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_웹툰

페르세폴리스 - Persepolis, 2007

by 성공의문 2008. 11. 23.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 - Persepolis, 2007> 는 마르잔 사트라피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이란에서 태어나 혁명과 전쟁을 겪은 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마르잔은 오랜 외국 생활을 경험하면서 이란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 만큼 <페르세폴리스> 는 또랑또랑한 눈을 번뜩이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어린 마르잔의 시선을 통해 이란의 현대사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그 과정은 무겁고 생소해서 쉽게 몰입하기 어렵지만, 생각해보면 태고부터 인간이 반복해 온 역사와 다를 바가 없다. 카자르 왕족의 후손이면서 부르주아인 마르잔의 가족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지지를 보낸다. 공산주의자였던 마르잔의 외할아버지와 혁명의 과도기에 희생당하는 삼촌은 카자르 왕조를 무너트린 팔레비 왕조와 다시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이란의 복잡한 현대사를 상징하는 구체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독재와 자유, 악습과 변혁, 막대한 군사, 경제적 이익을 노린 서구의 침략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근본주의가 어지럽게 뒤엉킨 피와 폭력의 시대다. 어떻게 보면 파란만장한 가족사는 마르잔에게 여느 이란 사람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페르세폴리스> 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깔면서 자신이 누군가에 관한 물음을 찾아간다. 인간답게 살기 힘든 이란의 현실이 변화하기를 누구보다 염원했던 마르잔의 부모는 더욱 딸을 안전하게 키울 수 없게 되자 어린 마르잔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떠나보낸다. 전쟁과 억압을 피해 온 땅에서도 마르잔은 혼란스런 마음을 피하기 어렵다. 남겨진 가족들이 겪을 고난을 혼자 피해 왔다는 죄책감은 형벌마냥 가슴을 짓누른다.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면서 치기어린 반항도 해보고 운명이라 믿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다 지독한 실연을 당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란의 무거운 역사를 재현해놓고는 실연에 절망하고 거리를 떠돌다 도피하듯 이란으로 돌아오는 마르잔의 모습에서 부잣집 딸내미의 철딱서니 없는 유랑기라 의심해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딜 가나 따라붙게 마련인 이란인이라는 꼬리표처럼 갓 10대 후반의 마르잔이 감당하기에 녹록치 않은 현실인 것은 변함없다. 고단함과 패배감에 젖어 이란으로 돌아온 마르잔이 친척과 주변인들에게 둘러싸여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취급을 받거나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 장면에서 마르잔의 고민은 잘 드러나는데, '나는 밖에서도 이방인이고 안에서도 마찬가지' 라며 무력하게 내뱉는 자조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경험한 한 개인의 성장통이자 더 넓게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 놓인 이슬람 여성들의 처지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데, 다행스럽게도 마르잔의 곁엔 현명한 어른들이 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마르잔의 꿈과 환상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신이 일종의 도피처라면 부모와 할머니는 마르잔을 주체적으로 살도록 추동하는 현실적인 조언자다. 특히 할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존엄을 잃지 말라' 고 마르잔에게 얘기하곤 하는데, 할머니의 가슴에서 은은한 향취를 풍기며 떨어지는 자스민은 모진 풍파를 겪어온 노인의 지혜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8년여에 걸친 이라크와의 전쟁이 끝나고 얼핏 세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마르잔을 둘러싼 환경은 나아진 게 없다.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비이성적인 체제와 여성을 향한 억압과 차별은 여전하다. 마르잔은 다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로 떠나게 되고 쉽사리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는 공항에 머물며 향수를 달래는 듯한 현재와 맞물린다. <페르세폴리스> 는 특별한 결말도 없고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삶의 태도일지 모른다. 마르잔은 쓸쓸히 공항을 떠나는 택시 안에서 어디 출신인가요? 라는 물음에 프랑스에서 태어났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는 대신, 이란에서 왔어요 라고 대답한다. 평생 그윽한 자스만 향기를 내고자 노력했던 할머니 이상으로 마르잔에게도 세상은 잘 견뎌내야 할 곳일 테니 말이다.


여러 무거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 는 지나치게 심각하기만 해서 관객을 주눅들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선과 색채는 묘하게도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다. 군데군데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과 유머로 무거움을 덜어내기도 한다. 이소룡의 브로마이드를 방안에 붙여놓고 암시장에서 '아이언 메이든 (겨우 10살이 넘은 꼬마가 아이언 메이든의 음악을 즐겨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마르잔은 마이클 잭슨과 아바를 좋아한다)' 의 테이프를 구해 들으며 차도르로 온 몸을 둘러야 하는 거리에서 '펑크는 살아 있다' 라는 옷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대중문화의 큰 영향을 받은 작가의 경험들이 경쾌한 터치의 삽화처럼 삽입되어 있다. 특히 실연의 상처로 상심하던 마르잔이 자기최면을 걸면서 남자친구를 세상 최고의 추접한 인간으로 묘사하거나, 그로 인해 심한 신경쇠약을 앓다가 <록키> 의 주제가 'Eye Of The Tiger' 를 따라 부르면서 기운을 차리는 장면은 박장대소할 만하다.

덧붙임
원작은 국내에 2권까지 출간됐다. 혹시 영화를 보실 생각이면 아래 동영상은 통과.


-이상한나라의도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