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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길로 들어선 일본 내셔널리즘


<무제>, 2004~2006-로드니 맥밀리언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를 보면, 일본 넷우익과 함께 송병준·이용구의 일진회를 떠올리게 된다. 일진회의 전신은 유신회이다. 이대로 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요시다 쇼인 이래 일본과 주변 대국이 오래전부터 모의해온 한반도 분할 지배가 조만간 완성 단계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요동을 포함한 만주까지 주무대로 삼던 한민족의 영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한반도 이남으로 축소됐다가, 다시 한반도 중부를 경계로 북은 중국에, 남은 일본에 각각 포섭당한 채 마지막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7세기에 한반도와 왜가 그런 식으로 갈라졌듯이, 미국이 주도해온 동아시아의 기나긴 전후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통일보다는 해양-대륙 두 진영으로, 남북 양극 분해에서 더 안도감을 느끼고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단계에 마침내 도달한 것일까.


"애당초 식민지배는 없었으며, 강제 연행이나 일본군 위안부 등은 좌익세력의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은 한반도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근대화를 도왔으며, 교육의 부흥에 힘썼다. 그럼에도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 남북한 양국이고, 재일 코리안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앞잡이·기생충이다." "바퀴벌레 조선인을 일본에서 쫓아내라!" "죽어버려!" "짱개들을 도쿄만에 처넣어라!"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후마니타스 번역 출판)에 등장하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회원은 그렇게 소리쳤다.


최근 도쿄대학에서 세이가쿠인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강상중 교수는 지난 1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3·11 사태까지 겹쳤지만 전후(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일본이 지금까지 쌓아 올려온 것, 그 토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내가 떠올리는 건 1923년의 간토(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들이다. 간토 대지진 뒤인 1928~29년 '쇼와 공황'으로 불린 금융공황이 밀어닥쳤다. 이어 1929년엔 뉴욕 증시 폭락과 함께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일본 경제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결국 만주 침략과 군부의 대두, 그리고 일본 국가 개조(군국주의화)로 나아갔다. 나는 그때 7~8년간 진행된 상황이 지금 1~2년 사이에 압축적으로 재현되는 게 아닌가 걱정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럽 나토처럼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일본 자위대가 정식 군대로 해외에 파견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만들려 한다. 그는 미군 점령하에 제정된 헌법과 그것이 만들어낸 의식 자체를 바꾸려 한다. 즉 전후 체제와 결별한 새로운 일본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 일본 일반 국민이 거기까지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재특회의 막말은 강 교수의 걱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베 망언의 뿌리


이에 대해 소외된 소규모 젊은 일탈 집단의 빗나간 언동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 또는 스테레오 타입의 천편일률적 엄살 내지 왜곡·과장이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특회의 막말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일본 실세 우익들의 최근 언동을 상기해보라.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와 중국 침략, 동남아 점령을 침략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아베의 발언. 침략의 학문적 정의를 들먹이며 말 돌리기를 하는 그 어설픈 주장의 속내는 한마디로 '그건 침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도한 것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천박하고 위험한 역사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일본 항공자위대 '731' 훈련기 탑승 쇼. 2006~2007년 1차 집권 때 그를 중도하차로 내몬 몰역사적 역사 인식은 2차 집권에서도 바뀐 게 없다. 엔저·인플레의 탈디플레이션 정책의 단기 성과에 힘입어 그의 기세는 오히려 한층 더 올라갔다. '애당초 식민지배는 없었으며, 오히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재특회 주장의 진원지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겠는가.


이미 아베 1차 집권 때,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강제동원 부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그를 당시 조지 부시 미국 공화당 정부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략 차원의 대중국 접근에 불필요한 잡음을 만들고, 사실상 한-미-일 삼각 동맹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아베의 극우 언동을 미국은 언짢아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까지 비난하며 선한 피해자 일본과 악당 전승국 미국이라는 일본 우익 특유의 전도된 자기최면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이 제동을 걸며 압박을 가하자 아베는 결국 워싱턴에 가서 사과했다. 도대체 피해자를 놔두고 왜 미국에 사과한단 말인가? 전후 일본의 국가 실체, 대미 종속 국가 일본의 본질이 거기에 날것으로 드러나 있다. 아울러 대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그들의 관리 대상에 지나지 않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도.


아베 2차 집권 때도 일본은 똑같은 문제로 또다시 미국에 사과했다. 이번엔 진사의 주인공이 아베가 아니라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하시모토 도루다. 하시모토는 '일본 군부가 성노예 동원에 개입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강제연행인지는 모르겠고, 게다가 정부가 직접 개입한 건 절대 아니다'라며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할머니들이 돈 몇 푼 타내기 위해 거짓말한다는 얘기다. 하시모토의 의중을 그대로 드러낸 일본유신회 소속 중의원 의원(7선) 나카야마 나리아키의 발언은 그들의 의식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나카야마는 피해자 할머니들이 정치 퍼포먼스에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예정된 하시모토와의 면담을 취소하자, 트위터를 통해 "(할머니들이) 하시모토씨에게 강제 연행의 내용을 추궁당할 것이 두려웠는가", "(거짓의) 가면이 벗겨지는 장소가 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예전부터 일본 핵무장을 주장하고 여성과 조선인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온, 역시 일본유신회 소속 니시무라 신고 중의원 의원(6선)도 그냥 있었을 리 없다. 원래 자민당 의원 출신인 그는 "일본에는 매춘부가 득실거린다"며 "오사카의 번화가에서 '너 한국인, 위안부지?'라고 말해주면 된다"고 거들었다. 딱 재특회 수준이다. 미국이 위험하다며 문제 삼은 것은 아베와 하시모토가 대표하는 이런 유의 언동이라기보다는 그런 언동이 불러올 재미없는 파장이었다.


강상중 교수가 1923년 간토 대지진을 떠올리게 된 사건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다. 간토 대지진 6년 뒤인 1929년 뉴욕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고, 이미 '쇼와 공황' 상태던 일본 경제는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일본 자본주의는 출구를 대륙 침략에서 찾았다. 1931년 만주 침략(만주사변)이 시작됐다. 그 다음해인 1932년 5월 15일, 일본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등을 살해하는 5·15 사건이 일어났다. 이누카이는 군부의 대륙 침략에 반대하다 살해당했다. 고삐 풀린 군부는 1936년 2월 26일엔 아예 천왕을 앞세워 권력을 찬탈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쇼와 유신'을 내건 '2·26 사건' 주모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명백히 메이지유신을 흉내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승승장구한 메이지 일본의 '기적'을 대륙 지배까지 확장하려는 장대한 꿈이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7년 일제는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중일전쟁)을 시작했다.


강 교수는 일본 장기불황 속의 3·11 대재난과 극우 아베 신조의 재집권을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급속히 진행된 일본의 군국화에 견주며 불길한 예감을 토로하고 있다. 3·11 이후 단기간에 1920~30년대의 일본 퇴화 과정이 압축적으로 재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도쿄 오쿠보, 쇼쿠안 도리,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도쿄 오다이바의 후지 텔레비전 앞에서 벌어진 6천 명의 거리시위 등.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신우익 준동은 6천여 명의 조선인 학살을 부른 간토 대지진의 악몽을 기억하는 재일동포에겐 아주 구체적인 위협이었다.



불안감 가득한 헛소리들


곳곳에 '유신'이란 이름을 내건 채 메이지 영광의 재래를 꿈꾸는 그들의 도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제는 식민지배를 통해 약탈할 '조선'도 없고, 마음대로 '진출'해서 급조해낼 만주국도 중원도 없다. 약탈과 식민지 초과 이윤을 보장해줄 땅도 없는 21세기에 그들의 꿈은 출발부터 헛된 것이 아닌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고, 여세를 몰아 기적 같은 개헌 작업을 완료해 자위대를 보통 군대로 만들고, 전쟁 포기 조항을 삭제한다고 한들, 저들이 다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의병 항전을 유린하면서 동학농민군을 휩쓸고 한반도를 다시 삼킨 뒤 제2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감행해 중국과 러시아까지 격파하고 진군할 대륙이 기다리는 세월이 아니지 않은가. 자본과 시장의 영토라 한들 지금의 일본 자본주의가 100년 전 파죽지세를 꿈꿀 형편은 아닐 텐데. 미국의 핵우산이 있다지만, 일본의 제2의 청일·러일 전쟁 시도는 중국과 러시아의 핵 공격 앞에 백일몽이 아닌가. 재래식 무기로도 일본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군사력 면만 본다면 일본은 해군력 세계 2위를 넘본다지만, 한반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할 수 없다.


일본의 근대 전쟁 승리는 서세동점의 압도적 우위의 서양과 절대적 열세의 동양이라는 비대칭 세력 구조 속에서, 서방 제국주의에 편승해서 가능했다. 그런 비대칭 구조는 이미 무너졌거나,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식 일본의 근대 독점권은 오래전에 해체됐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지위를 중국이 삽시에 일본 대신 차지했듯이, 오히려 힘은 일본에 불리한 쪽으로 급히 이동하고 있다.


야스다 고이치도 지적했지만, 일본 신우익과 넷우익의 발흥은 이처럼 일본의 상대적 지위 약화, 한때 아시아를 호령하던 일본 경제력과 전략적 파워의 급속한 쇠퇴에 따른 불안과 초조, 상실감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하면 아베와 그의 정치적 동반자 아소 다로, 하시모토 도루, 이시하라 신타로, 니시무라 신고 등의 도발적 언동과 그들에 대한 지지율 상승은 자신감에 찬 공세적 확장 의욕의 발로라기보다는 불안감 가득한 수세적 방어 본능의 발로일 수 있다.


강상중 교수의 걱정도 대외적인 면보다는 일본 국내 상황의 변화, 즉 일본의 군국화 내지 파시즘 체제로의 퇴락에 맞춰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 경험으로 보건대, 일본에서 '황도파'의 재등장과 존왕양이(尊王攘夷), 존황토간(尊皇討奸)을 내세운 급진 도막(막부타도) 세력의 21세기 버전 5·15나 2·26 시도가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리오.


그 길로 가면 일본은 위험하다. 무엇보다 일본 자신의 몰락을 재촉할 것이다.


그런데 아베와 아소의 자민당은 민주당에 정권을 내준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민주당 정권의 실패로 기사회생한 뒤 더욱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반동복고의 길을 택함으로써 위험한 길을 내달려갈 태세다.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 정권을 집권 1년이 채 안 돼 무너뜨린 것은, 오키나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의 알력이었다. 미국은 하토야마가 공약한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바깥 이전과 중국 및 동아시아 중시를 위험신호로 받아들여 압박을 가했고, 오랜 친미 노선에 편승해온 일본 외교·국방 관료들과 주류 언론이 미국 편을 들었다. 그 때문인지 아베 정권의 미국 경사는 도를 더하고 있지만, 미국이 과연 일본의 구원자가 돼줄까.


아베 신조의 '신' 자는 일본인이 숭상하는 메이지유신 영웅 중 한 사람인 다카스기 신사쿠의 '신'에서 따왔다. 신조의 아버지로 한때 자민당 실세였으나 암으로 사망한 아베 신타로의 '신'자도 신사쿠에서 딴 것이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메이지유신 주역들의 사상적 지주이던 요시다 쇼인의 문하다. 요시다는 말했다.



도요토미 침략 노선의 후계자들


"류큐(오키나와)를 손에 넣고 조선을 취하며, 만주를 누르고, 지나(중국)를 제압한 뒤, 인도에 임함으로써 진취의 세를 펴고, 그것을 굳게 지킴으로써 진구황후(신라를 정벌했다는 설화의 주인공)의 못다 이룬 뜻을 완수하고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지를 달성하라."


요시다의 이 지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메이지유신의 고향'이라 일컫는 조슈번, 지금의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도조 히데키 내각 상공대신과 군수성 차관을 지내고,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말한 만주국 총무청 차장 출신이기도 한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미국의 배려로 살아남아 전후 일본 보수합동의 자민당 55년 체제를 만들고, 미-일 안보동맹 강화로 이에 보답한 '쇼와의 요괴' 기시의 장녀가 아베 신타로와 결혼해 낳은 둘째아들이 아베 신조다. 그러니까 아베 신조는 기시의 외손자다. 메이지유신의 또 다른 주역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주는 대신 조선 지배권을 미국에서 보장받은 가쓰라 다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도 모두 조슈 출신이다.


이들과 메이지유신의 또 다른 고향 사쓰마(현 가고시마현 일원)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 지금 일본 1만 엔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탈아입구의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조선 정벌(정한론)을 부르짖은 것은 그 뿌리가 멀리 요시다 쇼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조선 침탈은 일본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침략을 위한 물적 토대 구축에 필수 불가결한 조처였다. 조선 식민지배가 제국 일본의 토대였다.


일제 때 수많은 조선인의 노동력 착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규슈 아소탄광 재벌가의 상속자로서, 아베 신조의 정치적 동맹자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은 만주국 총영사 출신으로 전후 일본의 토대를 놓은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이다. 역시 총리를 지낸 아소 다로의 여동생은 황족에게 시집갔다. 요시다 시게루 집안과 기시 집안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사토 가문에서 만나게 되는데, 기시 노부스케는 원래 사토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기시 집안에 양자로 입적했다.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기시의 친동생이다.


아베와 아소는 자신을 근대 일본의 출발점인 메이지유신과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경제 대국으로 부활이라는 성공신화 주역들의 직계 상속자로 간주한다. 그들의 언동은 같은 전범국이면서 아데나워에서 빌리 브란트 등으로 이어진 독일의 과거 청산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독일은 자신의 색깔을 죽이고 유럽에 사죄함으로써 앙숙이던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 형성의 주역이 되고, 유럽 최강의 경제 강국이 됐다. 독일은 '독일의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독일'을 택함으로써 다시 유럽의 중심이 됐다. 일본의 요시다와 기시의 후예들은 그와는 다른 길을 갔다. 그들은 독일 방식의 과거 청산과 단절을 거부했다. 요시다와 기시의 후예들은 선조의 방식을 정당하다고 여겼으며, 이웃에 대한 침략을 근대화의 시혜, 서구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던 민족해방운동이라 우긴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로 말미암은 이웃의 고통을 냉전이 무너진 1993년에야 처음으로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 담화문을 통해 공식 인정했다. 2년 뒤인 1995년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의 사회당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역시 담화를 통해 고노 담화 내용을 재확인한 후 사과했다.


냉전 붕괴와 함께 반공의 기치 아래 억지로 봉합된 일본의 과거사, 이웃 나라와의 미청산 과제가 하나둘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은 민주화와 더불어 경직된 반공체제에 균열이 가면서 한-일 우파 정권의 정치·경제적 유착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등 미국의 주도 아래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봉합된 과거사의 망령이 다시 출현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냉전 붕괴의 충격 속에 자민당 정권이 무너져 55년 체제 이후 처음으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비자민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그해의 고노 담화와 일본 패전 50주년인 그 2년 뒤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국내외의 정세 변동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범죄 인정을 거부하며 전후의 고도성장 속에 쌓아올린 기득권 속에 안주해온 일본 보수우파 주류 지배세력은 그들의 기존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뒤흔들어놓은 담화 수준의 인식과 사과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조차 그들에겐 충격이었다. 그것이 세세년년 누려온 기득권의 토대를 허물어버릴지도 모를 불길한 전조라는 걸 감지한 그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도쿄 전범재판부터 잘못됐다는, 이른바 수정주의적 '자유주의 사관'이 등장하고,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과 유사한 이름의 우파 국회의원 모임이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한 게 그 무렵부터다. 과거 청산과 단절을 모르고 살아온 그들은 메이지유신과 고도성장 신화 속에 일본을 강국으로 올려세운 자신들의 직계 선배들과 혈연적 선조들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수용하지 못한 채 거기에 거세게 반발하며 적극적 옹호와 미화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기 선조를 터무니없이 높이면서 이웃을 경멸하는 '혐한류' 따위가 우파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일본의 시대착오를 불러온 미국의 전후처리


지금 미약한 수준의 고노와 무라야마 담화 내용조차 인정할 수 없다며, 수정하겠다고 공언해온 아베와 하시모토와 이시하라 등이 바로 '자유주의 사관'의 대표적 신봉자이다.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와 기시, 요시다 시게루의 후예요 스스로 그들의 정신적 적자임을 선언한 그들로서는 당연한 자세일지 모른다. 스스로 후계자임을 천명한 선배들의 행적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자신에 대한 부정이 될 테니까.


기묘하게도 이것은 한국에서도 기막히게 닮은꼴로 복제됐다. 6·29 선언과 민주화운동의 귀결인 1987년 체제 등장으로 반세기 가까이 자연적 권리처럼 누려온 특권적 기득권이 일거에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한국 수구냉전 세력이 일본의 보수반동처럼 '역사 바로잡기'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실 바로잡힐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역사를 다시 수구냉전의 반공 스테레오타입으로 뒤집어놓겠다는 것이다. 그게 뉴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의 본질이 아닐까.


'동아시아의 일본'이 아니라 '일본의 동아시아'가 되려고 한 일본의 꿈은 1980년대의 거품경제 붕괴와 함께 깨졌다.


일본이 답답하고 위험한 것은, 거품과 환상의 붕괴로 인한 상처의 치유책을 동아시아의 일본이라는 현실에서 찾지 않고 여전히 일본의 동아시아라는 비현실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류 보수우익은 메이지유신과 전후 냉전체제와 한국전쟁이 선사한 고도성장이라는 일본 '기적'의 신화에 취한 나머지, 그것을 아시아의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일본 민족의 질적 우수성이 안겨준 특권적 자산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아베, 아소, 하시모토, 니시무라, 나카야마, 그리고 재특회의 언동이 하나같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설사 그들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세계관을 유지하는 한 그 결과는 동아시아에 또 한 번의 대재앙을 안겨주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베와 아소의 길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적 물적 조건은 이미 지난 과거가 됐는데도 그들이 일본 미래 재생의 길을 여전히 그 과거로의 반동적 복귀 속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런 시대착오는 상당 부분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자국 냉전전략의 동아시아 보루로 삼기 위해 전쟁범죄의 책임을 가장 무겁게 묻고, 가장 우선적으로 청산해야 하는 천황제를 두고 이용했다. 한때 공직에서 추방한 전범자들도 사실상 전원 복귀시켜 활용했다. 그들 자신이 초안을 작성한 일본 '평화헌법'을 미국은 냉전 초기부터 이미 스스로 무력화했으며, 일본 보수우파 정객에게 개헌 압박을 가했다. 냉전 붕괴 뒤에도 미국은 잠재적 주적을 소련(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꾸고, 동아시아 개입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재설정했다. 미국 안보군사전략의 양대 축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동아시아판 나토라 할 미-일 동맹의 전방위적 전개를 위해서는 군대 보유와 전쟁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을 바꿔야만 한다.


1960년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학생과 시민 세력의 격렬한 '안보투쟁' 저항 속에서도 미-일 안보동맹을 한층 더 강화했으나, 개헌 작업은 완수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외조부의 유지를 자신의 정치적 신조로 삼는 아베의 최대 목표가 개헌과 자위대의 보통군대화, 이를 통한 '전후체제'의 완전한 탈피일 것이다. 대두하는 거대 중국을 최대 위협으로 인식하는 일본 보수우파는 개헌 이후의 재무장과 그것을 토대로 한 미국과의 수평적 동맹강화를 21세기 생존전략으로 삼고 있다.


친미 노선. 1853년 '흑선'을 이끌고 우라가 해안에 나타난 페리 제독이 안겨준 제1 충격파, 제2차 세계대전 패배와 함께 밀어닥친 제2 충격파, 그리고 냉전 붕괴 이후 거대 중국의 등장과 함께 지금 밀어닥치는 제3 충격파를 일본 보수우파는 '제3의 개국'을 위한 호기로 삼자고 다짐한다. 일본은 제1, 제2 충격파를 모두 미국·영국이라는 서구 제1세계의 앵글로색슨과 손잡고 타고 넘는 데 성공했다. 제3 충격파 타고 넘기 전략도 역시 미국과의 동맹이 핵심 축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불행을 선사했다.


미국은 패전 일본을 통째로 차지하기 위해 홋카이도를 분단하자는 소련의 제의를 물리치고 대신 한반도를 분단 제물로 삼아 소련과 나눠 지배했다. 불행은 거기서 시작됐다. 뒤늦게 서울에 입성한 미 점령군은 도쿄 점령 미군처럼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반공정책을 강화하면서 친일파를 대거 기용했다. 일본 전범자들이 미국의 지원 속에 결국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이 됐듯이, 이 땅에서도 청산돼야 마땅한 친일파- 군국 일본 경영자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민족 식민수탈에 기여한 대가로 출세하고 영화를 누린 세력- 들이 반공과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다시 권력을 잡았다. 해방이 됐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항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제거당했다. 4·3 항쟁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을 앞세운 친일파의 광기 어린 정치적 반대파 색출·제거(학살) 작업은 그 극한까지 나아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일본 자민당 장기 일당지배를 보장한 보수합동의 55년 체제처럼 대한민국 부동의 기득권 집단으로 살아남아 확대재생산을 거듭해왔다. 냉전 붕괴의 충격 속에 일본 자민당 55년 체제가 한때 동요했고, 때로는 야당에 정권을 내주기도 했으나, 지금껏 건재한 것처럼 이 땅의 보수우파 기득권 세력도 그것을 복제하듯 닮은꼴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일, 그들은 실은 한 뿌리다.



닮아가는 일본 넷우익과 한국 일베


한국 현대사는 어떤 면에선 친일파와 그들의 권력 장악에 반대하고 저항한 다수 대중의 끝없는 싸움의 역사였다. 노도와 같은 민주화 혁명 속에 그들은 한때 흔들리지만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건재하다. 식민지배의 주역이 일본 본토로 물러간 뒤 미국이 다시 짠, 그들과 식민지 하수인 출신들이 주역을 담당한 일본과 한국의 전후 질서가 어느덧 70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 속에서 다시 형성된 계급관계는 확대재생산되고 이젠 과거로 환원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가고 있다. 남북도 한 나라였다는 사실이 먼 고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아스라한 과거사처럼 가물거린다. 북은 한 나라로 산 경험이 없는 남의 반공 세대에겐 지구상 어떤 나라보다 먼 적성국일 뿐이다. 내일 또는 며칠 뒤 다시 보자며 헤어진 부모형제들이 60년이 넘도록 소식을 알지 못한 기막힌 현실 속에서, 가족 또는 동족으로서 유대는 끊어져가고 있다. 오히려 미-일 동맹과 경제체제 편입 속에 이룩한 경제성장의 과실을 향수해온 세대에겐 일본인과 미국인이 훨씬 더 친숙하고 편안하고 소통 가능한 '동족'이 됐다.


우리는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전략에 너무나 철저하게 잘 적응했다. 미국과 일본은 동아시아를,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분단선을 경계로 미-일 중심의 해양세력과 그 최전방 보루인 남한이 중-러 중심의 대륙 세력과 그 최전방 보루인 북한이 대치하는 구도로 짰다. 오랜 반목과 대립 끝에 이 구도는 마침내 정착 단계에 들어가는 것 같다. 이제 한반도 남쪽의 다수는 미국 주도의 이런 동아시아 질서에 더는 저항하지 말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자고 속삭이는 것 같다. 못살고 불편한 북의 동족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침략과 식민지배의 구원도 잊어버리고, '같은 편'끼리 어울려 잘 살아보자고 속삭이는 것 같다. 어차피 한 세상 사는 데 편하게 살다 가는 게 좋은 것 아니냐고,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속삭이는 것 같다. 최근 좌익과 종북, 약자들에 대한 혐오와 멸시, 증오를 공통의 특징으로 삼고 있는 일베와 일본 넷우익의 등장도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하나의 지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외된 약자들의 엘리트층에 대한 반발 심리를 바닥에 깔고 있는 일본 넷우익은 얕은 사고력과 취약한 물적 기반 때문에 우파 민족주의의 강력한 자장에 이끌려 엉뚱하게도 자신들의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부락민이라는 일본 사회의 인종적·계급적 피차별 약자들을 향해 공격적인 화풀이를 하고 있다. 비슷한 배경을 지닌 한국의 일베 역시 강력한 반공주의와 우파 민족주의에 이끌려 자신과 계급적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는 사회적 약자와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인 정치적 반대자들을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을 소외시킨 세력을 결과적으로 편들고 있다. 역사란 본시 이런 것인가.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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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한승동 <한겨레> 기자. 서강대 사학과 수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한겨레> 문화부(서평 담당) 기자. <한겨레> 국제부장,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등 역임. 민족(통일)·국제 분야에 관심이 많다. <대한민국 걷어차기> 등의 저서와 <디아스포라의 눈> <나의 서양음악 순례> <시대를 건너는 법> <속담 인류학> <우익에 눈먼 미국> <부시의 정신분석> <원전 없는 미래로> 등의 역서가 있다.

출처: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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