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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동학, 깨달음을 말하다.

by 성공의문 2013. 1. 8.

1. 들어가며

동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동학이란 단어를 익숙하게 들어왔고, 또한 우리의 근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진정 동학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날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학자의 자리에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고작 밖에서 바라본 이의 피상적 이해에서 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것은 동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학문 대상이 어떤 것이든 모든 영역에 두루 해당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 대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대상이 되어본 후에 다시 학자의 자리로 돌아와 학자의 말을 하는 것이 더 깊은 이해와 균형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고는 이런 뜻에서 학인의 자리를 떠나, 동학 속으로 들어가 동학의 뇌로 생각하고, 동학의 심장으로 느끼며, 동학의 입술로 말을 해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동학>과 <人乃天>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학에 대해 백치에 가까우며, 전문 학자들도 동학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있어 빗겨서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듯 동학 속으로 들어가 동학이 되어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文字之學'이 아닌 것을 문자지학으로만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깨달음의 배움>입니다. 깨달음은 문자지학으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人乃天"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데, 인내천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동학을 다 알았다 할 것이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동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서는 최제우, 최시형이 어떤 인물이며 또한 동학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어떠한지 전혀 알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의 길을 밝힌 깨달음의 도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큰 유리컵이 하나 있다고 할 때, 유리컵 속에 허공과 유리컵 밖에 허공이 둘로 나뉘어 있지만, 이 유리컵이 깨어지면 <안의 허공/밖의 허공>이 하나의 허공이 됩니다. 이처럼 에고라는 경계로 '내 안의 마음'과 '나 아닌 나 밖에 있는 物의 마음'이 나뉘어 있지만, 에고에 묶인 我相이 깨어지면 <내 마음/物(천지)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유리컵의 안과 밖의 허공이 하나의 허공이 되었듯, 내 마음과 物(천지)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내 마음이 바로 천지의 마음이 되고, 천지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 된 마음'을 불교에서는 一心이라고 하는데, 천지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이기에 一切唯心造라 이르는 것이요, 소강절이 "마음이 바로 태극(우주만상)이다"라고 한 것도 모두 똑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동학에서는 與天地合其德이라 하거니와 또한 도가에서 이르는 物我一體의 진의 또한 이것이니 내가 천지와 합일을 이루었으니 아와 물의 비분리의 합일 상태이기에 無爲自然(함이 없이 절로 그러함)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합일을 이룬 이는 자아의 我心를 초월하여 천지의 마음(우주심)으로 살아가기에 늘 천리에 합일하는 성인이 됩니다. 바로 이것, <우주 만물과 내가 완전한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골자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무한 자비심과 조화의 마음이며, 진정한 중용의 참뜻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 아래 모든 깨달은 이의 공통된 메시지이며, 모든 깨달음의 경전의 똑같은 목소리입니다.


人乃天이라는 말도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나온 말로,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천지만물, 우주, 하느님의 제유로 쓰인 말로, 모든 것이 하늘이라는 뜻은 모든 것이 분리가 되지 않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物/神>의 경계를 넘어서면 모든 것이 하나이기에 나, 아님이 없고 하늘(님)이 아닌 것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최시형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을 일러 "하늘이 하늘을 지고서 하늘을 먹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궁한 울 속에 무궁한 나>! 이것이 신인합일의 깨침이며 이를 깨달은 이를 불가에서는 부처라 했고, 한국의 선가에서는 신선이라 하였습니다.


이렇듯 동학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대각을 통한 위대한 성과(열반) 위에 나온 깨달음의 聖火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석가와 같은 레벨의 대철인이 우리의 근대사에 나와서 깨달음의 찬란한 빛을 밝혔지만, 우리는 고작 이들을 구한말 민족종교를 창시한 시시한 종교지도자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동학은 불가나 도가, 예수, 흰두교 등 세계 그 어느 깨달음의 말보다도 더 뛰어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오직 하나이지만, 이 깨달음을 말로 펴는 경우 더 쉽고 절실하고 명료하게 말하는데 있어서는 차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른바 道可道(말로 표현한 도)로써 도가나 불교는 형이상학전이 면에 많이 치우쳐서 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최치원이 [낭랑비서]에서 말했듯 우리나라의 고유의 도 풍류는 깨달음의 형이상학적인 면과 그것이 실생활에 적용된 형이하학적인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그 고유의 선도의 진정한 면모를 동학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학이 참으로 놀라운 것은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의 이치를 너무나도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힘차게 삶의 일상 속으로 가져온 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공경하라." 전 세계 그 어느 경전에서도 이처럼 명료하고 단순하게 실천의 논리로 깨달음과 삶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시킨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동학은 위(上) 없는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도가도에 있어서 궁극을 꿰어 더 없이 독특하며 또한 깊고 다채로워 오히려 깨달음의 宣揚에 있어 절정을 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聖學, 우리는 여기서 동학이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와 함께 우리는 역사의 저울에 동학과 최제우, 최시형의 무게를 다시 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동학의 씨를 뿌린 최제우

崔濟愚는 (1824 순조 24∼1864 고종 1) 崔옥의 외동아들로 10세에 어머니를 여이고 16세에 아버지마저 잃었습니다. 아버지 최옥은 당시 경주에서 덕망 있는 선비였으나, 과거에 출사하지 못하고 불우하게 초야에서 묻혀 살았다고 합니다. 멀리는 최치원의 후속이고 가까이는 7대조 최진립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의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 이후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출세하지는 못하였으나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있었고 또 제자들이 문집([近庵集])을 만들어 줄 정도였으므로, 최제우의 성장기의 학문적 소양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 양 부모를 여이고 화재까지 겹쳐 그의 살림은 더욱 궁핍했으며, 당시 부패한 정치 상황에 출사할 뜻을 품지 못하고 젊어서부터 시대와 자신의 신세에 대해 심한 갈등을 가진 듯합니다. 20대 초부터 전국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혔는데, 당시 서구와 일제의 침입 등 갖은 혼란상을 목격하고 최제우의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 졌으며, 1856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일화가 있지만, 정확히 그가 어떤 수도방법을 통해 수도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가무도교의 김일부와 동문수학하였다 하였으니, 그런 이 수도에도 다소 영향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결정적으로 1860년에 자신의 교향인 용담정에서 49일의 수도 끝(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에 대각을 이루니 이것이 동학이 발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를 펴는 1861년부터 순교까지 고작 3년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의 저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되어, 더 많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세상에 대한 원대한 구원의 뜻을 품은 그는 체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3.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동경대전] 최시형이 최제우 사후에 그의 글을 수습하여 엮은 책입니다. 분량이 매우 적어서 그의 사상의 면모를 폭넓게 살펴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동학의 기본 씨앗의 단편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論學文]에는 득도를 통해 천주의 접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동학의 첫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일일이 들어 말지 않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뿐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 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신기한 말씀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라고 물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를 어찌 알리오. 천지는 안다 해도 귀신은 알지 못하였으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에게 무궁 무궁한 도를 미치게 하노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擧此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講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曰 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 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오랜 수도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득하는 순간 天語를 듣게 되고 자신의 천명을 자각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동에서 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라고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는데 서가 어찌 동이 되며, 동을 어찌 서라고 말하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서 나서 추나라에 교화를 이루었으므로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하여졌다.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서학이라고 이름 하겠는가.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 受於斯 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동학의 이름을 정한 연유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서학에 대해 상대적인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땅에서 난 우리의 도라는 자부심과 자주적 의지의 표현으로써 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므로 주문이라 이르는 것이니, 지금 글에도 있고 옛 글에도 있는 것이니라." 묻기를 "강령의 글 뜻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하기를 至라는 것은 지극한 것이오, 氣라는 것은 허령이 창창하여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모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混元)한 한기운(一氣)이니라. 今至라는 것은 도에 들어 처음으로 至氣에 접하게 됨을 안다는 것이요, 願爲라는 것은 청하여 비는 뜻이오, 大降이라는 것은 氣化를 원하는 것이다.


侍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아는 것이오, 主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이오, 造化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定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오, 永世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오, 不忘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오, 萬事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오, 知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밝고 밝은 그 덕을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하면 지기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지극한 성인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曰呪文之意 何也 曰至爲天主之字 故以呪言之 今文有 古文有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 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和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 故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동학의 수법인 주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글입니다. [시천주] "하느님이 내 안에 있어 조화를 이루니 영원토록 잊지 않아 만사가 절로 깨달아지도다.(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상세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도법의 전부이고 이것이 깨달음을 얻어 천지와 합일하는 유일한 길임을 여러 글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을 이 같은 맥락에서도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니, 그 근원이 매우 깊고 그 이치가 심히 깊은 뜻을 지녔노라. 내 마음 속에 바른 기운이 있고 줏대가 떳떳해야, 우리 도의 참 진미를 알고, 오로지 하느님을 위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어야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느니라. 나쁘고 옳지 못한 기운을 모두 떨쳐버리고 맑고 바른 기운을 , 하느님의 마음을 받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의 깨끗한 마음처럼 닦도록 하라. 우리 도를 행함의 바른 방법은, 오직 하느님을 위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되어야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있느니라.


풍부하고 지혜로운 총명은, 자연 속에서 사는 신선의 마음에서 나오고, 밝은 지혜로 크게 이루는 모든 일은 오직 하느님의 바른 이치로 돌아가느니라. 남의 조그만 허물을, 나의 바른 마음에 두지 말 것이며, 나의 바른 마음의 작은 지혜일지라도, 남이 본받도록 베풀어주어라.


이와 같은 큰 도를, 사사로운 자신의 욕심을 위하는 작은 일로는 정성을 삼지 말 것이니라. 하느님을 도와 하느님의 덕을 펴는 일에 자신의 정성을 다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도움이 있느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창조의 힘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모두 다르니, 하느님과의 약속을 굳게 지키고, 마음을 조급히 하지 말 것이로다. 그러면 공을 이루는 다른 날에 하느님과의 연분을 짓게 되느니라. 하느님의 마음은 본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응하여도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하느님의 바른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을 닦아야 하느님의 무한한 베푸심인 덕을 알고, 그 덕이 오직 밝아야 하느니라. 오직 이것이 하느님의 올바른 가르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도는, 한 결 같이 하느님의 무한한 베푸심에 있으며 사람에게 있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의 도는,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믿음에 있으며, 사람이 갖고 있는 재주에 있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의 도는 가까운데 있으며, 먼데 있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의 도는, 하느님을 위하는 지극한 정성에 있으며,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구하는데 있지 아니 하느니라.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런 것이고, 먼데 있는 것처럼 느껴 질 수도 있으나 절대 멀리 있지 아니 하도다.


간신히 한 가닥 길을 얻어서, 걷고 또 걸어 험하고 어려운 난관을 극복했도다. 산 넘어 산이 다시 나타나고, 물 건너 또 물을 만났도다. 다행히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너머 산을 넘어 왔도다. 넓은 들판에 거의 이르러 비로소 큰 길 있음을 알았노라.


봄소식을 몹시 기다려도 봄빛은 끝내 오지 않도다. 봄빛을 좋아하지 않음은 결코 아니나, 오지 아니하면 때가 아니로다. 이르러 올 계절이 되면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오리라. 봄바람이 간밤에 불어와, 모든 나무들이 봄소식을 모두 알도다. 하루에 한 송이 꽃이 피고 이틀에 두 송이 꽃이 피고 삼백예순 날에 꽃송이 만발하도다. 한 몸이 다 꽃이요 온 집 안이 다 봄이로다.


병속에 신선의 술이 있으니 백만 사람을 살릴만하도다. 빚어 넣기는 천년 전인데, 쓸 곳을 대비하여 이를 간직하도다. 부질없이 봉한 뚜껑을 열면 향기는 흩어지고, 맛도 또한 희박해 지리라. 지금 우리 도를 위하는 사람들은 말조심하기를 이 술병같이 지켜야하느니라


山河大運盡歸此道其源極深其理甚遠固我心柱乃知道味一念在玆萬事如意消除濁氣兒養淑氣非徒心至惟在正心隱隱聰明仙出自然來頭百事同歸一理他人細過勿論我心我心小慧以施於人如斯大道勿誠小事臨勳盡料自然有助風雲大手隨其器局玄機不露勿爲心急功成他日好作仙緣心兮本虛應物無迹心修來而知德德惟明而是道在德不在於人在信不在於工在近不在於遠在誠不在於求不然而其然似遠而非遠

裳得一條路步步涉險難山外更見山水外又峯水幸渡水外水僅越山外山且到野廣處始覺有大道苦待春消息春光終不來非無春光好不來卽非時玆到當來節不待自然來春風吹去夜萬木一時知一日一花開二日二花開三百六十日三百六十開一身皆是花一家都是春甁中有仙酒可活百萬人釀出千年前藏之備用處無然一開封臭散味亦薄今我爲道者守口如此甁


최제우는 한문보다도 오히려 한글 가사를 널리 도를 알리고자 했는데 이는 서민과 부녀자와 아이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하울님만 믿어서라

네 몸에 모셨으니

捨近取遠한단말가

나 역시 바라기는

한울님만 전혀 믿고

해몽 못한 너희들은

서책은 아주 폐코

수도하기 힘쓰기는

그도 또한 도덕이라

문장이고 도덕이고

歸於虛事 될가보다

열석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心學이라 하였으니

不忘其意 하여서라

현군자 될 것이니

도성덕립 못 미치까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 한다말가(...)

이 글보고 개과하여

날 본 듯이 수도하라

부대부대 이 글보고

남과 같이 하여서라. -[敎訓歌] 4절 일부


사상적인 면에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분량 면에서 {용담유사}가 더 많은 양을 차지할 뿐 아니라 민중적이고 정서적인 생생한 목소리는 가사에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4. 동학을 열매 맺게 한 최시형

동학의 씨를 최제우가 뿌렸다면, 崔時亨(1827 순조27∼1898)은 동학의 열매를 찬란하게 거둔 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최제우보다도 더 몰락한 집안이었고,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최제우가 동학을 편 1861년에 동학에 입교하였고, 수도정진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63년에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아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98년 72세의 나이로 순교하기까지 평생을 혹독한 고난 속에도 교세의 확장과 구국안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최보따리'라 불리우리 만치 그는 일생을 쫓겨 다니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진리 빛을 밝히기 위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찬란한 혼불을 밝힌 다시없는 성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5. 동학의 성전 {해월신사 법설}

동학의 사상은 실로 {해월신사법설}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해월신사법설}(총38장)은 동학사상의 골자를 담고 있는 동학의 찬란한 꽃이요 열매라 할 수 있는 경전입니다. 그 내용 중 일부 내용을 통해 동학의 사상적 특질을 살펴볼까 합니다.


밝게 분별하여 말하면 처음에 기운을 편 것은 이치요, 형상을 이룬 뒤에 움직이는 것은 기운이니, 기운은 곧 이치라 어찌 반드시 나누어져 둘이라 하겠는가. 기란 것은 조화의 원체 근본이요, 이치란 것은 조화의 현묘이니, 기운이 이치를 낳고 이치가 기운을 낳아 천지의 수를 이루고 만물의 이치가 되어 천지 대정수를 세운 것이니라.


明辨初宣氣理也 成形後運動氣也 氣則理也何必分而二之 氣者造化之元體根本也 理者造化之玄妙也 氣生理 理生氣 成天地之數 化萬物之理以 立天地大定數也


이 글은 동학의 이기론이라 할 수 있는 글로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지금 사람들은 다만 부모 포태의 이치만 알고 천지포태의 이치와 기운을 알지 못하느니라.


한울과 땅이 덮고 실었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이며, 해와 달이 비치었으니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며, 만물이 화해 낳으니 천지이기의 조화가 아니 무엇인가.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이니라.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主란 것은 존칭하여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기는 것이라'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예와 이제를 살펴보면 인사의 할 바니라' 하셨으니, '존칭하여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 는 것은 옛 성인이 밝히지 못한 일이요 수운대선생님께서 비로소 창명하신 큰 도이니라. 지극한 덕이 아니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천지가 그 부모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 오만년이 지나도록 오래 되었으니, 다 천지가 부모임을 알지 못하면 억조창생이 누가 능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로써 공경스럽게 천지를 받들 것인가.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깊은 물가에 이르듯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 된 도리이니라. 그 아들과 딸 된 자가 부모를 공경치 아니하면, 부모가 크게 노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벌을 내리나니, 경계하고 삼가라.


내가 부모 섬기는 이치를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기다려 억지로 할 것인가. 도무지 이것은 큰 운이 밝아지지 못한 까닭이요 부지런히 힘써서 착한데 이르지 못한 탓이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사람은 오행의 빼어난 기운이요 곡식은 오행의 으뜸가는 기운이니, 젖이란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곡식이요, 곡식이란 것은 천지의 젖이니라.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사람이 어렸을 때에 그 어머니 젖을 빠는 것은 곧 천지의 젖이요,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은 또한 천지의 젖이니라. 어려서 먹는 것이 어머님의 젖이 아니고 무엇이며, 자라서 먹는 것이 천지의 곡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젓과 곡식은 다 이것이 천지의 녹이니라.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을 알면 반드시 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보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어찌 홀로 사람만이 입고 사람만이 먹겠는가. 해도 역시 입고, 입고 달도 역시 먹고 먹느니라.


사람은 한울을 떠날 수 없고 한울은 사람을 떠날 수 없나니, 그러므로 사람의 한 호흡, 한 동정, 한 의식도 이는 서로 화하는 기틀이니라.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사람의 호흡과 동정과 굴신과 의식은 다 한울님 조화의 힘이니, 한울님과 사람이 서로 더부는 기틀은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못할 것이니라.


1. 天地卽父母父母卽天地天地父母一體也父母之胞胎卽天地之胞胎今人但知父母胞胎之理不知天地之胞胎之理氣也

2. 天地盖載非德而何也日月照臨非恩而何也萬物化生非天地理氣造化而何也

3. 天地萬物之父母也故經曰主者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又曰察其古今則人事之所爲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前聖未發之事水雲大先生主始創之大道也非至德孰能知之不知天地其父母之理者五萬年久矣皆不知天地之父母則億兆蒼生孰能以孝養父母之道敬奉天地乎

4. 天地父母永侍不忘如臨深淵如履薄氷然至誠至孝極盡極敬人子之道理也爲其子女者不敬父母則父母大怒降罰於其最愛之子女戒之愼之

5. 吾事父母之理何待人言而强爲哉都是大運未明之故也勤勉不善之致也實是慨嘆之處也

6. 人是五行之秀氣也穀是五行之元氣也乳也者人身之穀也穀也者天地之乳也

7. 父母之胞胎卽天地之胞胎人之幼孩時唆其母乳卽天地之乳也長而食五穀亦是天地之乳也幼而哺者非母之乳而何也長而食者非天地之穀而何也乳與穀者是天地之祿也

8. 人知天地之祿則必知食告之理也知母之乳而長之則必生孝養之心也食告反哺之理也報恩之道也對食必告于天地不忘其恩爲本也

9. 何獨人衣人食乎日亦衣衣月亦食食

10. 人不離天天不離人故人之一呼吸一動靜一衣食是相與之機也

11. 天依人人依食萬事知食一碗

12. 人依食而資其生成天依人而現其造化人之呼吸動靜屈伸衣食皆天主造化之力天人相與之機須臾不可離也


2장 천지부모의 전문으로 동학 특유의 범신론적인 만물일체 사상과 조화와 공경 정신을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사람의 일동일정이 어찌 한울님의 시키는 바가 아니겠는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 힘써 행하면 한울임이 감동하고 땅이 응하여 감히 통하게 되는 것은 한울님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人之一動一靜 豈非天地之所使乎 孜孜力行則天感地應 敢以遂通者 非天而何(3장 도결-12)


천지인은 도시 한 이치기운뿐이니라. 사람은 바로 한울 덩어리요, 한울은 바로 만물의 정기이니라. 푸르고 푸르게 위에 있어 일월성신이 걸려 있는 곳을 사람이 다 한울이라 하지마는, 나는 홀로 한울이라 하지 않노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이 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라.


天地人都是一理氣而已人是天塊天是萬物之精也蒼蒼在上日月星辰所係者人皆謂之天吾獨不謂天也不知者不能覺斯言矣(4장 천지인-2)


사람의 일거일동이 하늘이며 오직, 하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천인합일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것이 동학의 메시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이 없느니라.


人是天 天是人 人外無天 天外無人(4장 천지인-7)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한울에 있고, 한울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곧 한울이요 한울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마음이 없느니라. 한울과 마음은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니 마음과 한울이 서로 화합해야 바로 侍定知(하늘이 내 안에 있음을 앎)라 이를 수 있으니, 마음과 한울이 서로 어기면 사람이 다 侍天主라고 말할지라도 나는 시천주라고 이르지 않으리라.


心在何方 在於天 天在何方 在於心 故心卽天 天卽心 心外無天 天外無心 天與心本無二物 心天相合方可謂侍定知 心天相違則 人皆曰侍天主 吾不謂侍天主也(4장 천지인-8)


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본래 비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다"라 하였으니, 빈 가운데 靈이 있어 깨달음이 스스로 나는 것이니라. 그릇이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집이 비었으므로 사람이 능히 거처할 수 있으며, 천지가 비었으므로 능히 만물을 용납할 수 있고, 마음이 비었으므로 능히 모든 이치를 통할 수 있는 것이니라.


經曰心兮本虛 應物無跡 虛中有靈知覺自生 器虛故能受萬物 室虛故能居人活 天地虛故能容萬物 心虛故通萬理也(5장 虛實-1)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그릇은 비움 있음을 통해 우주와 하느님까지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천지를 에워싸고 우주를 담을 때 진정한 시천주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청주에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하늘)가 베 짜는 것인가"하니, 서군이 나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 강림하셨다 말하라.


余過淸州 徐淳家聞其子婦織布之聲 問徐君曰 彼誰之織布之聲耶 徐君對曰 生之子婦織布也 又問曰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 徐君不卞吾言矣 何獨徐君耶 道家人來勿人來言 天主降臨言

(7장 待人接物-4)


도가의 부인은 경솔히 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 도인집 부인이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경솔히 아이를 때리면, 그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니 이제 아이를 때리지 말라.


道家婦人輕勿打兒 打兒卽打天矣 天厭氣傷 道家婦人不畏天厭氣傷而輕打幼兒則 其兒必死矣 切勿打兒(7장 待人接物-5)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데 들어가리라.


待人之時 如少兒樣 常如花開之形 可以入於人和成德也(7장-12부분)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요,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孰非我長 孰非我師 吾雖婦人小兒之言 可學而可師也(7장-13)


동학의 행동지침을 읽을 수 있는 글로 모든 이에 대한 <하늘같은 공경>은 동학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태어난 것이요, 우리 사람이 사는 것도 또한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사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사람만이 홀로 한울님을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


吾人之化生 侍天靈氣而化生 吾人之生活 亦侍天靈氣而生活 何必斯人也 獨謂侍天主 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亦是侍天主之聲也

(8장 靈符呪文-11)


우리의 도의 뜻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고, 한울로써 한울을 화할 뿐이니라. 만물이 낳고 나는 것은 이 마음과 이 기운을 받은 뒤에라야 그 생성을 얻나니, 우주만물이 모두 한 기운과 한 마음으로 꿰뚫어졌느니라.


吾道義 以天食天 以天化天 萬物生生 稟此心此氣以後得其生成 宇宙萬物總貫一氣一心也(8장-12)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존중 사상을 독특하게 들어내 주고 있습니다. 흙 한줌도, 물 한 방울도 모두 우리의 형제이며, 나이며 하늘인 것입니다.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은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요, 내 마음이 편안치 않는 것은 천지가 편안치 않은 것이니라. 내 마음을 공경치 아니하고 내 마음을 편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천지부모에게 오래도록 순종치 않는 것이니, 이는 불효한 일과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부모의 뜻을 거tm르는 것은 불효가 이에서 더 큰 것이 없으니 경계하고 삼가라.


我心不敬天地不敬 我心不安天地不安 我心不敬不安 天地父母長時不順也 此無異於不孝之事 逆其天地父母之志 不孝莫大於此 也戒之愼之

(9장 守心正氣-7)


모든 것과의 일체감을 느끼고 하늘같은 공경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내 마음이 먼저 하늘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도 모두 하느님이 마음이니 어찌 경솔히 그 마음을 대하겠습니까.


남편이 화애롭고 아내가 정순함은 우리 도의 제일 종지니라.


夫和婦順 吾道之第一宗旨也(17장 夫和婦順-1)


도를 통하고 통하지 못하는 것은 도무지 내외가 화순하고 화순치 못하는 데 있느니라. 내외가 화순하면 천지가 안락하고 부모도 기뻐하며, 내외가 불화하면 한울이 크게 싫어하고 부모가 노하나니, 부모의 진노는 곧 천지의 진노이니라.


道之通不通 都是在內外和不和 內外和順則天地安樂 父母喜悅 內外不和則天大惡之 父母震怒矣 父母震怒卽天地之震怒也(17장-2)


묻기를 "우리 도 안에서 부인 수도를 장려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부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부인이 감당하니, 주부가 만일 정성 없이 음식을 갖추면 한울이 반드시 감응치 아니하는 것이요, 정성 없이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반드시 충실치 못하나니, 부인 수도는 우리 도의 큰 근본이니라. 이제로부터 부인 도통이 많이 나리라. 이것은 일남구녀를 비한 운이니, 지난 때에는 부인을 압박하였으나 지금 이 운을 당하여서는 부인 도통으로 사람 살리는 이가 많으리니, 이것은 사람이 다 어머니의 모태 속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吾道之內婦人修道奬勵是何故也 神師曰婦人家之主也 爲飮食製衣服育孀兒待賓奉祀之役 婦人堪當矣 主婦若無誠而俱食 則天必不感應 無誠而育兒 則兒必不充 實婦人修道吾道之大本也 自此以後婦人道通者多出矣 此一男九女而比之運也 過去之時 婦人壓迫 當今此運婦人道通活人者亦多矣 此人皆是母之胞胎中生長者如也(18장 婦人修道)


동학은 증산도와 함께 지극한 여성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이 제대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는 미개의 사회입니다. 中正의 조화가 이미 깨어졌으니 결코 진실이 바르게 깨어나지 못할 것은 살펴볼 필요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아니하리라. 이로운 것은 밤과 낮, 활을 당기는 사이에 있느리라. 山不利 水不利 利在晝夜 挽弓之間(36장 降詩-9)"이라 했으니 중정의 조화는 역의 진리이자 깨달음의 진리입니다.


 

1. 사람은 첫째로 敬天을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先師의 創明하신 道法이라. 敬天의原理를 모르는 사람은 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하면 한울은 眞理의 衷을 잡은 것이므로 써 이다. 그러나 敬天은 결단코 虛空을 向하여 上帝를 恭敬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恭敬함이 곧 敬天의 道를 바르게 하는 길이니, 「吾心不敬이 卽 天地不敬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敬天함으로써 自己의 永生을 알게 될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의 全的理諦를 깨달을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남을 爲하여 犧牲하는 마음, 世上을 爲하여 義務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敬天은 모든 眞理의 中樞를 把持함이니라.


2. 둘째는 敬人이니 敬天은 敬人의 行爲에 의지하여 事實로 그 效果가 나타나는 것 이다. 敬天만 있고 敬人이 없으면 이는 農事의 理致는 알되 實地로 種子를 땅에 뿌리 지 않는 行爲와 같으니, 道닦는 자 사람을 섬기되 한울과 같이 한 후에야 처음으로 바르게 道를 實行하는 者니라. 道家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降臨하였다 이르라 하였으니, 사람을 恭敬치 아니하고 鬼神을 恭敬하여 무슨 實效가 있겠느냐. 愚俗에 鬼神을 恭敬할 줄은 알되 사람은 賤待하나니, 이것은 죽은 父母의 魂은 恭敬하되 산 父母는 賤待함과 같으니라. 한울이 사람을 떠나 別로 있지 않는지라, 사람을 버리고 한울을 恭敬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解渴을 求하는 자와 같으니라.


3. 셋째는 敬物이니 사람은 사람을 恭敬함으로써 道德의 極致가 되지 못하고, 나아 가 物을 恭敬함에까지 이르러야 天地氣化의 德에 合一될 수 있느니라. (셋째는 물건을 공경함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최고경지가 되지 못 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느니라.)


天·人·物에 대한 동학의 삼경사상입니다. 결국 어느 글을 보아도 다 같은 맥락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이므로 모든 것을 나처럼 사랑하라!


1. 내 恒常 말할 때에 天語를 이야기 하였으나 天語가 어찌 따로 있으리오. 人語가 곧 天語이며 鳥聲도 亦是 侍天主의 聲이니라. 그러면 天語와 人語의 區別은 어디서 分別되는 것이냐 하면, 天語는 大槪 降話로 나오는 말을 이름인데 降話는 사람의 私慾 과 感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公理와 天心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말이 理에 合하고 道에 通한다 하면 어느 것이 天語 아님이 있겠느냐. (주: 내 항상 말할 때에 한얼말씀을 이야기 하였으나 한얼님말씀이 어찌 다로 있으리오. 사람의 말이 곧 한얼님 말씀이며 새소리도 역시 한얼님의 소리이니라. 그러면 한얼님 말씀과 사람의 말이 어디서 분별되느냐 하면 한얼님말씀은 대개 강화로 나오는 말씀을 이름인데 강화는 사람의 사욕과 감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공리와 천심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1. 내 恒常 말할 때에 物物天이요 事事天이라 하였나니, 萬若 이 理致를 是認한다면 物物이 다 以天食天아님이 없을지니, 以天食天은 어찌 생각하면 理에 相合치 않음 과 같으나, 그러나 이것은 人心의 偏見으로 보는 말이요, 萬一 한울 全體로 본다하면 한울이 한울 全體을 키우기 爲하여 同質이 된 자는 相互扶助로써 서로 氣化를 이루게 하고, 異質이 된 者는 以天食天으로써 서로 氣化를 通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울은 一面에서 同質的氣化로 種屬을 養케하고 一面에서 異質的氣化로써 種屬과 種屬의 連帶的 成長發展을 圖謀하는 것이니, 總히 말하면 以天食天은 곧 한울의 氣化作用 으로 볼 수 있는데, 大神師께서 侍字를 解義할 때에 內有神靈이라 함은 한울을 이름이요, 外有氣化라 함은 以天食天을 말한 것이니 至妙한 天地의 妙法이 도무지 氣化에 있느니라. ( 주: 내 항상 말할 때 사물과 사물이 한울이요, 일과 일이 한울이라 하였나니, 만약 이 이치를 시인한다면 사물이 다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이 아님이 없을 지니, 한울이 한울을 먹음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상합치 않음과 같으나 이것은 사람 마음의 편견으로 보는 말이요, 만일 한울 전체로 본다면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하여 같은 성질이 된 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서로 기운이 화합함을 이루게 하고, 성질이 다른 자는 한울이 한울을 먹음으로써 서로 기운이 상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울은 일면에서 동질적기화로서 종속을 기르게 하고, 일면에서 이질적기화로서 종속과 종속의 연대적 성장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니,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은 곧 한울의 기화작용으로 볼 수 있는데, 대신사께서 侍자를 해설하실 때 내유신령(안에 있는 신령)이라 함은 한울을 이름이요, 외유기화라 함은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을 말한 것이니, 지극히 신묘한 천지의 묘법이 도무지 기화에 있는 것이다.) 

宇宙는 一氣의 所使며 一神의 所爲라, 眼前에 百千萬像이 비록 其形이 各殊하나 其理는 一이니라. 一은 卽 天이니 天이 物의 組織에 依하여 表顯이 各殊하도다. 同一의 雨露에 桃에는 桃實이 結하고 李에는 李實이 熟하나니 是 天이 異함이 아니요, 物의 種類 異함이로다. 人이 氣를 吸하고 物을 食함은 是天으로써 天을 養하는 所以니라. 무엇이든지 道아님이 없으며 天아님이 없는지라, 各各 順應이 有하고 調和가 有하여 宇宙의 理此에 順行하나니, 人이 此를 從하는 者는 是正이요 此를 逆하는 者 是惡이니라.(주: 우주는 한 기운의 쓰인바 이며, 일신이 계신바라, 눈앞에 삼라만상이 비록 그 모양이 각기 다르지만 그 본바탕은 하나이니라. 하나는 곧 한울이니 한울이 사물의 짜임에 의하여 표현됨이 각기 다르다.  같은 비와 서리에 복숭아에는 복숭아 열매가 열고, 오얏에는 오얏열매가 익어가나니, 이것은 한울이 달라서 그러함이 아니요, 사물의 종류가 달라서 그러함이다. 사람이 기를 마시고 사물을 먹음은 한울로서 한울을 길러내는 바이니라. 무엇이든지 도가 아님이 없으며 한울 아님이 없는지라, 각각 순응이 있고 조화가 있어 이에 우주의 이치에 순행하나니, 이에 사람이 이를 따르는 자는 올바른 자요. 이를 거역하는 자는 악한자니라.)


我의 一氣 天地宇宙의 元氣와 一脈相通이며, 我의 一心이 造化鬼神의 所使와 一家活用이니, 故로 天卽我이며 我卽天이라. 故로 氣를 暴함은 天을 暴함이요, 心을 亂함은 天을 亂케 함이니라. 吾師 天地宇宙의 絶對元氣와 絶對性靈을 體應하여 萬事萬理의 根本을 明하시니, 是乃天道며 天道는 儒佛仙의 本原이니라.(주: 나의 일氣는 천지우주의 원기와 일맥으로 상통하며, 나의 일심이 조화귀신의 쓰이는 바와 한가지로 활용되니, 그런고로 한울이 곧 나이며 내가 곧 한울이라, 그런고로 기운을 난폭하게 쓰면 한울에 난폭하게 함이요, 마음을 어지럽힘은 한울을 어지럽힘이니라. 스승께서 천지우주의 절대원기와 절대성령을 몸소 순응하여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이치의 근본을 밝히시니, 이는 한울의 도이며 한울의 도는 유불선의 본원이니라.)


個人各個가 能히 神人合一이 自我됨을 覺하면 이는 곧 侍字의 本이며, 侍의 根本을 知하면 能히 定의 根本을 知할 것이요, 終에 知의 根本을 知할 것이니, 知는 卽通이므로 萬事無爲의 中에서 化하나니, 無爲는 卽 順理順道를 이름이니라.(주:  개인 각개가 능히 신과 사람이 합하여 하나 됨이, 자기 스스로 됨을 깨달으면, 이는 곧 侍(모실시)자의 근본이며, 시의 근본을 알면 능히 마음 정함의 근본을 알 것이니, 아는 것은 곧 통함이므로, 만사를 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그렇게 되나니, 무위는 즉 순리순도를 이름이니라.)


이 글들은 최시형의 구술을 담은 내용인데, 동학의 실천 강령은 결국 '모든 것이 하나의 하느님임을 알아서 하느님으로 살아라.'는 것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달리해서 각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 생명과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