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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상투틀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위만이 상투를 하고 조선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위만이 상투를 튼 것은 조선인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통이 고구려에 연결되어 초기 고구려인들도 상투를 하였다.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 사진들(위)을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외상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좌) 고구려 고관들 (중) 수박싸움을 하는 병사들 (우) 안악고분의 문지기 모습


고구려의 상투는 일반적으로 외상투가 많았고, 간혹 쌍상투가 보이기도 한다.(중국 집안현 5호 벽화의 문지기 사진) 쌍상투는 생머리를 2갈래로 땋은 뒤, 말아올려 뒷통수의 머리 위까지 올린 상투를 말한다.


(좌) 상투를 튼 석상 (중) 고구려 각저총에 나타난 상투 (우) 신라인의 상투를 보여주는 작품


벽화의 시기를 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상투가 높고, 시기가 지나가면서 상투가 낮아진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 변화 때문이다. 4-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때 중국 한나라와 다양한 교류를 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중국 남북조 및 돌궐, 유연 등의 민족과 교류하면서 이질적인 헤어스타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점차 가벼운 단발을 하거나 북방식 변발을 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중국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상투튼 병사들의 훈련장면(좌)과 복원도(우)


남쪽의 삼한에서는 괴두라고 하여 동글동글하게 말아올린 상투를 틀었는데, 이것이 백제 남성의 머리 모양으로 이어진 듯 하다. 신라는 정수리를 뽀족하게 만든 상투를 볼 수 있으나, 점차 삼한 시대의 머리 모양을 벗어나 독자적인 형태를 이어간 듯 하다. 특히 삼국을 통일 한 이후 지배층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화려한 머리 모양을 한 듯 하다. 발해는 <머리를 땋아 길레 늘어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시대의 상투틀기


상투를 쓸 때 쓰던 망건


원래 상투는 여진족과 강족, 인도인, 막부시대의 일본 무사,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도 볼 수 있는 풍습이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기록과 벽화를 볼 때 우리 민족 고유의 상투 트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상투와 우리의 상투 모습이 확연히 다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투 풍습이 이들과 관련있음이 입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말기, 몽골의 침입으로 변발이 성행하였다. 몽골인들은 머리의 앞부분 반을 모두 밀어 버렸는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투를 트는 풍습은 중지되었지만, 그렇다고 몽골식으로 앞머리를 모두 밀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 이 변형된 변발 풍습이 소위 말하는 <백호치기>로 연결된다. 상투를 틀때 정수리 부분의 중앙 머리(소갈머리)를 깍아 버린다. 가운데 머리가 뻥~~ 하니 사라지면, 주변머리를 가운데로 말아올려 상투를 트는 것이다.


소갈머리를 없애는 것은, 상투 머리의 부풀어오르는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투를 감싸주는 망건과 동곳이 잘 고정되게 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는 머리를 안깍을 경우 여름철에 너무 덥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상투는 결혼을 하거나 성인식을 거쳤을 때 올리기 때문에 상투를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성인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양반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반이지만 결혼을 못한 이들은 대놓고 상투를 하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것을 <건상투>라고 한다.


<소갈머리 없다>나 <주변머리가 부족하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소갈머리는 상투를 틀어야만 생긱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양반이 아닌 계층은 소갈머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문이 미비한 중인들이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면 신분 파악을 못하는 놈이기 때문에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되는 것이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은, 상투를 틀지 못한 아이들이 머리를 땋아서 말아올린 쌍상투를 튼 것에서 이야기 된다. 아이들은 주변머리가 아닌 생머리를 땋아서 <새앙머리>를 만들어 다니는데, 만약 주제 파악을 못하고 양반집 자제와 같은 머리를 하는 평민이 있다면 눈치, 코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발령


상투가 사라진 것은 1895년 고종황제의 단발령에 의해서이다. 이 때, 유생들은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베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따라서 단발령은 국내 여론을 고려해 일부만 실시되었고, 성년식을 거친 유생들이 몰래 상투를 하는 것까지 제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상투가 사라진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때였다.


반면, 상투가 사라진 조선 사회에서 유생들은 짧은 머리를 부끄러워 해서 모자를 쓰고 다나기 시작했다. 신여성들이 다양한 악세사리로 첨단 패션을 보여주고, 개화파들이 멋진 양복과 구두를 뽐낼 때 이들의 유일한 악세사리는 머리를 가리는 모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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