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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학교에 대한 정신 생활의 공적 관리가 현대에 들어 점점 더 국가 소관이 되어 버렸다. 교육 제도는 국가가 떠맡아야 할 안건이라는 생각이 현재 너무나 깊이 인간 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런 의견을 뒤흔들어야 한다는 상상이라도 하는 사람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론가>로 치부된다. 하필이면 삶의 바로 그 영역에 가장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놓여 있다. 이미 암시된 방식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움>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방어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오늘날 인류의 문화 생활에서 쇠퇴하는 흐름의 모사에 불과한 특징을 유별나게 띠고 있다. 새로운 국가 형성은 그 사회적 구조에 있어서 삶의 요구 사항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서 현대 인류의 경제적 요구 사항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를 보인다. 교육 제도를 종교 공동체에서 분리해 내어 완전히 국가에 종속시킨 이래로 교육 제도에 낙후성이라는 딱지를 눌러 붙였다. 

모든 단계에서의 학교가 인간을 양성하는 데에 있어서, 국가가 필수적이라 여기는 일을 위해 인간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를 고려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학교 제도에 반영한다. 보편적인 인성 교육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강하게 자신을 국가질서의 한 지체로 느끼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성 교육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실은 국가에 쓸모 있는 하인을 만드는 교육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이 관계에서 오늘날 사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유익한 것을 전혀 약속하지 않는다. 낡은 국가를 거대한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국가의 학교가 그 경제 조직에서 연속되어야 한다. 그 연속이 현재의 학교가 지니는 모든 오류를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 확대시킬 것이다. 국가가 아직은 교육 제도의 지배자가 아니었던 시대에서 유래한 것들이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물론 구시대에서 유래하는 정신이 다시 지배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발달된 인류의 새로운 정신을 학교로 들여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국가를 경제 조직으로 전환시키고, 그 경제 조직 내에서 쓸모 있는 노동 기계나 될 사람들을 양성하도록 학교를 변형시킨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단일학교>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 단일학교에 대해 이론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상상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를 경제 조직의 유기적 지체로 형성하면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시해야 할 것은 학교가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생활 내에 자리 잡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을 가르치고 교육해야 할지는 오로지 성장하는 인간과 개인의 소질에 대한 인식에서만 나와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인류학이 교육과 수업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해 인간이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어떤 소질이 인간 내부에 담겨 있는가? 그 인간 내부로부터 무엇을 계발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항상 새로운 힘을 사회 질서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면 사회로 들어서는 성인들이 그 사회와 할 수 있는 것이 사회 질서 내에 항상 살게 된다. 반면에 기존의 사회 질서가 성장하는 세대로부터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거침없이 발달하도록 양성된 개인적 재능들이 항상 새로이 사회 조직으로 공급될 때에만 학교와 사회 조직 간의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학교와 교육 제도가 자치적 근거에 세워질 때에만 그 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독립적인 정신 생활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을 맞아들여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 과정을 지시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이 특정한 연령에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지는 인간 천성에서 나와야만 한다. 국가와 경제는 인간 천성의 요구에 상응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 "특정한 직무를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필요한 사람인지 검증하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도록 교육하라."고 국가와 경제가 말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유기체의 정신적 지체가 독립된 행정으로부터 적합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을 일정 정도까지 교육시켜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경제는 정신적 지체에서 이룬 일의 결과에 맞추어서 조직해야 한다.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은 인간 천성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천성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 스스로에 근거하는 정신 생활이 인간을 세상 물정에 어둡게 양성하리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와는 반대로, 기존의 국가 조직과 경제 조직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스스로 규제하는 경우에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 생겨난다. 국가와 경제 내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이미 되어 버린 것에서 관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되어 가는 인간의 계발을 위해서는 사고와 감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원칙이 필요하다. 교육되어야 할, 수업을 받아야 할 사람을 자유롭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마주 대하는 경우에만 교육자로서, 교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작용 원칙을 위해서는 오로지 사회 질서의 본성이나 그와 유사한 것에 대한, 인간 천성에 대한 인식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외부에서 주어진 지시나 법률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의 사회 질서를 공동체적인 관점을 따르는 사회 질서로 전환시키기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를 포함한 정신 생활이 독자적인 행정을 따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 사회적 유기체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유기체의 그런 독립적인 지체로부터 양성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 생활에 의해 규제되는 학교에서는 그런 열정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 배출될 수 있을 뿐이다.

국가와 경제를 위해 완전히 의식적인 시민과 일꾼이 되기 전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지배권의 영향력을 마치 파괴하는 요소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국가와 경제로부터 독립적인 교사와 교육자의 힘을 통해서 되어 가는 인간이 성장해야 한다. 그런 교사와 교육자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능력 역시 자유롭게 발달시킬 수 있다.

··········

지난 수백년간 시민 계급적 사회 조직 내에서 경제 생활의 의미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정신 생활이 경제 생활에 강한 종속성을 띠게 되었다. 인간 영혼이 관여하는 자체적인 근거를 지니는 정신 생활에 대한 의식이 소실되고 말았다. 자연 과학과 산업주의가 그 소실에 협력했다. 현대에 들어 학교를 사회적 유기체 내로 편입한 방식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다. 국가와 경제 내의 외적인 생활을 위해 인간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 학교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최우선적으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사물의 정신 질서와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그 의식을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국가와 경제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점점 덜 고려되었다.

두뇌들이 점점 더 정신적 세계 질서를 외면했고, 점점 더 경제적인 생산 관계만 주시했다. 시민 계급의 경우에는 그것이 영혼 생활의 느낌에 상응하는 방향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적 지도자들은 그것에서 이론적인 인생관, 삶의 도그마를 만들어 내었다. 그 삶의 도그마가 미래에 학교 제도의 구축을 위한 근거가 되어야 한다면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회적 유기체에서 아무리 뛰어난 경제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에서는 정신 생활의 관리, 특히나 학교 제도를 위한 생산적인 제도는 절대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일단은 낡은 사고 세계의 전승을 통해서 학교 제도를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삶의 형상화를 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당들은 계속해서 낡은 세계관의 소유자들에게 학교 내의 정신적인 것을 관리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는 지속되는 낡은 것에 대한 내적인 관계가 성장하는 세대들에게서 생겨날 수 없기 때문에, 정신 생활이 점점 더 피폐해지고 만다. 내적인 힘의 원천이 될 수 없는 인생관과 함께 자기기만적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세대의 영혼이 황폐해질 것이다. 산업주의에서 생겨난 공동체 질서 내에서 사람들은 영혼이 비어 버린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들어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삼지적인 사회적 유기체를 향한 운동은 수업 제도를 국가 생활과 경제 생활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자 한다. 교육계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지체는 그 분야에서 직접 활동하는 사람들 외에 다른 어떤 권력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업 제도의 행정, 교육 과정과 교육 목표의 설정은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거나, 혹은 정신 생활에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만 관여해야 한다. 그런 인물들 각자가 수업이나 여타의 정신적 활동과 학제를 위한 행정 간에 그들의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 정신 생활의 판단을 아무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수업 활동을 하거나 다른 정신적 창조 활등을 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만 교육 제도와 수업 제도의 조직과 행정에 필요한 활력이 자라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무너진 공동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정신 생활의 새로운 원천이 어떻게 열려야 할지를 공평무사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 필시 그 사람만 우리 시대를 위한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르크시즘과 삼지성"이라는 논설에서, 올바르기는 하지만 역시 일방적인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인간을 지배하던 정부의 자리에 물건의 행정과 생산 과정의 관리가 들어선다." 엥겔스의 생각이 옳은 만큼, 경제적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인간을 함께 지배했기 때문에 과거의 공동체 질서 내에서 인간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역시 진실이다. 그 지배가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지배 자극을 통해 인간 내에 작용했던 삶의 동력을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정신 생활에서 얻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에 또 다른 점이 더해진다. 정신 생활은 스스로 단일성으로서 발달할 수 있을 때에만 풍부하게 성장한다는 점이다. 충족시키는 세계관, 인간을 떠받치는 세계관이 나오는 영혼력의 동일한 발달에서, 인간을 경제 생활을 위해 유능한 일꾼으로 만드는 생산적인 힘이 생겨난다. 건강한 방식으로 고차적인 세계관을 위한 동력도 역시 발달시킬 줄 아는 수업 제도에서만 외적인 생활을 위해 실용적인 인간이 양성되어 나온다. 건강하게 발달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는다면, 단지 물건만 취급하고 생산 과정만 관리하는 사회 질서는 점차적으로 아주 잘못된 길을 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 생활의 새로운 구축은 독립적인 수업 제도를 설치할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을 낡은 방식으로 더 이상 <지배> 해서는 안 된다면, 모든 인간 영혼 내의 자유로운 정신이 완전히 강건해져서, 그것이 각 인간의 개인성 내에서 삶의 주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정신은 결코 억압되지 않는다. 경제 질서의 관점에서만 학교 제도를 조정하려는 체제는 그런 억압을 위한 시도가 된다. 그런 체제는, 자유로운 정신이 그 천성적 근거로 인해 끊임 없이 반항하도록 만들 것이다. 생산 과정의 관리와 동시에 학교 제도를 조직하려는 질서의 불가피한 결과로 사회구조에 지속적인 동요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찰하는 사람에게는, 교육 제도와 학교 제도의 자유와 자치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인간 공동체의 구축이 가장 중요한 시대적 요구가 된다. 이 영역에서 올바른 것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이 시대의 다른 모든 필수적인 요구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오늘날 정신 생활의 형상을 솔직한 시각으로 일별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의 분열성을, 그리고 올바른 것을 인식하기에는 인간 영혼을 위해 너무나 부족한 그것의 적재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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