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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에까지 이른 당시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에 형성된 단일국가를 지목하면서, 유럽 사회의 건강을 근본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를 유기적인 세 부분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생활의 모든 것을 관리, 지배하고 책임지는 단일국가가 해체된 그 자리에, 교육 · 문화 · 종교 등 인간의 정신 생활을 담당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 조직,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권리 · 법률 부문을 담당하는 민주적 국가 조직, 박애를 근거로 하는 경제 조직이 들어서도록 하되, 그 세 조직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사회를 언급하였다. 그런 사회 형태를 그는 '삼지적 사회 유기체'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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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이 바로 인간의 한 부분인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데에 있다. '일=수입'이라는 생각이 자연법칙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일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한 부분을 팔아야 하고 자신의 내적인 요구와는 무관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로써 또한 경제 구조 내에 맞물린 개인의 노동이 박애의 근거를 지니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불가피하게 얻게 된다.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서 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 즉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 대부분의 상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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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행위의 원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합하게끔 행하라."라는 칸트의 윤리학에 슈타이너는 "네 특유의 개인성에 따라,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하라!"고 대답하였다. 교육을 통해 접종된, 외부의 기대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발안한 일을 할 때에만 인간이 자유롭고, 외부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그 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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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계 은행인 GLS 은행의 이름은 삼지적 사회 내의 자본에 대한 관념 중 중요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 Geben=주기, Leihen=빌려주기. Schenken=기부하기, 이 세 단어의 이니셜을 딴 약자가 그 은행의 이름이다. 삼지적 사회 유기체 내에서 은행의 역할은 자본 근거를 지닌 사람과 활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연결해 돈이 고여 냄새가 나기 전에 흐르도록 만드는 일에 국한된다. 그렇게 은행을 통해 매개되는 자본 근거 중에서도 조건 없이 그냥 주는 돈이 가장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정신 생활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교육 담당자, 예술가, 작가, 종교 지도자, 학자 등은 국가가 아니라 경제 생활 영역에서 넘어오는 조건 없는 기부금으로 뒷받침될 때에만 그들의 활동 결과가 가장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작가의 생활 상태가 일의 결과물인 책을 판매하여 나오는 수입에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팔릴 책만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보다는 순수하게 예술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신 생활의 영역이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자치를 실행하고, 경제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뒷받침을 얻는 것, 바로 이 사실에 오늘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거와 더불어 한 사회의 건강한 미래 형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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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의 삼지적 사회 유기체의 관념에 따르면 자연물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해 변화시킨 것만 상품이 될 수 있으며 유통되고 소비된다. 토지나 대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적용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자연으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생산물처럼 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토지나 대지, 부동산 등은 생산을 위한 자본 근거가 되며,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시기 동안 그것에 대한 재량권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생산 활동을 멈추는 순간에 그것에 대한 재량권이 생산적으로 활동할 다른 개인이나 집단으로 전환되어야만, 자본 근거의 부당한 집적으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적 현상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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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내에 존재하는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인지라는 선제 조건을 채웠을 때에만 가능하다. 자신의 자유를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만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수 있으며, 서로 간의 신뢰를 싹 틔워서 함께 돌보는 과정에서 자유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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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기존 개념으로는 [사회 문제의 핵심]을 통해 루돌프 슈타이너가 인류에 제시하는 내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어깨 위에 다른 머리가 필요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그 내용은 혁명적이다. 자본축적이 아니라 자본소진이 공동체를 위해 생산적이라거나, 돈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자로 불어나지 않고 낡아서 가치를 상실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받고 성장산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바로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를 건강한 유기체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최우선적인 일은 외적인 정치 활동도 사회 활동도 아니라, 각 개인이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념과 개념을 새로이 정립해서 느끼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삼지적 사회 유기체'는 어떤 거대한 조직이, 예를 들어서 국가 조직이 그런 사회 체제를 만들어 냄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가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서' 삼지적 사회관념에 따라 사고하고 느끼기를 배워서 살아내려고 애쓸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심지어 인지학계의 인사들조차 슈타이너의 사회적 삼지성은 이미 극복된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머리가 로마시대 이래로 존재해 온 낡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정신 생활은 당연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사람들이 쉽게 말들 한다.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문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 생활이 자유롭다고 자연스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 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이루는 교육에 이르면 갑자기 정신 생활의 자유에 대한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삭제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증서가 필요해서, 국가공인이 필요해서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는가? 자식을 교육시키는 이유 역시 국가가 인정하는 졸업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장래의 경제 생활을 보장해 줄 직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국가의 인정이나 경제 생활의 안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배움 그 자체를 위해서만, 되어 가는 인간의 전개 자체를 위해서만 자식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하면, 사회의 발달과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현재의 독일 발도르프 교육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들조차도 국가의 공인을 받으려고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도 그 정도가 심각하게, 그 정도로 뼛속 깊이 우리의 정신 생활을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루어내지 않는다면, 국가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을 각 개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내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건강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의 정신 생활을 위해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자유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의 어께 위에 다른 머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야만 한다.

- 역자 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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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노예'로 키우는 노예 교사들을 쓴 현직 교사는 절망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학교의 참상을 말한다. 그것이 학교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지칠 줄 모르고 뺨을 후려갈기는 동영상 속 여교사의 뒷모습에서 엉뚱하게도 권태감을 보았다. 무심한 발길질은 지금도 꿈에 나올까 무서운 군대 시절 ‘말뚝’ 선임하사의 몸짓과 신통하게 닮았다. 같이 간 친구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데도 놀이공원에서 더 놀려고 마음먹었던 배짱 좋은 녀석들치고는 너무나 고분고분하게 폭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료 교사의 침묵은 여교사의 ‘분열된 교권’을 단호하게 지켜주었다. 버스 안에서 두려움과 분노가 넘쳤다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냉소·무관심 혹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더 크지나 않았을까.


고통은 인간을 대오각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로마 제국과 바리사이(Pharisees)의 폭압 속에서 예수는 부활했다. 10대 여공의 싱싱한 폐를 순식간에 폐품으로 만드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불타올랐다. 사법연수원 출신끼리 밀어주며 힘 없는 자의 비명 위에 부를 쌓아가는 신성 불멸의 가족 가운데서 김두식 교수가 튀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삼성의 구조본에서 김용철 변호사는 거짓이 번번이 이긴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본다면 성인이 열 명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바로 중·고등학교 교육 현장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교사들은 이미 그만뒀거나, 명예퇴직 연한이나마 채우려 이를 악물고 견디는 중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육 관료나 교장·교감은 자기도 뜻을 모르는 얘기를 끝도 없이 해댄다. 아이들은 중요 부품이 빠진 로봇처럼 기이하게 굴고, 학부모는 점점 염치와 예의를 잃어가는 속에서 멀쩡하던 많은 교사가 맛이 가버린 곳이 바로 학교다.

 

ⓒ한성원 그림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생각의 나무, 2011년)을 쓴 황주환씨는 절망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학교의 참상을 말한다. 작은 읍내의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교사의 폭력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는 부모의 이기심 탓에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학교가 곧 우리 사회의 축약판임을 깨닫는다. 경쟁과 효율의 신화로 자기 배만 불리는 권력과 자본까지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지금 학교에서 벌어지는 억압과 모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만 고민했던 그는 누구를 위해 가르치는가로 질문을 바꾸면서 절대로 다시는 굴종의 길로 들어설 수 없게 된, ‘깨달은 자’의 반열에 들었다.


아이들이 괴물이 되어가는 까닭


그렇다. 요즘 아이들 정말 이상하다. 저자에 따르면 몇몇 일탈 학생보다도 무관심·무책임·무력감으로 무장한 대다수 아이들이 교육 현장을 더욱 스산하게 한다. 아이들은 웬만해선 손가락도 까딱 않는다. 금세 쓰레기를 버리고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 몰염치에는 할 말을 잊는다고 한다. 따뜻한 말로 훈시를 해보지만 아이들과의 간극만을 확인할 따름이다.


교사와 어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 ‘건조한 인성’은 따지고 보면 숨 막히는 경쟁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은 일탈에 불과하다는 것이 황주환 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비겁하게 사태의 결과를 원인으로 바꾸어 면죄부를 가지려 한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타락해서 수업을 못한다지만, 사실은 학교가 강요한 교육 때문에 아이들이 망가진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 하기 나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동안 아이들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공감할 수 없는 괴물로 변해간다.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황주환 지음생각의 나무 펴냄


그는 학교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책으로, 책에서 학교로 종횡무진 이동하며 얘기를 전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이들이 괴물처럼 변해가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괴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겪어왔지만 여전히 교무회의 자리가 불편하다.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에, 굴종과 침묵이 범벅되는 이런 풍경을 그는 10년 넘도록 무던하게 넘기질 못한다. 혼자 떠들고 나올 땐 마치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벌거벗은 채로 언덕에 홀로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든다. 회식 술자리의 낭자한 분노와 교무회의 자리의 기묘한 침묵의 간극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학교뿐 아니라 관청이든 회사든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곳에 무겁게 깔리는 이 침묵이 동서고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교사들은, 아니 우리네 민초는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큐를 닮았다. 날품팔이꾼 아큐는 주변 인물들에게 모진 멸시와 폭행까지 당하면서도 ‘노려보기주의’와 ‘정신승리법’으로 형식적으로만 패배했을 뿐이라고 믿는다. 그는 힘 있는 자들에게 내면적으로만 승리하는 인물이다.


유태인 학살 실무총괄 담당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그린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시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이히만은 도덕이나 이상 따위의 말을 많이 사용했으나 그것은 그냥 사용하는 상투어였을 뿐이고 그에게는 진정으로 소통하는 능력이 없었다. 나치가 주입한 생각과 어휘로만 그는 말했고 당연히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한나 아렌트가 ‘평범한 악’이라고 이름 붙인 그를 보면서 황주환씨는 좋은 말로 가득한 학교장의 훈시를 떠올린다. 그리고 온 나라를 뒤덮은 ‘중도, 실용, 서민, 법치’라는 말이 왜 도무지 와 닿지 않는지 이해한다.


저자는 말에 유난히 민감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대로 말하지 못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조종당하는 대로 말할 뿐이다. 대중은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문화적·도덕적 가치를 프로그래밍화된 사회 시스템을 통해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학습받기에, 자신이 지배당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런 지배 문화를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학교와 언론이다. 놀랍게도 학생들에게 체벌에 관해 논술을 하라고 하면, 체벌당했던 당사자까지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고 보면 가혹한 경쟁에 휘말려 자살로 내몰린 KAIST 대학생 상당수가 서남표 총장의 조처가 학교 ‘개혁’을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배 권력이 불의할수록 아큐나 아이히만 같은 자들처럼 대중은 자기 언어를 잃고 비굴하게 타락한다. 이를 방치하면서 오로지 학교만 변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저자가 볼 때 환상에 불과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부려 먹기 좋은 노동자, 손쉽게 자를 수 있는 노동자를 학교 시스템을 통해 기르는 데만 혈안이 된 이 나라의 자본과 권력은 몹시 불의하다.


학교에서 십수 년 교과서를 가르치며, 학생을 지도하며, 교장과 부딪치며, 그리고 정치 권력에 눌리며 그가 깨달은 것은, 교사는 그리고 우리 사회 힘없는 이들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예인 내가 또 다른 노예를 ‘제작’하고 있었을 따름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나약한지라 어느 시대 어느 땅에나 패배한 정의가 나뒹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진실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라고 그는 믿는다.


그에 따르면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 아름다운 말로만 쓰인 책은 모두 쓰레기이다.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학교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이 책을 쓴 이유이다. 그는 내가 교육 현장이나 책으로 만났던 수많은 교사 중에서 팔이 안으로 굽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차 없이 질문을 던지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굴종하지 않으려면, 자유로워지려면 숙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는 학교에서 참 많이 외로웠겠다. 그의 책에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 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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