던 인간이 왜 모든 동물들보다 '뚜렷하게' 발달된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된 것일까? 진화론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언어이다. 가령 인간과 진화계보상 가장 비슷한 종 중 하나라는 침팬치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효율적인 수단을 통해 언어를 가르쳐도, 기껏 침팬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어를 흉내내는 것 뿐이다. 인간은 전두엽에 다른 어떤 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한 언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침팬치나 오랑우탄, 원숭이들과는 다르게 좁은 기도를 갖고 있다. 그 좁은 기도(구강 구조)를 통해, 인간의 언어는 그러한 그 어떤 동물 동물의 소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자기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이성적 능력과 '느끼는' 감수성인 감성적 능력이 고도로 발달해야 가능한 일인데, 몇몇 동물들의 자살 예가 회자되긴 했으나, 이 정도의 인지능력은 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압도적으로 이성과 감성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발달하여,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하나로서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가 다스칼로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동물들과 다르게 로고스(Logos, 道의 내재)가 있다. 로고스는 곧 자아의식과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절대자의 부분으로 절대자의 또다른 부분인 성령은 창조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자의 역동적 힘을 나타낸다. 영원한 존재인 인간은 로고스적이며 성령적이기 때문에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동물은 단지 성령적일 뿐이어서 자아의식이 없다. 인간이 영적으로 높이 진화할수록 자신의 로고스적인 부분(자아의식)도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혹성탈출>에 나온 것과 같이 원숭이들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개소리를 담고 있는 다윈의 진화이론이 앞으로 학계에서 퇴출당할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윤회적 개념의 진화 '의식의 진화'이론으로 대체되어야할 것이다.

실제로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윤회는 더 큰 앎을 알기위해 필요한 진화론적 과정인 것이며, 현대사회는 그와 역(逆)으로 가며 파괴일변으로 치닫고 있다.

의식의 진보가 어떻게 거꾸로 역행하고 있는지 좀 더 심도있게 보기 위해 근대역사를 잠깐 살펴본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잉카와 아즈텍 문명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대탐험시대부터 시작하여(미개했던 그들은 심지어 어떻게 인디언들을 잘 죽이는지 내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일단 신대륙에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자 유럽 사회는 이러한 광물을 통해서 지난 700년간 상실했던 기축 통화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상업 경제가 발전하게 되니 이가 바로 '상업혁명'이다. 14-16세기 말까지 진행되었던, 유럽의 르네상스 운동은 사회의 전반적인 것을 변화시키고, 유럽 제국간의 잦은 전쟁들은 유럽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일조를 하게 되어, 유럽과 동양과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을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역전된다. 유럽에서 제작된 화포와 총포가 동양의 그것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다시금 유럽문명의 기술적 발전을 가져오는 한편, 인간 사회의 황폐화를 촉진시켰다. 제 1차 산업혁명의 경우,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모직물 공업을 하였고 광대한 식민지를 상대로 해외무역이 활발하여 많은 자본이 충족되어 온 상태였으며, 명예 혁명 이후 정치와 경제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18세기에 와서 국내외에서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산업혁명은 면직물에서부터 시작하여, 방적기(실을 짜는 기계)와 방직기(직물을 짜는 기계)의 발명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되었다. 와트가 발명한 증기 기관은(1765) 은 적은 연료를 가지고 강한 힘을 내었으며, 공장제 기계 공업의 발달으로 증기 기관이 공장에 보급되어 공장제 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면직물 공업ㆍ제철 공업ㆍ기계 공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19세기 초 미국의 풀턴이 증기선을 만들고, 영국의 스티븐슨이 1814년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여 철도 시대의 막을 열자, 교통수단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통신 기관의 발명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났는데, 유선 전신(1843, 미국의 모스), 전화(1876, 미국의 벨), 무선 전신(1896, 이탈리아의 마르코니)이 발명되었다.
 
결국 산업혁명 이후 원료와 제품의 빠른 수송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국제화 시대, 자본주의 시대가 개막되어 세계의 거리를 단축시키게 되었다. 기술적으로는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으로 탈바꿈했고, 경제 구조도 1차 산업보다 2-3차 산업의 비중이 높아져 농업 사회는 산업 사회로 변하여 본격적으로 '매연 덩어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으로 확산되면서 성장을 계속하던 유럽경제는 1873년부터 약 20년간 걸친 불황기를 맞이하였는데, 19세기말에 유럽은 이 불황을 벗어나면서 산업상의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맞이하고 과학적 발명과 기술혁신이 진행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제 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전력과 석유가 새로운 동력원으로 등장하고, 강철, 알미늄 등의 비금속, 전기, 화학공업 등 중공업부문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분야의 개척은 산업화 발전에 가속화를 가져왔다.
 
영국은 사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기 보다는, '매연이 꺼지지 않는 나라'였다고 부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에 들어서자, 1700년대에는 인도와 중국은 세계 GDP의 47%를 차지했고 유럽의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1870년대가 되자 , 서구에 의한 아편무역으로 황폐화된 인도와 중국의 비율은 세계  GDP의 29%로 낙하하고 서유럽은 42%로 점프했다. 동인도회사는 이 역전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유럽 제국은 16세기의 대탐험 시대와 상업 혁명, 그리고 잇달은 산업 혁명으로 얻게된 부를 서구제국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악용하였다. 북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사는 인디언들의 멸망, 중국과 인도의 몰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전 세계의 패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도 모잘라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필리핀(마르코스), 인도네시아(수하르토), 칠레(피노체트), 니카라과(소모사), 남아공(아파르타이드 백인정권) 등 숱한 국가들을 침략해왔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미국서구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이었다. 그들의 사주, 지원을 받아 (군사)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친미 사대 매판세력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들의 진짜 인권(범죄)문제는 미국정부, 그들의 소위 '인권NGO'들, 보수적 기업언론매체들에 의해 '인권문제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칭송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미개한 제국주의가 붙인 '인권문제', '테러리스트' 등의 꼬리표 달린 민족, 국가, 조직, 인물들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들 많은 경우가 세상 여러 곳에서 존경 받는 영예로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살해, 고문, 감옥, 굶주림 등 온갖 위협, 악조건에 굴함 없이 수십 년을 결연히 싸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지배에 맞선 대가로 '테러리스트조직' 딱지가 붙은 과거 PLO, 오늘 하마스가 좋은 예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발표한 북한, 중국, 쿠바,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이 사실은 모두가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 대신 '유료화'로 석유를 결재하는 것을 검토했던 국가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서구국가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세계가 얼마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평등해왔는가, 그 참혹한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을 예로 들면, 전쟁 시에 온갖 인권탄압, 학살도구로 쓰인 각종 살인무기, 고문기술을 해왔다. 그들의 끔찍한 인권범죄는 끝없이 가열찬 반파쇼반독재투쟁에 의해 타도되는 과정에 폭로되었을 뿐이다. 반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끝없는 봉쇄, 고립, 침략위협에 맞서 싸우는 반제자주국가들은 거꾸로 '인권문제(국가)'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끝없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서구의 제국주의와 물질주의 질서가 낳은 체계는 여러 부작용들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가 환경 파괴와 지나친 경쟁주의로 인한 인간성 파괴이다. 19세기 유럽의 인구는 산업화로 유럽에서 2배 이상, 영국에서 3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 문제, 노동 문제(노조 운동)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여러 인종간의 대립과 자살률 등은 사실 가난과 경쟁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 사회학의 견해이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이 세계는 거짓 투성이의 물질주의, 제국주의가 낳은 헛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세계는 전쟁으로 넘쳐나고, 불평등으로 넘쳐나며, 각종 상업주의와 경쟁주의에 자신의 신성(神性)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식은 다시 또 윤회의 길고 긴 순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명백히 현 사회는 진화와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만 풍요롭고, 의식이 더 상위의 단계로 진화하지 않으면 결국 생명체는 멸종하게 된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아도 옳은 개념이며, 윤회론적(또는 영적) 개념으로 보아도 옳은 개념이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은 인류는 결국 과거의 초고대문명(레무리아, 무, 아틸란티스) 처럼 멸망의 길을 걷게될 뿐이다. 결국 <아키라>의 세계관에서도 세계는 한번 멸망하고 나서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말하자면, 진화를 위해 윤회하는 것이다.

결국 넓게 보면, 인간은 계속 진화해간다. 다윈의 진화론적(개체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의식의 진화론적으로 말이다. 그 점이 윤회와 진화론의 유일한 상관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진보와 역행하며 갈수록 탐욕 자체로 치닫는 현대의 문명은 진화의 법칙에 의해 더 복잡성이 가중되기 보다는,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윤회론적 개벽(開闢)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평선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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