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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경에 맞서는 '대담한 희망' - " 버락 오바마 " <그 일대기를 화첩에 답아>

by 성공의문 2008. 11. 6.



Barack  Obama  미국 상원의원이 6월 3일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수를
확보함으로써  'Presidential Nominee' 가 되었다.
미국 민주당이 사상 처음으로 흑인 출신 대선 후보를 배출하였다
.

 

이에 따라 오는 11월 실시되는 대선에서 공화당 존 매케인 상원의원(71)과 오바마 의원 간 흑백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오바마는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집회에서 “오늘 밤 나는 여러분 앞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것임을 밝힌다. 오늘로써 길고 힘들었던 프라이머리 시즌이 끝났다”고 승리를 선언했다.

 


오바마는 1961년 8월 4 하와이 호놀룰루 출생했다.  
하와이대 학생이던 케냐 출신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는 오바마가 두 살 때 이혼을 하였다.

2004 7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케냐 출신 아버지와 미국 캔자스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오바마는 대담한 희망 이란 연설로 일약 스타가 됐다.




부모는 내게버락’(Barack, 스와힐리어로축복받은’)이란 아프리카식 이름을 붙여줬다.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이 야윈 소년은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었다
.
(
미국이 아니라면)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 내 이야기가 가능하겠는가. 역경에 맞서는 대담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 그건 신이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이자 미국의 근본이다
.”

오바마 아버지


하와이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났으나 케냐로 가고싶어하지 않던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더넘 소에토로 이혼했다.

케냐 정부 장학금으로 하와이에 유학을 와 오바마를 낳은 그는 아들이 2살 되던 해 부인과 이혼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떠났다.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른 미국여인과 결혼해 케냐로 돌아간 그는 대통령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고위직에 올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새 조국 케냐의 건설을 주도했고 부와 명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 러나 1960년대 말 케냐는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과 제2의 부족인 루오족의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휩싸였다.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 후 소요사태로 1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케냐의 부족갈등은 40년의 뿌리를 가진 것이었다.
  
  루오 족 출신인 아버지 오바마는 같은 루오족 출신인 부통령 라일라 오딩가와 함께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케냐 야당 오렌지민주운동의 지도자 오딩가가 미국의 유력 대선후보인 오바마를 두고 자신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건 아버지 오바마와의 직접적인 인연 때문이다.
  
  아 버지 오바마는 오딩가와 함께 케냐의 정치가들이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제국주의자들이 두고 간 재산을 차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최대 부족이 만들어 가는 기득권에 타협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오바마는 대통령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강력히 저항했다.
  
  정부는 그런 오바마를 거세게 탄압했다. 공직에서 해임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갑자기 닥친 불행을 술로 달래던 오바마는 권토중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82년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는 비운을 맞았다.


  아버지 오바마가 꿈에 그리던 아들을 데려갈 요량으로 하와이를 찾았던 것은 어쩌면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외조부 밑에서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는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1971년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한 아버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소년 오바마.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의 시련을 뒤늦게 듣게 됐다. 그것은 우상의 몰락이었다. "명석한 학자, 관대한 남자, 탁월한 지도자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부서져 연기처럼 사라졌다." 소수파로서의 제약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아버지를 통해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계부 롤로는 생부와 마찬가지로 하와이대 동서센터 유학생이었다.
오바마가 그를 따라 자카르타로 건너간 것은 1967년이었다. 수하르토가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수카르노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최고의 격변기로 기록되던 바로 그 해였다.
   
롤로는 당시 가장 급진적인 제3세계 지도자로 꼽혔던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갔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여권이 취소되어 귀국했고, 1년간 강제 징집됐다.


-인도네시아의 일반 초등학교에서

  
그런 롤로는 오바마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러나 오바마가 본 것은 절망 끝에 세상과 타협해 버리는 전형적인 엘리트의 모습이었다.
  
군에서 나온 롤로는 오바마의 표현대로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뚱어리 그대로 늘 생경하게 존재"하고 있는 권력에 의해 길들여졌고, "권력과 손을 잡고 망각의 지혜를 배웠다." 석유회사에 취직해 돈과 권력을 맛봤지만 탈세 혐의로 몰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롤로는 자신의 행태에 대해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오바마의 어머니에게 "죄의식은 외국인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라고 쏘아붙였고, 둘은 불화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집권한 수하르토 치하에서 과거를 버리고 타협해 버린 롤로. 그런 그에게 '양심'을 이야기 하는 미국인 어머니의 다툼 속에서 어린 오바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바마는 롤로가 "가난과 부패와 자기 안전을 위한 끊임없는 쟁탈에 대해 설명했다"면서 "그의 설명은 내게 늘 가까이 남아 있었고 내 안의 몰인정한 회의주의에 자양분이 됐다"고 고백했다.


인류학을 전공해 박사학위까지 딴 오바마의 모친은 아이 둘을 키우면서 대학원에 들어가 800쪽짜리 인류학 논문을 썼다. 그는 뉴욕에 있는 여성세계은행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포드재단 등에서 근무하며 여성과 빈민지원 활동에 참여했고 파키스탄에서 관련 컨설팅 업무를 맡기도 했다.

 


-어머니 앤과 외조부모

자카르타에서의 혼란에서 빛을 발했던 것은 어머니 앤의 존재였다.
앤은 롤로의 체념이 아들 오바마에게 전도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했고, 아들을 자부심 강하고 예의 바른 인물로 만들었다. 형편이 허락지 않아 오바마를 국제학교가 아닌 인도네시아 학교에 보내는 대신 매일 새벽 4시 아들을 깨워 미국식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앤은 아들에게 언제나 생부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난하게 자랐는지, 그렇지만 얼마나 부지런하고 정직했는지를 되풀이 해 들려줬다. 오바마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의 유일한 동맹군"이라고 말했다.


10살이 되어 자카르타에서 하와이로 돌아와 명문 푸나호우 아카데미 5학년에 전학한 오바마에게 인종주의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오바마가 오기 전까지 흑인이 단 한명밖에 없었던 푸나호우에서
그는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고, 스스로 쌓은 벽 안에 갇혀 허우적댔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농구였다. 푸나호우 농구부 선수가 된 오바마는 대학 코트에서 만난 흑인 선수들을 보며 열등감을 털어버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농구장에서 그는 "존경심은 자기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구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했다.

-186cm의 키로 고등학교 농구부원으로 뛰던 오바마君


- 하와이 소재 푸나호우고등학교 졸업식때 축하해 주는 여동생


인도네시아인 피가 흐르는 여동생은 동남아계 남자와 결혼해서 하와이대학 강사로 재직 중.


외할아버지 스탠리 던햄과 외할머니의 고교 졸업 축하 장면.

유년기와 청년기의 오바마를 키운 외할아버지는 실제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였다. 오바마가 태어나던 1961년부터 하와이의 명문 푸나우 아카데미를 졸업하던 1979년까지, 외할아버지는 그가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4년을 제외하고 14년 동안 오바마를 지켜줬다.

외조부는 오바마에게 미국의 백인 중산층 가정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을 터득케 했다. 케냐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혼혈이자 자카르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바마였지만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다문화적 장점만을 받아들인 인물로 성장하게 한 것은 외조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외할아버지가 겪고 오바마에게 전해준 역사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캔자스 남부 위치타에서 태어난 그는 대공황을 겪은 후 1941년 진주만 공격 이후 입대, 유럽에서 군복무를 했다.
  
1959년 사업을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한 그가 미국 50개 주(州) 중 절 반이 흑백 결혼을 중죄로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딸과 케냐인의 결혼을 승낙한 것은 언제나 자유를 갈망했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오바마는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늘 새로운 출발을 찾고 눈에 익은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라고 외할아버지를 묘사했다.


-콜럼비아 대학을 찾아 온 외조부모

외조부 던햄의 역마살을 다스린 것은 오바마의 탄생이었다. 오바마가 태어난 후 그는 하와이에 완전히 정착해 손자를 뒷바라지하며 자신이 겪은 경험이며 역사를 대물림했다.
   
특히 외할아버지는 소년 오바마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흑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오바마의 피부색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혀를 차는 관광객들을 향해 경멸을 태도를 보이며 그의 상처를 달래줬다.
  
  "너희들만 잘 되면 그게 다야. 내가 바라는 건."
  
외할아버지는 평생 오바마에게 이 말을 되풀이하며 부모의 사랑에 목마른 손자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한 뒤 19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CNN 중독자'가 되어 외손자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벅찬 가슴으로 지켜보고 있다. 가끔은 유세장에도 나간다.

△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오바마는 시카고로 돌아가 시민운동에 열을 올리는 한편, 시카고대 법대에서 헌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콜럼비아대학을 졸업한 뒤 24살이 되던 해에 시카고라는 낯선 땅으로 건너간 것은 공동체에 대한 동경과 갈망 때문이었다. 욕망의 도시 뉴욕에서 할렘과 부유층 거주 구역을 보며 목도한 문제, 즉 인종과 계급이 얽혀서 만들어낸 차별과 억압을 공동체를 통해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공동체조직가가 되기로 결심한 오마바의 혼잣말을 보면 지금 오바마가 내걸고 있는 '변화'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게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그의 독백은 매우 급진적이다.
  
  "레이건과 그의 앞잡이들이 더러운 짓을 벌이는 백악관에 변화가 필요하고, 양처럼 고분고분하고 부패한 의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미친 듯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나라 안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풀뿌리에서만 나온다."

뒤늦게 얻게 된 종교는 결정적인 축복이었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의 '희망의 담대함'이란 설교를 듣고 흑인들의 시련은 보편적인 인간의 것이라는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됐다. '희망'의 담대함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 그리고 미국의 미래 비전을 담은 그의 평론집 제목이 됐다.


아버지의 땅 케냐에 다녀와 정체성의 뿌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한때 우상이었다가 부서져 버린 아버지와 마음으로 화해한 일도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희망을 품은 오바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988년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간 뒤 흑인 최초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 91년 졸업한 오바마는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민권변호사로 활동했고, 결혼과 동시에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오바마의 희망은 소수자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참의미를 되새기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기조연설 전반부에 압축됐다. 그 연설로 오바마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 이 나라의 가능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졌던 내 부모님은 나에게 '신의 은총'이란 뜻의 버락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것은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 이름은 성공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은 부유하지 않았지만 내가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대한 나라 미국에서는 꼭 부유하지 않아도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오늘 밤 하늘나라에서 나를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 는 오늘 내가 물려받은 다양성에 대해 감사하고, 내 부모님들의 꿈이 내 귀여운 두 딸에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 서 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품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고, 내가 먼저 살았던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내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고서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밤 우리는 우리나라의 위대함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 모였다. 미국은 마천루의 웅장함이나 군사력, 경제 규모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다. 200년 전 독립선언문에 나온 대단히 간단한 말은 우리가 가진 자긍심의 기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것은 진정한 미국의 정신이다. (…)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도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미국은 오직 미국일 뿐이다."  
    

부인 미셸(64년 생)은 흑인 소방관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법대를 나와 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이다.   미셀은 대선 유세 지원을 위해 시카고 대학병원 대외업무 담당 부원장직을 그만 두었다. 
공부하느라 비교적 결혼이 늦었고, 딸만 둘인데….애들도 결혼 7年만에 낳아서, 초등학생   말리아(10)와 사샤(7)의 학부모이다.

참고 출처 : 프레시안 '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 중앙선데이 평론집 '희망의 담대함'동아일보.'오바마 어머니는 커리어 우먼' 세계일보, 한국일보 사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