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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사료로 찾은 고조선의 강역 - 고대사학자 심백강

by 성공의문 2014. 11. 17.

사료로 찾은 고조선의 강역 - 고대사학자 심백강


<심백강 원장은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후학(後學)들이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연구할 수 있도록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강역(疆域) 문제다.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서 우리 고대사는 그 뿌리인 출발부터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우리 상고사(上古史)가 이처럼 부실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사료(史料) 부족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세기 후반 일연(一然) 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이며, 그나마 책 한 장 분량에 그친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는 우리 고대사를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보일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미로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 사학계(史學界)는 일제가 연구해 놓은(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해 놓은) 고대사(고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그는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라며 <사고전서> 등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이런 우리 사학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학자가 있다. 바로 심백강(沈伯綱)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이다. 그는 “상고사(上古史)는 사료가 생명”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20여 년간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사료(1차 사료)의 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심 원장이 눈을 돌린 사료는 바로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乾隆: 1736~1795) 연간에 학자 1000여 명을 동원해 10년에 걸쳐 청나라 이전 중국의 사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료의 보고(寶庫)이다. 심 원장은 8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료를 포함하고 있는 <사고전서>를 이 잡듯이 뒤져 우리 고대사와 관계된 모든 기록을 추려내 책으로 엮어냈다.

 

그는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단군(檀君)과 고조선 관련 자료도 모두 발췌해서 후학(後學)들이 우리 상고사 관련 1차 사료를 접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문제는 이렇게 심열을 기울여 만든 책이지만, 모두 한문으로 된 책이라 후학(後學)들이나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어렵다는 것. 심 박사는 요즘 국사학계에서 한문 원전을 해독할 수 있는 교수나 학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고전서>의 우리 역사 관련 기록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지난 6월과 8월 <사고전서> 자료 중에 일차적으로 고조선과 한사군(漢四郡)의 낙랑(樂浪)관련 자료를 모아 펴냈다.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 역사)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두 책에서 심 원장은 고조선과 낙랑관련 사료의 원문과 번역문, 해설문, 주석을 실어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편집했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사료는 국내학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인용이나 번역이 된 적이 없는 초역(初譯) 자료들이다.



낙랑의 위치가 곧 고조선의 강역 


고전의 정확한 번역과 상세한 주석, 그리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이는 것은 단순한 한문 독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국책연구기관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심 원장 개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높은 한문 해독 실력을 갖춘 한학자이자 역사가, 문학가이기 때문이다. 한중(韓中) 고대사 전공으로 중국에서 역사학박사 학위를 받은 심 원장은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주요 고전과 역사 기록물을 번역했다. 또한 월간 현대문학 출신의 문학평론가로서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조예가 깊은 학자다.

 

지난 10월초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는 민족문화연구원 사무실에서 심백강 원장을 만났다. 심 원장은 “이번에 펴낸 두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중국의 새로운 사료(사고전서)를 통해 고조선의 발상지와 강역을 고증한 것으로, 오랜 고대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사의 척추를 바로 세운 작업”이라고 자평했다.

 

-원장님께서는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사고전서>에서 우리 민족과 고대사 관련 자료를 많이 발췌하여 책으로 엮으셨는데, 이번에 특별히 <사고전서>에 있는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자료를 따로 묶어낸 이유가 있는지요.

 

“그동안 펴낸 책은 원전(原典)을 그대로 발췌해서 엮은 1차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작업은 이런 사료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하는 2차 작업에 해당합니다. 국내에 사료의 원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적이고, 특히 요즘에는 역사학과 교수 중에도 사료의 원전을 제대로 해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일이 만무합니다. 따라서 제가 후학들을 위해 단순히 1차 자료를 모아서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자료들을 직접 해석하고, 주석과 해설을 붙여 엮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고조선과 낙랑 부분에 관한 작업을 했으니 이어서 삼국시대에 관한 사료 정리 작업을 할 것입니다.”

 

-‘낙랑’은 한나라 사군(四郡)의 하나인데 어째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지요.

 

“고조선이나 낙랑은 다 우리 상고사에 속합니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사료에 등장이라도 하지만, 중국 사료에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은 한무제(漢武帝: BC 156 ~ BC 87)가 고조선(위만 조선)을 침략해서 설치한 한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도) 중의 하나기 때문에 중국 문헌에 많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이 낙랑과 현도(玄菟)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낙랑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존 강단 사학(이병도 학설을 계승한 현재의 통설)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이 부근이 되는 것이고, 낙랑이 대동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다른 곳이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더 이상 '사료의 빈곤' 주장은 통하지 않아"

 

-<사고전서>에 낙랑이 평양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요.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입니다. 20여 종의 각기 다른 자료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동쪽, 내몽고 남쪽, 요녕성 서쪽, 즉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요서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동안 강단 사학이 상고사 연구에서 그토록 강조해 온 ‘사료의 빈곤’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 낙랑 관련 사료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국사 책에 실린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이 압록강과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이병도 학설을 따르고 있다. 

심백강 원장은 "낙랑의 영토가 곧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에 낙랑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우리 고대사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이미지 출처: 영토한국사(소나무)


-현재 학계의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첫 수도를 중국 요녕성(遼寧省) 오녀산성(홀본 혹은 졸본)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요.

 

“그 문제는 낙랑의 위치가 어디인가만 밝혀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출발지가 바로 낙랑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를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으로 해놓았는데 이는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가정하에 고정된 학설입니다.

 

이병도씨는 그 가운데 낙랑군이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학설에 반발한 사람들이 소위 민족사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같은 분들로 이들은 낙랑을 요동(신채호)이나 요서(정인보 등) 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신채호ㆍ정인보 같은 민족사학자들도 당시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중국 측 1차 사료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강역을 요동이나 요서지역 이상 확대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사고전서>를 보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현재의 심양(瀋陽) 부근을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것이죠?

 

“맞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요하의 동쪽인 요동 지방인 현재의 개주(盖州) 부근을, 정인보 선생은 요하의 서쪽 지방인 조양(朝陽)을 낙랑군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고전서>의 기록을 고증해 보니, 낙랑군은 하북성의 발해만을 끼고 현재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의 남쪽 일대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동으로 당산(唐山) 천진을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보정시(保定市) 수성진(遂城鎭)과 백석산(옛 갈석산)까지 이르는 지역입니다. 즉 이곳이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그 근거를 설명해 주시죠.

 

“당시 한나라 수도는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이었습니다. 한무제가 동쪽에 있던 고조선을 침략해서 낙랑군으로 삼은 겁니다. <전한서>(前漢書)에 ‘한무제가 동쪽으로는 갈석(碣石)을 지나 현도ㆍ낙랑으로써 군(郡)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갈석을 지나서 낙랑군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성현은 현재의 보정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의 서쪽이 바로 갈석산과 수성현이라는 의미이고, 이곳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이 어디까지인지 국내 학계에서 정확히 연구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고전서>의 기록을 통해 서쪽 변경의 국경을 찾아낸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사고전서>등 중국에서 펴낸 1차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를 고증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의 주 활동무대(중심지)는 오늘날 노룡현 일대(하북성 동쪽 일대)로, 그 세력 범위가 동쪽 발해만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수성현, 동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이른다. 심 원장은 "이 하북성 동쪽 일대가 바로 우리 배달민족(동이족)이 수천년간 한족(漢族)과 흥망을 다투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최근 펴낸《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북경 부근에 있는 '조하'가 예전에는 '조선하'였다는 것을 고증했다. 그는 "진시황과 한나라 시절에는 이 조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날 요녕성의 요하를 기준으로 나눈 요동ㆍ요서와는 다른 지역"이라고 밝혔다. /구글맵



-그러면 <전한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이나 ‘수성현’이 현재 북경과 천진 남쪽에 있는 보정시(수성진) 부근인지 어떻게 고증을 할 수 있는지요.

 

“일부 민족 사학자들이 이병도의 낙랑군 대동강 유역설을 비판하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고증하려고, 나름 애를 썼습니다. 그중에 한 이론이 현재 ‘갈석산’이라는 산이 있는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秦皇島市)와 이웃한 창려현(昌黎縣) 동쪽 즉, 산해관(山海關) 부근을 낙랑군의 서쪽 변방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일부 민족 사학자들이 이곳을 고조선과 한(漢)나라와의 국경이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이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그 부근에 ‘갈석산’이라는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고전서>를 보기 전까지는 이 이론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중국 <사고전서> 기록을 차례로 고증하니 진황도시 부근의 갈석산은 <전한서>에 등장하는 그 갈석산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낙랑 위치 고증의 핵심인 '갈석산'과 '수성' 


-<전한서>에서 이야기하는 원래의 갈석산은 어디입니까.

 

“중국 역사상에 갈석산이 두 개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갈석산입니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진(西晉: 265∼316) 시기에는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고,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당(隋唐) 시대 이후 갈석산이 지금의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盧龍縣)에 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수서 <지리지>, 당 두보의 <통전>, 송의 <태평환우기> 등). 문제는 갈석산이 있다고 언급된 북평군에는 ‘수성현’이 설치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서진 시대에 말한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갈석산과는 분명 다른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전한서>에 기록된 갈석산인데, 현재의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 부근에 있습니다.”

 

-그곳에도 갈석산이 있다면 왜 많은 학자가 찾아내지 못했습니까.

 

“현재 보정시의 수성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내려온 지명입니다. 낙랑군의 25개 현 중에 수성현만 빼고 현재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곳에 있던 갈석산은 도중에 이름이 바뀌면서 후대에 혼란을 준 것입니다.

 

<사기>에 보면 전국시대 종횡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문후(文候)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滹沱)와 역수(易水)가 있는데 지방이 2000리쯤 된다’(사기 열전). 이어서 그는 ‘연 나라가 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수익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을 하지 않더라도 대추와 밤의 수익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천혜의 땅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진은 바로 연나라 남쪽 변경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호타하와 역수는 지금도 하북성 보정시 남쪽에 있습니다. 역수는 역현(易縣) 부근에 있습니다. 소진은 이어서 ‘호타하를 건너고 역수를 건너서 4ㆍ5일을 넘기지 않아 국도(國都)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의 수도에서 남쪽으로 4~5일 거리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종합하면 갈석과 안문은 호타하와 역수 유역 부근에 위치한 연나라 남쪽 강토라는 말입니다. 안문은 현재 산서성 북쪽에 있는 안문산입니다.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의 하나인 안문관도 있습니다. 즉, 연나라 남쪽의 안문산과 함께 거론된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과 동일한 산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입니다.”

 

-현장을 가보셨습니까.

 

“제가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현장에 갈석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없습니다. 갈석산은 ‘백석산’이라고 글자 한 자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갈석산의 갈(碣)은 비석 중에 짤막한 돌로 비를 세우는 것을 특별히 ‘갈’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큰 것은 비(碑)라고 하고요. 그래서 합쳐서 비갈(碑碣)이라고 하는데 백석산에 가니까 산의 돌이 전부 비석 같은 모양의 갈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지맥으로 연결된 낭아산(狼牙山)이 있는데, 이 역시 산 위에 돌들이 삐죽삐죽 한 것이 이리의 이빨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백석산’과 ‘낭아산’이 예전에 바로 갈석산으로 부르던 산입니다.”

 


“낙랑의 평양 대동강 유역설은 어불성설”

 

-그러니까 진황도시 창려현 부근의 갈석산은 한무제 당시의 갈석산이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갈석산은 서한 말엽 신왕조의 왕망시대에 ‘게석산’으로 출발했다가,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 갈석산으로 개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ㆍ낙랑군은 바로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한사군이 압록강과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다면,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의 원래 갈석산은 물론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과도 수천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갈석산과 한반도 사이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백두산 등 큰 산이 있고, 조하(潮河), 난하(灤河), 대릉하(大凌河), 압록강 등 여러 큰 강이 있습니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수천리 밖에 있는 갈석산을 특징적인 산으로 들어 설명하지 않고, 백두산이나 압록강을 지나 현도ㆍ낙랑을 설치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만약 요녕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가장 특징적인 산인 의무려산을 지나서 설치했다고 했을 겁니다.”

 

-혹시 전한시대 기록이 오기(誤記)일 수는 없는지요.

 

“한무제가 압록강을 건너 고조선을 평정해 놓고 잘못 기록해 놓았다는 주장인데, 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예를 들어 <전한서>에서 이 말을 한 당사자인 가연지(賈捐之)가 낙랑군이 설치된 지 500년이나 1000년 뒤쯤 사람이라면 그동안의 역사를 고증하는데 착오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불과 50년 뒤의 기록입니다. 50년 전에 일을 말하면서 공간적으로 수천리가 떨어진 지리를 혼동할 정도로 큰 착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가연지는 한무제가 설치한 주애군(珠厓郡)의 폐기를 건의했고, 한원제가 이를 받아들였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가 사적인 저술이 아니라 황제에게 정중히 올리는 글에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이 기록이 잘못되었다면 후대에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을 텐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은 사대 식민사관적 논리를 따르는 근거 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그 밖에 낙랑군이 오늘날 보정시 부근이라는 근거가 더 있는지요.

 

“수성현에서 장성(長城)이 시작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곳이 만리장성의 기점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옛 기록에 모두 맞으려면 현재의 보정시 수성진이 예전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지명이어야 하고, 여기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또한 만리장성의 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장성은 오늘날 북경 위에 있는 장성이 아니라,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북경 부근에 쌓은 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성이기 때문에 ‘명장성’(明長城)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을 진시황의 장성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천리장성을 쭉 연결해서 쌓은 것만이 ‘만리장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연나라 장성이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기점이 바로 수성입니다. 거기가 예전 고조선과 접경지역이었으니까 당연히 장성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참고로, 현재 갈석산이 있는 산해관 부근의 창려현 쪽에는 연나라 장성이 없습니다.”

 


연나라가 점령한 고조선의 요서ㆍ요동은 북경 부근

 

-그나마 기존의 민족 사학자들이 고조선이나 낙랑의 서쪽 변경을 산해관까지 확장해서 보기는 했지만, 전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 부근에는 수당시대에 와서 명칭이 ‘갈석산’이라고 바뀐 산이 하나 있다는 것 외에는 고대의 기록과 맞는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진태강지리지>에 말한 지역이 아닙니다.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가? <한서> 무제기에 갈석산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해석했는데, 그것이 시발이 되어 많은 사가(史家)들이 이를 근거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게석산이 갈석으로 둔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당 이후에 갈석산이 창려현쪽으로 옮겨오면서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갈석산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것이죠.” 

 


심백강 원장은 <조선왕조실록>과  중국측 기록인 <사고전서>에 있는 단군(檀君)과 고조선 관련 자료를 모두 발췌해서 후학(後學)들이 1차 사료를 통해 상고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놓았다.

 

 

-소진이 연나라 동쪽에 ‘조선ㆍ요동이 있다’고 했는데 이 기록을 근거해도 오늘날 요동에 낙랑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요동ㆍ요서의 구분은 심양 앞에 남북으로 흐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진시황 시절이나 전국시대에는 요동 ㆍ요서를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요동을 예전의 요동으로 해석하니까 연나라의 영토가 요동까지 차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하북성 남쪽에 있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전국 7국 중 가장 약소국이 었습다. 춘추시대의 패권 국가였던 제(齊)나라도 산동성의 절반밖에 못 차지했던 상황인데 한 번도 패주(覇主)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연나라가 오늘날 요녕성 요동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나서 ‘연나라 영토가 2000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가 강성할 때인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소진의 설명에 의하면 연나라는 동서로 좁고 길게 늘어져 있던 나라입니다. 중국은 이런 연나라의 영토를 요동까지 확장해서 요동은 물론 어떤 때는 압록강까지 확장해 놓은 것입니다.”

 

-연나라 강역에 대한 고증이 왜 중요한지요.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서 요서ㆍ요동 등 5군을 설치했는데 바로 그 요서ㆍ요동이 고조선이 통치한 지역이기 때문에 연나라 영토가 곧 고조선의 영토와 중첩이 되고, 후에 다시 낙랑이 됩니다. 문제는 방금 말씀드렸듯이 당시 요서ㆍ요동이 지금 심양 부근의 그 요서ㆍ요동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연나라 당시의 요서ㆍ요동 지역은 현재 북경 부근의 상수원이 있는 곳인데, 여기가 바로 연나라가 고조선을 쳐서 빼앗은 지역입니다.

 

중국 사학계나 일제의 반도사관을 따르는 우리 강단 사학의 논리라면 하북성 남쪽에 있던 작은 연 나라가 현재의 요동까지 차지한 초강대국이 됩니다. 이런 논리로 중국이 지금 동북공정을 한 것입니다.”

 


1500년 전 선비족의 금석문에 기록된 고조선의 위치 


-그러니까 고조선의 강역 고증은 유물조사까지 갈 것 없이 1차 사료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씀이시네요.

 

“더 결정적인 것은 고조선 영토에 대한 금석문(金石文)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무려 1500년 전의 선비족이 남긴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가 그것인데 정말 귀중한 사료입니다. 사료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문헌사료는 필사(筆寫) 과정에서 글자를 고칠 수가 있지만, 금석문은 그것이 거의 어렵기 때문에 더욱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이 기록에 요서에 건국한 전연(前燕)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건국(朝鮮建國)’ 즉 ‘조선이 그 지역에서 건국했었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금석문은 고조선이 바로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준 겁니다. 물론 이때의 요서는 오늘날의 요녕성의 요서 지역이 아니고, 고조선과 한사군, 연나라가 있던 하북성의 북경 부근 지역을 말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1차 사료가 왜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그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일연 같은 분이 이 비문을 봤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단 한 줄만 인용을 했었더라도 우리 고대사가 이렇게 참담한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되었으면 일본이 아무리 우리 고대사를 위조한들 위조가 되겠습니까.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000년의 역사를 ‘신화’ 혹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잘라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부터 역사로 인정해서 일본의 역사보다 우리나라 역사의 길이를 줄여놨습니다. 이런 일제의 반도사관을 강단 사학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역사를 왜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조선의 역사만 비틀어 놓으면 뿌리를 비틀어 놓은 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의 모든 부분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 강역도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해놓은 것입니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이제부터는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요서 지역과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은(殷)나라가 망하면서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기자는 자기 선대(先代)가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은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남성(河南省: 은허)에서 한반도의 대동강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망명객 신분에 이(異)민족이 있는 지역을 지나서 한반도로 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우리 사학계도 기자조선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요서조선(진한 시대의 요서군)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한 하북성 동부 일대 지도.

 


원나라 말기까지 존속한 '조선하' 명칭 


-고조선의 중심 도시나 무대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발해만에서 동북쪽 일대가 활동 영역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송나라 때 나라에서 펴낸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인데, 여기에 바로 ‘조선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선하는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무경총요>에 등장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왜 북경 북쪽 지역에 이 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경총요>가 편찬된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씨(李氏) 조선 건국보다 348년이 앞섭니다. 따라서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성계의 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고대 조선의 주무대가 대륙 깊숙이 중원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조선하’가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잠시 정리를 해보면, 중국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활동지는 주로 섬서성(陝西省)입니다. 조선하는 고대 요서조선 수도의 서쪽에 있던 강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모든 기록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사기> 열전에 섭하(涉河)가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것이고, 위만이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겁니다. 당연히 수(隋)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이병도의 주장처럼 청천강이 아니고 조선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천강 패수설’과 ‘대동강 낙랑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무경총요>는 어떤 책입니까.

 

“이 책의 저자 증공량(曾公亮)은 북송(北宋) 왕조의 중신(重臣)입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신당서>와 <영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입니다. <무경총요>는 북송 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아 4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펴낸 역작으로 정사(正史)에 뒤지지 않는 권위 있는 사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하가 허위일 수 없고, 저들이 허위로 조작하여 조선하를 기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 조선하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제가 고증을 해보니 오늘날 북경 부근의 ‘조하’(潮河)가 바로 조선하입니다. 저의 이번 책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사고전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하가 왜 조선하인지 자세하게 고증했습니다. 최소한 원(元)나라 말년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습니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 같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소유한 나라에 불과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원 수도 근처에 조선하가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불편한 명칭이었을 겁니다.”

 


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시아 최고 지리서 <산해경>, '동해 안쪽에 나라가 있으니…' 

 

-혹시 노룡현 쪽이 고조선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다른 기록도 있는지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편을 보면 ‘동해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산해경광주>는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과 ‘대황경(大荒經)’을 ‘조선기’(朝鮮記)라고 했습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한 셈이 됩니다.

 

<산해경광주>는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이란 학자가 쓴 <산해경> 주석서입니다.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입니다. 서한(西漢) 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유흠(劉歆)은 <산해경>이 하(夏)나라의 우(禹)왕과 백익(伯益)의 저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근거 없는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사기>에도 <산해경>이 인용된 것을 보면 선진시대의 사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에서 사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한대(漢代) 이전 고조선의 직접 사료인 <산해경> 중 ‘해내경’과 ‘대황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해경>에 말한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가 노룡현 부근입니까.

 

“풀이할 것도 없이 글자 그대로입니다. 지금의 황해를 예전에는 ‘동해’라고 했습니다. 한족의 근거지인 섬서성을 기준으로 보면 북해(北海)는 현재의 ‘발해만’밖에 없습니다. 발해의 다른 이름이 ‘북해’입니다.

 

<해내경>은 첫줄에서 조선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북해의 모퉁이’라고 했습니다. 삐죽 튀어나온 곳을 모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북성 발해만 지역에 있는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이 바로 <산해경>이 말한 지역이 됩니다.

 

<태평환우기>에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하고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나 한나라 때는 이 지역을 ‘요서’라고 했습니다. 즉 조하의 동쪽이 요동, 조하의 서쪽이 요서로, 지금의 요동ㆍ요서하고 다른 기준입니다.

 

이처럼 옛날의 모든 기록이 고조선과 낙랑의 중심적 위치를 일괄적으로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맞아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이 현재의 요동이나 반도에 위치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조하(조선하)를 기준으로 요동ㆍ요서를 나눈 근거는 무엇인가요.

 

“〈산해경〉에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동ㆍ요서를 나누는 오늘날의 요수(요하)를 보세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요녕성에서 지리 구조상 강이 동남쪽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녕성의 요하는 옛날 <산해경>에서 말해온 그 요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요하로 바꾼 거죠.

 

거기에 반해 조하는 정확하게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갑니다. 기록이 정확하잖아요. 이병도 같은 분들은 요동ㆍ요서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낙랑군이 요동군 동쪽이라고 하니까 대동강 유역이라고 본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가 요서군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과도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요동군에 한나라의 군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압록강에 있다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넘어서 성을 쌓을 수 있습니까. 강단 사학은 앞뒤가 안 맞으면 무조건 오류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냥 옛 기록에 있는 그대로만 따르면 다 맞는다는 말씀이시네요.

 

“<사고전서>에 기록된 대로 요하를 조하로 보고, 노룡현 지역을 ‘요서고조선’의 평양으로 보면 고대사 전체가 다 맞아 들어갑니다. 그동안 사료가 없다 보니까 우리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더듬이 길 찾듯이 고대사를 다루었는데 이제 사료를 통해 다 밝혀졌으니까 더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강단 사학은 새로운 사료가 나와도 자기들 통설하고 안 맞으면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척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전서>에서 밝혀진 사료는 강단 사학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든탑을 허무는 것이 너무 아까우니까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또 보려고 해도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이 안되다 보니까 그동안 이런 내용이 보이지가 않았던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최근 펴낸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심 원장은 계속해서 <사고전서>의 삼국시대 관련 사료를 펴낼 계획이다.



"북한이 만든 시조 단군릉은 가짜" 


-바로 그 강단 사학의 뿌리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우려된다는 말씀이시죠.

 

“일본 사람들이 단군조선은 ‘신화(神話)’라고 해서 부정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거리가 멀어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습니다.

 

이런 논리로 단군조선 1000년, 기자조선 1000년을 잘라내고, 위만(衛滿)조선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를 2300년으로 만들었는데, 일본의 2500년보다 역사가 짧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의 길이를 단절시켰고, 역사의 무대를 축소해 놓았습니다.”

 

-재야사학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사료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먼저 알아야할 것은 <환단고기> 등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주로 ‘재야사학자’라하고, 신채호, 정인보 선생처럼 정사(正史) 사료를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들은 ‘민족사학자’로 구분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고전서>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료는 연대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는데, 이런 원자료를 부정한다면 역사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말씀대로 중국 중원(中原)에서 활동하던 우리 민족은 어떤 계기로 한반도 쪽으로 영역을 계속해서 축소해 왔는지요.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興亡) 했습니다. 돌궐, 흉노, 말갈, 여진…. 그 모든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지만, 오직 우리만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토, 언어, 전통, 민족, 역사를 모두 유지하면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로마가 아무리 강성한들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단군이 세운 그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 민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세계사에서 이처럼 생명력이 긴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천년의 역사적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환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옛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처음 주 무대가 노룡현 일대라면,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제가 다음번에 <사고전서>의 자료를 모아서 책으로 펴낼 부분이 바로 삼국의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주 무대가 동북을 포함하는 역사였습니다. 반도(半島) 쪽으로 완전히 축소된 것은 고려 이후 조선조에 넘어오면서입니다.

 

고구려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노룡현 지방이고, 현재의 평양 천도는 그 한참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의 수도가 바로 노룡 지방입니다. 이때 당(唐)나라에 요서평양(노룡 지역)을 내주고,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번 책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북한은 “평양에서 단군의 시신이 발겼되었다”며 단군릉을 조성했습니다.

 

“고조선이 워낙 오래 존속되었기에 훗날 단군의 후손이나 왕족의 일부가 평양에 건너와 거주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그 무덤이 시조(始祖) 단군일 수는 없습니다. 단군에게 제사를 철저하게 지냈던 조선 시대에도 평양 일대 민간에서 단군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묘를 시조 단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삼원 구조의 원형제단(좌)과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대규모 적석총 유적. 

/ 이미지 출처: 우실하 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 쏟아지는 유물ㆍ유적 증거 


-기록과 함께 유물ㆍ유적 같은 고고학적 증거가 받쳐 주어야 더욱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민족이 원래 중원의 주인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발굴되면서 입증되었습니다. 기록뿐 아니라 유물과 유적까지 뒷받침하는 것이죠.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던 요서군 지역입니다.

 

홍산문화의 3대 특징은 여신을 모신 사당과 원형제단,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섬서성처럼 중국 한족 문화가 융성한 지역(황화문명권)에서는 이런 특징을 가진 유적이 발굴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우리 동이족 매장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 황제는 무덤 조성 시 평지에 흙을 끌어모아 토갱(土坑)을 만들었습니다. 능(陵)과 태묘(太廟), 제단(祭壇) 등은 부락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인데, 대규모 제단이 황화문명에 앞선 홍산문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국가의 전야(前夜) 단계라고 합니다. 황화문명이 아직 국가 단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때 벌써 국가의 전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거주하는 곳에서 먼저 문명이 시작되어 황화문명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홍산문화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신상. 

오른쪽은 두상이고, 왼쪽은 복원한 반가부좌상이다.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라는 것이죠. 


“그것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올 수는 없잖아요. 이러한 문화의 전야(前夜) 위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면 무슨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가지고 고대국가의 건국을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중원 대륙의 우리 민족이 살던 곳 요서지역에서 국가의 건국을 상징하는 유물이 최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중국 문명의 서광(曙光)이 홍산문화에서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명의 시작이 황화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족의 무대는 섬서성이고, 동쪽은 동이족, 그 가운데 우리 ‘박달민족(배달민족)’의 주무대였습니다. 박달민족 국가를 한자로 쓰면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 되는 데, 현재 이 지역에 ‘아사달’이나 ‘박달’과 연관된 무수한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은 홍산문화도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동북공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홍산문화를 발굴해놓고 보니까 기존 중화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건국도 홍산문화에서 먼저 이루어졌고요.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용(龍)이 황화문명에서 발굴된 용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봉황(鳳凰)도 최초로 이쪽에서 나왔고요.

 

그러다 보니 ‘황화문명에서 문명이 시작되어 오랑캐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기존의 이론이 뒤집어 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달라지다 보니까 아예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를 이쪽 지방으로 갖다놓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우리 강단 사학 이론"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족 입장에서 동북지방은 동쪽과 북쪽 사이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입니다. 즉 동쪽과 북쪽 사이를 일컫는 말인데 그동안 이 지역의 역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은 해왔지만, 명백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입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람뿐 아니라 우리 강단 사학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이 이룬 많은 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학회도 만들고, 정부의 움직임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겠다고 출범한 연구재단도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면 기존의 일제나 이병도의 반도사관 학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보낸 자료가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자료에 불과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일일이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요서고조선’ ‘요서낙랑’ ‘요서고구려’(여기서 말하는 요서는 오늘날의 요서 지역이 아니라 진한시대의 요서군 지역임)만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모든 사료는 중국의 조상이 만든 중국 측 자료이고, 그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우리가 합리적이고 치열하게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반박하면 중국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군요.

 

“당연합니다. 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예컨대 선비족(鮮卑族)은 고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세워진 선비족의 ‘두로공신도비문’이 지금 전해집니다. 어떤 이의 비문을 쓸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조상(뿌리)부터 이야기하는데, 그 첫마디가 바로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건국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선비 모용부(慕容部)가 나라를 세우고 활동한 지역이 요서와 요동 지구,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곳은 기자조선이 건국하고, 고죽국이 통치하고, 이후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사군을 설치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는데, 제가 사료분석을 하니 고죽국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분명합니다. 고죽국은 백이ㆍ숙제의 고사로 유명합니다. 이 고죽국이 바로 요서에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고죽국’까지 나오니까 좀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주시죠.

 

“그러니까 발해만에서 가까운 노룡 지역에 조선성이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 ‘고죽성’, ‘요서성’으로 불렸습니다. 요서성은 진시황이 이쪽 지역을 요서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있었으니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고, 고조선 때는 조선이 있어서 ‘조선성’이란 이름이 있었던 겁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중국 동북지방 전체가 우리 역사이고, 우리 조상의 무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교과서 개정으로 왜곡된 역사 바로 잡아야" 


갑골문자(좌)와 이보다 앞서는 골각문자(우).


-동북아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은나라도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다면 은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로 봐도 됩니까.

 

“갑골문자는 한자(漢字)가 아니라 ‘은나라의 문자’ 즉 은문자(殷文字)입니다. 갑골문자에서 4000천자(字)가량이 해독되었는데, 미해독 문자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의 문자가 통용될 정도라면 이미 이에 앞서 갑골문을 탄생시킨 문자 체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문자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습니다(수년 전 산동성 창려현 지방에서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 앞선 골각문자가 발견됨=편집자주). 

 

한자(漢字)는 갑골문자를 한족이 더욱 발전시킨 문자입니다. 정리하면 한자는 당연히 갑골문을 토대로 한족이 발전시킨 글자이지만, 이 문자를 발생시키고 문명 자체를 연 서광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문명의 뿌리이자, 시초를 열어준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서 중국의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현재 우리 역사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반도사관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신화이고, 기자는 허구이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민족은 타율적이며,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관을 아직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꾸려면 교과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료를 정리해 놓아야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작업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가르칩니다. 로마나 한(漢) 왕조보다도 훨씬 위대했던 고조선만 바로 서면 동서화합,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사업은 범국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사학계의 주류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학회나 재단이 만들어진들 연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일연 스님이 고조선에 대해 단 몇줄의 기사를 남김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살려내는 공헌을 했습니다. 만약 일연 스님이 그 기록조차 안 남겼다면 후대에 누가 고조선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제가 하는 이 일도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조선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사료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 사료를 찾아내서 세상에 내놓고 있는 겁니다.”

 


심백강 원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이라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심 원장은 "고죽국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한다" 


-우리 사학계에 하실 말씀은.

 

“국사 학자라면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능력보다 한문 원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교수로 임명해야 합니다. 사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대사학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놓은 ‘요서낙랑’ ‘요서고조선’ 자료를 가지고도 박사학위 논문이 수십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북경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라는 것을 밝히는데 3개의 자료를 인용했지만, 후학들이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고전서>는 동양 삼국이 공히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고전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바로 세우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여러 난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를 통해 한국사의 근간을 바로잡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며, 한중(韓中)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는 여러 문제에 대해 상호 우의(友誼)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심백강 박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광복 이후 모든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정권도 여(與)에서 야(野)로, 야에서 여로 여러 차례 교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 가까운 세월을 조금도 변화없이 식민사학을 계승한 이병도 학파가 줄기차게 주도하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입니다.

 

이제 늦었지만, 역사학계도 하루빨리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야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인문학의 핵심은 역사입니다. ‘역사광복’을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을 때입니다.”


출처: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 기자 조선으로 이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