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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평생 토종과 함께한 삶 - 안완식 박사

by 성공의문 2013. 2. 13.

《10만6199km. 그가 모는 2006년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누적 주행거리다. 매년 평균 1만5000km쯤 달린 셈이다. 직장인 출퇴근용이라면 회사가 좀 멀겠다 싶은 정도다. 아니면 주말 여가활동에 꽤 투입됐던지. 그런데 차주가 정년퇴임을 한 지 10년도 넘은 70대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자동차는 한 번도 고장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퀴는 수도 없이 바꿨단다. 단순히 멀리 다닌 게 아니라 험한 곳만 골라 다닌 모양이다. 차주가 등산 마니아인가, 낚시꾼인가? 이 차는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 걸까.》


밖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가 있는데 안완식 박사의 집에는 꽃이 만발했다. 그는 실내에서만지내는 겨울의 답답함을 이 꽃들로 달랜다고 했다. 화성=김창덕 기자


차주는 한국의 대표적 토종연구가인 안완식 박사(72). 귀농을 꿈꾼다거나 토종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토종의 대부.' 이쯤 되면 벌써 견적이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 안 박사와 그의 SUV는 토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한 백발 신사가 처음 운전석에 앉았을 때 그의 SUV는 동네공원이나 마트만 오가는 '나태함'을 꿈꿨겠지. 설마 비포장도로에서 거친 일생을 보낼지 상상이나 했을까. 문제는 주인의 다음 목표다.


"내가 의식이 있는 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토종이 있을 만한 곳은 전부 가서 모든 종자를 수집하는 게 남은 꿈이죠."


불쌍한 SUV, 앞으로도 쉬기는 글렀다. 할 일이 태산같이 남았으니 말이다.


○ 평생 토종과 함께한 삶


안 박사가 '토종'과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촌진흥청은 1976년 종자저장고를 지어 당시 작물시험장, 원예시험장, 축산기술연구소, 농업과학기술연구원 등에 흩어져 있던 종자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러나 종자관리시스템은 후진성을 면치 못했고, 심지어 책임자 직제도 없이 10년이 흘러갔다.


농진청 맥류연구소에서 밀을 연구하던 안 박사가 종자 관리를 책임지게 된 때는 1985년이었다.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세계의 유명한 유전자원센터를 모두 둘러보는 것이었다. 배우고 나니 길이 보였다. 그러곤 50만 점 규모의 저장고를 경기 수원에 다시 지었다. 토종이라 할 만한 종자를 모으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전국에 배치돼 있던 농촌지도사 7000여 명을 활용해 한꺼번에 토종 종자 5000여 점을 모으기도 했다. 안 박사의 노력은 1991년 종자 관리를 위한 유전자원과 신설로 이어졌다.


1997년에는 한국토종연구회(2000년에 사단법인화)도 만들었다. 해외 장기출장 때문에 초대 회장을 타인에게 맡긴 그는 2∼5대 회장을 내리 지내면서 토종에 관한 학계와 농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헌신했다. 2002년 농진청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로도 일을 쉰 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토종 사랑은 은퇴 후 더 깊어졌다.


○ 땅에서 보존해야 진짜 토종이다


사실 안 박사 자신도 처음엔 '탁상공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종자를 발견하면 저장고에 보관만 했고, 토종이 무엇인지 토종을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에 대해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려 했다. 한국토종연구회도 대학교수나 연구원들이 주도하다 보니 어느새 농민들이 설 자리는 좁아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토종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우리 종자가 하루하루 소멸되는데 실험실에서, 책상머리에서 고민할 틈이 없었다. 2002년 퇴임 즈음에야 그걸 깨달았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할지 고민하던 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측에서 안 박사를 찾았다. '종자주권' 지키기 운동에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안 박사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종자와 관련된 일을 평생 하겠다고 마음먹은 터였고, 종자주권이나 식량주권도 누군가는 나서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들딸뻘인 사람들과 함께였지만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토종을 찾아다녔다. 토종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는 심포지엄을 진두지휘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2007년엔 새로운 영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토종 보존을 위해 뛰어다니면서 연을 맺은 사람들과 함께 '씨드림(Seed Dream)'이란 인터넷 카페를 만든 것이다. 직접 만든 카페 이름에 그는 큰 애착을 보였다. "'씨앗의 꿈'이란 뜻도 있으면서, 우리말로는 '씨를 드린다'는 의미도 되니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도 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면서 치켜세워줬죠. 하하하."


씨드림은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 회원은 현재 4800여 명. 평상시는 토종이나 전통농법 등에 관한 정보교환이 주요 활동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매년 3월의 '씨앗 나눔' 행사다. 회원들은 자기가 확보한 종자들을 직접 가져와 다른 회원들과 필요한 만큼 주고받는다. 카페 운영위원들이 직접 증식한 종자들을 회원들에게 나눠 주기도 한다. 안 박사는 늘 "토종일수록 농가에서 직접 재배해야 보존다운 보존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농가 1토종 갖기 운동'도 그런 이유에서다.


○ 겨울이 괴로운 70대 젊은이


안 박사는 매년 큰 조사를 1건씩 수행해 왔다. 큰 조사란 1박 2일 또는 2박 3일간의 조사를 10번쯤(일주일에 1번) 하는 것을 뜻한다.


"2010년에는 충북 괴산군에서 360여 점을 찾았고, 2011년과 지난해는 전남 곡성군과 경기여주군을 샅샅이 뒤져서 각각 330여 점, 160여 점을 확보했습니다. 2008년엔 제주, 강화, 울릉도 3개 섬을 다니면서 450점을 수집했고요."


걸쭉한 무용담도 곁들였다. 거의 포기하려던 '삼층거리파'(괴산군)와 '분홍감자'(강화도)를 우연히 들른 농가에서 극적으로 찾은 사연이나 차 오른쪽 뒷바퀴가 낭떠러지에 빠져 간담이 서늘해졌던 기억도 꺼냈다.


겨울이면 안 박사는 몸이 근질근질해 미칠 지경이다. 현장을 나가기도 힘들지만, 나간다 한들 종자를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종자 조사엔 9∼11월이 가장 좋은데, 그때까지 기다리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얼음이 녹으면 어디든 움직여볼 작정이다. 조바심 탓인지 겨울엔 시간이 더 더디게 흐른다.


요즘 같은 때 그의 적적함을 유일하게 달래주는 건 매화와 동백이다.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그는 매화 10여 종과 동백 70여 종을 키우고 있다. 하얀색, 분홍색, 붉은색 꽃들이 가득한 이곳은 '한겨울의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다. 특히 그의 매화 사랑은 남다르다. 전국을 누비며 350종이나 되는 매화를 수집한 다음 250종을 골라 '우리 매화의 모든 것'(눌와·2011년)이란 책을 펴냈을 정도니까.


인터뷰 말미 그의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씨드림 카페 운영자가 수원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씨드림은 지금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기 위한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좀 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활동을 하려면 법인화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사람, 도무지 언제까지 일을 벌여나갈지 종잡을 수가 없다.

화성=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