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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리는 아직 슈타이너를 모른다 - 변종인

by 성공의문 2016. 10. 27.

우리는 아직 슈타이너를 모른다

변종인



스위스 바젤에 살고 계신 변종인님은 음악을 전공하고 바젤에 있는 슈타이너 사범대학에서 음악교사 양성과정을 마쳤습니다. 큰 딸(18세)은 지금 발도로프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민들레에서 '슈타이너 교육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주제로 집중조명을 하겠다는 데에 얼른 수긍이 가지 않았다. 주제가 단순히 '슈타이너 교육은 어떤 교육인가?'라면 금방 납득이 갔겠지만….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슈타이너 교육이 어떤 교육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이 교육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니 없니 하고 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민들레 5호에 김희동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슈타이너는 역시 참고자료일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구절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김희동 선생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살펴보자. 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그가 아무리 저를 설득하려 해도 끝내 그에게 동의할 수 없는 아쉬운 점, 그것은 그의 철학이나 교육내용에서 이 땅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에게서 배울 수는 있으나 그를 따를 수는 없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슈타이너라는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김희동 선생더러 자기를 따르라고 했을까?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의 말을 눈먼 장님처럼 무조건 따르지 말고 옳은지 그른지 잘 살펴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땅의 정서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도 우리의 정서에 맞아야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직도 누군가 우리를 이끌어야 하나? 언제까지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꼭 누군가를 따라야 하나? 각 개인이 왜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지 못하나? 에디슨이나 제임슨 와트나 스티븐슨은 이 땅의 정서를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사람들이 찾아낸 원리를 이용해 우리도 배니 자동차 같은 온갖 기계들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내가 어떤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놓여 있지 동의 여부가 먼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슈타이너 교육의 핵심에 다가서기란 그리 쉽지 않다. 더구나 74년 전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말이나 글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서양말로 포장이 되어 있어 번역이나 통역이란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통역이나 번역이 어설플 땐 그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가 더욱 힘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고 금방 단정을 짓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피타고라스의 직각 삼각형에 대한 정의나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갖고 이 땅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니 없니 다투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도 이런 차원에서, 아주 객관적인 위치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말 속에 진실이 들어있는지, 내가 바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모르더라도 세상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물리 현상을 이해하면 그만큼 우리의 시야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에 태어났다 해서 꼭 동양 전통의식만으로 살아야 하고 동양 미술만 그리고 동양 음악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자신을, 온 세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은 이미 옛날 같지 않은데 의식은 옛의식을 고집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옛날에는 어느 지역에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임금이 죽어라고 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죽어야 했다. 인간의 존엄성이니 인권이니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전통 속에 진리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이 우리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바도 아니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과학으로 우리의 전통을 한번 비추어보자. 우리의 전래 이야기 가운데 ꡐ해와 달이 된 오누이ꡑ 란 이야기가 있다. 이오덕 선생은 이 이야기를 폭군과 가난한 백성의 모습으로 풀이를 하는데 필자는 다르게 본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의 저서 비밀학 개요(Die Geheim-wissensonaft im umriss, 1910)에서 자신의 영안으로 지구의 진화 과정을 밝혀 세상에 알렸다. 여기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 지구는 현재 모습을 띄기 전에 이미 세 번이나 그 모습을 바꾸었다. 마치 사람이 죽으면 몸을 벗고 저승으로 갔다가 다음 생에서 새 몸을 입듯이. 지구의 첫 모습은 오직 열기운으로 시작하는데, 몸을 새로 입을 때마다 공기와 빛, 물과 소리, 땅과 생명이 차례로 보태어졌다. 지구가 네 번째로 새 몸을 입을 때 지난 과정들이 되풀이되면서 물의 요소가 들어오자 해가 지구에서 빛과 열을 갖고 빠져나가고 땅의 요소가 들어와 점점 굳어지자 지구가 더 이상 굳지 않도록 달이 그 굳어지는 기운을 갖고 지구를 빠져나갔다. 물론 여러 신들의 작용과 물질계의 수많은 변화 과정을 몇 문장으로 다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호랑이를 굳는 기운으로 치면 우리 옛이야기가 바로 억만년 전의 일을 담고 있지 않나?


보기를 하나 더 들어보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사람이 죽어서 몸을 벗고 저승으로 간 다음 새 몸을 입기까지 거치는 여러 과정들을 잘 밝혀주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정신-영혼은 약 사흘간 지난 생을 돌이켜 본다. 이때는 객관적 위치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한테 고통이나 상처를 입혔으면 자신도 그만큼 아픔을 겪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었던 좋은 일에도 상대방이 느꼈던 기쁨을 같이 갖는다. 그리고 게을러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일도 아픔으로 다가선다.


이렇게 자신의 전생을 돌이켜 본 다음 사람의 정신-영혼은 점점 퍼져서 달까지 넓혀지는데 이때 시간은 그 사람이 살았던 나이의 삼분의 일 정도가 된다. 이때는 사람이 몸을 갖고 있었을 때 품었던, 아직 채 해결하지 못했던 갖가지 욕망을 떨구어내는 시기이다. 이 시기가 지난 다음, 사람의 정신-영혼은 점점 퍼져서 태양계를 거쳐 나중에는 우주와 하나가 되어 신들과 함께 다음 생을 준비한다. 저승에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죽음에 견줄 만한 것은 고립이다. 어떤 사람이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고 양심을 속이는 삶을 살았다고 하자. 이런 사람은 주변에 다른 정신-영혼 존재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다가가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 고립이 저승에선 아주 큰 고통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실컷 즐기다가 가야지 영성을 닦긴 뭘 닦아, 죽으면 다 그만인데 하고 물질향락에만 집착하면 이는 이 세상의 삶이 바로 저 세상의 삶도 결정하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정신-영혼한테도 도움을 주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그 사람과 이승에서 직접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그 사람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영성에 관한 바른 글을 읽어 주거나 생각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혼백을 위해 적어도 49일 동안은 날마다 천도제를 올렸다. 지금은 미신이라고 많이 없애버린 조상한테 올렸던 제사도 이런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한테는 이런 조상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도 거의 막혀있는 실정 아닌가? 우리 조상들은 어릴 때 충분히 기어다닌 아이는 튼튼한 위장을 갖는다는 것을 알았다. 슈타이너 교육에서도, 제대로 기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행기에다 태우고 이리저리 다니게 하면 왜 평생을 심신이 허약한 상태로 보내게 되는지, 또 그밖에 참으로 많은 귀중한 진리를 전해준다.


교육에 관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과 지금의 한국 실정을 비교해 보자. 현재 일반 제도교육이 영성을 가다듬는 교육이 아니라 인성까지 말살시키는 교육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매주 세 명 꼴로 청소년이 자살하고 있다.(이는 물론 학교 교육에만 결부되어 있지 않겠지만.) 또 이렇게 민들레가 용감하게 들고 나왔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런 사정을 쉽게 짐작케 한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7년 주기로 큰 변화가 오는 인간 성장 가운데 첫 시기에 건강한 몸을 갖추게 하여 꿋꿋한 의지를 심어주고, 두 번째 시기에는 여러 예술 활동으로 풍부한 감성을 길러주고, 세 번째 시기에 생각을 깊이 이끌어주어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제각기 따로 떨어져 모난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정서와 상관없이 지혜로 가득찬 말이다. 양심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리지만 남을 속이고 해치는 행동을 한다든지,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든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든지, 심한 우울증에 빠져 만사가 귀찮다든지 하는 모습들은 의지와 감정과 생각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실정을 보자. 첫째 시기에 부모나 아이 교육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대신에 무조건 금지시켜 아이들의 의지를 꺾고,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이한테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려 든다든지 또는 한정되어 있는 생명력을 일찍부터 두뇌로 돌려 몸이 약한 아이로 만든다든지, 학교에 들어가면 이제 너도 컸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한테 무리하게 판단을 미루어 우유부단한 아이가 되도록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리고 편파적인 지식 교육으로 감정을 거칠게 만들고 청소년이 되어 이제 스스로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때는 부모나 교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토록 강요함으로써 자립 기회를 빼앗는다. 지난날처럼 순종이 으뜸가는 미덕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교육으로 우유부단하고 의지와 자아의식이 약하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지배층에서 보면 백성이 우둔할수록 자기들 마음대로 백성을 부릴 수 있으니 그런 교육이 옳은 교육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런 교육을 밀고 나가는 것은 권력이나 돈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이 노예처럼 얽매여도 상관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스위스에 있는 12년제 통합학교인 슈타이너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10학년으로 올라가면 그날부터 교사들은 학생들한테 말을 높여준다. 물론 체벌은 한참 옛날 일이다. 매질이나 욕설로 교육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미운 아이한테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아이한테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은 전형적인 전제군주 시대의 잔재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이는 부모나 교사의 소유물이 아니다. 매질이나 욕설로 아이들한테 죄짓는 일은 이제 마땅히 그만두어야 할 일이다. 우리 조상들도 매질하는 엄교를 가장 저질 교육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사실 우리는 루돌프 슈타이너라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다. 단순히 한 철학자나 사회개혁가나 교육자로 생각하는 정도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루어 낸 일을 보면 다만 그런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나 어마어마하다. 어떤 사람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괴테의 영향을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한다. (실제 우리는 괴테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자유정신과학 대학과 세계 인지학 협회 본부가 들어서 있는 곳도 괴테아눔(Goethe-anum, 괴테관)이라 부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열린 영안으로 괴테의 정신 높이를 가장 잘 알아줄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루돌프 슈타이너였다.


세계 인지학 협회에 대해 한마디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한 강연회에서, 일이 번거롭지만 않다면 인지학이니 인지학 협회니 하는 명칭을 매주 다른 명칭으로 바꾸어 쓰고 싶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ILKLEY, 영국, 1932년 8월 17일). 이름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요즈음 그런 이름을 갖고 상표 등록을 한다, 특허를 낸다, 네가 쓰면 법에 저촉이 되니 안된다 어쩌구 저쩌구 야단들이다. 세계 인지학 협회 회원은 협회를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될 수 있다.(영문 정관 가운데 네 번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The Anthroposophical Society is in no sense a secret society, but is entirly public. Anyone can become a member, without regard to conviction, who considers as justified the existence of an institution such as the Goetheanum in Dornach in its capacity as a school of Spiritual Science. The Anthroposphical Society rejects any kind of sectarian activity.)


누구라도 세계 인지학 협회에 들고 싶으면 필자한테 연락하길 바란다. 신청서가 외국말로 되어 있어 문제지 그밖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지학 협회 회원이라고 해서 또는 슈타이너 교사양성과정을 수료했다 해서 인지학을 제대로 알고 있다거나 제대로 알린다거나 또는 올바른 교육을 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사람이 훨씬 더 올바른 교육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단체에서든, 최소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이름을 빌리는 단체에서만이라도, 그 단체에 들어 있는 개인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해서 그 의견을 살펴보기도 전에 단체의 이름으로 억누른다든지 대의명분을 내세워 개인을 묵살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개인 없는 단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 없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듯이. 개인은 단체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로 알고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은 물론 아주 중요하다고 필자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것만 지나치게 고집하다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것네것할 것 없이 모조리 잃을지 모른다. 자연을 다시 살리자는 이상실천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만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웃의 불행을 모른 척하고 자연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면 자의든 타의든 자연을 잃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둘까? 거센 물살은 뒤에서 아무리 잡아 당겨도 되돌릴 수 없다. 한 걸음 앞서서 물살의 흐름을 잡아 틀면 몰라도.


마지막으로 한길사에서 펴낸 크리스토퍼 린덴베르크의 슈타이너 전기에 대해 한마디하자. 본문에는 오역이 수없이 눈에 띈다. 앞부분에 있는 몇 곳만 살펴보자.


11쪽

난 이 과외수업을 퍽 고맙게 생각했다. 이미 배운 수업자료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나는 학교 수업시간에 항상 긴장해 있었다. 내게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인생설계에서 어떻게 수용되는 것인지를 달리 설명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인지도로 얻은 게 많았다. 나는 수업시간에 거의 꿈을 꾸듯이 있었다. 그래서 수업 때 다루었던 내용을 전해주기 위해선(수업이 끝난 뒤, 필자주) 정신을 차려 다시 그 내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선(?) 꿈꾸듯 받아들인 수업내용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쪽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매를 맞았다. 나는 그때부터 복사일에 아주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되어 손을 떼기로 했다. 그리고는 매를 맞은 사실을 숨긴 채 자진해서 그 일을 그만 둔 것처럼 행동했다.

->우린 모두 학교에서 매를 맞게 되었다. 나는 매질 그 자체를 아주 싫어했고 그때 어떻게 그 매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를 알았다. 그 뒤에도 늘 매를 피해 갈 수 있었기에 한번도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


14쪽

서로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는가 라는 생각과 질문들 에 사로잡혔고,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매료되었다. 영혼적으로 순수하고 내면적으로만 바라보는 교육형태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느껴지지 않아도 나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주었다. 

->평행선이 도대체 어디서 교차하는가 라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고 피타고라스 정의에 매료되었다. 외부감각을 빌리지 않고도 오로지 마음속으로 여러 기하형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순수 내면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최고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15 쪽

슈타이너는 독일어 선생이 이 기본서의 전문 용어에 불만을 품고 집필한 논문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슈타이너는 선생이 얄밉게 느낄 정도로 적합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글을 지었다.(*독일어 선생이 논문을 집필하지 않았음. 슈타이너는 논문을 훔쳐보지 않았음.)


곳곳에 이런 오역이 눈에 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 책은 당장 판매를 중지하고 재번역에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물리나 화학을 모르는 사람이 독일말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독일 말로 된 물리나 화학서적을 번역할 수 있을까? 아직 한국에서는 슈타이너가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 격월간 민들레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