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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지역적인 특성 상, 백제나 신라와 비교하여 쌀을 재배하기에 부적합한 지형이 많았다. 그래서 초기의 식생활은 곡식과 육식이 결합된 형태였으나, 중기 이후 요동지방과 한강유역을 평정하고 요서지방을 넘나들며 국력이 강해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면서 쌀의 공급이 원활해져 점차 식생활의 수준도 높아졌다.




쌀·콩·조·보리 등을 재배한 고구려인

고구려에서 재배된 채소로는 부루(상추)와 아욱, 배추, 무우와 콩잎, 박, 오이 등이 전해진다. "고구려 사신이 수(隋)나라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은 부루 종자가 귀하여 비싼 값에 매입하였던 관계로 '천금채(千金菜)'라 불리기도 한다"는 조선후기 역사서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재배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초기에는 단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먹었지만, 후기에 접어들면서 양념으로 파, 생강이 곁들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겨울이 춥고 긴 고구려에서, 김치는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과일로는 산에서 채취가 가능한 야생 과일과 복숭아, 배, 밤, 오얏 등이 재배되었다.


곡식으로는 쌀, 콩, 조, 보리 등을 비롯하여 기장, 수수, 밀이 있었다. 고구려인은 사냥을 통하여 사슴과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 고기를 주로 섭취했다. 또한 고구려 초기에는 해안 쪽에 거주하는 동예(東濊), 옥저(沃沮) 등의 피정복민들에게 공납으로 받은 소금과 해산물도 식생활에 이용되었으며, 이후 해산물의 직접 조달을 통한 활용도 이루어졌다.


대략 고구려 초기에는 곡식을 가루로 내어 토기에 물을 붓고 가열하여 죽의 형태로 먹었으나, 이후 시루에 곡물을 쪄서 먹다가 점차 무쇠솥에 밥을 해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차좁쌀을 시루에 찐 차좁쌀 밥이거나 혹은 기장쌀로 밥을 짓기도 하였다.


농사를 지을만한 비옥한 농토가 그리 많지 않아 쌀은 매우 귀했다. 귀족들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은 쌀밥과 사냥을 통해 조달한 각종 고기와 젓갈 등으로 식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콩이나 조, 보리와 밀 등의 잡곡밥과 간단한 반찬 정도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황해도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벽화에 그려진 주방그림에서 시루로 음식 만드는 모습, 우물에서 물 뜨는 모습, 주방에서 음식을 나르는 모습, 귀부인에게 차를 드리는 모습, 곡식을 시루에 넣고 조리하는 모습 등을 통해 고구려 식생활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에는 주인과 손님이 담소하는 모습 뒤편으로 그릇에 가득 담은 과일이 그려져 있다. 또한 디딜방아로 곡식을 빻는 장면과, 약수리고분 벽화에 키질하는 장면이 있어 곡식류가 고구려인에게 주요한 식량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구려 지역 특성상 콩의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고구려 사람은 장양(藏釀, 술빚기, 장담그기 등 발효성 가공식품을 총칭)을 잘 한다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된장, 간장을 비롯한 발효음식이 우리 민족이 즐기는 음식이었으며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고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반 백성들은 곡식을 빻을 때 오목하고 넓적한 돌판과 둥근 돌막대로 이루어진 맷돌을 이용했다. 그러나 왕궁이나 귀족의 집, 군대 등에서는 소를 이용한 연자방아가 사용되어 밥을 지을 수 있게 곡식을 빻았다.


이렇게 마련한 곡식을 솥이나 시루에 밥을 지어먹었으며, 솥이나 시루는 대개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고구려 후기에 들어서며 쇠로 만든 솥이 이용되었다.




고구려음식의 간판스타 '맥적'

육류 역시 곡류와 더불어 고구려인의 주요한 식량이었다. 광대한 지역특성상 육식이 곡식보다 더욱 중요한 식량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서북쪽 국경지대인 현재 동몽골 초원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양, 염소 등과 양, 낙타, 말 등의 젖을 주식으로 했다. 이들은 오늘날 몽골 등지의 유목민들처럼 말린고기와 치즈같은 유제품을 자주 먹었을 것이다.


현재 연해주 지역인 동북쪽 삼림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노루나 꿩, (멧)돼지 등과 민물고기를 많이 먹었을 것이다. 특히 돼지는 동북쪽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또한 각종 민물과 바다 생선류도 주요 음식이었다. 고구려는 동해안에 자리한 동옥저에게서 생선과 해초류, 소금 등을 상납받기도 했다.


중국의 책 '수신기(搜神記)'에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고기구이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불고기 음식이다.


(멧)돼지를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 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굽는다. 이 요리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던 음식이다. 간이 깊게 배어 있고 구워낸 맛이 고소해서 이웃 중국에도 전해졌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노루, 소, 개 따위의 고기도 좋아했지만 돼지고기를 더욱 즐겨 먹었다.


고구려의 맥적이 널리 선호되는 먹거리로 자리잡았던 이유는, 산악지역 특성상 풍부한 사냥감과 대두(大豆)의 원산지답게 간장 맛 때문일 것이다. 가을에 콩을 삶아서 동해안에서 들여온 소금으로 메주를 만드는 일은 당시에도 매우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간장은 사냥에서 잡아온 노루나 멧돼지의 살코기를 양념하는 데 쓰였다. 즉, 맥적이 콩을 이용한 발효음식으로 양념을 한 것은 현대 한국의 대표음식인 불고기와 된장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중국 책 '수신기'에는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만큼 맥적은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음식이며 이웃 나라에도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육식을 즐겨한 고구려인

가축으로 키운 소, 돼지, 양, 닭, 개 등도 육식으로 이용되었다. 유리왕 때의 기록이 말해주듯 돼지는 제사에 쓰기 위해 국가에서 관청을 두고 길렀을 만큼 중시되었으며, 당시 제천행사에서 조상신령에게 바쳐지는 제물 중 돼지는 으뜸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잔치 때나 큰 행사시 돼지를 잡는 풍습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벽화에서 볼 수 있듯 소 역시 제사에 쓰이기도 했으며, 농사에도 활용하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량이었다. "신라인들이 고구려인을 '수탉'으로 비유했다"는 기록을 보면 닭 역시 많이 사육되었을 것이다.


'무용총 수렵도(舞踊塚 狩獵圖)', '장천1호분 수렵도(長川一號墳 狩獵圖)', '덕흥리고분 수렵도(德興里古墳 狩獵圖)'로 볼 때 고구려인은 멧돼지, 사슴, 토끼, 노루, 꿩을 사냥하였으며, 이는 사냥을 통한 식량조달의 비중이 꽤 높았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호랑이 역시 사냥을 통해 잡았지만 식용보다는 호피(虎皮)를 벗겨 의복이나 기타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고구려인이 육식을 즐겨했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은 그의 형수였던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인 우씨 왕후의 방문을 받는다.


산상왕은 왕후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하자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 손가락을 싸매준다.


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이 660년경에 편찬한 사류부(事類賦)인 한원(翰苑)에는 고구려인이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패용한다"고 했다.


산상왕이 든 칼은 오자도로 볼 수 있다. 사냥을 통해 즉석에서 고기를 잡아 오자도로 썰어 먹거나, 식탁에서 오자도로 고기를 썰어 먹는 것은 고구려인들에게는 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불고기·김치·된장 등은 고구려 음식문화에서 발단

고구려 사람들은 '맥반'이란 식탁에서 '조두'라 불리는 좋은 그릇을 비롯해 여러 개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놓고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 식사를 했으며, 고기를 썰기 위한 '오자도'라는 작은칼을 이용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동이족의 식기류인 조두(俎豆)라는 것을 오직 동쪽 고구려 등지에서만 사용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사람들의 식생활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무용총(舞踊塚)' 벽화에서 볼 수 있듯, 고구려인들은 식사할 때 밥상을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밥상은 상류층 귀족들의 음식문화로 추정되며, 일반 백성들의 주거문화는 귀족들과 달리 움집이나 반움막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탁이나 밥상은 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념으로는 지금과 같이 각종 양념이 첨가되었다기 보다는 주로 마늘과 소금으로 절이거나 발효시킨 각종 장류와 젓갈류 등이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불고기, 김치, 된장 등 거의 모든 음식이 고구려의 우수한 음식문화에서 발단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전해진 것이며, 음주가무의 기질이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이어져 풍류를 아는 민족성을 보여주고 있다.




천하일품의 고구려술 '곡아주'

양(梁)나라 때 고구려 여인이 빚어 파는 곡아주(曲阿酒)의 명성이 문헌에 나오며, '제왕운기 동명성왕'의 탄생설화에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술에 취하게 한 후 주몽을 잉태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고(迎鼓 : 부여(夫餘)의 제천의식), 동맹(東盟, 고구려의 제천의식), 무천(舞天, 예·맥족의 제천의식) 등의 제천의식 때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에서 고구려의 강한 국력과 우수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술누룩(酒麴)과 곡아(穀芽)로 빚는 술이 만들어졌고 다른 나라에도 크게 인정을 받았다. 고구려의 술은 일찍부터 주목받아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고구려 사람은 장양(藏釀):발효식품의 총칭)을 잘 한다"고 하였다.


또한 송(宋)나라 때 이방(李昉)이 983년에 편찬한 백과사서인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강소성(江蘇省)의 명주인 곡아주(曲阿酒)가 고구려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담겨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 때 지주(旨酒:맛좋은 술)로서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인들은 평소에 차좁쌀로 밥을 지어먹기도 했지만, 술을 만드는 데도 차좁쌀은 좋은 재료가 되었다. 먼저 차좁쌀을 디딜방아에서 곱게 빻아 가루를 내어 미지근한 물에 반죽을 한 후 시루에 앉혀서 떡이 되게 찐다. 이렇게 삶아 낸 차좁쌀 떡을 식힌 후 손으로 다시 반죽을 한다.


충분히 다진 후 그 위에 말린 메주에서 떼어낸 가루를 넣고 물을 간간이 부어가며 손으로 반죽을 하며 이리저리 잘 섞는다. 이것을 항아리에 넣고 우물에서 떠온 깨끗한 물을 부어 뚜껑을 꼭 덮고 화로 옆에 한 달쯤 두면 술독 맨 위로 맑은 청주가 떠오른다.


이웃 중국의 기록에는 이 술을 '곡아주(曲阿酒)'라 부르면서 고구려 술이라 적고 있다. 술병의 왼쪽에 놓인 상에는 오늘날의 고임음식과 닮은 것이 놓였다. 아마도 강정, 산자, 밤 따위를 고임한 곡아주의 안주가 아닐까 여겨진다.


일본의 고대 기록에는 이런 고임음식을 '고구려병(高句麗餠)'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인의 독창적 발명품 '양다리방아'

디딜방아는 2명 혹은 4명이 발로 밟아서 절구를 찧고 1~2명이 절구공을 손질하여 곡식을 찧거나 빻는 도구. 떡을 찧거나 고추 등을 빻는데도 사용된다.


한 쪽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져서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마주 서서 찧는 양다리방아와 한쪽이 벌어지지 않고 곧아서 한 사람이 찧는 외다리방아의 두 가지가 있다.


외다리방아의 가장 오랜 증거는 황해도 '안악3호분(安岳三號墳)'의 고구려고분으로서 이 무덤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므로 이미 4세기 이전부터 이것을 써 왔음이 분명하다.


이 방아는 불과 20여년 전까지 한국의 시골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현대화로 인해 사용빈도는 적지만 지금도 극히 일부 시골지역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디딜방아의 분포지역은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대륙, 인도네시아 등지의 도서 지역, 일본, 네팔, 인도 등이지만, 양다리방아(Y자형)는 한국 고유의 발명품으로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외다리 방아를 나란히 설치하여 쓸지언정 한국처럼 양다리방아를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양다리방아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를 불러가며 찧는 까닭에 매우 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고달픔을 덜 수 있는 장점도 지녔다. 공이로는 나무, 돌을 쓰지만 나무공이 끝에 겉을 우툴두툴하게 만든 쇠통을 끼우기도 한다.


천장에서 늘인 새끼줄을 쥐고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발로 디뎌서 공이가 오르내리게 하고 내려쳐 지는 공이의 힘으로 확속의 낟알을 벗긴다.

- 시사포커스 : 역사 바로 지키기

- 글 : 오공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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