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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전공을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들은 전공을 통해 일종의 쓸모 있는 기계가 될 수는 있겠지만 조화롭게 발달하는 인간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학생들이 가치들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고 그 가치들의 느낌을 몸으로 익히도록 하는 것이 필수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문적 지식만을 갖춘 사람이 될 것이고, 따라서 조화롭게 발달한 인간이기보다는 훈련이 잘 된 개에 더 가까워 보일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나 공동체와의 관계를 적절히 맺기 위해서 인간 존재들의 동기와 망상과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소중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서 젊은 세대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통해서는 절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문화를 형성하고 저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개인적 접촉이다.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 내가 마음에 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와 철학 분야의 딱딱한 전문 지식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즉시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시작하는 전문화와 경쟁체제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문화적 삶의 바탕이 될 영혼을 죽이고 있다.

젊은이들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부담이 지워지고 지나치게 다양한 주제들이 주어지는 탓에 비판적인 사고의 발달이 크게 훼손 되고 있다. 과도한 부담은 필히 겉핥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가르치는 행위가 고된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값진 선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New York Times, 1952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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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을 돌아보며  


▲ 정아림(22)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간 방황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조금씩 '나'와 가까워졌다."

 

‘어느 대학 어느 과에 다니는 누구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그렇게 간략하게 소개할 수 없는 까닭은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어느 소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회가 보기에 ‘청년백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나온 4년 동안 인도에서의 자원봉사, 인문학연구실, 대안학교, 극단 등 많은 소속들을 거쳐 바쁘게 달려왔다.

 

나의 다음 걸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대학이던 대안이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길로의 오랜 걸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길을 찾아 훌훌 떠날 수 있는 가벼움도 좋지만 한 길에서 오래 머물며 깊게 느끼기 위해서는 엉덩이심도 필요하지 않을까. 4년간 발품을 팔면서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며 떠돈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나의 발목을 잡는 목표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건 소중한 사람들과 그 안에서의 방황, 그리고 끊임없는 질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통해서 ‘나’라는 사람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대안학교에 두 번 떨어지고, 대안을 고민하다 

유년 시절, 초등학교 6년을 6번 학교를 옮겼을 만큼 잦았던 이사와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몇 번의 인도 유학이라는 남다른 경력 때문에 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인도아이들 사이에서 다른 생김새, 다른 언어를 쓰는 나는 모든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인도에서 왔다고 하면 조금 별난 아이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런 관심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고, 이놈의 ‘자뻑’(자의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다른 애들과 난 달라’ 치부해버리고서 맺는 관계는 항상 겉돌았다.

 

풍파와도 같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한국에 자리를 잡은 중학교 시절 난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공상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은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모녀의 사이는 꽤 괜찮은 편이지만, 그것도 성적표가 오기 전까지다. 성적표가 날아오는 날로부터 몇 달간 냉전이 지속되었다. 그런 나에게 대안학교는 탈출구로 보였다. 앉아서 하는 공부만 아니라면 밭일이든 뭐든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그곳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은 엄연히 존재했고, 나는 떨어졌다. 그 후 일반 여고에 진학했다. 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빡빡한 수업들과, 체육시간에 실기는 하지 않고 이론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은 나의 머리와 몸을 굳게 만들었다. 정말 심각하게도 심한 변비에 걸려 일주일간 똥이 안 나왔던 끔찍한 사건도 있다. 대장과 소장 사이에서 딱딱하게 굳고 있던 나의 똥처럼 나의 맘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으로 굳고 있었다.

 

대안학교라는 다른 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현실에 전혀 집중을 할 수도, 마음을 줄 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안학교에 원서를 넣기로 결정하고, 염려스런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변비에게 기쁘게 작별을 고했다. 허나, 결과는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대안학교에 떨어진 것이다. 대안학교를 두 번 떨어지니 도대체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었고 내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내 딴에는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몇 없던 친구들과의 인연도 끊고 생애 처음으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검정고시 합격 후 18살 무렵, 나는 고립되었다. 또래들과의 관계는 줄었고,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했다. 빵집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재미있었지만, 평생 빵 포장과 철판을 닦으며 지내고 싶지도 않았고, 돈을 벌어도 쓸 곳이 없으니 주머니를 채우는 쾌감도 없었다.

 

이 세상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들었던 음악은 외로움을 더 고조시켰다. 나는 이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인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도아이들과 바디랭귀지로 소통하며

▲  내가 만난 첫번째 공동체. 인도의 한 시골마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을 경험했다.


18살, 아빠가 살고 있는 인도 공동체에는 나 말고도 아들, 딸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과 내가 함께 살게 되었다. 1년 간 동거의 시작,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나름 밝은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웬걸, 사람들 앞에서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런 나의 성격을 변화시켜 준 것은 인도 아이들이었다.

 

1년간 자원봉사자로서 내 역할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센터로 오면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티쳐’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아이들은 먼저 달려와 이름을 묻고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기도 세고, 말도 많고, 몸이 솜털같이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려 가버릴 것 같은 아이들을 내가 가르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엄청 긴장을 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도 아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이 엄청난 소통의 벽이란. 다행히 시골마을에서 영어 좀 한다는 청년들이 안 되는 실력으로 영어를 인도말로 통역해주러 왔지만, 그마저 빠지는 날에는 골치가 아팠다. 하루에 1시간 30분, 아이들은 자신들 앞에 서있는 이방인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울던, 웃던, 춤을 추던, 뭐라도 해야 하는 개그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발표회에 올릴 영어연극을 준비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도무지 연습만 하자고 하면 매번 도망가고, 영어는 외워지질 않는 터라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동작과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언어가 그냥 언어로 다가왔을 때는 무감각하지만 그 언어를 몸으로 이해하면 쉽게 습득했다. 또 다른 세상을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내게 활력을 주었다.

 

공연 당일 날, 아이들은 자신들을 보러 온 관객들을 마주하니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의 얼굴 표정과 손짓만을 보고서 나의 맘을 다 알아채고는 그 어떤 때보다 잘했다. 늘 대사를 까먹어 애를 먹었던 아이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자 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인사 후 무대 뒤로 내려와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주는데, 아 정말이지 인생의 가장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연극을 올리면서 온 몸으로 만나 함께 뛰어 놀며 소통하는 바디 랭귀지가 얼마나 소중한 지, 사람을 만날 때 꼭 언어로만 말로만 만나는 게 아니라 부딪힘과 직감으로 만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아이들은 내게 선사해주었다.

 


홀로 떠난 배낭여행이 남긴 깨달음 

▲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 마음의 문을 여는 경험을 하고, 불편함과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고민을 남겼다.


자원봉사 기간 중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공동체 생활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건드리면 할퀴기라도 할 듯 겁이 난 고양이처럼,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서 누가 해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하고 내 발톱은 꺾어지고 만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생애 처음으로 일시적 기절이라는 걸 경험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밥도 맘 놓고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자 몸이 파업을 한 것이다. 기차역에서 쓰러진 순간, 오지랖이 넓은 인도인들이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왁자지껄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정신 차리라며 얼굴에 차가운 물을 들이 붓는 게 아닌가! 물벼락을 맞고 정신이 든 순간 기적적으로 나를 향한 손들이 모두 도움의 손길로 보였다.

 

아프고 나니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것이다. 내가 피하려고만 했던 그 사람들은 내게 ‘어디가 아프냐’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돈은 있는지, 낯선 이방인에게 잘도 말을 걸고 무슨 일이든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온 몸에 물이 흥건한 채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인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기차표를 끊고 다음 여행지로 갈 수 있었다.

 

인도여행은 길 위에서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 낯선 마을과 도시의 풍경, 그리고 다른 차원의 불편함을 주었다. 기차바닥에서 바퀴벌레와 쥐와 함께 지샜던 밤을 생각하면…. 네팔로 가는 버스 안, 마치 출근길 지하철 2호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가득 찼던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앉아서라도 갔지, 14시간을 서서 버티던 이들을 떠올리면 일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불편들은 그 기억들 앞에서 아주 소소해지고 만다. 불편하지 않고서 배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 편하고 익숙하기 만한 환경에서 삶이 절실해지기 어렵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인도여행에서 남은 깨달음이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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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농사의 달인’ 엄마와 두 딸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인 우리 가족을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엄마가 있다. 한때 집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시골에서 키운 장본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소규모 자급농사의 달인, 예민한 초감각을 가진 잔소리꾼이다.

 

큰딸인 나는 아침에 머리도 빗지 않고 밭으로 나가는 털털함의 화신이자 양서류, 굳이 말하자면 청개구리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혼자 괭이질하면서 자기 솜씨에 감탄하는 자뻑 기질이 있는 십대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밥 먹을 때만 나타나는데도 ‘사랑스럽게 가르랑거리는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고양이는 동생과 딱 어울린다. 내가 곰이라면 동생은 여우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겠다.

 


이상적인 농사 vs. 흙투성이 현실의 농사 

▲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깨를 심고 있는 여연.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학교를 그만 둔 첫해였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왜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나는 농담처럼 “밭을 빌렸었는데 집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 말에는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둘 다 여자인 어른 하나랑 애 하나가 기계 없이 500평 밭농사를 짓는다!’ 매일 학교에 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물론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학교 비슷한 걸 만들어서 한참 재밌게 놀러 다니긴 했지만).

 

게다가 나는 일을 참 못했다. 물론 그 나이에 농사일을 잘하는 애는 한국 전역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였다. 풀 베겠다고 낫 들고 설치다가 작물을 베는 일이 허다했고, 내가 캔 감자에는 유난히 호미로 찍은 자국이 선명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하려니까 눈물 콧물을 다 짜낼 만큼 힘들었다. 

 

한동안은 그 힘든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농사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였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이미 농사일 때문에 가족들과 으르렁거리면서 만들어진 반발심이 얼룩처럼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은 뒤였다.

 

이상적인 농사가 땀 흘리는 건실한 노동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적인 삶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면, 내게 있어서 현실의 농사는 욕 나오게 바쁘고, 무식하게 힘들기만 하고, 흙투성이가 되는 일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미리부터 뼈저리게 깨달은 나는 내심 밭에서 벗어날 기회를 꿈꾸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뭔가 일을 칠 용기도 없는 어린애가 갈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 나는 집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와 자주 싸우지만 않는다면 집은 계절마다 신선하고 맛있는 먹을 거리들이 넘쳐나고, 주변에는 산과 별, 꽃과 나무로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땀방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가난한 우리 집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아마 나는 농사일을 집이라는 좋은 곳에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임시방편일 따름이었다. 곧 농사에 대한 내 진짜 마음을 시험할 때가 왔으니.

 

밭일하며 마음의 격동기를 거친 시간들 

▲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이 시대에는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저항이야.’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다. 이 말처럼 엄마는 농사야말로 산업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책상 앞에 앉아 죽어라고 책만 파는’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딸들은 그런 불균형한 공부를 하지 않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나 청개구리 기질이 충만했던 큰딸의 비비꼬인 마음은 엄마가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에 관심 좀 가지라고 잔소리를 하면 할수록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로 기울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타입의 아이였다면 내 반항에 뭔가 정당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일하러 나가기 싫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눈앞에 닥친 일들에서 어떻게든 내 이익을 보호하려고 미친 듯이 싸웠다.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쉬고, 힘을 덜 써서 일하고, 작업복을 안 빨아보려고 잔머리를 마구마구 굴리다가 엄마에게 걸리면 그날은 싸움의 날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조금씩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 마음속에서 좀더 깊은 분노가 부글부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벌써부터 농사를 짓고 살라고 할 수가 있어?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잘할지 엄마가 어떻게 알고? 내 인생을 미리 설계해 놓은 거야? 그럼 도대체 제도교육 안에서 부모의 관리를 받으며 사는 애들이랑 뭐가 다른데?

 

엄마에게는 분명 인생의 많은 것들이 ‘농사’와 ‘생태주의’로 수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세대인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스스로 선택한 가치가 아닌, 너무 흔해서 있는 줄도 모를 정도인 산소 같은 거였다. ‘귀한 줄 몰랐다’는 게 돈도, 넘쳐나는 정보도 아닌 가치관이었다.

 

사춘기가 지난 어느 시점부터는 나도 확실히 농사일을 꽤나 즐기고 있기는 했다. 아침 일찍 안개에 몸을 가린 산 근처에 있는 밭에 나가 새벽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일하는 건 하루 중에서도 기분 좋은 순간이다. 단지 일하는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초조했을 뿐이다. 이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책을 읽었으면, 수학문제를 풀었으면, 기타를 연습했으면, 뭐라도 좋으니까 다른 걸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밭에만 가면 늘 시간에 쫓기고 불만에 차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대는 시간에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 십대 여자애들이 할 만한 그런 걸 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고 자신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실제 모습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속 빈 강정 같은 아이였다(지금도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명료하게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고민한다  

▲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뭘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앞으로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만약 내가 200년쯤 전에 한국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을 것이다. 다른 삶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냥 꿈만 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면에서 내가 이렇게 온갖 고민을 하는 이유는, 이 시대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농사와 식량자급의 가치를 워낙 하찮게 생각하고, 부모가 농사를 지어도 자식은 다른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물이 들었는지 농사일을 순수하게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나중에 나이 들고 해도 되는 일을 왜 벌써부터? 라는 통속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차피 이미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있으니 걱정 없다는 여유로움도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농사일을 배우는 게 내 나머지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은근히 생각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 앞으로의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뭐지?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려서 회사를 다닐 생각도,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뭘까? 이것저것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농사 쪽으로 생각이 흘러왔다. 하지만 역시 찝찝했다. 정말 이걸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님 그냥 살아온 대로 사는 게 편한 거야?

 

게다가 농사도 농사 나름이라, 관행농법으로 대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고, 유기농이어도 억 소리가 나오는 커다란 하우스를 몇 동이나 짓는 부농(?)도 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을 기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급자족을 꿈꾸며 다양한 작물들을 소규모로 심어 기르는 엄마와 같은 사람도 있다. 이 안도 단순한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알을 뚫고 날아가기를 아주 간절하게 원한다. 하지만 그전에 과연 그 ‘알’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분명 땅에서 먹을 것을 직접 기르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사는 일이 진솔한 삶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다른 걸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에 공감하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문제라면 문제다. 애매모호한 상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다. 아니, 젊다. 그러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떤 가치가 의미 있는 가치인지에 대해서. 

-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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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까지 가르쳐야 하는 5가지 삶의 가치

베이비뉴스-강샘 기자



정직·정의·결정·배려·사랑이 왜 중요한지 알려줘야


어린 아이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은 대부분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미 육아잡지 페어런츠(parents.com)는 다섯 살 전에 적어도 다섯가지 삶의 가치는 반드시 가르쳐 놓아야 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페어런츠가 전하는 5세 이전에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다섯가지 삶의 가치다.


1. 정직

크리스가 친구 폴과 걸핏하면 싸웠다. 크리스의 엄마는 두 아이를 떼어 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폴의 엄마가 찾아와서 크리스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장황한 설명이 싫어서 크리스 엄마는 크리스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폴의 엄마가 가고 난 후 안에서 듣고 있던 크리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어디가 아픈데?"


엄마는 급한 김에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느라고 아들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엄마는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아이는 그 순간에 엄마로부터 거짓말을 배웠다. 그 상황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에 남아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은 앞으로 크리스의 삶을 망쳐 놓을 수도 있다.


아이 앞에서 부모의 정직은 참으로 중요하다. 크리스의 엄마는 다소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요즘에 두 아이가 너무 싸우네요. 당분간은 좀 떨어 뜨려 놓아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경우가 있다. 꼭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도 말해야 할 것을 숨기는 것도 정직을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다. 예를 들자면 "이거 아빠한테 말하면 안돼" 라던가, 전화가 걸려 오면 "엄마 없다고 해"라고 말하는 것도 아이의 정직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아이의 정직을 방해하는 것은 지나친 엄격성이다.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하면 아이들은 사고를 저지르고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잘못을 하더라도 야단치기 보다는 함께 풀어나가 버릇하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정의

4살 에이미가 사촌 마커스와 각자 나무 블록으로 성 쌓기를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에이미가 마커스의 성을 부숴버렸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마커스가 자기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화가 나서 부숴버렸다고 말했다. 아빠는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다시 놀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안된다.


에이미는 분명히 마커스의 성을 부수는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힌 경우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사과를 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커스가 그만큼 공들여 쌓은 성을 원상 복귀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 본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마커스에게 과자를 하나 주는 행동을 하도록 했어야 한다.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면 반드시 사과와 복구, 보상을 가르쳐야 한다.


3. 결정

삶은 결정의 연속이다. 두 개, 세 개, 혹은 더 많은 문제들에 부딪쳤을 때 빠른 판단력으로 결정하고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빠르게 결정하는 습관을 길러 주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잘못 결정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이 때 잘못 결정했다고 야단을 치면 다음에 무언가를 결정해야 될 때 당연히 망설이고 겁이나서 주저하게 된다. 잘못 판단해서 했더라도 야단치지 말고 다시 되돌리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 보면 좋다.


4. 배려

사회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들이 줄어 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약한 면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서로 배려해가면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솔선 수범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말에 자선냄비 같은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자선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자선으로 그치지 말고 그것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도 반드시 가르치자. 가능하면 아이로 하여금 직접 기부를 하게 하는 것도 좋다.


5. 사랑

사람들은 아이들은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가 모델이 되면 훨씬 더 많은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먼저 부모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부부끼리 자주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다. 또한 아이에게도 많은 포옹을 해 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주자.


단순한 말로서만 끝낼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다. 도시락 안에 살짝 사랑한다는 쪽지를 남겨 두기도 하고 포스트 잇을 이용해 칫솔에 "사랑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두면 아이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부모가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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