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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더해서 인간은 지상의 현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배워야만 한다. 

그 첫 번째로 인간은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키기를 배운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전적으로 간과한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성을 공간 내에 적응시킨다는 사실에서 인간과 동물 간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 중 하나를 건드리게 된다. 동물은 공간 내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균형 상태를 발달시키도록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다. 어떤 동물은 기어오르도록 규정되어 있고, 또 어떤 동물은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등등. 동물은 애초에 조직되어 있기를 자신에 알맞은 방식으로 공간에 들어선다. 유인원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 동물학자가 이 사실을 숙고한다면, 예를 들어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며 얼마나 많은 수의 유사한 뼈와 근육이 있는지 별로 강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균형 관계를 위한 완벽한 소질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비해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전체 존재로부터 균형 관계를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한다. 걷지 못하는 존재에서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에게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에게 수직적 자세, 공간 내의 균형 상태를 주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중력에 대한 관계에 대치시킨다. 사실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고찰에 있어서는 외관상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이 점을 아주 쉽게 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기어오르는 동물이 기어오르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도 똑바로 서서 걷도록 조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주시해 보면 동물의 경우에는 조직의 특성이 공간 내로 들어서도록 만드는 요소임에 비해 인간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임을 알 수 있다. 영혼이 공간에 대한 관계 내로 들어서서 조직을 극복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배우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일한 것으로서 현신에서 현신으로 전진하는 존재로부터 스스로 배우는 두 번째, 그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인간을, 일단은 인간을 통해서 물체적 세계를 관통하는 정신 생활의 주체로 만든다. 말을 할 수 있기도 전 어린 나이에 외딴 섬에 방치된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은 사람은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 자주 강조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유전으로 물려받은 것, 후일의 삶을 위해 고정된 상태로 유전의 법칙을 따르는 것, 그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서 일곱 살이 되면 이갈이를 하도록 유전 관계를 통해서 이미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다. 외딴 섬에 있다 하더라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면 이갈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기는,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서의 영혼 존재가 고무되어야만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자아의식을 아직 지니지 않은 바로 그 시기에 후두 발달을 위한 기초를 형성해야만 한다. 거슬러 올라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그 시기 이전에 후두 발달의 형성을 위한 기초를 놓아야만 후두가 언어 기관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번째가 있다. 사람이 스스로를 통해서, 달리 말하자면 한 현신에서 다음의 현신으로 건너가면서 자신의 내면에 지니는 것을 통해서 배우는 그것은 사고 세계 자체 내에서의 삶이다. 두뇌에 작업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고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삶의 초기에는 아직 그 기관의 조형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지니고 다니는 그 존재의 의미에 따라 두뇌를 사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일단은 형성해 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출생 직후의 두뇌 상태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힘들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전생에 따라 고유한 존재로서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사고 내에 표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 출생 후에 - 부모나 조상에게서 물체적으로 독립적이 되면 물려받은 두뇌의 특질을 스스로 변형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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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체험했던 것이나 행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회상을 자주 해 보면 아주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경험을 더욱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네 삶의 이 시기나 저 시기에 너는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말했었던가?"라고 자문해 보면, 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


이 관찰을 자주 하면, 이론적으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완전한 생활 실천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인간이 실행해야 할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식적인 이해력으로 실행해야 한다면, 모든 관계를 조망하는 지능으로 실행해야 한다면, 삶에서 그리 멀리 나아갈 수 없으리라는 점은 이론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단지 다음의 사실을 숙고해 보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 어느 연령기에 자신의 현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행하는가? 인간이 언제 자신에게 가장 지혜로운 행위를 하는가? 

태어나서 부터, 지상의 현존에서 흘러 보낸 세월을 후일의 삶에서 되돌아보면 아직 기억해 낼 수 있는 바로 그 시기까지 그렇게 일한다. 사오 년 전에, 그리고 훨씬 더 이전에 했던 것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어린 시절의 특정한 시점에 이른다. 그 시점 이전으로는 더 이상 기억을 더듬어 올라갈 수가 없다.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그 특정 시점에까지만 이를 뿐이다. 사람이 자신을 나로 느끼기를 배우는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하다. 


기억이 정상적인 삶의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시점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 이전에 인간 영혼이 자신에게 가장 지혜로운 일을 행한다. 나중에 자신의 의식에 도달한 상태에서는 어린 시절의 첫 해들 동안에 잠재의식적인 영혼 근거로부터 실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비범한 것을 인간이 스스로에게 행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전생의 열매로 얻은 것을 출생을 통해 물체적인 세계로 들여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이 갓 태어나서는 예를 들어서 신체적 두뇌가 아직은 상당히 불완전한 도구다. 이제 인간의 영혼이 그 도구에 일단은 섬세한 구조를 만들어 내어서 영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매개가 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인간 영혼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되기 이전에 이미 실제로 두뇌에 일을 한다. 그래서 두뇌가 전생의 결과로서 영혼의 소유가 되는 모든 능력, 소질, 성향 등을 실현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신체에 하는 그 일은, 인간이 나중에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 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관점에 의해 이끌어진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인간이 자신의 두뇌를 조형적으로 완성시키는 일, 그 일만 하지는 않는다. 



한 인간이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인 의지 자극으로 포괄하는 자아 외에도 그것보다 더 힘찬 두 번째 자아가 자신 내부에 있다는 통찰에 머지않아 이른다. 이러한 통찰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더 고차적인 힘으로서의 그 두 번째 자아에 순응하는지 알아보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는 선함과 진솔함으로 기우는, 완전히 의식적이고 명료한 영혼 존재로 포괄하는 자아에 비해 그 두 번째 자아를 더 낮은 존재로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더 낮은 존재를 극복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내밀한 자성이 그 두 번째 자아에 대해 조금 다른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것이나 행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회상을 자주 해 보면 아주 기이한 발견을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경험을 더욱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네 삶의 이 시기나 저 시기에 너는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말했었던가?" 라고 자문해 보면, 실은 나이를 먹은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했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칠팔 년 전에, 아니면 이십 년 전에 어떤 일을 했다고 하자. 그에 대해 이렇게 확언할 수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네 오성의 폭이 넓어져서 네가 그때 했었던 일, 그 때 했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의 자기 발견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이 영혼에 대한 그런 자성을 자주 하면 비범한 효과가 있다. "네가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들을 사실 오래전에 했었다. 당시에는 네 이해력이 충분히 성숙치 못했었기 때문에 네가 행하고 말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알아보는 그 순간에, 그런 종류의 발견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이 영혼의 느낌과 유사한 것이 시작된다. "내 존재의 심연 속에는 관장하는 선한 힘을 통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은 인간이 그야말로 최상의 의미에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것과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보아 세상에서 실행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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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익학당입니다. 홍익학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유투브에 370여개의 전세계의 철학고전들을 무료 강의로 제공을 해 왔습니다. 사서오경, 노자, 장자, 불경, 성경, 서양철학까지 유명한 철학고전 들의 상당수를 제공하였는데, 이러다 보니 먼저 공부할 내용을 추려 주시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이 제시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시리즈]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홍익학당의 강의중에 각 분야의 뼈대가 되는 강의를 추려서 1주일 정도안에 학습하실 수 있게 제공해 드립니다. 이 강의를 들으시면 어떤 인문학/철학 고전을 읽는 것 보다 정확한 공부의 뼈대가 생기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주일만 투자하시면 인문학과 고전의 전문가가 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이 강의만 들으셔도 되고, 좀 더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은 학당의 다른 강의를 더 들어 보시거나 관련된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이나 고전/철학을 공부해 보고 싶은 직장인들께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1차 동양철학편, 2차 불교철학편에 이어서 3차 [인문학 1주일 완전정복 시리즈-기독교철학편]을 제공해 드립니다. 아래 제시된 순서로 강의를 들어 보시면 기독교철학의 핵심적인 뼈대와 가장 중요한 골자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1일차. 산상수훈(마태복음) 01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산위에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행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집약된 핵심 고전입니다.

 

첫번째 강의는 산상수훈 전반의 가르침과 8복, 소금과 빛, 율법 등의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철학자 윤홍식 대표가 쉽게 설명해 줍니다. 팟캐스트에서 20만명이 청취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강의입니다.

 

강의자료 

산상수훈 강의.pdf

 

 


2일차. 산상수훈(마태복음) 02 

두번째 산상수훈 강의는 주기도문, 황금률 등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강의자료는 1일차 강의자료와 동일합니다. 


 

 


3일차. 요한복음 01 

요한복음은 기독교의 복음서중 가장 많이 읽히는 복음서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요한복음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주셔서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 22개 절을 뽑아서 강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첫째 강의는 요한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 전반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학자 윤홍식 대표가 쉽게 설명해 줍니다.

 

강의자료 

요한복음.pdf

 

 


 

4일차. 요한복음 02 

두번째 요한복음 강의는 성령, 양심을 따르는 삶, 진정한 기도에 대한 내용을 철학자 윤홍식 대표가 시원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쉽고 자명한 강의가 있을까 싶습니다.


 

 

 


5일차. 요한복음 03 

세번째 요한복음 강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에수님의 가르침과 시편의 "내가 말하길 너희들은 하나님들이며, 지극히 존귀한 분의 아들들이다." 라는 구절을 설명해 줍니다.


 

 


 

6일차. 요한복음 04

네번째 요한복음 강의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아버지,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제가 당신과 함게 누렸던 영광을, 이제 당신의 현존 안에서 다시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철학자 윤홍식 대표가 쉽게 설명해 줍니다.

 

요한복음 강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알게 되었네요.



 

 


7일차.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준주성범은 15세기 독일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에 쓰여져 약 6세기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자, 비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온 그리스도교 베스트셀러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가장 명확하고 간결하게 나타낸 영성지도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철학자 윤홍식 대표가 준주성범의 핵심을 알기쉽고 감동적으로 설명을 해 줍니다. 참 와 닿는 강의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실전 방법이 알기 쉽게 제시됩니다.

 

이번 강의는 가톨릭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윤을수님의 번역본 "그리스도를 본받음, 준주성범"을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저작권 보호를 위해 강의 자료는 별도로 올리지 않으니 양해하여 주십시오.

 


[출처: http://hongikhd.tistory.com/89]




슈타이너의 불교론


니시카와 류우항 편역

번역 : 엘토포

 

 

부처의 니르마나카야(應身) 

불교의 영적 전통은 고타마 붓다에게서 정점을 이루었다. 부처는 그때까지 수많은 윤회전생을 되풀이해온 존재이다. 기원전 6세기의 육화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 육화를 통해서 고타마는 비로소 부처가 된 것이다. 그 이전에 그는 보살, 즉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였다.

 

수천 년에 걸쳐서 사랑과 자비를 고차의 영적 영역에서 인간 가운데로 흘려보내는 임무를 가진 존재가 훗날 인도에 부처로서 육화한 보살이다. 물질계에 있는 인간은 사랑과 자비를 자신 안에서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다. 보살들은 비의입문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로 상승하여, 그곳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보리수 아래에 좌정한 보살이 부처가 되었을 때, 지구 전체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인간으로 살았던 부처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나타난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상세히 말한 것이 팔정도이다. 부처가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서 생생하게 인식함으로써 인류는 부처와 장래에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그때 이래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위대한 부처를 따라 팔정도를 실천하는 생활을 보냈다.

 

당시 부처가 체험한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팔정도를 심혼의 능력으로 만들 정도로 성숙하고, 그 시점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부처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쏟아 부었다. 그 이래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 안에서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가져오는 일을 사명으로 한 부처는 물질체를 버리고 떠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란 최후의 육화를 의미한다. 부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타마로서 육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이후로 부처가 된 보살에게는 물질체에 육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에테르까지 육화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영시만이 이 부처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물질체를 갖지 않는 모습을 니르마나카야(應身)라고 부른다.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과거 보살로서 받은 사명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활동한 부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라고 하는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응신불(應身佛)은 ‘만약 내가 힘을 빌려주면 이 아이는 인류를 크게 전진시킬 가능성을 물질체 안에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니르마나카야를 하나의 닫힌 몸으로 표상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힘에 불과했던 것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니르마나카야이다. 우리 안에 사고, 감정, 의지의 능력이 결합하고 있듯이 이 존재의 조직은 고차세계에서 어느 존재의 개아를 통해서 서로 맺어져있다. 영시자는 응신불에 속한 여러 존재들을 지각한다.

 

이와 같은 관계를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응신불이 예수에게로 내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영적세계로부터 천사 무리가 내려와 양치기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시자는 예수 위를 떠다니는 응신불을 보았을 것이다. 나이가 든 현자 아시타가 이제 막 태어난 부처를 보고 이 보살은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인도의 전설이 있다. 이 현자는 자신이 이미 늙어서 그 아이가 부처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아시타는 재육화하여 다시 노인으로서 아이인 예수를 만난다. <누가복음서> 제2장에 기록되어있는 시므온이 바로 그이다. 신전에서 예수를 만나 보살이 부처가 된 것을 보고 ‘주여, 이제 이 종이 평화롭게 가게 해주십시오. 나의 눈은 당신의 구세주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시타=시므온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것을 5백년 후에 본 것이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보살 (1905년 10월 1일, 베를린)  

지상의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그 경험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알고 있으며,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자를 보살(보디삿트바)이라고 부른다. 보디, 지구의 붓디를 충분히 자신 안에 받아들인 인간이다.

창조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지구의 모든 앎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뒤에야 인간은 비로소 보살이 된다. 예를 들면 부처나 조로아스터는 보살이었다.

첫 번째 튀어 오름(카마)이 힘으로서 화성 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이 육화하기 직전에 인간에게 덧붙여진다. 두 번째 튀어 오름(마나스)이 수성에서 아틀란티스의 제5아인종, 원 셈인에게 내려왔다. 이 새로운 추진력은 보다 고차 존재들, 여러 혹성의 응신(니르마나카야)을 통해서 지상에 가져오게 되었다. 그 존재들은 화성에서 카마를 가져오고, 수성에서 마나스를 가져와 덧붙였다. 응신(應身)들은 보살보다 한 단계 고차존재이다. 보살은 끊임없이 진화를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져오는 일은 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응신들 뿐이다. 응신들 보다 한 단계 위에 피트리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서있다.

일곱 단계의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신들, 두 번째 피트리, 세 번째 응신, 네 번째 보살, 다섯 번째 순수한 인간, 여섯 번째 인간, 일곱 번째 사대원소존재가 있다.

-《비의의 기본요소》중에서

 

 

부처와 보탄 (1908년 8월 14일, 슈투트가르트) 

보통 인간은 고대의 불분명한 의식 가운데서 천사를 지각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는 그리스인이 제우스 안에서, 게르만인이 보탄 안에서 신성으로 간주한 존재이다.

보탄은 과거 비의입문자로서 어느 인체 안에서 살면서 신성한 비밀의식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보탄은 충분히 깊게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그 인간그룹 안으로 육화할 수 없었다. 그 인간그룹은 진화로부터 뒤쳐졌고, 그 때문에 물질계를 무가치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계를 가치 있는 신성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번뇌의 장소, 고통의 장소로 보았다. 그들은 물질계로부터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한 지복이라고 고찰하고 있었다. 이 보탄의 개체는 실제로 게르만 민족의 비밀의식 가운데서 가르침을 폈다. 이 개체는 훗날 같은 사명을 위해 부처로 다시 나타났다. 이 세계와 고차세계의 관계를 중계했던 부처라고 하는 개체와 과거 유럽에 존재하면서 북구에서 보탄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개체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부처의 사인  (1908년 8월 16일, 슈투트가르트) 

「부처가 돼지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동양학자는 부처의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기술로부터 평범한 것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비교(秘敎)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 기술은 부처가 동시대인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부처는 바라문교의 신성한 비밀을 너무 많이 세상에 전했다. 너무 많은 신비학을 세상에 전했기 때문에 부처는 죽은 것이다. 감추어진 것을 전하는 자가 죽음을 맞이하듯, 부처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것을 이와 같은 이미지로 말하고 있다.

선정불(禪定佛)로 판단되는 존재는 바로 역사상 실존했던 부처의 에테르체, 신들에 의해 붙들린 에테르체, 보탄의 개체에 의해 붙들린 에체르체이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보탄과 부처 (1908년 9월 12일, 라이프찌히) 

육안으로는 아틀란티스인의 신체를 어느 정도까지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에테르체 안까지만 육화하는 존재도 있었다. 대기가 수증기로 가득했던 당시 어떤 존재가 육화했다. 인간이 물과 안개로 가득한 대기권에서 살고 있던 당시 아직 육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존재가 훗날의 보탄이다.「인간이 이 광액체(光液體) 물질에 육화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띄고 물질계에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지구가 경화되어 인간도 경화된 모습을 취하게 되자,「나는 이러한 단단한 물질 속으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보탄은 지상에서 떨어진 비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렀다.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정화하여 고차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될 때까지 진화를 이룬 인간이 재육화하는 일이 있다. 그 같은 식으로 부처는 보탄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었다. 게르만 신화에서 보탄이라고 부른 존재가 부처로서 다시 나타났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은 물질계를 아주 조금 밖에 고려하지 않은, 물질계는 고통의 장소이고 물질계로부터 해방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부처 안에서 보탄 존재가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을 가장 깊이 이해한 것은 아틀란티스에서 늦게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신화와 밀의》에서 



부처와 보살과 선정불 (1909년 4월 16일, 뒤셀도르프) 

레무리아 시대에 인격의 신들이 인간 존재를 통해서 말하고,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대천사들이 말하고, 후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천사들이 말하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인간이라도 물질체에 이르기까지 자신 내부에 인격의 신들을 짊어진 인물을 동양에서는 선정불(禪定佛)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정불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의 신들이 물질체까지 침투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에테르체까지 대천사가 침투한 인물은 보살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천사가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관통한 존재를 인간―부처라고 부른다. 선정불・보살・부처라고 하는 세 가지 위계가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한 명의 부처뿐만 아니라 많은 부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상을 걷는 부처의 배후에 보살, 그리고 선정불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선정불과 보살이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하강하지 않은 채 보살이 에테르체에 침투하는 정도까지만 하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가지 않고 에테르체에 영감을 부여하는 것에 머무르는 존재를 추정해볼 수 있다. 에테르체 안에서만 충현한 보살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와 같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살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보살은 고차존재로서 인간―부처에게 특별한 영감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사에 의해서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에테르체 안에 대천사로부터 영감을 받는 인간―부처가 있는 것이다.

-《물질계에서 신령존재의 반영》 중에서



부처의 탄생 (1909년 6월 25일, 카셀) 

부처가 인도에 출현했던 시대를 다루어보자. 당시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부처와 같은 존재가 출현한다고 해도 특별히 존경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시대에는 달랐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탄생에서 다른 사람의 탄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깊이 이해한 동양의 문헌은 부처의 탄생을 기품 있는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모상’인 마야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녀가 힘 있는 존재를 세상에 가져오리라 예언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존재의 탄생은 세상에게 있어서 일종의 조산(早産)이었다.


의미 있는 존재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늘은 그 존재를 종종 조산(早産)시키는 일이 있다. 인간 안에 고차의 정신존재가 육화해야할 때, 시기가 무르익은 것처럼 철저하게 물질과 결합하지는 않는 것이다.


동양의 중요한 문헌에는 부처가 태어난 순간, 부처는 빛났고, 곧 눈을 뜨고 동서남북을 보고 일곱 걸음 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곱 걸음 뗀 것은 대지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보살에서 부처가 될 인생이다. 이 지상에서 나의 마지막 육화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물론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기묘하게 여겨질 것이다. 정신적인 눈으로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진실이다. 당시는 자연적(천성적)인 영시력으로 부처와 함께 무엇이 탄생했는지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사람은 지금 말한 동양의 문헌에서 전하는 부처의 이야기를 기묘한 것으로, 전설이나 신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정신세계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부처의 탄생과 같은 사건은 개인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고, 세계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힘을 발산하는 법이다. 세계가 정신적인 힘을 받아들일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처의 탄생과 함께 치유와 화해의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서와 공관복음서》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 (1909.10.18 베를린) 

나단계 소년 예수로 나타난 인물, 즉 본래의 나사렛 예수 위에서 그 아이의 오라로 나타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를 볼 수 있다. 니르마나카야는 석가가 부처가 된 마지막 육화 이후에 입은 형태이다.

보살은 정해진 육화 아래에서 부처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존재는 더 이상 지상의 육체로 육화할 필요가 없는 진화단계에 이른다. 더 이상 육화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성과이다.


그 육화이후 보살・부처는 더 이상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는다.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고 에테르체(생명체)를 가장 낮은 신체적 본성으로서 육화할 뿐이다. 이 개체는 이후에도 에테르체 안으로 육화했다. 부처는 이제 물질체로 육화하지 않고 에테르체까지만 육화하는 것이다.


부처와 같은 개체가 육화하는 에테르체는 닫쳐진 단일한 공간이 아닌 관련이 없는 수많은 부분들로 되어있다.

그와 같은 보살・부처가 에테르체에 육화하여 다시 나타날 때는 한 무리의 존재라고 하는 모양으로 눈에 보인다. 「누가복음서」의 저자가 들판의 양치기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에서 이러한 한 무리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라고 부르는 이 에테르체가 나단계의 어린 예수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이 니르마나카야가 영감을 부여하고 부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 안에 쏟아 부었다.


이것이 「누가복음서」안에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인 천사무리로 쓰여 있다.

보살・부처 안에 육화한 개체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시대에서 시대로 전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보살이 부처로서 존재했던 때 보살을 통해서 사랑에 관한 내용이 암시적으로 불어넣어졌다. 그로부터 인간이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점차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 이른바 팔정도의 가르침을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과거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것이 부처가 지상에서 활동했을 때 처음으로 가르침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져오는 것이 부처의 사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힘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사랑의 힘이 아래로 흘러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 존재를 통해서 드러날 가능성이 주어졌고,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부처를 통해서 전해질 가능성이 주어졌다.


부처가 가져온 것을 위대한 법,「다르마」라고 부른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부처는 법을 혼이 그 법을 인식하고, 인간이 그 법을 자신의 심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태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명령으로서 가져온 것이다.


부처는「그대들은 자신의 혼 깊숙한 곳에서 내가 말한 법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세는「하느님의 법이 이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앞으로 나아갔을 때 보살・부처는 이 가르침을 가져올 수 있었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 대한 부처의 의견 (1913년 10월 5일, 오슬로)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과 이념을 주고받은 결과 예수에게 부처나 나타났다. 그리고 예수와 부처 사이에 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부처는 예수에게「만약 내 가르침이 내가 설파한 그대로 완전히 실현된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속세로부터 벗어난 청정한 승가를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도 세간을 등짐으로써 정신적인 진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깨끗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속세의 사람들을 희생해서 자신이 꺠끗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실현한다면, 에세네파 교단처럼 청정해진 사람들이 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제5복음서》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서 예수와 부처 (1913년 11월 4일, 베를린) 

에세네파 교단의 행동 방식은 부처가 세상에 가져다 준 것과 매우 닮아있다. 예수는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부처는「내가 인류에게 전해준 길로는 모든 사람이 신적・영적 세계와의 연관성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시하는 사람이 없다면 부처와 제자들은 보시를 받을 수 없다. 부처의 가르침은 어떠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5복음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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