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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빛의 화가 - 모네 Claude Monet

by 성공의문 2008. 12. 3.

Claude Monet 1840∼1926  클로드 모네 (르느와르가 그려준 초상화)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 파리 출생. 5세 무렵 일가가 르아브르로 이주하여 센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5살때 부모를 따라 르아브르에 정착하여 유년기와 청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가 사춘기 때  처음에는 마을 명사들을 그린 캐리커처로 그 지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노르망디의 바다와 구름 낀 넓은 하늘도 훗날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십대 후반에 만난 해안화가라고 불리우는 으젱 부댕(1824-1898) 덕분에 모네는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부댕으로부터 유화를 배우면서 <옥외에서 풍경이나 바다경치를 그리라>는 말을 들은 후에는 풍경화가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부댕의 "실제적으로 있는 장소에서 직접적으로 그린 것은 아틀리에에서 완성한 작품에 없는 박력이 있고 생동감이 있다."는 말을 믿고 그와 같이 노르만디의 해변 풍경을 사생하면서 다녔다. 그래서 이들을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라고 하기도 한다.
 
그는 19세 때에 파리에 가서 아카데미·쉬쓰에 드나들면서 畵業을 닦는 한편 피사로를 만나기도 한다. 1859년 파리에 온 모네는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아르망고티에 의 아틀리에에 들어간다. 그는 입대하였다가 신병으로 제대하고 다시 르·아브르에 돌아와 부댕과 같이 쌩따드레스에 가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또 용킨트를 만나 큰 영향을 받고, 그 해 11월에 다시 파리로 나와 그레이르·아틀리에에서 르노와르, 바지유, 시슬레 등과 交遊하게 된다. 1863년 봄에 모네는 이들과 같이 퐁텐블로 숲에서 외광을 받고 있는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또 파리에서 쿠르베를 만나는가 하면, 샤를르·프랑소와·도비니와 만나 같이 일도 하였다.

정원의 연인들(1689)

그는 1865년 "까뮈·綠色의 의상"(1688)을 살롱에 출품하여 소설가 에밀·졸라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1867년에 "정원의 여인들"(1689)이 살롱에서 낙선되었으며, 그해 장남 쟌이 출생됨과 동시에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가 고디베르의 원조를 받고 그렇게도 그리기 싫어한 그 부인의 초상화(1690)를 그리기도 하였다. 1870년에 보불전쟁을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도비니와 다시 만나 그의 소개로 인상파의 성립과 그 보급에 힘쓴 폴·듀란류엘(Paul Durandruel 1831∼1922)ㅇ라는 파리의 화상을 만나 그 후 모네의 큰 도움이 되었다. 이 戰火로 피난 온 피사로와 다시 만나 같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컨스터블과 터너들의 작품을 보게 되어 자기들의 진로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모네는 사실주의 화가인 밀레, 쿠르베, 바르비종 화가들을 비롯하여, 코로, 들라크루아, 용킨트 등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이때 F.바지유·A.시슬레·P.A.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알게되어, 4사람은 때때로 퐁텐블로 숲에서 작업을 함께 했다. 62년에는 르아브르 근처에서 네덜란드 풍경화가 J.B.용킨트를 만나 물과 대기와 빛의 묘사에 크게 감화되었다. 65년 살롱에서 2점의 바다풍경화가 입선되고, 66년의 살롱에서도 2점의 작품이 입선되었다. 그는 점점 빛의 효과나 물의 반영에 민감해졌고 색조도 60년대 말에는 한층 밝아졌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차 런던으로 건너가 C.F.도비니를 통해서 화상 뒤랑―뤼엘을 알게되었다.
 
71년 프랑스에 돌아와 파리 교외 센강변의 행락지 아르장퇴유에 거처를 정하고, 차츰 근대화·공업화 물결을 다고 있던 이 지방의 여러 정경을 그렸다. 그는 자연을 그 변화상에 따라 그리려고 때로는 아틀리에용으로 마련한 배를 센강에 띄우기도 했다. 이들은 퐁텐블르로 숲에 가서 작업한다. 모네는 때로 노르망디로 가서 부댕, 용킨트와 함께 작업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G.쿠르베나,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콘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어느 신문기자가 모네의 작품 ‘인상, 해 뜨는 광경'을 본 후 그가 느꼈던 시각적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 용어의 의미가 내포하는 뜻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전통적인 회화 양식의 표현 수단을 상실한 모네를 비롯해 많은 인상주의 예술가들을 공격하기 위한 반감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모네만큼 빛을 사랑하고 동경한 화가는 일찌감치 없었다. 희뿌연 아침 안개와 빛으로 물드는 일출의 바다, 수많은 은비늘처럼 태양의 빛에 반짝거리는 포플러 가로수, 신이 내리는 빛의 변화에 시시각각으로 옷을 갈아입는 자연의 모습은 모네에게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마법을 걸고 말았다. 그는 언제나 사물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창조보다 빛에 의해 변화되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1866년 모네는 살롱에 초상화 <카미유>를 전시한다. 이작품으로 그는 성공을 거두고 전도양양한 작가로 부상하지만, 그동안에 진 빚과 1867년 <살롱>낙선으로 인하여 생활고를 겪는다.
 
1870년 보볼전쟁의 피해 피사로와 함께 런던에 간 모네는 터너를 통해 영국 풍경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접하고 반해 버린다. 이 시기에 그는 영향력 있는 화장이자 콜레터인 뒤랑, 뤼엘을 만난다.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시작하며 인상파의 지도자가 된 모네는 1872년부터 아르장퇴이유에 머물면서, 연못과 다리 등 세느강 유역의 풍경을 즐겨 그린다. 르누아르와 마네도 아르장퇴이유로 그를 방문하여 종종 함께 작업했고, 이 시기에 모네는 자신의 작품들 중 태양광을 통한 가장 밝은빛의 영향을 연구하면서 작업하였다. 당시의 전통에서 벗어난 화풍을 보이는 인상파 화가들은 <살롱>에서 계속 낙선한다. 그래서 이들은 심사위원과 상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전시회 <앙데팡당>을 기획한다.


74년에는 C.피사로 등과 함께 살롱에 대항하여 독자적 그룹전을 조직하있는데 여기에 출품한 작품의 하나인 《인상―해돋이》는 뒤에 인상파라는 호칭을 낳는다. 그는 <여러 색채는 바라보게 되었을 때 단일체로 합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8년 초까지 아르장퇴유에 머물렀으며, 같은 해 센강 하류 베퇴유로 옮겨 살았으며, 83년에는 지베르니로 옮겨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에게 주어진 어린 시절의 주위 환경은 자연 속에서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의 빛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모네는 동네에서도 그 실력을 일찌감치 인정받았고, 그는 종교적인 것을 믿지 않았고,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모네는 화가란 대상의 존재를 단지 실제적이고, 현존하는 것만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상상력에 의한 변화란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용납되지 않았다.


1868년부터 모네는 세느강을 그의 회화에 중앙 무대로 끌어들이게 된다. 세느강은 모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세느강을 통해 들어오는 형태와 색조, 리듬과 빛에 의해 투영되는 물살의 움직임에 그는 감동했다.

1874년 아르장퇴이유에서 배를 구입한 모네는 물 위에 어른거리는 빛의 움직임을 꾸준히 관찰했다. 따라서 센느강과 범선이 이 시기의 주제가 되었다. 작가는 아틀리에로 개조한 배 안에서 작업하면서, 분할된 터치를 써서 떨림과 물의 반사를 강조하고, 금방 사라지는 것과 즉흥적인 것을 포착하려 애썼다. 화상 뒤랑-뤼엘을 비롯한 애호가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그 때문에 1878년부터 피라와 인상파 친구들을 떠난 모네는 베퇴이유에 머무는 데, 1879년 동반자였던 부인 카미유가 죽고, 혹독한 추위 때문에 실내 작업만 계속하게 되었다.



그 아내를 제대로 호강 한번 시켜주지 못한 남편 모네 그 날 그가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마지막으로 아내의 목에 걸아주게 저당잡힌 아내의 메달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노라면 어려운 시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자의 비통함과 쓸쓸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때 그는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그린 꽃과 과일의 정물화는 그가 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슬픔과 절망의 색조를 띤다.

1883년 초부터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여졌다. 1883년 봄 둘째 아내 블랑슈 오세드와 아이들을 데리고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했고, 풍광 좋은 지베르니의 아름다운 정원에 매료된 그는 1890년 집을 사게된다. 이어 뒤랑 - 뤼엘과 조르주 푸티, 두 화상의 도움으로 재정적인 어려움도 차츰 풀려 가고 프랑스와 국외전시도 활발히 진행되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1890년 <밀짚>을 계기로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계절, 시간, 기후,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들을 구상한다.


모네는 인상파의 거장답게 놀라울 정도의 정확한 눈과 손놀림을 갖고 있었다. 집념 어린 관찰을 통해 그는 촌음을 다투는 자연의 변화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른 것이었다.  세느 강변에 앉아 모네는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착하며 자연의 떨림을 재현해 내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붓터치를 터득해 나갔다. 거칠고 강한 붓터치, 극심한 색조의 굴곡은 바로 이 같은 모네의 경험적 토대 위에 형성되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네의 이 같은 작업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같은 사물을 대하면서도 빛에 의해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그가 보았던 순간의 빛, 그리고 그 빛에 의해 반사되는 사물의 형태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상태를 포착하기 위한 그의 눈과 손은 항상 자연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모네는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고,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고 생각했다. 86년이라는 긴 생애 동안 모네는 오직 자연의 빛만을 찾아 헤맸다. 수시로 변화하는 일순간의 빛들을 담기 위해 끊임없이 화폭을 메워 갔다. 그래서 모네에겐 어떤 주제를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빛의 변화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과제였다. 1880년대에 그는 노르망디나 지중해 연안, 중부 프랑스, 브르다뉴의 벨릴섬 등 각지로 자주 여행하여 극적인 구도를 즐겨 그렸다.


90년대에는 여행을 그만 두고, 같은 모티프를 다루면서 시간의 추이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며 그리는클로드·모네의 작품의 변화상을 볼 때, 그의 작품에는 아카데미파의 역사화나 신화화와 같은 주제의 것도 없지만 그 어두운 색조나 반들반들한 형체 표현도 없다. 밝고 거칠고 시정이 담기고 빛깔의 이동으로 데포르메화하여 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만년이 되어갈 수록 시시각각으로 천변만화하여 가는 빛깔의 변동을 화폭에 싣기 위하여 연작을 시작하였다. 1876년에서 78년에 걸쳐 그린 최초의 연작 "쌍·라지르역"은 같은 소재를 빛깔의 변화에 따라 수 많은 캔버스에 나누어서 그렸다.

모네는 그 변화상을 色價의 미묘성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解氷", "포플라", "짚더미", "루앙 대성당", "런던의 국회의사당", "수련" 들을 그렸다. 이렇게 모네가 쌍·라지르역에서 시작한 연작은 빛깔의 효과의 조직적 추구의 이론적 전개이며, 시간의 흐름세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다. 따라서 필촉은 점점 크게 야들야들 해지고 시각은 점차로 예민성과 미시성(微視性)이 불어나 하늘과 대지가 마치 그 이후의 추상화의 선구적인 성격이 강조되는 듯 하다. 더욱이 그의 "수련"은 1899년에서 1926년 그가 작고할 때까지 추구하던 최후의 연작이다. 그 중에서도 1911년 후처 아리스를 잃고, 실의에 차서 3년간이나 화필(畵筆)을 던져버리고 있었다가 그의 친우인 정치가 죠르쥬·끌레망(Georges Clemenceau 1841∼1929)의 격려로 겨우 다시 화필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파리의 뛸르리궁의 오랑쥬리미술관에 있는 "수련"의 대벽화이다 1890년, 노년의 모네는 지베르니에 머물면서 노년기의 예술혼을 불태운다.

이때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모네가 그렸던 주제는 연못 위에 피어 있는 ‘수련'이었다.

모네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수련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하나의 주제를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그대로 그리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서 모네는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관찰하며 연작을 그렸던 것이다.


<수련>을 통해 우리는 모네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회화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첫째, 모네는 붓놀림이 매우 빠른 화가였다. 철저하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모네는 그가 붓질을 시작한 첫 장소에서 무조건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일단 시작한 그림을 마무리 하기 위해 그에겐 내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일의 빛은 또다시 어떻게 변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붓놀림은 필연적으로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직접 색을 혼합했다. 이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또 색조의 선명한 효과를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셋째, 풍부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햇빛으로부터 생동감을 부여받은 사물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밝고 풍부한 색감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의 후기작품에서는 현장뿐만 아니라 아틀리에에서의 제작도 차츰 중요도를 더해갔다. 그는 빨리 쉽게 이를 수 있는 것에는 만족하지 않았고, 자신이 의도하는 순간의 효과를 내기 위해 몇 번이고 그림에 되돌아가 아틀리에에서 그것을 완성시켰다. 만년에 친구이며 정치가인 G.클레망소의 권고로 《수련》의 대장식화를 그렸고 뒤에 국가에 기증되어 파리 오랑제리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후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78년에는 센 강변의 베퇴유, 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外光)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는 물의 흐름, 구름의 진행, 빛의 떨림, 수목의 동요를 재빨리 파악하여 자연의 형태의 표현보다는 거기에 변화를 주는 빛과 색의 효과를 그리려고 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표현에 전념한 그는 자기의 외향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같은 주제를 상이한 시간에 따로따로 제작한 몇 개의 뛰어난 연작을 남겼다.

이 밖에 《소풍:The Picnic》 《강: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곳 전원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여기 와서 이 정원을 구경하라고 편지에 쓰고 싶었답니다.
정원은 지금이 한창때이니 한 번 ! 와볼 만할겁니다.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 시들어 버리니까요."

1900년 5월 모네가 귀스타브 젤프루아에게 쓴 편지 中


모네의 정원

모네가 살아 생전 열과 성을 다해 꾸며놓은 화단과 연못은 모네의 가장 이상적인 작품 혹은
가장 이상적인 팔레트라 할 수 있다.  많은 화가들이 유품으로 화구와 팔레트를 남겨놓지만
모네의 이 팔레트만큼 크고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모네의 정원은 모네의 남다른 빛과 색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화려하고 멋진 화가의 팔레트인 것이다. 그 어떤 물감이 이곳의 수많은 꽃들 그 이름조차 헤아리기 어려운 각양각색의 꽃들보다 아름다울까. 모네도 생전에 이 팔레트를 자랑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모네의 집,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파리에서 노르망디 방면 A13 고속도로로 70km 남짓 달리면 세느강을 끼고 한적한 마을이 나타난다.

지베르니. 인상파화가 클로드 모네가 말년에 거주하면서 애착을 가지고 가꾸고 다듬던 창작의 산실이자 보기드문 정원, 화단, 연못으로 이루어진 문화명소이다.

모네작품 대부분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마르모탕 미술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지만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는 오늘도 한 화가가 정성들여 이룩한 예술공간을 보기위한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연간 대략 40만명으로 추산되는 관람객수는 그 자체로는 많아 보이지만 입장료수입만 가지고는 운영, 유지관리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국내외 많은 후원자의 도움과 자체 수익사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11월~3월까지 동절기에는 휴관하는 관계로 수입은 더욱 줄어든다. 꽃과 초목이 시들어 버리고 노르망디 특유의 기후 탓으로 5개월간 입장객을 받지 않는 동안 원예관리를 통하여 다음해 공개를 준비한다는 설명이다. 꽃밭을 제외하고도 많은 볼거리로 관람객을 받을 수 있음에도 문을 닫는 대목에서 우리는 모네의 집이 꽃밭에 갖는 자부심을 읽는다.

꽃에 열광한 화가- 정원사 모네의 정성과 담이 넓은 정원과 연못 그리고 울창한 숲 사이에 선연하게 배어있는 듯 하다. 모네의 집은 사실 꽃과 수목으로 더 유명하다. 철따라 수선화, 튤립, 철쭉, 라일락, 등나무꽃, 아이리스, 작약, 원추리, 백합, 부채꽃, 양귀비, 장미, 꽃무우, 샐비어 등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들은 100년전 물과 빛의 정교한 유희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화폭에 담으려 한 거장화가의 열정을 짐짓 아는 양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모네의 집은 크게 저택, 꽃밭, 연못이 있는 정원 그리고 아틀리에와 부속온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네가 구입하여 생애후반에 정성들여 가꾸어온 것을 1966년 모네의 아들이 미술아카데미에 기증하였고 1980년 모네재단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러 파리근교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규식 교수의 파리산책 중>


아르장퇴 유의 다리

생 라자르 역

생 타드레스 해변

정원

해바라기

일본의상의 여자

Houses of Parliament, London, Sun (1904)
Oil on canvas (81 x 92 cm)
Musee d'Orsay,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