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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류의 원형과 그 세계사적 의의  

서정록


1.

이땅의 조상들이 이루어냈던 아름다운 도, ‘풍류(風流)’는 지금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시대에 우리의 삶을 옭아맸던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길은 원래의 풍류의 모습을 왜곡시켰고, 오랫동안 우리문화에 덧씌워졌던 외래문화 또한 이땅의 풍류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종내는 이땅의 풍류의 원형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풍류는 중국의 유불선(儒佛仙)의 영향 하에서 해석되어 왔다. 유불선이 들어온 후 이른바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풍류’를 만들어 어리석은 민중을 교화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러한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중국으로부터 유불선이라는 학문다운 학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과 같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이땅의 고대문화나 정신으로 유불선 이외의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유불선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문화다운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러한 해석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유불선이 전래되기 전에는 이땅에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고,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시각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벽화를 보면 샤마니즘이 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즉 샤마니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무덤 내부의 공간이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에는 그에 상응하는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에 견주어 유불선은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만큼 샤마니즘의 세계관이 뚜렷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백제, 신라, 그리고 고대 일본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땅에 내놓을 만한 문화가 없었다는 식의 해석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鸞郞碑) 서문에서 ‘국유현묘지도, 왈풍류, 포함삼교 접화군생(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包含三敎 接化羣生)’이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땅에는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풍류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가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물질의 욕망이 생기면서, 그리고 중국의 유불선이 덧씌워지면서 그 아름다운 도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짧지만 함축이 많은 위의 문장을 대할 때면 왠지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이 짙게 느껴지는 것이다. 



2.

우리민족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영적인 민족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의 유교정책 하에서 이땅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받던 무당(샤만)들이 하루아침에 천한 하층민으로 전락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그때 이래로 그들의 사회적 활동을 미신으로 치부하는 상황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나라보다도 샤만이 많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땅의 기층문화로서 샤마니즘이 갖는 뚜렷한 위치를 말해준다.이땅의 현재의 샤마니즘 현상이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샤마니즘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동안 국가화, 계급화, 물질화의 길을 걸어온 우리역사와 함께 변화한데다, 기복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땅의 샤마니즘의 영적인 지혜가 모두 소진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과제는 이땅의 샤마니즘 현상을 비판하고 폄하하기보다는 그동안의 물질화하고 기복화의 길을 걸어온 샤마니즘 문화를 생명과 평화의 길로 거듭나도록, 그래서 이땅에 다시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가 피어나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현실계와 영계가 시계의 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고 본다면, 영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정신적, 문화적 현상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땅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 삼국시대 이래 국가체계의 확대와 신분과 계급 제도, 그리고 물질적 욕망의 확대재생산의 구조를 발달시켜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현재 이땅의 샤마니즘 현상은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그 이전 시대의 샤마니즘 현상과는 많이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것이 현재의 샤마니즘 현상에서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요소’를 전혀 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샤마니즘의 현상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변화해왔지만, 기본적으로 영혼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와 계급, 신분, 물질적 욕망 등과 같은 외부의 영향과 함께 샤마니즘 현상과 영성에 상당한 변이와 기복적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이땅의 풍류의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북미 인디언들과 시베리아의 일부 소수민족과 아프리카와 호주, 아메리카 등지의 제3세계의 원주민들의 영적인 삶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혀둔다.

  

따라서 이땅의 고대의 풍류문화를 이해하고자 할 때 부득이 국가와 계급과 물질의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무래도 이땅의 고대 풍류는 국가와 계급과 물질이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기 전 이땅의 소박한 민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수한 영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라 할 때는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의 샤마니즘 현상, 또는 가깝게는 전통시대의 북미 인디언들이나 일부 제3세계 민족들의 국가와 계급과 물질적 욕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적인 삶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3.

‘풍류’라는 용어는 최치원 선생의 난랑비 서문에 나타나기 전에 중국에서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풍류’란 말의 의미를 둘러싸고 혼란이 있는데, 중국에서 풍류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위진(魏晉)시대이다. 그때는 유교를 국교로 했던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영적인 사고가 크게 위축된 시대였다. 유교와 노장에서는 영혼과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히 중국에서 샤만의 활동은 끊어지고, 그 빈틈을 방사(方士)들의 신선사상과 도교가 메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이 풍류라 할 때의 ‘풍(風)’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국풍(國風)’, ‘정풍(鄭風)’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래와 가무, 시문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풍류라 할 때 중국에서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시문(詩文)이나 주연, 가무를 즐기는 귀족적 향취 내지 북방민족들에게 쫓기는 신세를 한탄하고 은둔자적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청담(淸談), 현학(玄學)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전자가 왕희지(王羲之)나 석숭(石崇) 등의 인물로 대표된다면, 후자는 완적(阮籍)이나 혜강(嵆康) 등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들 수 있다. 신은경, <풍류 - 동아시아 미학의 근원>, 보고사, 1999, 20쪽 이하; 孔繁, <魏晉玄談>, 遼寧敎育出版社, 1991.   


그에 반해 샤마니즘 문화를 토대로 하는 동북아의 풍류는 <바람 風, 흐를 流>, 즉 ‘바람과 물’의 영적인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이 한나라 이래로 영적인 사고를 부정하고, 인문주의적 경향을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이땅의 문화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성의 토대 위에서, 1)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살아있는 생명이며, 2)모든 존재는 영적으로 평등하고, 3)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4)서로 의존하며 살아가고, 5)각각의 존재는 모두 다 그 나름의 임무와 직분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사고는 북미 인디언과 제3세계 원주민들의 영성에 대한 이해에서 잘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류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풍류와는 그 함의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무릇 중국의 풍류가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시문과 술과 가무로 그들의 답답한 심사를 푸는 문화라면, 이땅의 풍류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를 토대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통합을 이루고, 일상의 삶에서 신성함을 찾으며, 주위의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근본적인 방식을 말하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이땅의 풍류적 사고의 전제가 되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사고란 무엇인가?

북유라시아와 북미 원주민들의 샤마니즘에서 샤만(또는 주술사)들은 영성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설명해왔다.북유라시아 원주민들의 영혼의 개념에 대해서는 Ivar Paulson, Die primitiven Seelenvorstellungen der nord-eurasischen Völker, Stockholm, 1958; Harva, Uno, The Mythology of All Races: Finno-Ugric, Siberian, 1964, pp.4-10 등에 정리되어 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영혼의 개념에 대해서는 Hultkrantz, Åke, Conceptions of the Soul Among North American Indians, Stockholm: Caslon Press, 1953에 정리되어 있다. 민족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영혼, 또는 생명을 대체로 숨결, 피, 불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ㄱ.숨결

ㄴ.피(또는 물)



먼저 숨결을 보자. 

많은 아시아와 아메리카, 호주, 아프리카 등지의 원주민들의 창조신화를 보면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물을 만든 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자,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창세기에도 전해진다. 

여기서 생명의 숨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람이다. 그 바람이 우리의 몸에 들고 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이 된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곧 바람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인데, 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다 숨을 쉰다는 것이 샤마니즘의 생명관이다. 말하자면 동식물은 물론 해님도, 달님도, 산도 강도, 심지어 우리가 무생물이라 치부하는 돌멩이까지도 숨을 쉰다고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벽화에는 천정의 해와 달이 숨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산이 춤을 추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 춤을 춘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고구려벽화에는 이처럼 모든 존재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샤마니즘의 생명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숨을 쉬는 동안 우리의 숨결은 주위의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섞이게 되어 있다. 우리가 들이쉬는 숨결에는 다른 존재들의 숨결이 들어와 있고, 나의 숨결은 다른 존재들의 숨결에 갈마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서로의 숨결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자연과 우주의 차원으로 확장하면 우리는 숨을 쉬는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숨을 쉬는 행위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숨을 쉬는 이 작은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몸을 도는 피는 어떤가. 고대인들은 피가 곧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상처가 나 피를 많이 흘리게 되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피는 물이다. 우리 몸의 70%가 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음식이나 음료수의 형태로 물을 섭취한다. 그리고 그 물은 신진대사를 통해 몸밖으로 분비, 또는 배출되며, 그것은 하천을 통해 바다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수증기가 되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우리는 그 물을 받아 마신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드나드는 물은 단순히 들고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드나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물은 또한 다른 존재들의 몸을 넘나들게 되고, 결국 이 물의 순환과정을 통해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물에 이러한 태도는 특별히 하와이인들의 사고에서 잘 나타난다. Michael Kioni Dudley, Man, Gods, and Nature, Honolulu, 1991, p.vii.  


우리의 숨결과 마찬가지로 물, 또는 피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람과 물은 우리의 몸을 넘나들며 다른 존재들과 우리를 관계시키고, 서로 이어주며, 서로 의존관계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고대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관통하여 흐르면서, 생명세계가 지속되도록 해주는 근원적인 에너지, 또는 생명력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성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들은 그러한 근원적인 생명력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바람과 물을 비유로 들었던 것이다. 



5.

시베리아의 샤마니즘의 연속선상에 있는 북미 원주민들 또한 이와 동일한 사고를 갖고 있는데, 그들 역시 바람, 물, 영성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Gregory Cajete, Look to the Mountain, 1994, p.178. 북미 원주민 전통에서 ‘모든 존재를 하나가 되게 해주는 구성요소는 바람과 물, 그리고 영성’이라고 말한다.  

특히 전통시대 북미 원주민들의 경우 아시아와 동북아의 샤마니즘이 물질화, 계급화, 국가화, 기복화의 길을 걸어온 것과 달리 고대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그들의 순수한 영적인 삶은 오늘날 영성운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서남부 인디언들과 나바호족은 바람이 생명의 숨결이 되어 우리 몸을 드나드는 것이 얼마나 영적인 것인가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James Kale McNeley, Holy Wind in Navajo Philosophy, Univ. of Arizona Press, 1981. 


그들은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가 춤을 춘다고 말한다.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나뭇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다. 바람이 불어 산의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을 두고 산이 춤을 춘다고 말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긴 사람이 노래하고 춤춘다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주가 우리의 몸에 불어넣어준 생명의 숨결은 우리 몸 안에서는 생각이 되고, 밖에 나가서는 말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의 근원이 바로 숨결임을 그들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물의 이런 영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호주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런 바람과 물의 순환에 기초한 영적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리라고 예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마태복음 3:11).


이 문장에 나오는 ‘성령holy spirit’이란 말은 '성스러운 숨결holy breath'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번역한 말이다.Timothy Freke & Peter Gandy, The Jesus Mysteries, 1999, p.37. 참고로 세례란 바람과 물의 영성에 몸과 마음을 씫김으로써 거듭나게 하는 것으로, 영지주의전통에서는 재생, 환생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사람이 늙은 나이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은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으니라(요한복음 3:5-8).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정확히 ‘물과 바람’이다. 이때의 성령 역시 위의 세례요한의 경우처럼 성스러운 숨결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인 것이다.위의 책, 같은 곳. 

따라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영적 이해가 고대 샤마니즘의 영적 이해와 동일선상에 서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바람과 물에 대한 영적 이해는 초기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친 로마시대의 이교도와 영지주의적 전통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6.

바람과 물의 이러한 영적 특징을 북미 원주민들은 나선형, 또는 원의 상징을 통해서 설명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신성한 원(Medicine Wheel)’, ‘생명의 원(Circle of Life)’, '원안의 원(Circle in Circle)'이 그것이다. 의상과 각종 생활도구에 장식된 나선형 무늬, 또는 원을 통해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면서 변화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구려벽화에서는 바람과 물이 나선형과 원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데, 류운문(流雲紋) 형태의 각종 바람이나 구름, 물결, 햇살, 넝쿨, 화염  문양이 그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본인의 <백제금동대향로>(2001, 학고재)의 266쪽 이하를 참고할 것.   

특히 덕흥리고분, 쌍영총, 수산리고분, 삼실총 등에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구분짓는 도리에 이러한 류운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바람과 물의 나선형, 원의 형태가 현상계(지상계)와 영계(천상계)의 경계를 나타냄을 뜻한다. 아무르강의 소수민족들은 이러한 나선형, 원의 무늬를 건축물의 기둥과 도리, 각종 생활도구 등에 장식하는데, 이는 이러한 무늬가 일종의 기도, 또는 주술적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Lopatin, Ivan A., The Goldy of the Amur, the Ussuri, and the Sungari, Vladivostok, 1922, pp.331-347; 같은 이의 The Cult of the Dead Among the Natives of the Amur Basin, Mouton & Co., 1960, p.23. 


흥미롭게도 고구려벽화의 이러한 류운문은 당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선비족의 경우 외에는 중국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한나라 이래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면서 영적 사고가 결여된 중국문화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참고로, 중국에서는 한나라 초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벽화와 유사한 승천신화를 갖고 있던 강남의 초나라 등지에서는 무덤의 관과 각종 장신구에 류운문을 장식했었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 이러한 류운문 장식은 급속히 소멸한다. 

그에 견주어 나선형 형태의 류운문은 삼국시대의 각종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의 유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바람과 물로 상징되는 풍류적 사고가 이땅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

바람과 물의 영적 의미를 상징화한 이러한 나선형, 원의 도상은 샤마니즘에 기초한 티벳 불교의 만달라에서도 확인된다. 티벳 불교의 만달라는 원과 사각형을 기조로 복잡하게 짜여져 있는데, 티벳의 만달라가 이처럼 복잡한 형태로 발전한 이유는 인도의 초기 만달라 위에 점차 형이상학화, 존재론화한 불교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Tucci, Giuseppe, The Theory and Practice of the Mandala, Dover, 1961. 

그런데 그들이 만달라 도상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실제로는 나선형, 원으로 상징되는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원이라는 것은 그 위에 무수한 점이 있다고 하면, 그 각각의 점은 원에 의존하고, 원은 각각의 점에 의존한다. 이렇게 원 위의 점들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다른 점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게 각각의 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작인 동시에 끝이 된다. 이렇게 원 위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원 위의 점들은 높낮이 없이 모두 평등하다. 그와 함께 각각의 점은 중심이 되며, 주인의 자리가 된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중심이며 주인의 위치에 있는 것과 같다. 어디 그뿐인가. 원이 우주의 만물을 상징한다면 원의 모든 존재를 관통해서 흐르는 생명력은 신이 되고, 그 신은 다시 각각의 존재에 내재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북미 원주민들의 원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티벳 불교의 만달라에 대한 핵심적 통찰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람과 물의 영성을 상징하는 이러한 나선형과 원의 문양, 또는 도상들은 고대의 샤마니즘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유럽의 고대민족인 켈트족의 나선형 장식무늬가 그러하며,Nordenfalk, Carl, Celtic and Anglo-Sacon Painting, George Braziller, 1977 

아무르강 중하류 지역에 거주하는 고아시아족 - 나나이족, 니브흐족, 울치족, 우데헤족, 네기달족 등이 그러하며,Laufer, Berthold, The Decorative Art of the Amur Tribes, Memoirs of the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Volume VII, Part I., The Knickerbocker Press, 1902. 

또한 북유라시아를 휩쓸던 스키타이-흉노족Aruz, Joan, et la(eds.), The Golden Deer of Eurasia: Scythian and Sarmatian Tresures from The Russian Stepp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0; 國立中央博物館, 스키타이 황금, 조선일보사, 1991. 

과 그들의 후예인 게르만-바이킹족의 나선형, 원의 도상이 그렇다. 또 샤마니즘 문화를 갖고 있는 제3세계 원주민들의 각종 의상에 장식된 무늬와 생활도구에 장식된 나선형, 원의 무늬들이 그렇다. 



8.

최치원 선생이 일찍이 <이땅에 아름다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고 했던 풍류는 이와 같은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풍류도가 퇴락해가던 신라 말기에 그가 이와 같은 풍류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성에 바탕한 영적 지혜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풍류의 인식론을 이른바 ‘접화군생(接化羣生)’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는데, 이 접화군생에 대해서 그동안 학자들은 ‘민중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바람과 물에 대한 영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이러한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모든 행위가 서로 관계지어져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접화군생은 일상의 신성한 행위 또는 삶 속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뭇 생명들이 살아간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신라인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접화군생이라고 하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학자들은 왜 이 접화군생은 그리도 다르게 해석하는가! 그것은 이 개념에 접근하는 많은 이들이 유불선이 전래되기 훨씬 전부터 이땅에 존재했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마니즘은 영혼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현상과 변화를 바라본다. 그런데 영혼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 세계를 어떻게 가시적으로 표현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바람과 물에 의한 영적 비유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이 접화군생의 의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놀랍게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설명으로 ‘시(侍)’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신다는 것은 안으로 신성한 영(혼)이 있고, 밖에는 천지만물의 기화가 있으며, 세상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여기서 안으로 신성한 영(혼)이 있고, 밖에는 천지만물의 기화가 있다는 <내유신령, 외유기화>는 곧 안으로는 신령한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천지만물의 기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내유신령, 외유기화>란 말은 모순된 말이다. 왜냐하면 ‘신령’이란 영(spirit), 또는 영혼을 말하는데 반해, ‘기화(氣化)’란 주자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자학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 또는 영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현상계 너머의 그 모든 작용을 이화(理化)로서 설명한다. 그것은 원리, 법칙을 말할 뿐 영혼을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령과 기화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양자를 함께 쓰고 있는 것이다.  

수운 선생 역시 이러한 이질적인 개념의 조합으로부터 생기는 문제점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나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던 언어적 한계 때문에 부득이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들이 동학을 어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내유신령, 외유기화> 속에 담긴 함의를 보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이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운 선생이 <내유신령, 외유기화>라고 말함으로써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모신다는 것은 안에 있는 신성한 영의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일상의 행위(氣化) 속에서 세상사람들이 모두 다 귀중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 선생의 이러한 시(侍)에 대한 이해는 정확히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이해를 갖고 있던 민중들의 지혜에 바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내유신령, 외유기화>는 <내유신령, 외유접화(內有神靈, 外有接化)>으로 푸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된다. 기화를 접화군생에 나오는 ‘접화(接化)’로 푸는 것이 옳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기화(氣化)’는 신령과 양립할 수 없는 주자학적 개념인데다 자칫 유물론적 해석을 범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20세기초 천도교에서는 위의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개념을 물질의 발전에 따른 의식의 진화로 해석해왔는데, 이는 ‘기화’를 유물론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동학의 토대인 조선 민중의 지혜에 담긴 샤마니즘의 영적 이해를 놓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더라면 안으로는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일상의 삶이라는 민중적 지혜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운 선생이 신내림을 통해 깨달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왜 주자학의 ‘기화’가 아니라 샤마니즘의 영적 지혜를 배경으로 하는 ‘접화’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접화군생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자. 

이 접화군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접화’와 ‘군생’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군생’은 뭇 생명이 살아간다는 의미이니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그렇다면 접화는 어떤가. 

먼저 ‘접(接)’‘접(接)’의 문자그대로의 의미는 ‘만남’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접신(接神), 접견(接見), 접물(接物), 영접(迎接), 대접(待接, 接待), 접촉(接觸) 등의 말이 여기에 든다. ‘연결’, ‘이음’ 등과 같은 접의 다른 의미들은 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接, 交也’로 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무당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들을 만날 때 사용하던 말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신접(神接)’, 또는 ‘접신(接神)’이라 하면, 현상계와 영계의 만남, 또는 그 경계를 뜻한다. 무당들이 영을 접하는 것을 그리 표현했던 것이다. 또 우리가 흥이 났을 때, ‘신난다’. ‘신명이 난다’, ‘신이 오른다’는 등의 표현을 쓰는데, 이 또한 접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접은 현상계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만나거나 그와 관계된 영적인 만남에 사용하던 말인 것이다. 


샤마니즘 현상의 하나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접의 성격은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또는 신이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 또한 정신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정신과 달리 우리의 몸이 세속적인 것이고, 그래서 신성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몸은 신성한 영 또는 정신과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이와 관련해서 하와이 원주민들의 문화를 연구하는 Michael Kioni Dudle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구지성사에서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되어 왔다. 신, 천사, 그리고 인간의 영혼만이 spirit를 갖고 있는 것으로 말해져왔다. 사람의 경우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은 오직 영(spirit)이나 영혼뿐이라는 것이다. 자연히 신, 천사, 그리고 인간의 영혼 이외의 모든 존재들은 물질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한마디로 물질은 생각하고, 의지하거나 다른 형태의 앎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서구 사상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러한 분리와 구분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그 한 가지는 인간의 생각하는 영혼이 어떻게 물질로 이루어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몸에 말을 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물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의 몸이 생각할 수 없다면, 당연히 몸은 생각하는 영혼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와이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 또한 생각하고 의지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물질로 된 인간의 몸 자체가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며, 그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력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질로 된 몸이 의식하고 그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다는 생각은 하와이인들이 그들의 행위를 설명하는 방식 - ‘발이 걷는다’, ‘귀가 듣는다’, ‘손이 집는다’ - 에서도 설명된다.” Michael Kioni Dudley, 앞의 책, pp.36-37. 

샤마니즘에서는 대체로 영혼을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free-soul이고, 다른 하나는 body-soul이 그것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자를 말하며, 후자는 몸에 해당한다. 이렇게 몸 또한 영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봄으로써, 비로소 일상의 행위가 기도도 되고 종교도 되는 일상과 종교의 일치가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접신이나 신명과 같은 영적인 만남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의 영혼의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이요 행위라는 것을 상기하면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동안 서구식 교육을 받아 몸과 물질은 세속적인 것이고, 정신과 영혼은 신적이고 고귀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몸의 움직임에 영혼이 함께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 또한 영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샤마니즘의 영혼관이다. 우리의 몸은 그냥 body가 아니라 spiritual body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과 영혼의 분리를 허용치 않는 것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는 그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몸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일상의 행위에는 신성함이 깃들게 된다.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행위가 단순한 세속적인 행위를 넘어 거룩하고 신성해질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하고 신성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접이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행위, 즉 일상과 종교의 일치와 분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데,현대 과학자들은 우리의 정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보는 듣는 정보들은 모두 상징에 불과하다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현상에 존재하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상(像, image)은 우리의 머리에서 재구성한 것일 뿐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의 시지각은 망막에 맺힌 상을 전기로 바꾸어 뉴론을 통해 뇌에 전달하고, 뇌에서는 그 전기 신호들을 재구성해서 다시 영상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의 영상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에서 전기적 신호를 재구성해서 만들어낸 영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재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상징이요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귀로 듣는 소리의 정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귀에서 외부의 소리를 디지털정보로 바꿔서 뇌로 보내면 뇌에서 이를 다시 재구성해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듣는 소리는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요 관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점은 냄새를 맡는 후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은 사건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TV를 통해서 보는 것이라든지 가수의 노래를 라디오로 청취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지만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고 이해를 하지만 그것은 정보일 뿐 현장과 실재는 아닌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일찍부터 알고 있던 북미 원주민들은 일종의 기도의 의미를 다양한 도상(圖像)의 문화를 발달시켰고, 이를 각종 의상과 천막, 생활도구 등에 장식했다. 그들은 실재와 상징 또는 실재와 관념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일치된 일상의 행위 속에서 신성함을 찾을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일상과 종교를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던 근본 소이다. 일상과 종교가 분리되면, 즉 우리가 몸으로 하는 일상의 행위가 정신이나 영혼과 분리되면 우리는 실재가 아닌 주관적 관념 속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구나 아시아권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상징과 관념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으로 몸을 통한 수련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인도의 요가나 중국의 기공, 우리 선가 쪽의 수련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정보들이 상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데 반해서 몸은 에너지를 통해 직접 만나고 접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몸을 통한 만남, 교류, 수련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한계가 극복될 수는 있겠지만, 일상과 종교의 분리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북미 인디언들이 일상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행위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흔히 우리의 몸에는 빛과 온기의 생명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몸을 가지고 다른 존재나 대상과 관계한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생명의 에너지를 통해서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생명에너지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로 통합된,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에 다름아니며, 일상의 행위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행위는 바로 이때만 가능한 것이다. 최치원 선생이 풍류를 말하면서 <접화군생>이라고 했을 때 ‘접(接)’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접의 이러한 성격은 모든 존재를 ‘모시라(侍)’는 말로 압축하고 있는 동학의 가르침처럼 우리에게 일상의 모든 행위가 신성하고 거룩해지도록 주위의 모든 존재를 공경하고 돌볼 것을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접은 먹고, 입고, 쓰는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늘 기도하고, 감사하고, 되먹이라고 가르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은 다른 존재들이 자신의 귀중한 목숨을 우리에게 내어준 것이고, 우리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는 폭력과 저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불균형과 부조화로 이끌 것이다. 일상 속에서 감사와 되먹임을 통한 살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접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도, 풍류가 바람과 물의 영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영적으로 평등하며, 다 존재이유와 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남을 교화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조상들과 제3세계의 원주민들은 말한다. 만남은 언제나 평등해야 하며, 오직 그때에만 평화가 있다고.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동학에서 그들의 최소조직의 명칭에 접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접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고 서로를 영접(迎接)하고 대접(待接)하고 접촉(接觸)하는 모든 행위가 신성한 행위임을 가리키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접은 단순한 물리적 만남, 또는 관념적 만남이 아니라 영적인 만남, 즉 영혼과 영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관계의 정화(精華)’, 또는 ‘관계의 성화(聖化)’라 할 수 있으니, 접은 일상적 삶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나선형 춤을 통해 모든 존재를 그 중심에 이르게 하고, 신을 만나게 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생명세계의 모든 존재는 춤을 춘다고 말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춤이라는 것이다. 에너지의 파동과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접은 이러한 생명에너지가 나선형 또는 원의 춤을 통해 그 중심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원의 춤을 통해서 근원적인 에너지에 이르는 이슬람 수피교의 사마춤(또는 whirling dervish)에 비유된다. 북미 원주민들은 이러한 나선형 춤을 ‘뇌조의 춤’이라 말한다. 


이런 이유로 샤마니즘에서 접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현재’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데, 오직 그때에만 일상의 행위들 속에서 신성함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접화의 또 한 부분인 ‘화(化)’는 교화(敎化), 감화(感化), 변화(變化), 그리고 화육(化育) 등의 예에서 보듯이 변화와 성장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영적인 만남을 뜻하는 ‘접’과 변화, 성장을 가리키는 ‘화’를 합친 접화는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동안 사람들이 영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접의 개념과 동학에 나타난 민중적 지혜를 바탕으로 접화군생의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으로는 영의 작용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동안 영적으로 변화하며, 뭇 생명들이 살아간다. 

內有神靈, 外有接化. 羣生. 


여기서 일상의 신성한 행위라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악이 되지 않고 거룩하게 되는 행위로,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늘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의 신성한 행위는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의 균형과 조화로운 관계를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꽃 한송이가 피려면 해도 비춰야 하고, 비도 내려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고, 별들도 비춰야 하고, 땅 속의 미생물들이 도와주어야 하고, 하다못해 지나가는 동물들이 아는 척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온갖 부대낌과 시련과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날 기적처럼 피는 것이다. 

결코 자기 혼자서 꽃을 피워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자연의 형제,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서 핀다는 것이다. 접화군생은 바로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사람은 물론 동식물과 해와 달, 별, 산과 강,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존재를 공경하고, 그들과 균형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하나되는 가운데 영적으로 성장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땅의 아름다운 도, 풍류는 이와같이 우리의 일상의 모든 행위 - 움직이고, 행동하고, 만나고, 관계맺고, 노래하고, 그림그리고, 사냥하고, 일하는 모든 행위, 숨쉬고 밥먹고 배설하고, 자고 일어나는 모든 행위가 신성한 행위가 되도록,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주위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하나되고,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삶의 원리를 가리킨다.  



9.

이러한 풍류적 세계관에서 나의 행위는 나 개인의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행위 -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 - 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고 돌아 결국 내게 돌아온다. 때문에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는 사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보다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풍류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이 세상의 생명에너지는 그 자체로는 선(善)도 악(惡)도 아니다. 마치 태양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에게 고루 비치고, 비가 대지 위의 모든 존재를 고루 적시듯이 생명에너지 자체에는 호불호가 없는 것이다.  

나의 행위는 결국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는 것이다. 내가 자연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나되고 행복해지는 삶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고, 물질을 탐하고 이기심을 발동하여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선도 되고 악도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풍류는 생명의 에너지를 모든 존재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모두가 더불어 하나가 되고 행복해지도록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거스르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풍파(風波)에 시달린다’고 했으니, 이는 곧 풍류의 길에서 벗어나 자연과 불균형과 부조화에 이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또한 이 세상의 생명에너지는 잠시도 그 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물이 흐르듯이 부단히 흐른다. 그래서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생명에너지는 끊임없이 변한다. 이것은 주위의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른 존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늘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 속에서, 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풍류의 세계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최치원 선생은 유불선 삼교(儒佛仙 三敎)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안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와 같고, 무위로서 일을 하고 침묵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행함은 석가의 교화와 같다.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여기서 ‘국가에 충성한다(忠於國)’는 것은 국가체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진흥왕 때 설치된 화랑제도는 국가체계 하의 호국사상(護國思想)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화랑이 제사(祭祀)를 받들던 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나, 이때의 제사 또한 국가의 신궁이 설치되고 체계화된 뒤의 각종 의례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체계가 개입하면 영적인 순수한 삶은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영적인 순수한 삶을 살고 있는 시베리아 소수민족이나 제3세계, 또는 북미 원주민들이 여전히 부족공동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만일 그들 사회에 국가체계가 개입한다면 그들의 영적인 순수한 삶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국가가 개입하기 전의 모습인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로 고치는 것이 옳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땅의 조상들의 풍류적 삶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안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않고 무위의 삶을 살고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침묵을 사랑하고, 악행을 멀리하고 늘 선함을 위해 힘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조상들의 풍류적 삶의 태도는 놀랍게도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전통시대 북미 원주민과 일부 제3세계 원주민들의 생태적이고 영적인 삶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이땅의 풍류가 샤마니즘 문화와 그 영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본문에서 밝힌 대로다. 그러나 개별 샤만의 치병이나 영적 의례와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례와 제도는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샤만이 치병과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차원에서 행위가 이루어지나, 후자는 부락 내지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다양한 관계와 의례, 문화, 축제 등을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샤만과 추장, 부족의 어르신 등 영적 지도자들로 구성된 <어르신들의 모임(Gathering of the Elders)>이 그 중심적 위치를 갖는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영성과 문화로서의 풍류는 주로 이 후자의 차원과 연결된다. 현재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북미 원주민들과 중미의 콰테말라의 추투질 마야 부족, 그리고 일부 제3세계 원주민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 서문을 쓸 당시, 비록 국가화, 계급화, 물질화의 영향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고대 동북아에 면면이 전승되어 내려오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를 상당부분 들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10. 

서구의 자연과학이 이 세상을 지배한 이래로 오늘날 전세계의 전통문화와 원주민문화는 물질화되고, 상품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 결과 조상들의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과 영적인 지혜는 망실되고, 자연은 우리의 삶의 주요한 부분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을 위한 물적 기반(환경)으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거미줄같은 관계망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던 이땅의 아름다운 도를 잃어버린 채 갈수록 개인주의와 자아의 섬에 갇혀 가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상황은 19세기 중엽 동학이 태동되던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이 잃어버렸던 풍류적 세계관 - 이 생명의 세계관, 친자연적 세계관을 바로 알고, 그것을 다시 세워, 자연을 살리고 모든 존재가 더불어 하나되고 행복해질 수 있는 생명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풍류적 세계관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새로운 영성과 평화 운동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진로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국내의 생명평화 운동에 새로운 풍류적 인식론과 미학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있으니,북미 원주민인 나바호족은 이러한 풍류의 세계관을 일컬어 ‘축복의 길’, ‘아름다운 길’이라 부른다. 그러한 축복의 길, 아름다운 길이야말로 나의 삶의 터전인 자연(또는 어머니 대지)과,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모든 존재가 하나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 속에서는 일상의 삶이 곧 기도가 되고, 종교가 되고, 예술이 되고, 미학이 된다. 

바로 여기에 이땅의 풍류가 갖는 보편적이고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11.

1990년대 이래 서구의 대체의학계에서는 기존의 인식체계, 또한 인간을 몸과 마음과 감정, 정신으로 나누어 분석해오던 인식체계로는 온전한 인간이해와 치료에 한계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고, 기존의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틀이 아닌, holistic view를 통해서 인간의 몸과 마음, 감정, 정신을 하나의 에너지 체계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나’이며, 몸과 마음과 영혼에 대한 개별적 접근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부분적인 설명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총체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그 참된 인격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서구의학 이외의 전통의학과 제3세계의 대체의학을 모두 묶어 ‘vibrational medicine’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Richard Gerber, Vibrational Medicine, Bear & Compant, 2001.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새로이 바람, 흐름, 결, 떨림의 인식론, 곧 바람과 물의 풍류적 인식론을 요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 생명과 평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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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실하 항공대 교수는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에서 아리랑(ALIRANG)은 '맞이하다'는 뜻을, 쓰리랑(SERERENG)은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뜻도 모르고 민요 후렴구로만 사용해 왔던 '아리랑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유전학적으로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유전자와 한국인의 유전자 형을 분석한 결과 70% 가량이 전형적인 몽골로이드의 유전형을 보이기도 하였고, 부계 Y-DNA에서도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이 단어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점은 시베리아에서 우리 선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아리랑 몽골어 어원설
 
몽골의 에벤키(Evenks)족 언어에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 등의 단어가 있다. 우리말에는 이미 그 뜻이 잊혀졌지만 에벤키족 말에는 그 뜻이 아직 화석처럼 살아 있다.  
 
‘아리랑 ALIRANG[aliraŋ]’의 여러 의미 가운데 ‘맞이하다(接)’, ‘영접하다/맞이하다(迎接)’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어웡커족의 샤마니즘의 전통과 관련 지어 보면 ‘죽은 자의 영혼을 맞이하다/영접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점은 ‘아리랑’,‘쓰리랑’의 어원을 살펴보는 부분에서 다시 상론하기로 한다. 

그러나 어웡커족은 숙신(肅愼)의 후예(後裔)이며, 읍루(挹婁)의 유부(遺部), 말갈(靺鞨)의 근친(近親), 여진(女眞)의 방지(旁支)[27.1.1. 烏力吉圖, “鄂溫克族族源略議”, 鄂溫克族 歷史資料集 第三輯, 161쪽.] 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부여나 고구려 계통의 말과 이들 어웡커족의 말이 고대에는 같은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보인다

Evenks 족의 솟대

제1장. 아리랑과 아라리요의 의미

문자가 없는 어원커족의 말을 10여 년 동안 수집 연구하여 국제음성기호를 바탕으로 만든 ‘에벵키어-중국어 사전’인 鄂漢詞典(1998년)에 나와 있는 아리랑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ALIRANG[aliraŋ] 
① 接(맞이하다), 迎接(영접하다, 맞이하다) 
② 接受(접수하다. 받아들이다), 承認(승인하다. 허가하다, 받아들이다, 시인하다) 
③ 承担, 承當(담당하다, 맡다), 担負 (부담하다, 맡다, 책임지다) 
④ 包干(책임지고 맡다), 包班(맡다, 독단하다. 독점하다) 
⑤ 忍耐(인내하다), 忍受(참고 받아들이다), 容忍(용인하다) 
⑥ 主班, 主持(주최하다, 주관하다) 

‘아리랑’의 의미영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맞이하다’, ‘영접하다’, ‘받아들이다’, ‘맡다’의 의미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하다’, ‘참다’, ‘참고 받아들이다’의 의미영역이다. 

‘아리랑’을 ‘맞이하다, 영접하다’의 뜻으로 새기면 ‘아리랑 고개’는 ‘님을 맞이하는 고개’의 의미가 된다. 

또한 ‘아리랑’을 ‘참고 받아들이다, 감수하다, 인내하다’ 등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아리랑 고개’는 님을 보내는 슬픔을 참고 감수하고 받아들이는 ‘님과 이별하는 고개’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아리랑 고개’는 결국 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보내기도 하는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고개’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지금도 에벤키족의 말에 아리랑은 ‘맞이하다/영접하다’와 ‘이별이나 슬픔을 참고 받아들이다’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에 보이는 ‘아리리요’를 ‘아라ㄹ + 이요’로 분해한다면, ‘아라리요’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원커족의 말에는 ‘아라-르(ALAAR)’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래와 같다. 

ALAAR[alaar] 
① 花色的, 雜色的 斑駁的 (혼란한, 어지러운, 복잡한) 
② 不齊的, 不整祭的, 各式各樣的 (같지 않은, 각양각색의) 
③ 異樣的, 不相等的, 不相似的 (다른, 서로 다른) 

‘아라리요’를 ‘ALAAR + 이요’로 보면 ‘아라리요’의 의미는 ‘서로 다르구나’, ‘혼란스럽구나’, ‘어지럽구나’ 정도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의미는, 
(1) ‘참자 참자 (님과 내가) 서로 다르구나’, 
(2) ‘인정하자 인정하자 (님이 나와) 같지 않구나’, 
(3) ‘감수하자 감수하자 (님이 나와 같지 않아) 혼란스럽구나’ 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조금씩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대체적인 의미는 ‘님이 나와 서로 다른 것을 참고 인내하자’라고 볼 수 있다. 

어원커족의 말에 남아 있는 ‘ALIRANG’과 ‘ALAAR’의 뜻을 살려서 본조아리랑의 가사를 해석해보면 노랫말의 뜻이 분명해진다. ‘ALIRANG’과 ‘ALAAR’의 여러 가지 뜻을 넣어서 해석해보자. 

● 본조아리랑의 해석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참자 참자 님이 나와 다르구나.( 님이 나와 달라 혼란스럽구나) 
(님이) 이별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감수하자 감수하자 님이 나 같지 않구나. (님이 나 같지 않아 혼란스럽구나) 
(님이) 이별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제2장. ‘쓰리랑’․‘쓰리’의 의미 

에벵키족의 언어사전을 보면 

SERERENG 
①知覺(지각하다), 察覺(살펴서 알다), 感到(느껴서 알다), 感觸 (감촉하다), 感知(감지하다), 感覺(감각하다) 
② 醒(술, 마취 등에서 깨다, 잠에서 깨다), 醒悟(깨닫다), 覺醒 (각성하다) 
③ 小心(조심하다), 謹防(주의하다, 유의하다) 

SERIRENG: 醒(술, 마취 등에서 깨다, 잠에서 깨다), 睡醒(잠에서 깨어나다) 

어원커족의 말에서도 우리의 모음조화(母音調和)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어서, ‘SER-’ 뒤에서는 ‘-RANG'이 아닌 ‘-RENG'이 접미사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SEREBUNENG: 感受(감수하다), (感應(감응하다). 
SEREBUNG: ① 感性(감성) ② 感覺(감각). 
SEREBURENG: 使知覺(지각하게 하다), 使感覺(감각하게 하다). 
SERENGE: 感覺(감각). 

‘SERERENG’의 독음(讀音)을 우리말로 표기하면 ‘써러렁’ 혹은 ‘쓰러렁’과 거의 같고, ‘SERIRENG’은 ‘써리렁’ 혹은 ‘쓰리렁’과 거의 같다. 
‘쓰리 쓰리랑’은 ‘알았네 알았다네’ 혹은 ‘깨어났네 깨어났어’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아리’의 의미 

에벵키족의 언어사전을 보면 
‘아리’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는 아래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ALIḠ’로 ‘고개, 산허리, 산등성이’를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ARI’로 ‘요정․귀신․유령․망령․도깨비’ 혹은 ‘혼불․도깨비불’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아래와 같다. 

ALIḠ[aliɤ] : 山腰(산허리, 산기슭), 山坡(고개) 
ARI[ari] : ① 妖精(요정), 魔(귀신, 유령, 망령, 도깨비) ② 鬼火(혼불, 도깨비불), 磷火(도깨비불) 

첫째, ‘아리’를 ‘ALIḠ’로 볼 수도 있다. ‘ALIḠ’에서 보이는 ‘Ḡ’의 발음은 우리나라의 ‘그’와 ‘허’의 중간쯤 되는 발음으로 한글에는 없는 발음이다. 굳이 한글로 발음을 표기한다면 ‘아리그’와 ‘아리흐’의 중간쯤 되는 것이다. 

‘아리(ARI)’의 이런 의미는 지금도 내몽고 북부의 강 이름과 지명에 남아 있다. 곧, 내몽고 동북부의 어룬춘(鄂倫春)자치기(自治旗)에 속하는 아리허쪈(阿里河鎭)과 주변의 아리허(阿里河)라는 강 이름이 그것이다. 
아리허(阿里河) 즉 아리강(阿里江)은 에벵키족 말로는 ‘아리 베라’(ARI BERA)라고 하는데, 베라(BERA)는 강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리 베라’라는 이름은 강기슭에 혼불, 도깨비불 혹은 반딧불(燐火)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방 샤마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에벵키족 등 동북방 소수민족들은 우리의 부여-고구려족들과 마찬가지로 2차장을 지냈다. 

1차로 시신의 탈골을 위해 풍장(風葬) 혹은 수장(樹葬)을 지낼 때 나무기둥 위에 시신을 얹는 샤만의 무덤을 브리야트족은 
‘아란가(ARANGA)’ 또는 ‘아란고(ARANGO)’라고 부르며, 
야쿠트어로는 ‘아랑카(ARANGKA)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어간 ‘ARAN-’은 영혼과 관련되고 샤만과 관련된 말들로 서로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또 쉬로코고로프(S. M. Shirokogoroff)에 의하면 쿠마르첸(Kumarcen), 비라르첸(Birarcen) 그리고 흑룡강 유역의 러시아 남부지역 여러 에벵키족들의 말에서 어근 ‘AR-’는 ‘되살아나다(to revive)’ 혹은 ‘숨쉬다(to breathe)'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 ‘ARENKI’란 말은 혼령이 죽은 뒤에 아직 저승에 이르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ghost)를 가리키는데, 저승으로 가지 않고 ‘되돌아온 혹은 되살아난(revive) 혼령’으로 몸을 갖진 못했으나 힘을 갖고 있는 혼령을 말하며, (2) 브라르첸(Birarcen) 에벵키족의 말 ‘ARRAN’은 ‘되살아나다(he rivives)’란 뜻이라고 한다. 

또한 만주족 샤만 이야기인 니샨샤만전(尼山薩滿傳)에서 죽은 아들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곡(哭)을 표현한 노래 가사에는 ‘아라(ARA)'라는 후렴구가 매 문장마다 붙어있다. 다른 노래에서는 ’아라 코라(ARA KORA)'라는 후렴구가 나오기도 한다. 

‘아리(ARI) 아리랑(ALIRANG)’은 ‘영혼을 맞이하다/영접하다’의 의미로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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