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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세 아이들 그림

생후 7년까지 첫 주기의 발달 특성에 대해 이해한다면 학교에서 교사는 아이들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결하여 수업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그림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그림들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 속에는 대부분 비슷한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그림들을 보며 “와! 참 잘 그렸구나.” 하고 생각할 뿐, 더 이상 그 그림을 가지고 뭔가를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면 금세 “아! 이 그림은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그림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을 만큼 자랐는가?’를 그림을 보면서 여러분과 엄격하게 짚어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인가요? 빠른 아이인 경우 8-9개월에 걷기도 하고, 늦되는 아이는 1년이 한참 지나서야 걷기도 합니다. 그렇게 걷는 시기가 아이들마다 다른 것처럼 지금 보는 그림들은 꼭 특정한 나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평균적인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그림들입니다.

아이들의 그림을 통해 아이들이 발달해 나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따라가고자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 그림의 발달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플 경우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가지고 아이들 그림들을 바라 봐야 합니다.

아이가 처음에 연필 같은 것을 쥐고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언젠가 누군가가 하는 행위를 봤기 때문입니다. 늘 모방을 하는 어린아이들은 행위와 움직임을 통해서 따라하고 배웁니다. 아이가 연필을 잡고 그리려고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을 봤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시장 가기 전에 뭘 살까 메모하는 것을 아이가 봤다면 아이는 엄마가 했던 행위를 따라하려고 합니다. 이때 아이가 따라하는 것은 '오이, 당근, …' 등의 글자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행위, 동작 같은 움직임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으로 뭔가를 쥐고 그리려고 하는 행위를 본 적이 있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가 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아이는 제일 처음 연필을 쥐고 (뭔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휘두르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종이에 흔적을 남깁니다. 물론 아이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처음에 나타난 형태는 점 형태가 아니라 마치 점에 꼬리가 뻗은 것 같은 형태가 나타납니다. 아이는 허공에 모방적 행위를 하다가 우연히 종이와 만나는 것입니다.(그림1)

(그림1)

이 시기는 빠르면 8-9개월, 늦으면 1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시기가 지난 다음에는 의도적으로 뭔가를 표현합니다. 아이가 직접 종이에 그리려고 표현할 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형태가 동시에 나옵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의 대부분은 왼쪽으로 그리는 형태로 나옵니다. (그림2)

(그림2)

다만 오늘날에 와서는 가끔 오른쪽으로 하는 아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물질주의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에는 아이들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그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뾰족한 물건을 찾습니다. 그것으로 그려낸 그림을 보면, 같은 것을 반복하지만 똑같이 만나지도 않으며 힘이 균등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는 진하게 또 연하게도 나타나는데, 바로 여기에서 아이들의 역동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색깔 크레파스를 주면 대부분 밝은 색부터 먼저 집고 그립니다. 그리고 그림은 점점 더 안으로 밀집해 들어갑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검은색이 되어 갑니다. 원들이 점점 밀집되어 작아져 가다가 언젠가는 점으로 찍기 시작합니다. (그림3)

(그림3)

점을 찍으면서 어떤 아이들은 “이건 나야, 이건 나야”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나이가 3세 때쯤입니다. “이건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바로 이때부터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점의 시기가 나오기 전까지에 대해 우리는 기억을 잘 못합니다. 점이 나타난다는 것은 '첫 번째 자아가 태어났다', '이제 나는 지상에 도착해서 두 발로 섰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이것을 거꾸로 본다면 점 이전의 그림들에서 하는 행위는 '출생 이전의 것'을 행위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러두기 : 본래 강연에서는 0세에서 7세까지를 (1) 0-2⅓세, (2) 2⅓-4⅔세, (3) 4⅔-7세로 세 주기로 나누었지만, 여기에서는 (1) 0-3세, (2) 3-5세, (3) 5-7로 바꾸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쓰이는 시기에 따랐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만나서 엄마의 몸속에서 커 가는 것입니다. 그 전의 인간 존재는 아주 넓고 굉장히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커다란 작용에 의해 크게 원을 그리다가 이것이 점점 밀집해서 하나의 점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 먼 우주에서 이 지상으로, 인간이 육화되는 과정입니다. 우주적 존재였던 인간이 완전히 지상적 존재가 되는 것은 만 21세 정도가 되어서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주로부터 배꼽을 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과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우주의 법칙성에 의해서 지상으로 오다가, 이제 처음으로 ‘나는 지구에 도착했다’라는 의식과 함께 태어나는 그 순간, 바로 점의 순간입니다. 즉, 점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은 이런 면에서 '나는 우주적 존재였다가 이제는 지상적 존재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밀집된 그림은 밀집과 동시에 퍼져나가는 요소도 보입니다. 퍼져나가는 형태는 여러 모양이지만 대부분 나선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 문화 유적 가운데에서 신전의 문양을 보면 나선형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풀어져 나가는 그림이 많습니다.

나선형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되어 가는 인간, 즉 육화과정'을 의미하며, 풀어져 나가는 것은 '탈육화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이런 면에서 아이는 항상 되어 가는 육화의 형태, 다시 말해 안으로 들어가는 나선 형태를 그리지, 풀어져 나가는 형태는 절대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림4)

(그림4)

나선 형태로 계속 들어오다가 끝을 선 같은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나는 지상인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표현입니다. 아이들은 나선 형태를 계속 그리지는 않고 점차 원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즉, 나선 형태로 가다가 끝 부분에서 나선 형태가 풀어지는데 그것이 점점 작아지다가 원 형태로 갑니다. (그림5)

(그림5)

어떤 그림에서는 원을 그리면서 원을 마무리하려고 노력한 것이 역력히 보입니다. 원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처음 시작한 데에서 만나려고 합니다. (그림6,7)

(그림6)

(그림7)

이렇게 원을 만드는 시기는 점을 찍는 시기와 똑같습니다. 원도 만나려 하고 동시에 점도 찍습니다. 점이라는 것은 '나'라는 의미이고, 원은 '내 주변, 집안에 내가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색깔이 나오는 나선 형태를 그린 아이는 좀 더 자란 아이입니다. 그 전까지는 색깔의 차이를 모릅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두움입니다.

저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 이 어두운 지구에 왔다는 의미인데, 내가 지구에 도착함으로써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어두워졌다는 것은 내가 빛이 있는 곳에서 어두운 곳을 지나 지구에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밝은 색에서 시작해 점점 그림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이가 점을 찍을 수 있고 원을 잘 그릴 수 있습니다. 이때 배운 이것이 후에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점과 원을 잘 그릴 수가 있는 이유입니다.

색이 있는 나선 형태를 그린 그림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는데, 나선형을 파란색으로 색칠한 가운데에 ‘자기’를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림5 참조) 이때가 바로 머리 인간(머리만 있고 그것에서 손과 발이 나오는 그림)의 시기로, 나선 형태로 육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지상에 왔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색깔을 쓰는 아이는 동그라미와 점을 온전하게 그릴 수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원과 점을 그릴 수 있다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것을 그려 나갑니다. 3.7세가 되면 원 안에 작은 원이나 점들을 그리기도 하고 좀 더 나이가 든 아이(만 4세)는 원에다가 점들을 찍어 그리기도 합니다. (그림8,9)

(그림8)

(그림9)

4세 아이의 그림은 ‘자아의식’에서 조금 벗어난 시기입니다. 출생부터 3-4세 시기까지 발달 과정의 특성을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3세 이하의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 혼자 놀거나 개별적인 단어들을 열거하는 자기중심적인 때입니다. 그래서 0세에서 3세 사이를 ‘자기 발견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원 형태로 겹치는 그림뿐만 아니라 원이 아닌 다른 형태의 그림들도 나타납니다. (그림10)

(그림10)

이런  그림들 역시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어둡게 만들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일정한 방향 없이 그리다가 점차 일정한 방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방향을 만들다가 두 방향으로 교차되는, 마치 십자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림11,12,13,14,15)

(그림11)

(그림12)

(그림13)

(그림14)

(그림15)

이렇게 그림이 겹쳐질 때는 ‘나’라는 초기적인 자아의식이 생길 때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완전히 자유롭게 놔 둘 때 나오지, 인위적인 조작으로 “이거 그려라, 저거 그려라” 하면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그림을 ‘면’으로 그리지 않고 선으로만 그립니다. 아이가 십자가 모양을 그릴 때에는 ‘내가 저 높은 곳에서 와서 지상에 섰다’는 수직관계뿐만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는 궤도의 방향처럼 수평의 관계도 성립해서 ‘이제 나는 세상에 와서 내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림16)

(그림16)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부분에서 이제 내가 생겨났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 모양의 몸짓은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나의 삶으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마구잡이로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원형적인(원초적인) 상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견할 때 굉장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이들이 존경스럽고 경외스럽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이렇게 원형적인 것을 그리는 것은, 천상의(점과 원, 십자가 같이 지혜가 가득 담긴 상징들은 천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천상에 있는 것들을 아이들이 그림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과 십자가들을 많이 그리고, 또 굉장히 연습을 많이 해서 언젠가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 밑이나 원 안에 선들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또 원 안에 점들을 찍는 그림도 있고, 십자가에서 발전한 형태의 선으로 인간을 표현합니다. (그림17,18,19,20)

(그림17)

(그림18)

(그림19)

(그림20)

그러한 그림들은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자기가 그린 것을 보고 “아! 이건 마리고, 저건 페터야”라고 말하며 그 그림에 대해 말합니다. 또 이 시기에 머리 인간의 형태를 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을 직선과 곡선을 가지고 그립니다. (그림21)

(그림21)

그러면 이것 말고 더 나올 것이 없을까요? 점, 선, 곡선, 이것들을 가지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무엇인가를 굉장히 빨리 그려 놓고 보니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아! 이건 자전거잖아” 하고 말합니다. (그림22)

(그림22)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리는 자전거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움직임으로 그립니다. 아이가 자전거라고 인식했을 때에는 이미 전에 자전거를 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라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아이가 그린 그림에서 아이는 “이건 오토바이야” 하고 말합니다. 그림에 “부릉, 부릉” 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서 아이는 오토바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23)

(그림23)

이러한 주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흥미롭고 또 잘 알아야 될 부분인지를 감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될 때, 이러한 그림의 과정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3-5세 아이들 그림

어제는 9개월에서 3세 사이의 아이들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원, 점, 십자를 그리는 시기로 초기적인 자아가 생길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출생 전에 경험했던 것들이 그림으로 나타나고, 우주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지상세계에 도착해서 ‘이제 내가 이 지상에 서 있다’는 것을 최초로 인식하는 과정임을 여러분께 보여 드렸습니다. 아이들은 뾰족한 크레파스 같은 것을 잡고 선을 그리는데, 이때는 색깔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종이에다 밝은 색에서 점점 어두운 색으로 밀집을 하며 그려 나갑니다.

초기에 아이들은 엄마가 사용했던 것들을 따라서 잡고, 그 후에 여러 가지 도구들을 잡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학교에 갈 때까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타나는 그림들이 원을 그림과 동시에 방향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십자 형태가 나타날 때까지 아이들은 반복해서 연습을 합니다. 지혜로운 것은 아이들이 그림을 원형(原形)적인 선(원), 점, 십자 같은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출생 전에 경험했던 것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원, 점, 십자를 그리면 첫 7년 주기의 첫 번째 시기(0-3세) 끝에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은 첫 번째 시기 이전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그 이후부터 기억합니다. 3세 즈음에 자아의식이 처음으로 생기면서 비로소 사고하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이들은 자기를 가리켜 “나”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는 원, 점, 십자 형태를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이 세 가지를 이용하여 그리는 것을 습득하고 나면 평생 동안 이 기술을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림을 보면 점, 선, 원은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그 후 머리 인간이 나올 때까지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려 나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아! 이건 엄마, 아빠야” 하며 알게 됩니다. 3.5세 정도 된 아이들 그림을 보면 머리 인간에서 다음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몸통 같은 것을 그립니다. (그림24)

(그림24)

3세 이후 아이는 다음 발달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자기 혼자 놀며 양극성 있는 놀이를 합니다. 문을 닫았다 열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앞으로 섰다 뒤로 섰다 등 자기 중심적인 놀이를 합니다. 그 이후 아이는 다른 아이와 놀고 싶어 하는 발달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때부터는 언어에서도 사회성이 나타나 다른 사람과 대화적인 언어를 합니다. 이제 아이는 감각기관을 펼쳐 들리는 곳으로, 소리 나는 곳으로, 보이는 곳으로 모든 방향으로 의식을 집중해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시기의 그림을 보게 되면 대개 사람들은 ‘해님을 그렸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발달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25)

(그림25)

아이가 머리 인간을 그려 놓고 또 옆에는 해 같은 것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 이제는 바깥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아이의 상태가 표현된 것입니다.(그림26)

(그림26)

아래의 그림을 그린 아이는 사방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림27)

(그림27)

아이들 그림 중에 배경 같은 것을 그린 경우가 있는데, 주의할 점은 아이들은 스스로 배경 같은 것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나 교사가 그려 주었거나 그리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부모나 교사는 절대로 말을 시키거나 지시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28)

(그림28)

기본적인 그림들은 이 시기에도 나타나지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들마다 다 다릅니다. 밖에서 가져오고 싶은 행위는 비슷하지만 이러한 잠재적 경향은 아이마다 다릅니다. 이 시기에 발달이 빠른 아이들 가운데에는 색깔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림29, 30, 31, 32, 33, 34)

(그림29)

(그림30)

(그림31)

(그림32)

(그림33)

(그림34)

이 시기의 모티브는 바깥 세계와 나의 만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아이들 그림 중에는 나선형에서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고, (그림 35)

(그림35)

색이 있으면서 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서도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림36)

(그림36)

또 점으로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림37)

(그림37)

아이들은 다양한 개인성이 있기 때문에 같은 모티브에서 출발하더라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이가 조금 든 아이들은 그림에 몸통이 생기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십자 형태도 그리며, 손이 움직이는 모습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림38,39,40)

(그림38)

(그림39)

(그림40)

이 시기의 아이들은 처음에는 머리를 중요시 여기며 바깥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마치 머리에서 안테나와 같이 뻗쳐 나가는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그림41)

(그림41)

저는 이런 그림들을 볼 때 아이들이 아직도 하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이 시기에 더 나이든 아이들 그림을 보면 머리 위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림42)

(그림42)

또 어떤 아이의 그림을 보면 귀에서 뭔가 나가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이틀 후에 귀에 염증이 났습니다. 이미 아이가 그 전에 느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43)

(그림43)

3-5세 사이의 그림들을 보면 아주 특별한 태아기에 대한 그림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프랑스 한 의사 부부는 아이들의 그림을 수집하여 태아기의 기억(회상)에 대한 그림들을 설명하여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이러한 특별한 그림들은 아이들한테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나선 형태를 안쪽으로 그릴 때 그것은 육화하는 것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 그림 중에 나선형을 그리고 난 다음 그 가운데에 또 하나의 원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안에 있는 부분인 것처럼 작은 원을 표현했고 그 위에 사람 얼굴 같은, 즉 엄마와 같은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엄마의 몸 전체와 엄마의 내부까지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44)

(그림44)

어떤 아이는 나선형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별들이 함께 나선형 안으로 들어오는 그림도 그립니다. 육화하는 과정을 엄마의 몸에 표현한 것인데, 더 흥미로운 일은 밖에 있는 별들이 엄마를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그림45)

(그림45)

또 다른 아이들 그림을 봐도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림46,47)

(그림46)

(그림47)

이것은 러시아 인형처럼 생겼는데, 이젠 아이가 바깥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 그림입니다. (그림 48)

(그림48)

다음 그림을 보면 점점 '내(자아)가 천상에서부터 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성인의 경우는 밑에서부터 그려 올라가겠지만, 아이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림을 그립니다. 이는 저 세상인 천상에서부터 이 세상으로 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 49)

(그림49)

또 다른 아이의 그림을 보면 ‘내가 온다. 아, 내가 와야만 하지!’라며 위에서 아래로 표현하고, 지상에 와서는 척추 같은 형태의 그림들을 통해 강하게 표현을 합니다. (그림 50)

(그림50)

두 그림의 경우(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그림) 다른 조건들이 있는데 한 그림은 오고 싶어서 좋아하는 그림이고, 또 한 그림은 오고 싶지 않은 듯한 조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3세 아이가 그렸는데, 태아기에서 세쌍둥이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2.9세 아이가 그린 그림에는 쌍둥이처럼 그렸는데 그린 아이는 정말 쌍둥이입니다. 이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바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51)

(그림51)

아이가 중심으로부터 12개의 선이 바깥으로 뻗어 나와 12개 선마다 원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12개의 선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마치 황도 십이궁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양탄자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위에 아이가 뉘어져 있고 식구들이 아기를 받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52)

(그림52)

아이들 그림을 많이 연구한 덴마크 의학자가 저에게 “당신은 당신의 일생을 선 하나로 끊이지 않고 그릴 수 있느냐?”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그린 어떤 그림을 보여 주면서 아이가 자기 일생을 선 하나로 표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그림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머리가 밑을 향하고 있는 태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선은 다시 태아 같은 것을 돌아 나와서 세상을 계속 살다가 다시 왔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림을 선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림53)

(그림53)

어느 시기에 다다른 아이의 그림을 보면, 엄마의 머리와 몸을 그리고 엄마 몸에 있는 아기 머리가 밑으로 내려가서 태어나려고 하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림 54)

(그림54)

이제까지 아이는 이러한 것들을 연습하고 표현한 다음 더 발전하여 마치 계단이나 사다리처럼 선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지학에 따른 인간의 발달론에 대해 소개한 다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인지학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7년 동안 형성력(에테르체)이 작용해 신체를 형성한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시기인 0-3세 시기에는 숫구멍이 닫힐 때까지 형성하는 힘이 머리 부분에서 제일 많이 작용합니다. 3세 즈음의 그림들을 보면 원을 완전하게 그리는데,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될 때까지 계속 힘을 쏟고 숫구멍이 닫힐 때까지 그 힘이 계속 작용합니다. 0-3세 시기에는 두뇌가 거의 70-80% 정도 형성되며, 두 번째 시기(3-5세)에는 몸통 속에 있는 기본적인 장기들이 대부분 형성됩니다. 또 이때에 신경계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인간을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다음에 있는 인간학적인 그림들을 보겠습니다. 3-5세부터는 지금까지 나온 그림들을 조합하여 그리는 형태가 나옵니다. 이 시기에는 항상 공간을 만들어 놓고 채워 놓는 듯한 사다리 그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림55)

(그림55)

이제 선이 왼쪽 오른쪽으로, 가슴-몸통에서 하는 일들인 규칙적이고 리듬적인 그림들이 나타납니다. (그림56)

(그림56)

이젠 머리가 작아지고 중간 부분인 몸통을 두드러지게 그립니다. 즉, 사다리에 머리가 있는 형태의 그림입니다. 머리가 작아지고 몸통이 크게 그려지며 몸통에 사다리처럼 내부를 표현합니다. (그림57)

(그림57)

어떤 아이는 이 부분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가 새로 나올 시기가 되면 아이 스스로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고, 입을 사다리 모양 안에 많은 선을 그려 표현합니다. (그림58)

(그림58)

이 시기의 아이는 눈도 사각형으로 그리곤 합니다. (그림59)

(그림59)

성인의 신경계를 보면 가슴 부분에 사다리 형태가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신경계가 완성되는데, 이때 아이들 그림에서도 사다리 모양의 그림이 나옵니다. (그림60, 61)

(그림60)

(그림61)

아이들은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전 발달 단계에서 십자를 그린 형태에서 발전하여 사각형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 시기에는 그전 발달단계에서 보인 점, 선, 원이 빠지는데, 이 부분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선이 발달하여 막힌 사각형으로 발전했고, 원이나 곡선은 사람의 장기 형태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그림에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건 흥미로운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장기 부분은 어디에 나타났는지 한 번 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


5-7세 아이들 그림

어제는 태아기 때를 그린 그림을 살펴보았습니다. 태아기 때의 그림 중에 사다리꼴 모양에서 막힌 사각형이 나오는 그림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후 형성하는 힘에 의해 몸통 부분이 생겨 나는 것을 그림에 보았습니다. 사다리꼴 모양이 수평적인 선과 수직선인 십자 모양에서 발전된 것도 보았습니다. 사다리꼴 모양의 형태는 일반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면 신경계 형태의 그림인데, 그러한 모티브들이 우리 몸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점, 선은 나왔는데 원에 대한 것은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아마도 원에 나타난 형태는 몸속에서 장기 형태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장기 형태는 아이들 그림 속에서 둥그런 원형들이 장기 형태로 보이는데 아직 그림에서는 확연히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잉에 브로흐만(『아이들 그림의 비밀』의 저자)은 저와 함께 연구를 했던 분으로 아이들 그림을 통해 발달과정을 연구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아이의 두 번째 발달 단계에서 원형은 장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언급은 되어 있지만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내용에도 약간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제 과제로 내준 ‘장기 같은 형태’가 그림의 어느 부분에 나타나는지 혹시 발견 사람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힌트를 드린다면, 그것이 몸통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곳은 나중에 우리의 감정(느낌)이 사는 곳입니다. 아이들 그림 중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나타납니다. (그림62, 63, 63-1)

(그림62)

(그림63)

(그림63-1)

색깔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7-14세 시기에 발달합니다. 손을 다쳐 울고 있는 아기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면 “책상이 나한테 그랬어”하고 말합니다. 감정이 내부에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가 아프거나 울 때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면 아기는 스스로 어디가 아픈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초기적인 감정에 대한 인식은 우리 신체 안에 3-5세 사이에 생겨납니다. 나중에 감정이 발달하기 위한 기초적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이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주기(0-3세)에서 나온 그림 중에 색깔들이 나온 그림들이 있는데 그것은 색깔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둡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색깔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다리꼴에 대한 모티브가 나타난 그림들에서도 색깔이 들어 있는데, 그 색깔은 마치 강조가 된 듯했습니다. 아이가 한 색깔을 그리면서 ‘아! 이것이 빨강이구나’ 하고 된 것처럼 말입니다. 사다리에 대한 모티브를 그리면서 색깔을 연습해 가는 과정들이 이 시기에 확연히 나타납니다.

바로 두 번째 단계(3-5세)에 아이들은 색깔도 인식하는 단계에 접어듭니다. 하지만 색을 한꺼번에 다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천천히 발견해 냅니다. 아이 스스로가 내면에서 색깔을 발견해 나갈 때 누군가가 ‘이건 빨간색이야’ 하고 미리 색을 말해 준다면 색을 발견해 나가는 성취감을 잃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5-7세)가 되면 색깔을 발견하는 정점에 이르는 시기입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시기의 초기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때에는 아이들이 색깔들을 굉장히 많이 발견해 내고, 아직도 사다리 모티브 형태 안에서 색깔들을 더 많이 칠함과 동시에 덧칠하며 색을 정복해 나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아이들이 이 나이 때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터득한 사각형 모양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색깔을 채워 나가면서 색에 대해 알아갑니다. (그림64)

(그림64)

이제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이 네 귀퉁이에서 시작해 색을 채워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림65)

(그림65)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5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색을 칠해 나가다가 사각형이 나옵니다. 이제까지의 사다리에서 나오는 사각형과는 다른, 뾰족한 부분이 서 있는 마치 마름모와 같은 그림들이 나옵니다. (그림66)

(그림66)

사실 잘 보면 마름모를 그린 것 같지만 본래는 삼각형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학교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행위를 하기 위한 신체에 기본적인 것’이 생깁니다. 이때는 손재주가 굉장히 늘어나고 발도 빨라집니다. 이것은 사지를 가지고하는 것으로, 사지에서 발견한 삼각형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그림66)과 같은 그림들(양탄자 모양)을 몇 주 동안 계속 그리게 되는데, 그것을 그리는 사이에 삼각형을 그리는 것입니다.

점, 선, 원, 사각형, 삼각형 이러한 것들은 기하학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색깔을 가지고 연습하기도 하지만 ‘대칭연습’을 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대칭연습을 한 후 이제는 어떤 것을 봤을 때 표상하는 힘이 생겨서, 자기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완전히 똑같은 대칭은 아니지만 약간 다를 경우 ‘살아 있는 대칭’의 그림들이 나옵니다. (그림67)

(그림67)

그리고 나서 아직도 모서리 부분을 그리고, 그러다가 하늘을 발견하여 대칭축 부근에 해를 그립니다. (그림68)

(그림68)

살아 있는 대칭은 항상 똑바른 대칭이 아닙니다. 이런 대칭에 대한 그림은 학교에 갈 때까지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그림이 있는데 대칭이 나타나고 양쪽에 삼각형이 나오고 별 모양, 반달모양, 또 별 두 개가 양쪽으로 똑같이 대칭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69)

(그림69)

이렇게 아이들이 색깔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자기가 봤던 것을 표상하여(Vorstellung, 아이가 유치원에 오면서 봤던 나무를 그리려고 할 때, 표상은 자기가 본 것을 자기 앞으로 가져온다는 뜻) 그리는 힘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 그림을 보면 꽃이 대칭의 중심선에 있고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땅의 대칭이 있습니다. 양쪽에 나무가 있는데 한 나무는 연두색, 다른 나무는 초록색의 살아 있는 대칭을 보여줍니다. (그림70)

(그림70)

또 아이가 습득해낸 것들(점, 선, 십자, 원, 삼각형, 사각형, 색깔들)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아이는 땅에 대해 완전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것을 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집은 우리 영혼이 사는 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림71)

(그림71)

위의 모든 과정을 거쳐야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는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어른들이 지시했을 때는 살아 있는 그림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5.3세에서 5.5세 사이의 아이들 그림을 보면 중심축이 있고, 양쪽, 위, 아래에 삼각형이 나옵니다. (그림72)

(그림72)

삼각형은 아이들이 학교에 갈 준비가 되어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학교에 가기 전 시기에는 아직 동물 그림이 잘 나오지 않는데, 간혹 집에 동물을 길렀을 때 나오기도 합니다.

6.9세에는 대칭의 중심에 집이 서 있고, 꽃, 나무, 태양 등이 대칭으로 그림에 나타납니다. 이때가 되면 표상(Vorstellung)이 어느 정도 되는데 아이들은 ‘저 위에 있는 저것만이 하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림에서처럼 하늘과 땅을 잡아 당겨 표현합니다. (그림73, 74)

(그림73)

(그림74)

아이들은 바깥에서 인식했던 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시도합니다. 부모가 음악가인, 그림을 잘 그리는 6.6세 된 아이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75)

(그림75)

이 그림에서는 대칭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섬세하거나 자세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 아이의 그림이 나중에 어떻게 나오는지 뒤에 말하겠습니다. 한국의 아이들 그림에도 위와 같은 대칭적인 그림들이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들은 세계 어느 나라 아이든지 일반적인 발달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대칭으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한테는 아직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않았지만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특히 집과 나무를 많이 그립니다. 전세계에서 수집한 집과 나무들 그림을 보면 자기들이 습득한 색깔과 선들을 가지고 연습해서 그린 것들이 나타납니다.

저는 이집트에 가서 이집트 최초의 발도르프 유치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때 있던 아이들도 바로 위와 같은 발달단계를 거쳤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이집트에 가면 삼각형 모양의 집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때 그곳 유치원에 다닌 아이들의 초기 그림에도 삼각형이 달린 집들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집은 인간의 몸과 관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각형 형태의 집에는 머리, 눈, 코, 입의 형태가 나오는데 이런 의미에서 집은 몸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칭 연습을 많이 하다가 표상을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작은 창문을 통해 큰 나무가 다 보이고, 열쇠 구멍을 통해 큰 산이 다 보이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아이는 교사에게 “선생님, 어떻게 저 큰 탑이 눈에 다 들어오나요?”라고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 아이들은 원근에 대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발견한 것을 가지고 연습하고 실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이 있으면 산 뒤에 있는 꽃을 그림에 그립니다. (그림76, 77)

(그림76)

(그림77)

그 사이에 흥미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새 머리를 파란색으로, 주둥이를 주황색으로, 몸통은 노란색, 한쪽 날개를 빨간색, 다른 날개를 노란색, 꽁지를 노란색으로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그림을 그릴 때 정말 멋있는 새를 그립니다. (그림78)

(그림78)

그런데 아래의 그림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새들의 형태입니다. 그러한 그림을 그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림79)

(그림79)

다음 그림을 보면 원근감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를 크게 그리고 그 뒤에 왕관을 쓴 왕과 나무들은 점점 작게 표현했습니다. (그림80)

(그림80)

또 도끼를 크게 그리고 집이나 길 들을 작게 표현하기도 하고, 앞에 있는 사람을 크게, 먼 쪽에 있는 집들은 작게 표현합니다. 이렇게 원근감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학교에 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갈 만큼 성숙되었다고 보이는 그림에는 삼각형이 나오거나, 머리에 항상 무엇인가 얹혀 있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지상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신발이 나오는 것도 하나의 표식입니다. 그리고 모자를 쓰거나 머리 부분을 매우 강조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림81)

(그림81)

아이들이 그린 것을 보고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게 “너 무엇을 그렸니?”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아이들은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를 그리기도 합니다. 가령 나무를 들고 간다거나 망치로 못을 때리는 등의 행위를 하는 그림들을 그립니다. (그림82)

(그림82)

이 시기 아이들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옆모습을 그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왕비에게 등잔불을 주는 내용의 그림을 보면 그 전까지는 사람의 앞모습을 그렸는데 이제는 왕의 옆얼굴을 그리는데, 아직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눈 색깔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눈의 모습을 보면 이상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림83)

(그림83)

또 이 시기에는 자세하게, 예를 들어 당근의 잎까지 표현하려고 하는 것도 나타납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줄거리,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가령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가는데 비가 오다가 다시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와서 무지개가 뜹니다. 이때에 아이들은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림84)

(그림84)

아이가 누구의 도움 없이, 외부의 조작 없이 지금까지 계속 그림을 그려 왔다면 놀라운 일이 나옵니다. 0-7세 동안 아이들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학교 담임교사의 과제는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지입니다. 이에 대한 것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까 말했던 음악가 부모님의 아이, 그림을 잘 그렸던 그 아이가(그림75) 6.6세에서 6.9세가 되어서 그린 그림을 보고 부모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엄마는 저에게 “아니 선생님,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아이가 지금 이 그림이 뭡니까?” 하며 놀라서 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옆에 있다가 저에게 와서 “선생님, 제가 그림을 이야기해 줄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식사를 위한 시’를 표현한 것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얼굴로부터 나옵니다.

빛은 곡식이 되고, 곡식은 양식이 됩니다.

땅의 열매도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빛은 내 가슴속에도 들어옵니다. (그림85)

(그림85)

이것을 보게 되면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와 비슷합니다. 이 아이는 바로 알고 있는 내용을 글로 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그린 그림들 중에는 교사가 보여준 손유희에 있는 내용을 표현한 그림도 있습니다. 손유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콩콩이라는 친구가 산보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어깨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떨어져 시궁창에 빠졌네’라는 내용입니다. 유치원에서 행하는 손유희의 줄거리를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글씨를 쓰고 싶은데 글씨를 몰라서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손을 잡고 둥지에 앉았습니다. 한 참새가 깨어나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또 다른 참새가 깨어나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둘 다 함께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함께 다시 둥지로 날아옵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이 내용을 가지고 아이에게 손유희를 하면서 들려주었습니다. 그 내용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저에게 왔습니다. 그 그림은 ‘두 새가 한 둥지에 있고 한 새가 둥지에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또 다른 새가 다시 날아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두 새는 함께 날아가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림86, 87)

(그림86)

(그림87)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것이, 아이가 이제까지 알았던 것을 가지고 정말로 학교에 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교사는 이러한 것을 받아서 이제까지 알았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변환시켜, 어떻게 아이들에게 셈하고 쓰기를 가르칠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아름답게 배워 왔습니다.

아이들이 동물을 그리는 것은 학교 가기 직전쯤에 나타납니다. 또 이 시기에는 남자아이들은 배를 많이 그리고, 대부분 여자아이들은 집을 많이 그립니다. 아마도 집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고, 배도 집은 집인데 물 위에 떠서 움직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계가 있는지는 제가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확실한 것은 남자아이는 배를, 여자아이는 집을 그린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생긴 크레파스를 주는가 하는 질문에 본인은 넓적하게 생긴 크레파스를 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뾰족한 것을 골라 그리기 때문입니다. 또 유치원에서 수채화를 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건 학교에 들어가서 해야 될 문제이지 유치원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움직임,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아래 그림은 터키 아이가 그렸습니다. 이 아이 그림 속에는 나무, 집, 이빨, 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사람의 눈, 입도 들어 있습니다. (그림88)

(그림88)

* 이 글은 2002년 Margret Costantini 여사의 사)한국발도르프교육협회(www.waldorf.or.kr) 교사교육 저녁특강을 재수정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여사님의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www.margretcostantini.de

출처: 슈타이너사상 연구소


학생들에게 전공을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들은 전공을 통해 일종의 쓸모 있는 기계가 될 수는 있겠지만 조화롭게 발달하는 인간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 

학생들이 가치들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하고 그 가치들의 느낌을 몸으로 익히도록 하는 것이 필수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문적 지식만을 갖춘 사람이 될 것이고, 따라서 조화롭게 발달한 인간이기보다는 훈련이 잘 된 개에 더 가까워 보일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나 공동체와의 관계를 적절히 맺기 위해서 인간 존재들의 동기와 망상과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소중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서 젊은 세대로 넘어간다. 교과서를 통해서는 절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문화를 형성하고 저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개인적 접촉이다.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 내가 마음에 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와 철학 분야의 딱딱한 전문 지식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즉시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시작하는 전문화와 경쟁체제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문화적 삶의 바탕이 될 영혼을 죽이고 있다.

젊은이들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젊은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부담이 지워지고 지나치게 다양한 주제들이 주어지는 탓에 비판적인 사고의 발달이 크게 훼손 되고 있다. 과도한 부담은 필히 겉핥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가르치는 행위가 고된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값진 선물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New York Times, 1952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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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을 돌아보며  


▲ 정아림(22)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난 4년간 방황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조금씩 '나'와 가까워졌다."

 

‘어느 대학 어느 과에 다니는 누구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많겠지만, 그렇게 간략하게 소개할 수 없는 까닭은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어느 소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회가 보기에 ‘청년백수’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고등학교 자퇴 후, 지나온 4년 동안 인도에서의 자원봉사, 인문학연구실, 대안학교, 극단 등 많은 소속들을 거쳐 바쁘게 달려왔다.

 

나의 다음 걸음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대학이던 대안이던 간에 중요한 것은 한 가지 길로의 오랜 걸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길을 찾아 훌훌 떠날 수 있는 가벼움도 좋지만 한 길에서 오래 머물며 깊게 느끼기 위해서는 엉덩이심도 필요하지 않을까. 4년간 발품을 팔면서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며 떠돈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나의 발목을 잡는 목표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건 소중한 사람들과 그 안에서의 방황, 그리고 끊임없는 질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통해서 ‘나’라는 사람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대안학교에 두 번 떨어지고, 대안을 고민하다 

유년 시절, 초등학교 6년을 6번 학교를 옮겼을 만큼 잦았던 이사와 부모님의 이혼, 그리고 몇 번의 인도 유학이라는 남다른 경력 때문에 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겼다. 인도아이들 사이에서 다른 생김새, 다른 언어를 쓰는 나는 모든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인도에서 왔다고 하면 조금 별난 아이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런 관심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고, 이놈의 ‘자뻑’(자의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다른 애들과 난 달라’ 치부해버리고서 맺는 관계는 항상 겉돌았다.

 

풍파와도 같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한국에 자리를 잡은 중학교 시절 난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공상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족은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모녀의 사이는 꽤 괜찮은 편이지만, 그것도 성적표가 오기 전까지다. 성적표가 날아오는 날로부터 몇 달간 냉전이 지속되었다. 그런 나에게 대안학교는 탈출구로 보였다. 앉아서 하는 공부만 아니라면 밭일이든 뭐든 하면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대안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그곳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은 엄연히 존재했고, 나는 떨어졌다. 그 후 일반 여고에 진학했다. 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빡빡한 수업들과, 체육시간에 실기는 하지 않고 이론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은 나의 머리와 몸을 굳게 만들었다. 정말 심각하게도 심한 변비에 걸려 일주일간 똥이 안 나왔던 끔찍한 사건도 있다. 대장과 소장 사이에서 딱딱하게 굳고 있던 나의 똥처럼 나의 맘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으로 굳고 있었다.

 

대안학교라는 다른 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현실에 전혀 집중을 할 수도, 마음을 줄 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안학교에 원서를 넣기로 결정하고, 염려스런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변비에게 기쁘게 작별을 고했다. 허나, 결과는 기쁘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대안학교에 떨어진 것이다. 대안학교를 두 번 떨어지니 도대체 ‘대안’이 무엇인가 고민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었고 내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내 딴에는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몇 없던 친구들과의 인연도 끊고 생애 처음으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검정고시 합격 후 18살 무렵, 나는 고립되었다. 또래들과의 관계는 줄었고,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했다. 빵집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는 재미있었지만, 평생 빵 포장과 철판을 닦으며 지내고 싶지도 않았고, 돈을 벌어도 쓸 곳이 없으니 주머니를 채우는 쾌감도 없었다.

 

이 세상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들었던 음악은 외로움을 더 고조시켰다. 나는 이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인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도아이들과 바디랭귀지로 소통하며

▲  내가 만난 첫번째 공동체. 인도의 한 시골마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을 경험했다.


18살, 아빠가 살고 있는 인도 공동체에는 나 말고도 아들, 딸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과 내가 함께 살게 되었다. 1년 간 동거의 시작,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나름 밝은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웬걸, 사람들 앞에서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런 나의 성격을 변화시켜 준 것은 인도 아이들이었다.

 

1년간 자원봉사자로서 내 역할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센터로 오면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에게 ‘티쳐’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아이들은 먼저 달려와 이름을 묻고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기도 세고, 말도 많고, 몸이 솜털같이 가벼워서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려 가버릴 것 같은 아이들을 내가 가르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엄청 긴장을 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도 아이들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이 엄청난 소통의 벽이란. 다행히 시골마을에서 영어 좀 한다는 청년들이 안 되는 실력으로 영어를 인도말로 통역해주러 왔지만, 그마저 빠지는 날에는 골치가 아팠다. 하루에 1시간 30분, 아이들은 자신들 앞에 서있는 이방인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울던, 웃던, 춤을 추던, 뭐라도 해야 하는 개그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발표회에 올릴 영어연극을 준비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도무지 연습만 하자고 하면 매번 도망가고, 영어는 외워지질 않는 터라 공연을 올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동작과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언어가 그냥 언어로 다가왔을 때는 무감각하지만 그 언어를 몸으로 이해하면 쉽게 습득했다. 또 다른 세상을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내게 활력을 주었다.

 

공연 당일 날, 아이들은 자신들을 보러 온 관객들을 마주하니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나의 얼굴 표정과 손짓만을 보고서 나의 맘을 다 알아채고는 그 어떤 때보다 잘했다. 늘 대사를 까먹어 애를 먹었던 아이가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자 난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인사 후 무대 뒤로 내려와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주는데, 아 정말이지 인생의 가장 따뜻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연극을 올리면서 온 몸으로 만나 함께 뛰어 놀며 소통하는 바디 랭귀지가 얼마나 소중한 지, 사람을 만날 때 꼭 언어로만 말로만 만나는 게 아니라 부딪힘과 직감으로 만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아이들은 내게 선사해주었다.

 


홀로 떠난 배낭여행이 남긴 깨달음 

▲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 마음의 문을 여는 경험을 하고, 불편함과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고민을 남겼다.


자원봉사 기간 중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공동체 생활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건드리면 할퀴기라도 할 듯 겁이 난 고양이처럼, 혼자라는 두려움과 낯선 환경에서 누가 해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하고 내 발톱은 꺾어지고 만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생애 처음으로 일시적 기절이라는 걸 경험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밥도 맘 놓고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자 몸이 파업을 한 것이다. 기차역에서 쓰러진 순간, 오지랖이 넓은 인도인들이 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왁자지껄 모여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정신 차리라며 얼굴에 차가운 물을 들이 붓는 게 아닌가! 물벼락을 맞고 정신이 든 순간 기적적으로 나를 향한 손들이 모두 도움의 손길로 보였다.

 

아프고 나니 모든 게 달라 보이는 것이다. 내가 피하려고만 했던 그 사람들은 내게 ‘어디가 아프냐’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왔는지, 밥은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돈은 있는지, 낯선 이방인에게 잘도 말을 걸고 무슨 일이든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온 몸에 물이 흥건한 채로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인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기차표를 끊고 다음 여행지로 갈 수 있었다.

 

인도여행은 길 위에서 만났던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 낯선 마을과 도시의 풍경, 그리고 다른 차원의 불편함을 주었다. 기차바닥에서 바퀴벌레와 쥐와 함께 지샜던 밤을 생각하면…. 네팔로 가는 버스 안, 마치 출근길 지하철 2호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숨 쉴 틈도 없이 가득 찼던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앉아서라도 갔지, 14시간을 서서 버티던 이들을 떠올리면 일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불편들은 그 기억들 앞에서 아주 소소해지고 만다. 불편하지 않고서 배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 편하고 익숙하기 만한 환경에서 삶이 절실해지기 어렵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인도여행에서 남은 깨달음이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자급농사의 달인’ 엄마와 두 딸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글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인 우리 가족을 먼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엄마가 있다. 한때 집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시골에서 키운 장본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소규모 자급농사의 달인, 예민한 초감각을 가진 잔소리꾼이다.

 

큰딸인 나는 아침에 머리도 빗지 않고 밭으로 나가는 털털함의 화신이자 양서류, 굳이 말하자면 청개구리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혼자 괭이질하면서 자기 솜씨에 감탄하는 자뻑 기질이 있는 십대이다.

 

그렇다면 동생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오는 고양이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밥 먹을 때만 나타나는데도 ‘사랑스럽게 가르랑거리는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는 고양이는 동생과 딱 어울린다. 내가 곰이라면 동생은 여우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으니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겠다.

 


이상적인 농사 vs. 흙투성이 현실의 농사 

▲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깨를 심고 있는 여연.


농사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다. 학교를 그만 둔 첫해였다.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왜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나는 농담처럼 “밭을 빌렸었는데 집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 말에는 절반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둘 다 여자인 어른 하나랑 애 하나가 기계 없이 500평 밭농사를 짓는다!’ 매일 학교에 갈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물론 그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학교 비슷한 걸 만들어서 한참 재밌게 놀러 다니긴 했지만).

 

게다가 나는 일을 참 못했다. 물론 그 나이에 농사일을 잘하는 애는 한국 전역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못하는 건 못하는 거였다. 풀 베겠다고 낫 들고 설치다가 작물을 베는 일이 허다했고, 내가 캔 감자에는 유난히 호미로 찍은 자국이 선명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하려니까 눈물 콧물을 다 짜낼 만큼 힘들었다. 

 

한동안은 그 힘든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농사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방해할 정도였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이미 농사일 때문에 가족들과 으르렁거리면서 만들어진 반발심이 얼룩처럼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를 잡은 뒤였다.

 

이상적인 농사가 땀 흘리는 건실한 노동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적인 삶에 어울리는 개념이라면, 내게 있어서 현실의 농사는 욕 나오게 바쁘고, 무식하게 힘들기만 하고, 흙투성이가 되는 일이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미리부터 뼈저리게 깨달은 나는 내심 밭에서 벗어날 기회를 꿈꾸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뭔가 일을 칠 용기도 없는 어린애가 갈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 나는 집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와 자주 싸우지만 않는다면 집은 계절마다 신선하고 맛있는 먹을 거리들이 넘쳐나고, 주변에는 산과 별, 꽃과 나무로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에서 좋은 음식 먹으며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땀방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가난한 우리 집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아마 나는 농사일을 집이라는 좋은 곳에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포기해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임시방편일 따름이었다. 곧 농사에 대한 내 진짜 마음을 시험할 때가 왔으니.

 

밭일하며 마음의 격동기를 거친 시간들 

▲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이 시대에는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저항이야.’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다. 이 말처럼 엄마는 농사야말로 산업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책상 앞에 앉아 죽어라고 책만 파는’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딸들은 그런 불균형한 공부를 하지 않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나 청개구리 기질이 충만했던 큰딸의 비비꼬인 마음은 엄마가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에 관심 좀 가지라고 잔소리를 하면 할수록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로 기울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타입의 아이였다면 내 반항에 뭔가 정당성이라도 부여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일하러 나가기 싫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눈앞에 닥친 일들에서 어떻게든 내 이익을 보호하려고 미친 듯이 싸웠다.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쉬고, 힘을 덜 써서 일하고, 작업복을 안 빨아보려고 잔머리를 마구마구 굴리다가 엄마에게 걸리면 그날은 싸움의 날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조금씩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 마음속에서 좀더 깊은 분노가 부글부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벌써부터 농사를 짓고 살라고 할 수가 있어?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잘할지 엄마가 어떻게 알고? 내 인생을 미리 설계해 놓은 거야? 그럼 도대체 제도교육 안에서 부모의 관리를 받으며 사는 애들이랑 뭐가 다른데?

 

엄마에게는 분명 인생의 많은 것들이 ‘농사’와 ‘생태주의’로 수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세대인 내게는 생태적이고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다. 스스로 선택한 가치가 아닌, 너무 흔해서 있는 줄도 모를 정도인 산소 같은 거였다. ‘귀한 줄 몰랐다’는 게 돈도, 넘쳐나는 정보도 아닌 가치관이었다.

 

사춘기가 지난 어느 시점부터는 나도 확실히 농사일을 꽤나 즐기고 있기는 했다. 아침 일찍 안개에 몸을 가린 산 근처에 있는 밭에 나가 새벽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일하는 건 하루 중에서도 기분 좋은 순간이다. 단지 일하는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초조했을 뿐이다. 이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책을 읽었으면, 수학문제를 풀었으면, 기타를 연습했으면, 뭐라도 좋으니까 다른 걸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밭에만 가면 늘 시간에 쫓기고 불만에 차 있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대는 시간에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었다. 딱 십대 여자애들이 할 만한 그런 걸 했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고 자신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실제 모습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속 빈 강정 같은 아이였다(지금도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명료하게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고민한다  

▲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뭘까,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앞으로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만약 내가 200년쯤 전에 한국에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을 것이다. 다른 삶을 꿈꾸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냥 꿈만 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면에서 내가 이렇게 온갖 고민을 하는 이유는, 이 시대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농사와 식량자급의 가치를 워낙 하찮게 생각하고, 부모가 농사를 지어도 자식은 다른 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물이 들었는지 농사일을 순수하게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나중에 나이 들고 해도 되는 일을 왜 벌써부터? 라는 통속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차피 이미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있으니 걱정 없다는 여유로움도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농사일을 배우는 게 내 나머지 인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은근히 생각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럼 앞으로의 인생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공부는 뭐지?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려서 회사를 다닐 생각도,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뭘까? 이것저것 고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농사 쪽으로 생각이 흘러왔다. 하지만 역시 찝찝했다. 정말 이걸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님 그냥 살아온 대로 사는 게 편한 거야?

 

게다가 농사도 농사 나름이라, 관행농법으로 대규모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부분이고, 유기농이어도 억 소리가 나오는 커다란 하우스를 몇 동이나 짓는 부농(?)도 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계절마다 다른 작물들을 기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급자족을 꿈꾸며 다양한 작물들을 소규모로 심어 기르는 엄마와 같은 사람도 있다. 이 안도 단순한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알을 뚫고 날아가기를 아주 간절하게 원한다. 하지만 그전에 과연 그 ‘알’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차근차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분명 땅에서 먹을 것을 직접 기르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사는 일이 진솔한 삶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다른 걸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에 공감하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문제라면 문제다. 애매모호한 상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다. 아니, 젊다. 그러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려 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떤 가치가 의미 있는 가치인지에 대해서. 

- 여성주의 저널 일다

5살까지 가르쳐야 하는 5가지 삶의 가치

베이비뉴스-강샘 기자



정직·정의·결정·배려·사랑이 왜 중요한지 알려줘야


어린 아이에게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은 대부분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미 육아잡지 페어런츠(parents.com)는 다섯 살 전에 적어도 다섯가지 삶의 가치는 반드시 가르쳐 놓아야 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페어런츠가 전하는 5세 이전에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다섯가지 삶의 가치다.


1. 정직

크리스가 친구 폴과 걸핏하면 싸웠다. 크리스의 엄마는 두 아이를 떼어 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폴의 엄마가 찾아와서 크리스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장황한 설명이 싫어서 크리스 엄마는 크리스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폴의 엄마가 가고 난 후 안에서 듣고 있던 크리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어디가 아픈데?"


엄마는 급한 김에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느라고 아들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엄마는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아이는 그 순간에 엄마로부터 거짓말을 배웠다. 그 상황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에 남아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은 앞으로 크리스의 삶을 망쳐 놓을 수도 있다.


아이 앞에서 부모의 정직은 참으로 중요하다. 크리스의 엄마는 다소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요즘에 두 아이가 너무 싸우네요. 당분간은 좀 떨어 뜨려 놓아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경우가 있다. 꼭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도 말해야 할 것을 숨기는 것도 정직을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다. 예를 들자면 "이거 아빠한테 말하면 안돼" 라던가, 전화가 걸려 오면 "엄마 없다고 해"라고 말하는 것도 아이의 정직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아이의 정직을 방해하는 것은 지나친 엄격성이다. 부모가 지나치게 엄격하면 아이들은 사고를 저지르고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잘못을 하더라도 야단치기 보다는 함께 풀어나가 버릇하면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정의

4살 에이미가 사촌 마커스와 각자 나무 블록으로 성 쌓기를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에이미가 마커스의 성을 부숴버렸다. 왜 그랬느냐고 묻자 마커스가 자기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 화가 나서 부숴버렸다고 말했다. 아빠는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다시 놀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하면 안된다.


에이미는 분명히 마커스의 성을 부수는 피해를 입혔다. 피해를 입힌 경우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사과를 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커스가 그만큼 공들여 쌓은 성을 원상 복귀하도록 했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 본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마커스에게 과자를 하나 주는 행동을 하도록 했어야 한다.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면 반드시 사과와 복구, 보상을 가르쳐야 한다.


3. 결정

삶은 결정의 연속이다. 두 개, 세 개, 혹은 더 많은 문제들에 부딪쳤을 때 빠른 판단력으로 결정하고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빠르게 결정하는 습관을 길러 주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잘못 결정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이 때 잘못 결정했다고 야단을 치면 다음에 무언가를 결정해야 될 때 당연히 망설이고 겁이나서 주저하게 된다. 잘못 판단해서 했더라도 야단치지 말고 다시 되돌리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 보면 좋다.


4. 배려

사회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들이 줄어 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약한 면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서로 배려해가면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솔선 수범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말에 자선냄비 같은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자선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자선으로 그치지 말고 그것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다는 것도 반드시 가르치자. 가능하면 아이로 하여금 직접 기부를 하게 하는 것도 좋다.


5. 사랑

사람들은 아이들은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배울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가 모델이 되면 훨씬 더 많은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먼저 부모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부부끼리 자주 포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다. 또한 아이에게도 많은 포옹을 해 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주자.


단순한 말로서만 끝낼 것이 아니라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다. 도시락 안에 살짝 사랑한다는 쪽지를 남겨 두기도 하고 포스트 잇을 이용해 칫솔에 "사랑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두면 아이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부모가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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