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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잭 웨더포드 지음·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 432쪽 | 1만8000원




한때 몽골은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역과 유럽까지 호령한 제국이었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칭기스 칸’을 칭송하는 흘러간 팝음악, 몽골에 여행 다녀온 사람들의 승마 이야기, 한국에 온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 정도다. 800년 전 대제국의 문화가 이토록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정주보다 이주를 선택한 유목민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머무는가 싶으면 떠나길 반복하는 노마드인 몽골인들은 최대한 짐을 줄였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정주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한족을 몰아내고 중국에 세운 원나라가 바로 그 유혹을 받아들인 사례다. 그러나 길들여진 늑대는 늑대가 아니라 개다. 원나라는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미국 매칼레스터대의 인류학 교수인 잭 웨더포드는 부족민 연구 전문가다.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1998년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칭기스 칸의 고향인 부르칸 칼둔 산을 방문했다. 한국에서 2005년 출간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원제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 Queens)는 몽골 역사의 흥미로운, 그러나 베일 뒤에 있던 사실들을 알려준다. 바로 몽골 여성 왕족의 활약상이다. 칭기스 칸은 제국을 세웠지만, 그의 아들들은 술 마시는 재능만 있을 뿐 군사·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아버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칭기스 칸의 뒤를 이어 제국을 움직인 이들은 그의 딸과 며느리들이었다. 


책은 역사서이지만 마치 소설같이 흥미로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13세기 후반, 미지의 검열자가 <몽골비사>의 한 부분을 삭제했다. 칭기스 칸의 발언을 기록한 이 책은 훗날 제국의 기본 법률 역할을 했고, 더 먼 훗날에는 사료가 됐다. 잘려나간 부분은 1206년의 발언이었다. 검열자는 실수인지 악의인지 삭제분에 들어있던 한 문장만을 남겨두었다. “우리의 여자 후손들을 칭송하기로 하자.” 삭제분의 바로 앞에는 칭기스 칸의 아들, 형제 등의 능력, 공적에 따라 관직·작위·영지를 수여하는 대목이 있으니, 삭제된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칭기스 칸의 네 아들은 아버지가 세운 제국을 사실상 ‘말아먹었다’. 그럼에도 역사에 분명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딸들은 수, 이름, 생몰연도조차 정확하지 않다. 몽골의 작가와 학자들이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삭제했기 때문이다. 


칭기스 칸의 딸들은 진취적이고 현명했다.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서 병사들을 지휘했고, 재판관이 돼 형사사건 판결을 내렸으며,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같은 시기 인근 문화권의 여인들이 전족으로 발을 학대하거나 베일로 얼굴을 가린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저급한 증오, 끝없는 다툼으로 분열돼 있던 몽골을 통합한 칭기스 칸은 곧 제국 경영이라는 과제에 부딪힌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건 역사의 상식이다. 계속된 정복 사업에 매진해야 했던 칭기스 칸은 딸들에게 제국의 경영을 맡겼다. 네 명의 딸들은 몽골의 동서남북에 위치한 이웃 국가로 시집을 갔다. 이것은 일종의 ‘결혼 동맹’이었지만, 칭기스 칸의 딸들이 왕실 사이 우호의 증표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딸들은 내실의 안락함을 즐기는 대신 직접 국가를 통치했다.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법을 정비했으며, 관료 조직을 챙겼다. 칭기스 칸은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딸들의 통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남성의 힘보다는 여성의 지혜가 중요함을 칭기스 칸은 일찌감치 깨달았다. 


칭기스 칸의 딸들이 다스린 왕국들은 영토 확장에 목매지 않았다. 대신 중요 접촉 지점과 이동 방향을 예측해 그곳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실크로드 상권을 장악한 이들은 제국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다국적기업에 가까웠다. 그들은 다른 자매들의 나라에서 나오는 물품에 일정 지분을 갖고 있었다. 


제국의 창업자는 태생에 의한 귀족제를 믿지 않았다. 칭기스 칸 자신이 납치해온 여자의 아들이었다. 

몽골에서는 적통이니 서얼이니 하는 구분도 없었다. 부인이 납치된 사이에 낳은 아이라 하더라도 “내가 내 아이라고 하는데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했다. 누가 아이를 낳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아이를 잘 키웠는지만을 따졌다. 


칭기스 칸은 딸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평등을 이야기했다. “만약 수레에서 어느 한쪽의 채가 부러진다면, 황소는 수레를 끌 수 없다.” 힘과 힘, 칼과 칼로 부딪치는 백병전이 아니라 말을 타고 가다가 먼 곳에서 활을 쏘는 몽골 전사들의 전투방식도 여성의 참여에 유리했다. 


칭기스 칸의 뒤를 이은 우구데이 칸 시절에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칭기스 칸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소녀라 하더라도 16세 이전까지는 성관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우구데이는 누이의 나라에서 소녀 4000명을 소집해온 뒤 자신의 병사들에게 집단 강간을 시켰다. 이는 누이의 땅을 빼앗기 위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이후 몽골 전역에서 집단 학살과 고문이 이어졌다. 위대한 아버지가 죽자 못난 아들들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칭기스 칸이 한평생에 걸쳐 창조한 것이 또 다른 한평생 사이에 파괴되었다.” 모두들 입으로는 칭기스 칸을 숭배했지만, 그의 정신은 받들지 않았다. 


칭기스 칸의 정신은 그가 죽은 지 200여년 뒤 부활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여성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웨더포드는 1998년 몽골 현지 조사 과정에서 어느 노파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칭기스 칸이 여자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렇게 환생한 분이 우리의 왕비 만두하이랍니다.”


만두하이는 16세의 나이에 25세 연상의 만둘 칸과 결혼했다. 그러나 당시 제국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다. 남쪽으로는 한족의 명나라가 세워졌고 서쪽으로는 이슬람 군벌 세력이 발흥했다. 만둘 칸은 바깥의 적은커녕 가족조차 온전히 다스릴 수 없었다. 늙은 칸은 곧 죽었고, 23세의 만두하이는 과부가 됐다. 주변에는 다음 칸의 후보가 보이지 않았다. 


여러 곳에서 유혹의 입질이 왔다. 만두하이와 재혼하는 자가 제국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2인자로 군림한 귀족 장군이 있었고, 강한 무슬림 군벌이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투항하면 문명국에서의 호화로운 여생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만두하이는 재혼을 권하는 측근의 머리 위로 뜨거운 찻잔을 내던졌다. 그리고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홀로 제국을 이끌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홀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만두하이는 칸의 핏줄을 이은 다섯살 아이 바투 뭉케를 찾아냈다. 외진 곳에서 방치된 채로 자라난 아이는 허약했다. 바투 뭉케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만두하이는 아이의 대칸 즉위식을 올렸다. 그리고 새로 옹립된 다얀 칸을 통해 섭정했다. 


만두하이와 다얀 칸은 세상에 단 둘만 있었다. 적들은 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고, 백성들은 지도자의 능력을 못미더워했다. 만두하이는 군사와 정치 양 분야에서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젊은 왕비는 첫 원정을 나서기 위해 머리 장식을 벗고 말 위에 올랐다. 어린 다얀 칸은 작은 상자에 담겨 말에 올랐다. 몽골의 아이들은 서너 살이면 말을 타기 시작한다지만, 병약한 다얀 칸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만두하이는 칸을 전장에 동행시켰다. 누가 전투를 이끄는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만두하이와 다얀 칸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후 둘은 승승장구했다. 만두하이는 성인이 된 다얀 칸과 결혼했다. 그들은 적들을 차례로 제압했으나 불필요한 복수는 하지 않았다. 많은 아들들을 낳아 동맹 세력인 다른 부족 사이에서 자라게 했다. 아들들은 그곳의 소식을 전해왔고, 자연스럽게 그곳 지도자 역할도 맡았다. 


만두하이와 다얀 칸은 서로를 제거하고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은 자발적으로 해로했다. 칭기스 칸은 몽골의 스텝 지역을 넘어서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만두하이와 다얀 칸은 지배할 수 있는 지역만 장악하기로 했다. 다얀 칸 치하의 몽골은 불교, 이슬람교, 초기 그리스도교 중 어느 것을 믿어도 되는 나라였다. “하늘은 그녀(만두하이)에게 위대한 운명을 부여하지 않았다. 몽골 연대기의 표현에 의하면, 그 대신 하늘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운명’을 만들어나가도록 허용했다.” 


만두하이와 다얀 칸의 후예들은 17세기에 만주족에 정벌당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왕실 사람들은 청나라 통치 아래서도 권력을 누리다가, 20세기 몽골과 중국의 혁명기에 그 핏줄을 이유로 시련을 겪었다. 


몽골의 유산은 남아있다. 레슬링에서 자기를 이기는 남자하고만 결혼하겠다고 한 여전사 쿠툴룬 공주의 이야기는 투란도트(투르크의 딸)로 서유럽에 소개됐다. 이 호랑이 같은 여인에 대해 실러, 괴테, 푸치니가 관심을 갖고 작품을 남겼다. 지금도 몽골 남자들은 전통 레슬링을 하기 전에 특별한 조끼를 입는다고 한다. 앞면이 완전히 노출된 이 조끼는 가슴을 통해 상대방이 남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방대한 문헌 조사와 성실한 현지 리서치에 기반하되, ‘공식 기록’에서 빠진 부분은 민간 전승 이야기와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했다. 말 위에서 창업한 제국의 흥망성쇠가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세계 그 어느 문명권의 여성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몽골 여성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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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있는 양갱 전문점 ‘오자사’. 

캄캄한 새벽부터 사람들은 모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로 모여든다. 가게 앞을 메운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

직원이나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모두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는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이 행렬은 4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줄을 선다고 해서 모두 양갱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에 만들어지는 양갱이 150개뿐이기 때문이다.

오자사는 3.3㎡(1평)밖에 안되는 작은 가게다. 양갱과 모나카 두 가지 제품만 팔지만 연 매출 40억원을 기록하는 ‘기적의 가게’다.


'1평의 기적'은 아버지에 이어 오자사를 경영하면서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게로 만들어낸 이나가키 아츠코 사장의 성공 비결과 경영 철학을 담았다.

60여년 전 반평도 채 안되는 노점에서 시작한 오자사가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은 맛과 서비스에 대한 엄격함에 있다.

이나가키 사장은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아무리 평범한 음식이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저 그런 평범한 음식이 될 수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유일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경기가 점점 나빠지고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갑자기 회사에서 밀려난 퇴직자나 청년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작은 가게라도 한번 해볼까’ 하고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를 맛본다. 누구나 사업에 뛰어들 수는 있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나가키 사장은 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돈이 없고 기술이 모자라거나 특별한 아이템이 아니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을 팔더라도 제조나 서비스, 직원 관리 등에서 분명한 경영철학과 마인드를 갖춘다면 단 1평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오자사는 양갱을 파는 작은 가게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회사로 선정되어 책에 소개되기도 했고, 그 밖에도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수차례 소개되었다. 대기업의 경영자들이 견학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한다.

오자사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60여 년 전 반 평도 채 안 되는 노점에서 시작된 오자사가 지금까지 꾸준히 고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가장 큰 이유는 오자사의 맛과 서비스에 대한 엄격함 때문이다.

오자사는 하루에 양갱을 150개만 만들어 판매한다. 사람들은 왜 더 많이 만들어 팔지 않느냐, 좀 더 판매해서 돈을 벌면 규모도 더 키울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하루 150개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팥은 작은 가마솥에 한 번에 세 되만 넣고 삶아야 맛있게 삶을 수 있다. 팥을 삶아 몇 번의 과정을 거친 뒤에는 동 냄비에 옮겨 담아 숯불에 올려 온 정성을 다해 졸여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세 시간 반. 그러다 보니 하루에 세 가마솥 이상을 만드는 것은 무리다. 작은 가마솥에 해야 하고, 과정이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서 하루에 할 수 있는 양은 150개를 넘지 못한다. 그 이상 생산하려면 큰 솥을 써야 하고 과정을 줄여야 하는데, 이는 오자사를 믿고 오는 고객들을 속이는 일이며, 그러면 오자사 양갱은 여느 양갱과 다를 바 없어지고 만다. 하루 150개는 오자사가 손님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오자사의 자부심이다.

또 다 만든 제품의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날 팔 물건도 과감하게 내다버린다. 고객들에게 최상의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 오자사의 의무이며, 그러지 않는 것은 오자사의 존재 이유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자사는 이처럼 ‘오자사에서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양갱’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제품 생산에 충실했다. 그런 열정은 결국 최고의 제품으로 이어졌고, 고객들은 맛있는 양갱과 모나카를 먹기 위해 자연스럽게 오자사를 찾게 된 것.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매출을 높이기 위해 상품의 종류를 늘리는 데 주력한다. 좀 더 다양한 제품군을 마련해 많이 파는 것이 매출을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자사는 규모가 크지 않은 가게나 중소기업은 상품의 다양성만으로는 큰 회사들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상품의 종류를 늘리기보다는 상품의 질을 높임으로써 고객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나가키 사장은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아무리 평범한 음식이라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저 그런 평범한 음식이 될 수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유일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빨리빨리’, ‘남들보다 먼저’ 가야만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가는 것이 시대를 읽고 변화에 대처하는 길이라 믿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것만이 성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주변에서 이게 좋다고 하면 그리로 따라가고 뭐가 유행이라 하면 그걸로 바꿔볼까 흔들리는 사람은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 '1평의 기적'은 유행을 좆지 말고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꾸준히 한길을 가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비결임을 보여준다.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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