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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윤회와 전생에 대한 단상

by 성공의문 2012. 2. 1.
실제 우주의 창조과정과 별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빅뱅보다 더 우수한 이론도 있다. 기존의 빅뱅은 행성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수소가스의 잔재 에너지를 찾지 못함으로서 열역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고, 또 "빅뱅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는 곤란한 질문에 전혀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순환우주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양자역학적 고찰과 같이 시간이나 공간 또는 물질이란 오직 마음에 의해 의식될 수 있는 성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고관을 대표하는 명석한 과학자 이차크 벤토프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가운데에 좁다랗고 긴 구멍을 가진 길쭉한 도넛과 같은 원환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블랙홀과 화이트홀로 표현되는 초점, 곧 의식 혹은 창조자가 있다. 창조자는 우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잠재된 형태로 담고 있는 씨앗과도 같다. 마치 도토리 속에 참나무의 형체가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화이트홀에서는 분사광이 뿜어나와 창조자를 둘러싸고 흐르기 시작하여 원환체의 표피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우주이다.

물질은 화이트홀로부터 분사되어 나오면서 생성된다. 처음에 그것은 분사광의 형태이다. 그것이 냉각되면 안정된 입자-양자, 중성자, 전자 등-가 형성된다. 그 다음에는 헬륨과 수소가스가 생긴다. 이것이 농축되어 별을 이루고 그 중심부에서 더 무거운 원소들이 생성된다. 별들이 모여 성단이나 은하계를 이루고 별들은 죽으면서 폭발하여 우주먼지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농축되어 새로운 별과 혹성을 이룬다. 화이트홀로부터 분사된 물질의 흐름은 점차 속도가 느려지면서 그것이 나왔던 씨앗, 곧 중심부의 근원이 발하는 중력에 의해 되끌려가 마침내 블랙홀에 흡수된다. 이것이 물질이 생멸하는 연속적 순환의 사이클이다.
 
이것을 한 순간에 폭발하여 모든 방향으로 고르게 퍼지는 빅뱅(대폭발) 우주와 대비하여 '부드럽고 지속적으로 폭발하는 우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폭발하는 우주에서는 원환체 중심부에 있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은 물질이 생멸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시간이 생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시간은 물질과 움직임이 존재하는 곳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시간은 물질이 자신이 생겨났던 화이틀홀로부터 멀어진 거리를 재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이 거리는 물질과 그것이 지닌 의식이 그 근원으로 회귀하는 순환 과정상의 진화적 단계를 말해준다.
 
우주의 법칙이 이처럼 다시 창조되고 파괴되는 과정을 무수히 되풀이하듯이, 우리가 직선적으로 이해하는 문명사 또한 이번의 문명이 처음의 문명이 아니란 증거가 많이 있다. 소위 초고대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인류의 탐욕에 의해 머나먼 옛날 빙하 아래로 사라졌던 선사 이전의 고도로 발달된 고대 문명들을 말하는 것이다(아틸란티스, 무, 레무리아 등). 또한 인간의 삶 또한 이번의 삶이 단 한번의 삶이라고 단언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항상 생명은 더 큰 전체를 향해 게걸음처럼 천천히 나아가며 마침내 종점에 이르르면 다시 순환할 뿐이다. 새로운 별이 창조하는 곳에는 곧 오래된 별의 소멸이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주는 시작과 끝도 없이 순환하며 움직임으로서 새 생명을 창조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회는 한낱 사이비 과학이 아니라, 채 300년의 역사도 안된 근대과학보다 더 과학적 엄밀성이 있는 몇 천년간의 인류 문명의 지혜인 것이다. 고대의 상징체계로 보았을 때도 전생 윤회라 하는 것은 순환하는 우주와 자연법칙인 것이다. 


인간의 윤회의 방식은 직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직선적으로 인간이 969살을 살거나 일만년의 세월을 산다면, 그 동안 쌓인 과로와 괴로움으로 평생 얼룩진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단 한번뿐이 아니고, 시절 인연에 따라 여러번 환생하기 때문에, 괴로운 기억을 지운 채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절대자의 자비로 본다. 인간에 대한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인간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란 말인가!
 
또한 인간은 단지 무수하게 윤회를 하며 의식이 발전해가는 것 뿐만 아니라, 뇌가 명상을 통해 우주의식의 공간에 접속하게 되면 우주심(宇宙心)을 알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우주심이란 곧 우주에 저장되어있는 무수한 파동들의 기록으로서, 이 세상에 사라지는 기억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예외없이 말이다. 뇌파가 시냅스를 통해 진동하면 그것이 아스트랄체와 멘탈체에 기록을 남기게된다. 죽고나서도 그 기록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주에 비밀이란 없기 때문이다. 고귀한 생각들, 그리고 추잡한 생각들 모두가 기록된다.

물리학자 이차크 벤토프의 우주모델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진동하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진동하는 원자들은 대부분 허공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사고 작용은 우리 뇌를 채우고 있는 우주의 허공을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 작용이란 허공, 곧 순수의식의 진동에 변형을 가하는 작용이다. 하지만 허공은 당신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며, 만인과 만물은 이 진동하는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의 사고 작용은 전파되어 모든 창조물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비밀이란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불평하기에는 때가 이미 늦어버렸다.
 
일본의 신비가 다카하시 신지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이 섞여 있는 세계인 것으로서 각자의 과거세, 전세, 저 세상에서의 생활의 기록과, 현상계, 즉 후천적 경험의 전부가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조사할 경우는, 우뇌의 상념대란 곳을 보면 일목요연해진다. 그 사람의 모든 경험, 생각한 것 까지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육체를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단계 빛의 천사·빛의 천사는, 각자의 상념대의 기록을 한 순간 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즉, 인간은 24시간 동안, 경험과, 기록의 연속인 것이다.  연중무휴이다.  에너지의 휴식은 있을 수 없다.  설사 죽을지라도 영혼은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행선지, 생각, 행동을 아는 것이다. 상념대란, 과거세의 기록과 현세의 경험의 기록집적소이기 때문에, 각자의 현상계에서의 운명은, 여기에 잡혀있게 된다. 그것은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명예적으로, 지위적으로, 다양한 면에 걸쳐서 결정되고 있다. 하지만 영적 각성을 하면 운명이 하한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고, 상한에까지, 자신의 운명을 개간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럼으로서 인간의 생이란 실로 다양한 기억과 기록들의 집합이니,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 말라.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더 많이 실험할수록 더 나아진다."고 말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영생에 가깝게 윤회를 하면서, 무언가를 배우지도 않고 평생 그 상태 그대로 안정적으로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나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영원불멸이라는 것을 알면 더 자신감을 갖고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공허해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각자 억겁의 시간을 살며 탐구해 가야할 주제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F. 니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사랑이 깨지는 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짧은 인간의 인생에서 영원한 사랑이 있을 리가 없다. 젊은 연인들의 불타오르는 사랑은 시간이 지남으로서, 특히 결혼을 함으로서, 서서히 식게된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사랑이 아닌 '희망'인 이유는, 두 타자의 사랑이란 이기적인 이유로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영성가 다스칼로스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현상계에서 서로 사랑을 맹약하고 동반자살한 연인이 죽고 나서 영계에서 어처구니없이 작은 일로 서로 갈라진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두 연인의 사랑, 또는 자기의 미(美)에 빠진 나르시스와 달리,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아가페적 사랑일 것이다. 그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평범한 인간들은 타인을 자기와 동일한 인간으로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별에서부터 시작해 인종, 지성, 학력, 취미, 기호 등이 모두 다르기에 인간은 타자를 동일한 주체로서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윤회를 거듭하면서 만나는 영혼의 짝들은 '운명 속에 예지된 어떤 강렬한 짜릿'함과 같이 텔레파시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악연이라고 한다해도, 카르마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만나는 연인들은, 깨질 운명임을 예감하고서도 만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소울메이트라고 신비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가인 루스 몽고메리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책을 썼던 것이고, 기시감, 동성애, 자신의 천성 등도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우연의 일치를 가장한 필연들이라고 할까나?
 
그렇다고 늘 찾아다녀야 하는 나의 ‘반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완벽한 존재다. 다만 절대자와 합일하는 과정에서, 사랑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소울메이트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살아가면서 아주 좋은 느낌으로 만나는 사람, 우연히 마주쳤지만 그가 전해준 평온의 눈길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생에서부터 맺어진 인연 또는 그보다 더 먼 태고적 같은 곳에서 같은 *성원소에서 맺어진 인연일 것이다.
(*성원소: 다스칼로스에 따르면, 절대자를 구성하는 부분. 각각의 성원소는 수많은 빛줄기를 방사하는데 이 빛줄기는 각기 다른 원형들을 통과하여 형체를 갖게 되고 현상적 존재가 된다. 프뉴마(Phenuma)가 인간 이데아를 통과하면 하나의 영혼이 형성된다. 같은 성원소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 각별한 친근감을 갖게된다.)  
 
소울메이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심리학적으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성격이나 행동이 극히 비슷하여, 서로를 알지 못하는 다른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비슷한 인생 패턴이 나타난다. 이것을 예로 일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라고 못을 박는 경우가 있으나, 윤회론적 시각에서 생각해보면, 바로 이 일란성 쌍둥이가 전생에서부터 영혼의 성질이 비슷한 어떤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풀면, 그들이 다른 인간임에도 성격이나 행동, 지성이 매우 비슷한 것을 설명해낼 수 있는 동시에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형제들 간에 왜 성격적 차이가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형제들은 다른 윤회의 과정을 걸어온 독립된 인격체이기에, 성격과 지성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과거세에서부터 맺어진 인연 뿐만 아니라 현생에서 새로운 인연, 새로운 생각의 염체,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과거의 카르마 뿐만 아니라, 현재 만들어내고 있는 모든 의식의 총합이니까.
 
분명한 것은, 의식의 신비를 지향하는 인간의 탐구는 결국 인간이 살아있는 한,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의 원초적인 재미와 신비를 부정하고, 해탈만을 지향하는 신비주의적 태도는 예술가적 마음을 품은 자에게 있어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윤회라는 신비한 사실에 기반한 장르문학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괴담과 전설이 항상 명작을 이루는 하나의 신화적 요소가 되는 이유이다. 현실은 항상 비현실적 이상과 함께해야 가장 완벽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현실적 사랑에 천착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운명적 사랑을 믿는 것이며 어떤 이들은 생사의 끈을 초월하는 해탈을 갈구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천문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왔다. 저 아득한 거리에 있는 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 근원이 지구가 아닌 우주가 아닌가 생각해오며 경외감과 동경심을 품어왔다. 이는 고대 종교로 갈수록 그 연관관계가 더욱 명확해진다. <시대정신>에서도 잘 폭로된 바 있듯이, 고대종교였던 유대교의 비밀은 천문학에서부터 나왔다.

가령 예수의 출생신화에 등장하는 동박박사 세 사람부터 그러하다. '동쪽의 별'이라 함은 밤하늘에 가장 밝은 '시리우스'별인데, 이 별은 12월 24일에 오리온좌의 벨트 3성(星)과 일직선을 이룬다. 이 3성이 과거에는 3명의 왕, 즉 '동방박사 세사람'으로 불렸고, 12월 25일(동지)에 이 3성과 시리우스별(천랑성)은 모두 일출을 향해 늘어서는데, 바로 이것을 표현하여 동방박사 세사람이 신의 아들인 '태양'의 출생을 찾아 '동쪽의 밝은 별'을 쫒아갔다고 하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또한 처녀좌와 관계가 있고, 예수의 3일 부활설은 태양이 동지 때 남하를 멈추고 3일 후 부활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본땄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대학생들은 망원경으로 천체관측을 하며 이러한 고대의 유산을 천문학이라는 '정립된 과학'의 이름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고대에 있던 신비주의적 감정은 상당 부분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고대의 영적 빈자리를 채우는 서구의 시도가 바로 인간의 운명을 천문학적 별자리와 연관해서 보는 서양의 점성학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점성학은 내가 보기에는 [영지주의-시온수도회-장미십자단-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오컬트(채널링)]로 이어지는 서구 신비주의 전통에서 끊이지 않고 그 맥을 이어왔다. 서구의 점성학은 타로카드의 형태로 발전되기도 했다.
 
서구의 대표적 신비주의자인 에드가 케이시와 루돌프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은 죽고 나면 태양계의 행성들로 들어가 정화의식을 거친다. 이곳에 있는 각각의 행성들은 지구와 같이 어떤 특정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죽은 자들이 이곳으로 오면, 자신들의 생전에 했던 마음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이곳에서 받게되어, 영혼의 구성비율로서 갖게된다. 더 지성적이고, 더 용감하게 산 자들은 바로 이러한 때에 더 큰 기운을 받게된다.

가령 수성과 금성은 도덕을 주관하는 별이므로, 평소 도덕적으로 산 사람은 여기서 더 큰 기운을 얻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때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하자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사후에 수성과 금성의 힘을 충분히 받았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사후에 자신만의 껍질 속에 갇혀, 은둔자처럼 살게 된다고도 한다. 에드가 케이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 수성은 마음에 속하고, 화성은 광기에 속한다. 
지구는 육신을 뜻하고 금성은 사랑을 의미한다. 
목성은 힘이며, 토성은 지구상의 모든 재난이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말하자면, 모든 불완전한 물질이 토성으로 내팽개쳐지고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천왕성은 심령에 속하며, 해왕성은 신비에 속한다. 
셉띠무스(Septimus: 명왕성)는 의식에 속하며, 대각성(大角星: 목동자리의 가장 큰 별)은 발전에 속한다. ]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하늘엔 천상의 별, 내 마음엔 도덕률." 이라고 얘기했던 것은 놀라운 직관에서 나온 진리라고 슈타이너는 이야기한다. 우리 영혼의 아스트랄체는 말 그대로 별들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장대한 경외감, 경이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비록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상에서의 새 삶을 시작하기 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별들의 세계와, 그 별들로부터 가장 고귀한 힘들을 받았던 우리 영혼의 고향에 대한 느낌이 우리 안에 일깨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률은 별들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을 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갖고 있는 영혼의 가장 크고 좋은 힘들은 바로 그렇게 별들로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 실상 보는 것은 죽음과 삶 사이에 살게 되는 영적 세계로부터 주어진 도덕률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신비에 관해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둔한 무감동과 무감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별들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을 것이라한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자질의 근원에 대해 진실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경이감을 가지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것이며 별은 곧 자신의 영원한 고향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재탄생 사이에 우리는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별들의 세계에서 산다고 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육체에서는 고기껍질에 불과할지 모르나, 죽고 나서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를 내면에 품고 있는' 위대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주를 윤회함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케이시와 슈타이너의 주장이었다.
 
혹자는 동양의 음양오행론이 서양으로 넘어오면서 서구 점성학의 발전에 보탬을 주었다고도 한다. 동양의 경우는 서구의 점성학과 달리, 음양오행이라는 일관된 체계를 이용한다. 권태훈 선사같은 경우는 지금부터 천 년 전 중국의 송(宋)나라 말엽 오성이 취규(聚奎, 규성 분야에 모임, 규성은 중국을 의미)하여 몽고족 가운데 징기스칸이 등장하고 세계를 정복, 몽고족의 위세를 떨칠 것을 예고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5성(五星, 金, 木, 水, 火, 土星)이 취두(聚斗), 두성(斗星)분야로 모이고, 두성은 28수 분야중 하나로서 지구상 위치로 우리 나라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시대가 2014년부터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육체와 정신을 묶는 의학론을 발전시킨 현성 김춘식 선생 같은 경우도, 천문학과 인간 육체에 깃든 오행의 에너지를 연관삼아 해석해왔다. 가령 2012년은 목태과(木太過)의 해로서 목기(木氣)가 불급하여, 간담이 허약해지고 따라서 신맛을 지속적으로 섭취해줘야한다.
 
이를 보면, 인간은 케이시와 슈타이너의 태양계에서 각각의 성격을 상징하는 우주법칙인 오행(五行)의 기운을 받고(오행과 비슷한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제 4원소론이 있다), 현생을 살아가면서도 우주의 기운에 따른 오행, 섭취하는 음식의 오행의 영향을 받아 총체적으로 정신을 형성함이 틀림없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가 많기에,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하는 미개척된 한정된 현대과학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천문학적 근원과 신비의 연장선상에서, 밤하늘을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플레이아데스(Pleiades) 성단은 반드시 보아야 할 최고의 성단이다. 날이 좋으면 푸른 별 6개를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신화에 나오는 공주 7인의 이름도 여기에서부터 기인된 것은 아닌가 싶다. UFO 이야기로 잘 알려진 빌리 마이어는 이곳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물론 그가 UFO 사진을 조작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자백한 적은 있지만).

시리우스 별(Sirius) 또한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이자, 태양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별로서 알려져있다. 시리우스는 또한 아프리카 도곤 부족이 창조신화로 믿는 놈모가 온 곳으로서, 인류에게 지식을 전수해준 출처라고 믿어지는 곳이다. 이집트 대피라미드의 경우, 시리우스는 여왕의 방과 정렬하고 오리온좌의 경우 왕의 방과 일렬로 정렬하게끔 배치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국제유태자본의 영적 그룹인 프리메이슨과 시리우스 별의 관계는 반드시 필독할 만하다.
 

<가이아 프로젝트>로 알려진 고(古) 장휘용 교수의 외계론에 따르면, 플레이아데스 행성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느끼는 감성이 발달하였고, 시리우스 별에서 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무적인 일을 하는 능력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자로 말하자면 동양문화권이자 여성을 상징하고, 후자로 말하자면 서양문화권이자 남성을 상징한다. 인간 영혼, 나아가 우주의 원소를 천문학적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현 인류의 기원 또한 우주의 행성들에서 윤회했다는 이론은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체과학적으로도 프레드 호일의 '범종론'을 비롯하여, 제체리아 시친의 수메르 신화(아눈나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이상의 이야기들에서 분명한 것은, 동서양 문화 모두에서 별자리 이야기는 곧 인간이 온 근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러므로 윤회를 상징하는 좋은 메타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별에서 다른 별로 끊임없이 영혼이 이동하는 그 장대한 윤회의 과정은 실제 케이시와 슈타이너, 그리고 장휘용 교수가 주장한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메타포를 잘 응용한 것이, 일본에서 전생붐을 일으켰던 <나의 지구를 지켜줘(ぼくの地球を守って , 1994)>라는 작품이다. 전생과 환생으로 이어지는 러브스토리야 뻔한 것 아닌가 싶지만 이 작품은 스케일이 다르다. 다른 행성의 사람들이 지구에서 환생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방해꾼이라는 뻔한 도식의 환생이 아닌 다른 행성의 지구연구소 직원 6명이 연구소안의 그 복잡했던 인간관계를 그대로 가진 체 환생한 이야기 이고, 전생의 기억이 단편 단편 밝혀지면서 서로의 인간관계가 점점 명확해진다.

실제로 <유명인들의 전생>의 저자인 데이비드 뱅스는 한국 무인시대의 인물들을 거론하며, 그들이 집단으로서 환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고려시대 때의 무인들이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으로 다시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군인들 사이에서 크다고 말을 하며, 집단 카르마의 경우 비행기의 승객들이 전원 다 추락하는 경우가 있다 한다.


현대과학을 논함에 있어 진화론은 필수불가결한 생물학적 전제이며, 윤회론 또한 불교와 힌두교, 나아가 동양철학의 전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나는 문화 키워드의 마지막 주제로서 이것을 연관시켜 보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무신론과 유신론의 양축을 대표하는 두 사상이 되려 흡사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공통점을 논하기 전에, 차이점부터 이야기해야 논의가 쉬울 것으로 보인다. 잠깐 현대과학의 중심 사상을 비판하자면,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약육강식의 자연 속에서 각각의 생물들은 적응에 적합한 환경을 위해 진화를 해나가야 한다. 얼핏 듣기에 이 이야기는 굉장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대기업에 잘 보이려는 하청기업 직원들의 사투를 생각해보면 한결 쉬울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사실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을 정립하고, 그것이 근대에 와서 유물론으로 발전된 흐름처럼 유신론의 양축에 선 오래된 고대의 믿음이기도 하였다. 뉴턴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이 그러했고, 생명의 불완벽성을 보여준 다윈의 진화론이 그러했으며, 무의식을 쓰레기로 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그러했고, 이후 인간은 '학습받은 대로만 훈련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반 파블로프와 F. 스키너의 이론들이 그러하였다. 특히 전두엽 절제수술을 시행했던 서구에서 '뇌가 없으면 의식도 없다'는 뇌과학 이론들이 그러한 유물론적 흐름에 윤활제를 넣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사하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 그리고 뇌사(腦死) 상태에도 기억이 유지되며,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는 뉴에이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였고, 보다 세계의 현상들을 단일적, 불교적 개념으로 설명해주는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이론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또 법학자 필립 존슨이 쓴 <심판대에 선 다윈>이 보수학계에 열풍을 일으킨 바와 같이, 진화론의 존립기반을 무너뜨리는 이론들이 많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실 진화론은 자연계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惡)을 보기 좋게 설명하려고 한 허구적 시도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세가지로 압축해서 간략히 설명해보도록 한다.
 
 
(1) 시기적 문제
생물학자들은 동물과 식물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분류한다. 동물은 헤모글로빈을 가지고 있고 식물은 엽록소를 가지고 있다. 헤모글로빈은 피이며 철의 원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놀라운 녹색 요소인 엽록소는 마그네슘의 원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일부 절지동물과 연체동물, 특히 달팽이는 철과 마그네슘을 모두 갖고 있지 않으나, 그 대신 주석의 원자를 갖고 있다. 만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이행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아주 기초적인 종류의 생명체들이 있다.
 
또 한명의 신비주의적 학자인 뒤 노위는 편조류가 그들 속에 포함된다고 서술했다. 편조류는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현미경으로 고여 있는 물을 보면 떼 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활기차다. 헤엄치고 뛰어다니며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들은 지극히 유연한 꼬리를 갖고 있으며 호흡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세포로 이루어진 몸이 부풀기도 하고 수축하기도 한다. 눈 역할을 하는 하나의 점은 빛에 민감하며, 그래서 아주 초보적인 단계의 시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들은 마그네슘 집단에 속한다. 그들은 진화의 척도에서 어디에 해당하는가? 그들을 동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식물이라고 해야 하는가? 뒤 노위는 이에 대해 생물학자들이 대답을 못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쨎거나 이런 저런 방식으로 최초의 유기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학자들은 정확한 순서를 알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아직도 엽록소가 없고, 대신에 남조소라는 색소가 있다. 청색 조류는 또한 무성이다. 그 다음으로 온 녹색 조류는 하나의 핵이 있으며, 번식할 때 유성 생식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능력이 있다. 녹색 조류가 성과 핵이 없는 청색 조류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설사 녹색 조류가 청색 조류에서 왔다고 해도 이런 결정적인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미경을 갖고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진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 근접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들은 '어떻게' 또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말을 더듬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말처럼 유기체가 지극히 작은 박테리아에서 세포를 가진 생명체인 녹색 조류로 이행 발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친 비약이다.
 
게다가 캄브라아기에 엄청나게 다양한 유기적 다세포를 지닌 생물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는 사실은 진화론의 기계적 작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큰 문제가 있어 보인다.
 
 
(2) 구조적 문제
기계적 작용을 다루는 진화론의 문제점은 구조적인 문제에서도 명확히 들어나 보인다.
세 가지 예만 간략히 들자면,
첫번째 예로 인간은 수 천년 동안 크기와 상관없이 손목관절의 비율이 항상 일정해왔고 어떤 일말의 진화적 흔적도 찾을 수 없는데, 과연 수백만 년을 대입한다고 해서 이러한 형태가 '돌연변이'에 의해 변형될 수 있는 것일까?
두 번째 예로, 꽃 사마귀같은 종은 아이큐가 0에 가깝도록 환경인지 능력이 취약한 곤충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떻게 그는 자신의 색깔과 주변 환경을 동화시켜서 스스로를 숨길 궁리를 했을까?
세 번째 예로, 수많은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공작새는 적을 위협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복잡한 꼬리를 왜 가지고 있을까? 예컨대 공작새 수컷의 아름다운 꼬리는 천적들로부터 공격당할 가능성을 훨씬 높인다.
 
 
(3) 화석의 문제
화석문제에 관해서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왔는데, 사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도 이것은 증거가 되어주지 않고 반박할 근거가 되어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과거 종과 현재 종의 일치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선캄브리아기의 시조새와 현재의 시조새는 동종임이 판별 됐는데 이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종 자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생물과 생물 간의 중간단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 무수하게 많은 생물들 중 진화론자들이 믿는 것처럼 중간단계의 화석이 발견된 예는 단 하나도 없다. 예컨대 박쥐는 두더지에서부터 왔다고 하고, 조류는 파충류에서부터 진화했다고 하는데 그 중간단계 화석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과학자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정립한 화석적 연대가 오류로 들어날 때마다 비과학적으로 연대를 지속적으로 수정해왔다. 루이스 리키 박사의 경우가 아주 좋은 예이다. 처음에 리키 박사는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를 발견하고 60만년 전 이상 된 것으로 계산했는데, 두개골은 450여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있어 잘 맞추어야했다. 그런데 후에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지질학자들이 연대를 다시 측정하자, 아르곤과 포타슘을 이용하는 방사화학 연대측정법으로 진잔트로푸스가 거의 175만 년 전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잔트로푸스의 두개골과 정강이뼈 하나만으로 죽음의 원인을 폐렴이라고 진단했다.

탄소연대측정법은 알려진데로 대단히 불완전하므로, 현대에 와서는 진잔트로푸스의 연대는 260만년~50만년 전의 것으로 확대되었다. 진화론의 화석적 증거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다. 과학자들은 겨우 한 줌의 치아와 두개골 몇 개, 그리고 십여 개의 턱뼈와 대퇴골을 근거로 바이덴라이히는 기간토피테쿠스(Gigantopithecus)가 50만년 전에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이 유인원 종 중 하나의 계통에서 출현했다고 하는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네안데르탈인의 뇌 크기는 상당히 다르며, 같은 연대의 자바원인과 북경원인의 몸 크기가 상당히 다른 바, 이것은 같은 계통의 인간이라기보다는 각각의 다른 원숭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게 더 합리적이란 것이다. 실제로, 7만 5천 년 전 지금의 이라크지역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발견된 바 있으며(이에 따라 과학자들은 자꾸 연대수정을 해나가며, 자신들의 과오를 지우려했다),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경우도 상당 수 있다.
 
네 번째로, 진화 또는 화석의 흔적이 많이 또는 거의 전혀 발견되지 않은 지역에서도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물품과 사해가 발견되는 것은 인간이 각 지역마다 독립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는 진화론적 연대가 불필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반박할만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경이나 진화론 모두 허구에 근거하는 것이 더 분명해보인다. 단지 최첨 과학의 이름으로 진화론을 지지한다고 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더욱 왜곡될 뿐이다. 그러면 이말인즉 윤회론과 진화론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일까? 아니다. 내가 처음에 입증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둘의 상관관계였다.

앞서 난 진화론이 허구라고 이야기했지만, 진화론 또한 얼마든지 종교를 지지하는 해석으로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과학의 이론은 유신론적으로도 자연주의적으로도 다 읽힐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과학 이론들은 두 가지 읽기를 위한 근거를 제공해왔다. 때로는 똑같은 개념이 성스러운 혹은 세속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조작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장 종교를 많이 침식했다고 간주되는 과학 이론들, 가령 찰스 다윈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리차드 도킨스에게 있어 다윈은 역사 상 처음으로 지적으로 만족할만한 무신론을 개진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다윈의 이론에 처음 동조했던 사람들은 찰스 킹슬리나 프레데릭 템플같은 기독교 목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킹슬리는 다윈의 이론이 단순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훨씬 더 존경할 만한, “자기 자신을 낳는” 존재를 만드신 하나님을 제안한다고 생각했다. 후일 영국 교회의 수장인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템플 역시 자연 법칙의 확대 적용을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자연 법칙이 도덕적 법칙을 유비적으로 지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말년에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지만, 다윈은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자주 진화론적 이론들을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 각인한 법칙들의 결과로 묘사하였다.
 
진화론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것은 무신론과 종교와의 대립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개념 역시 윤회론에 적용된다.
 
<윤회의 비밀>의 저자이자 뛰어난 심리학자였던 지나 서머리나 같은 경우 역시 진화론이 윤회의 개념에 가깝다는 점을 말하며, 지성적인 진보주의자들이 이 개념을 윤회 사상에 적용못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사실 다윈적 진화론은 힌두교의 믿음(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고, 인간에서 동물로 퇴보하고 하는 식의 윤회)와 티베트불교의 믿음과 동일한 가치체계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다윈의 진화론이 물질적 영역에서의 진화라면, 후자들의 경우는 보다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진화인 것이다.
 
사실 무신론의 영역에 있지만, 자연스럽게 윤회를 생각하게하는 서구의 무신론적 사상들은 상당히 많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가령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말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는 비록 허구로 들어났지만, 모든 생명체가 태아기에 같은 모양에서부터 진화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세상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파타고라스의 주장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참고로 파타고라스는 윤회를 믿기도 하였다), 모든 사물은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떠오르게도 하며,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 미래세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으로 "모든 사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사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헤켈의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는 니체의 영원회귀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재귀순환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다만 상기한 이들 철학의 공통점은 그들의 사상이 대체로 무신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유신론으로까지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저자인 한동석 선생이라면 이렇게 지적했을 것이다. 그들의 시도는 훌륭했지만,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동양과학이라면 생명이 순환할 뿐만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다는 작용을 설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이 윤회론을 지지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고 보면, 그것은 유물론을 배제한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인간의식의 발달국면의 단계를 초개아심리학에서는 흔히 3단계로 분류하곤 한다. 대중들은 감정적이고 집단주의적인 가치를 강변하는 반면, 지식인들은 논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치를 강변하는가 하면, 마지막으로 신비주의자들은 통합적이고 개인과 집단의 가치 모두를 강변한다. 이를 음-양-중 이론으로 적용해보면, 지식의 단계에서는 '평균이하의 지능 - 대중 -지식인'의 3단계가 성립되며, 영성의 단계에서는 '평균이하의 영성 - 대중 - 성인'의 3단계가 성립되어 의식수준(통합 수준)과 인식수준(지적 수준)의 차이가 나뉘어지나, 중요한 것은 대중들은 언제나 이러한 차트의 평균값을 차지하며, 지식인과 성인들은 더 상위의 발달국면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3단계론에서부터, 심리학자 맨슬로우, 피아제, 콜버그, 에릭슨, 윌버 등의 위계론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개념들이고, 저널리스트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이론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것을 직역해보면, 인간정신을 다루는 신비주의가 종교를 포함하고, 종교는 철학을 포함하며, 철학과 심리학이 더 하위차원인 생물학을 포함하는 구조로 우주가 만들어져 있으며, 그 역은 성립이 불가능하듯이, 우리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한 존재이나 수준차이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모든 생명체는 하위의 수준에서부터 모두 상위를 향해 진화한다. 진화를 위한 인간영혼의 윤회는 사실상 다윈의 진화론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는 점 또한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메바나 원숭이에서부터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의 진화를 계속 밟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의식진화의 수준에 따라 이 세계에는 원자, 분자, 세포, 식물, 파충류, 원시포유류, 포유류, 인간, 그리고 신의 순서대로 그 계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주의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윤회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이 죽을 때 어떤 형태의 물질적, 정신적 미련과 애증을 갖게되면 우리의 에너지체(에테르체)가 다음 생에 다시 육체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영화 <혹성탈출>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어느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처럼 원숭이가 인간사회의 일부가 되어, 나아가 지배하는 날이 올 수 있는 것일까? 또는 이러한 인간의식의 '진화의 계보'에서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 혹은 광물로 환생할 수 없는 것일까? 나의 생각은 의식의 에너지장이 다르므로, 다른 종(동물, 식물, 광물)으로 환생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가령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뚜렷한 의식수준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성, 감성 모두가 동물들보다 발달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한낱 원숭이에 불과했던 인간이 왜 모든 동물들보다 '뚜렷하게' 발달된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된 것일까? 진화론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언어이다. 가령 인간과 진화계보상 가장 비슷한 종 중 하나라는 침팬치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갖 효율적인 수단을 통해 언어를 가르쳐도, 기껏 침팬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어를 흉내내는 것 뿐이다. 인간은 전두엽에 다른 어떤 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한 언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침팬치나 오랑우탄, 원숭이들과는 다르게 좁은 기도를 갖고 있다. 그 좁은 기도(구강 구조)를 통해, 인간의 언어는 그러한 그 어떤 동물 동물의 소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따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자기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이성적 능력과 '느끼는' 감수성인 감성적 능력이 고도로 발달해야 가능한 일인데, 몇몇 동물들의 자살 예가 회자되긴 했으나, 이 정도의 인지능력은 그 어떤 동물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은 압도적으로 이성과 감성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발달하여,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하나로서 인식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비가 다스칼로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동물들과 다르게 로고스(Logos, 道의 내재)가 있다. 로고스는 곧 자아의식과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절대자의 부분으로 절대자의 또다른 부분인 성령은 창조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자의 역동적 힘을 나타낸다. 영원한 존재인 인간은 로고스적이며 성령적이기 때문에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동물은 단지 성령적일 뿐이어서 자아의식이 없다. 인간이 영적으로 높이 진화할수록 자신의 로고스적인 부분(자아의식)도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혹성탈출>에 나온 것과 같이 원숭이들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개소리를 담고 있는 다윈의 진화이론이 앞으로 학계에서 퇴출당할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윤회적 개념의 진화 '의식의 진화'이론으로 대체되어야할 것이다.

실제로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윤회는 더 큰 앎을 알기위해 필요한 진화론적 과정인 것이며, 현대사회는 그와 역(逆)으로 가며 파괴일변으로 치닫고 있다.

의식의 진보가 어떻게 거꾸로 역행하고 있는지 좀 더 심도있게 보기 위해 근대역사를 잠깐 살펴본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잉카와 아즈텍 문명을 잔인하게 멸망시킨 대탐험시대부터 시작하여(미개했던 그들은 심지어 어떻게 인디언들을 잘 죽이는지 내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일단 신대륙에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자 유럽 사회는 이러한 광물을 통해서 지난 700년간 상실했던 기축 통화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상업 경제가 발전하게 되니 이가 바로 '상업혁명'이다. 14-16세기 말까지 진행되었던, 유럽의 르네상스 운동은 사회의 전반적인 것을 변화시키고, 유럽 제국간의 잦은 전쟁들은 유럽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일조를 하게 되어, 유럽과 동양과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을 지나고 나서는 완전히 역전된다. 유럽에서 제작된 화포와 총포가 동양의 그것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다시금 유럽문명의 기술적 발전을 가져오는 한편, 인간 사회의 황폐화를 촉진시켰다. 제 1차 산업혁명의 경우,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모직물 공업을 하였고 광대한 식민지를 상대로 해외무역이 활발하여 많은 자본이 충족되어 온 상태였으며, 명예 혁명 이후 정치와 경제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18세기에 와서 국내외에서 면직물의 수요가 급증하자, 산업혁명은 면직물에서부터 시작하여, 방적기(실을 짜는 기계)와 방직기(직물을 짜는 기계)의 발명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되었다. 와트가 발명한 증기 기관은(1765) 은 적은 연료를 가지고 강한 힘을 내었으며, 공장제 기계 공업의 발달으로 증기 기관이 공장에 보급되어 공장제 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면직물 공업ㆍ제철 공업ㆍ기계 공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19세기 초 미국의 풀턴이 증기선을 만들고, 영국의 스티븐슨이 1814년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여 철도 시대의 막을 열자, 교통수단에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통신 기관의 발명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났는데, 유선 전신(1843, 미국의 모스), 전화(1876, 미국의 벨), 무선 전신(1896, 이탈리아의 마르코니)이 발명되었다.
 
결국 산업혁명 이후 원료와 제품의 빠른 수송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국제화 시대, 자본주의 시대가 개막되어 세계의 거리를 단축시키게 되었다. 기술적으로는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으로 탈바꿈했고, 경제 구조도 1차 산업보다 2-3차 산업의 비중이 높아져 농업 사회는 산업 사회로 변하여 본격적으로 '매연 덩어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으로 확산되면서 성장을 계속하던 유럽경제는 1873년부터 약 20년간 걸친 불황기를 맞이하였는데, 19세기말에 유럽은 이 불황을 벗어나면서 산업상의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맞이하고 과학적 발명과 기술혁신이 진행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제 2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전력과 석유가 새로운 동력원으로 등장하고, 강철, 알미늄 등의 비금속, 전기, 화학공업 등 중공업부문이 발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분야의 개척은 산업화 발전에 가속화를 가져왔다.
 
영국은 사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기 보다는, '매연이 꺼지지 않는 나라'였다고 부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에 들어서자, 1700년대에는 인도와 중국은 세계 GDP의 47%를 차지했고 유럽의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1870년대가 되자 , 서구에 의한 아편무역으로 황폐화된 인도와 중국의 비율은 세계  GDP의 29%로 낙하하고 서유럽은 42%로 점프했다. 동인도회사는 이 역전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유럽 제국은 16세기의 대탐험 시대와 상업 혁명, 그리고 잇달은 산업 혁명으로 얻게된 부를 서구제국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악용하였다. 북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사는 인디언들의 멸망, 중국과 인도의 몰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전 세계의 패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것도 모잘라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필리핀(마르코스), 인도네시아(수하르토), 칠레(피노체트), 니카라과(소모사), 남아공(아파르타이드 백인정권) 등 숱한 국가들을 침략해왔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미국서구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들이었다. 그들의 사주, 지원을 받아 (군사)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친미 사대 매판세력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들의 진짜 인권(범죄)문제는 미국정부, 그들의 소위 '인권NGO'들, 보수적 기업언론매체들에 의해 '인권문제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칭송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미개한 제국주의가 붙인 '인권문제', '테러리스트' 등의 꼬리표 달린 민족, 국가, 조직, 인물들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들 많은 경우가 세상 여러 곳에서 존경 받는 영예로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살해, 고문, 감옥, 굶주림 등 온갖 위협, 악조건에 굴함 없이 수십 년을 결연히 싸웠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지배에 맞선 대가로 '테러리스트조직' 딱지가 붙은 과거 PLO, 오늘 하마스가 좋은 예다.

미국이 '악의 축'으로 발표한 북한, 중국, 쿠바,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이 사실은 모두가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 대신 '유료화'로 석유를 결재하는 것을 검토했던 국가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서구국가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세계가 얼마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평등해왔는가, 그 참혹한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을 예로 들면, 전쟁 시에 온갖 인권탄압, 학살도구로 쓰인 각종 살인무기, 고문기술을 해왔다. 그들의 끔찍한 인권범죄는 끝없이 가열찬 반파쇼반독재투쟁에 의해 타도되는 과정에 폭로되었을 뿐이다. 반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끝없는 봉쇄, 고립, 침략위협에 맞서 싸우는 반제자주국가들은 거꾸로 '인권문제(국가)'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끝없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서구의 제국주의와 물질주의 질서가 낳은 체계는 여러 부작용들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가 환경 파괴와 지나친 경쟁주의로 인한 인간성 파괴이다. 19세기 유럽의 인구는 산업화로 유럽에서 2배 이상, 영국에서 3배 이상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 문제, 노동 문제(노조 운동)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였다. 여러 인종간의 대립과 자살률 등은 사실 가난과 경쟁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 사회학의 견해이다.
 
이렇게 보면 확실히 이 세계는 거짓 투성이의 물질주의, 제국주의가 낳은 헛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세계는 전쟁으로 넘쳐나고, 불평등으로 넘쳐나며, 각종 상업주의와 경쟁주의에 자신의 신성(神性)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식은 다시 또 윤회의 길고 긴 순환을 요구하게 되었다. 명백히 현 사회는 진화와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만 풍요롭고, 의식이 더 상위의 단계로 진화하지 않으면 결국 생명체는 멸종하게 된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으로 보아도 옳은 개념이며, 윤회론적(또는 영적) 개념으로 보아도 옳은 개념이다.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은 인류는 결국 과거의 초고대문명(레무리아, 무, 아틸란티스) 처럼 멸망의 길을 걷게될 뿐이다. 결국 <아키라>의 세계관에서도 세계는 한번 멸망하고 나서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말하자면, 진화를 위해 윤회하는 것이다.

결국 넓게 보면, 인간은 계속 진화해간다. 다윈의 진화론적(개체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의식의 진화론적으로 말이다. 그 점이 윤회와 진화론의 유일한 상관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진보와 역행하며 갈수록 탐욕 자체로 치닫는 현대의 문명은 진화의 법칙에 의해 더 복잡성이 가중되기 보다는,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윤회론적 개벽(開闢)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