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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_문화

사주팔자와 명리학, 혁명을 일으키다.

by 성공의문 2013. 1. 18.

四柱八字는 길흉화복 점치는 占術인 동시에 세상을 뒤엎으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였다.

 

조선왕조 때 일어난 대부분 반란사건의 반란 가담자 취조 과정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四柱八字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주팔자는 어떤 형식으로 반란사건과 연결되었던 것일까. 사주팔자가 개인의 吉凶禍福을 예측하는 점술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역사의 정권교체 과정에 음지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온 담론체계인 사주팔자와 명리학의 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본다.<편집자 주> 


번성한 점집들. 특히 인터넷 점집의 성황은 한국인만의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사주팔자 문화가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인식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연월일시 기유정(年月日時 旣有定)인데 부생(浮生)이 공자망(空自忙)이라!’ ‘연월일시(年月日時,四柱八字를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부평초(浮萍草) 같은 삶을 사는 인생들이 그것을 모르고 공연히 스스로 바쁘기만 하다’는 옛 선인들의 말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예정조화(豫定造化)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쓸 데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결국 이미 정해진 운명에서 도망갈 수 없음을 설파한 잠언이기도 하다. 


한국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드라마틱한 방향전환이나 대단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할 때 이를 사주팔자 탓으로 돌리는 관습이 있다.‘사주팔자가 그렇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 여자 팔자가 세어서 그렇다’ 등의 말은 한국사람들의 인생관에 깊이 뿌리박힌 표현이기도 하다. 


매사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 숙명론에 함몰된 의지가 박약한 인간들의 넋두리이고,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이라고 하는 납득하기 힘든 연속극을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감상법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세네카가 그랬던가! 인생이란 순응하면 등에 업혀 가고 반항하면 질질 끌려간다고…. 


그 사람의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간지(干支)로 환산해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인 사주팔자. 한국에서는 ‘운명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이를 통상 명리학(命理學)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운명을 추리한다’고 해서 추명학(推命學), 중국(대만)에서는 ‘운명을 계산해 본다’는 의미의 산명학(算命學)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뜻은 같다. 한자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한·중·일 3국은 사주팔자라고 하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진 나이 지긋한 식자층들끼리 서로 만나면 상대방의 사주팔자를 주고받는 풍습이 일부에서는 아직 남아 있다. 비록 말은 서로 통하지 않더라도 사주팔자를 보는 방법만큼은 동양 3국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3국의 대가들을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아베 다이장(阿部泰山)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추명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일본은 그동안 중국·한국의 명리학 수준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어 왔으나, 아베가 기존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이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면서 중국·한국의 수준을 따라잡게 되었다. 

아베는 메이지(明治)대학 출신으로 중·일 전쟁때 종군기자로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면서 사주팔자에 관한 중국의 모든 문헌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일본으로 되돌아올 때 가지고 나온 문헌의 양은 자그마치 트럭 1대분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고 전해진다. 전후 그는 일본에서 이 문헌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종래의 학설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추명학이라는 용어 자체도 아베가 창출해낸 말이다. 아베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아베 다이장 전집’ 26권은 현재 일본 추명학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작고한 웨이쳰리(韋千里)가 유명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정권이 들어선 이후 홍콩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주로 홍콩에서 활동했고 대만을 자주 왕래했다. 사주팔자를 신봉했던 장제스(蔣介石)와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웨이쳰리는 대만정부의 중요한 정책결정에 관여하는 국사(國師) 대접을 받았다. 


그는 홍콩에서 활동하면서 벽안의 서양인들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동양사상에 호기심이 많은 불란서 신부들에게 사주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웨이쳰리에게 사주를 배운 불란서 신부들 몇몇은 현대 서양 점성술의 개량화 작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웨이쳰리의 명성은 1960~70년대 한국에까지 알려져 삼성의 고(故) 이병철 회장도 1년에 한번씩은 꼭 홍콩에 가서 웨이쳰리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병철 회장은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는 사판(事判)과, 신비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는 이판(理判)을 모두 종합하는 이사무애(理事無碍·理와 事에 걸림이 없음)의 경지를 추구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첨단산업의 전문가는 물론이고 역술에 정통한 술객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취향이 있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서도 역시 1970년대 이후 이석영(李錫暎,1920~83)·박재완(朴在琓, 1903~92)·박제현(朴齋顯, 1935~2000)과 같은 대가들이 출현해 정·재계 인사들의 정책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별도의 장에서 이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세 사람이 한국의 정·재계 중요 인사들의 진로와 인사문제들을 상담해 주면서 발생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소설이 따로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들은 음지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양지에서는 별로 대접받지 못했다. 중국의 웨이쳰리나 일본의 아베가 누렸던 사회적 지위와는 거리가 먼 대접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명리학이 동양사상에 바탕을 둔 전통적 세계관으로써 어느 정도 대접받았던 반면 한국사회에서는 ‘점쟁이’ 또는 ‘미신·잡술’로 평가절하되면서 공식적인 담론체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 결과 학계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같은 ‘미신·잡술’이면서도 무속신앙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 편인데, 사주팔자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게도 별로 시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다 보니 사주팔자는 한국사회의 이면문화(裏面文化, behind culture)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는 논의되지도 주목 받지도 못하지만, 무대 뒤로 한걸음 들어간 배후에서는 활발하게 유통되는 문화가 ‘비하인드 컬처’라고 할 수 있다. 사주는 그러한 비하인드 컬처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문화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신세대로 이식되고 있는 四柱八字 


학문적 연구는 적은 반면 사주가 인터넷과 결합되는 속도는 한국이 중국·일본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인터넷 사용률이 아주 높은 국가에 해당한다. 인터넷 사용률의 증가와 함께 등장한 문화현상 중 하나가 ‘사주’(四柱) 사이트의 범람이다. 한국의 인터넷 유료 사이트 가운데 현재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사이트가 2개인데, 하나는 포르노 사이트이고, 다른 하나는 사주 사이트인 것이다. 


포르노 사이트가 유료로 운영되면서 호황을 누리는 것은 세계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사주팔자를 상담해 주는 사주 사이트가 유료로 활발하게 운영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필자가 2001년 12월2일 인터넷에서 ‘사주’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무려 240개의 사이트가 나왔으며, ‘팔자’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48개의 사이트가 나왔다. 약 300여개에 가까운 사이트가 이용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운영하는 유료 사이트였던 것이다. 


사주 사이트의 지나친 범람은 꼭 바람직한 사회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인터넷 사주 사이트의 성황(盛況)은 일본이나 중국의 인터넷 문화와는 구분되는 한국적인 문화현상임이 분명하다. 아울러 인터넷을 이용하는 주 연령층이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음을 감안하면 사주라고 하는 것이 구세대에서 신세대 젊은 계층으로 이식(移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저변에서 이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사주팔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사주팔자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해 보자. 


그 사람의 생년, 월, 일, 시를 간지(干支)로 환산해 운명을 예측하는 명리학은 중국의 도교 수련가였던 서자평(徐子平)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이론체계가 정립되었다. 오늘날 명리학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연해자평’(淵海子平)이란 책은 서자평의 저술이고, 책 제목 자체도 그의 호를 딴 이름이다. 서자평에 대한 신상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생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가 도사(道士)인 진단(陣 :871~989)과 함께 중국의 화산(華山)에서 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대략 900년대에 활동했던 인물인 것 같다. 


따라서 서자평의 명리학은 10세기 후반쯤 세상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것이 언제 한국에 유입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서자평의 명리학은 중국의 왕실과 소수의 상류 귀족들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었을 뿐 일반 대중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고급스러운 지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외국으로 쉽게 반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면 빨라도 100~200년 후에나 우리나라에 명리학이 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정치가와 점술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우리나라에서 사주팔자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왕조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경국대전은 세조 6년인 1460년에 편찬을 시작해 성종 16년인 1485년에 최종 완성되었으므로 조선 초기에 성립된 법전인데, 여기에 보면 전문적으로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을 국가에서 과거시험으로 선발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과거시험 분류를 보면 중인(中人) 계급들이 응시하는 잡과(雜科)가 있다. 잡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문 기술직이다. 


잡과 가운데 하나로 음양과(陰陽科)라는 것이 있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전문가를 선발하는 과거가 바로 음양과다. 음양과를 다시 세분하면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뉘고 초시(初試)와 복시(復試) 2차에 걸쳐 시험을 보았다. 초시에서 천문학은 10명, 지리학과 명과학은 각각 4명씩 뽑았다. 복시에서는 천문학 5명, 지리학·명과학은 각각 2명씩 뽑았다고 나온다. 


지리학은 풍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관료로 채용하는 과목이고, 명과학이란 사주팔자에 능통자 자를 관료로 채용하는 과목이다. 과거시험은 매년 있었던 것도 아니고 3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자·오·묘·유(子·午·卯·酉)년에 시행하는 식년시(式年試)에서 ‘명과학 교수’를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씩 채용하였다. 3년마다 시행되는 명과학 과거시험에서 최종적으로 2명만을 선발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적은 인원만을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명과학의 시험과목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시험과목을 보면 ‘서자평’(徐子平) ‘원천강’(袁天綱) ‘범위수’(範圍數) ‘극택통서’(剋擇通書) 등이다. 서자평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주팔자의 원리에 대한 내용이고, 원천강은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책이며, 범위수는 어느 날짜에 혼사를 하거나 건물을 짓는 공사를 시작할 것인가를 논하는 택일(擇日)에 관한 책이다. 


‘극택통서’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어 어떤 책인지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고, 나머지 과목들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명과학의 시험과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과목을 꼽는다면 서자평의 ‘연해자평’이다. 서자평은 오늘날에도 명리학을 처음 공부하려는 학인들이 필수적으로 섭렵해야 할 교과서로 평가되는 책이다. 사주팔자를 해석하는 모든 기본 원리는 서자평에 들어 있다. 아무튼 명과학의 시험과목에 서자평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주팔자의 원리는 경국대전이 성립되던 1400년대 후반까지는 조선사회에 전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공식적인 확인이고 비공식적으로는 15세기 후반 이전에 서자평의 명리학이 이미 조선사회에 유입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팔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CD롬에서 ‘팔자’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태종 17년(1417)에도 공주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남자의 팔자를 보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왕실에서 사주팔자를 보고 혼사를 정하는 풍습이 그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 미루어 기록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려말 조선 초에 서자평의 명리학이 중국으로부터 이미 들어와 있었으며,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계층에서는 사주팔자를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을 예측하거나 혼사를 정할 때 궁합을 보는 풍습이 유행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때까지는 명리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이 임의로 사주팔자를 보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아예 이것을 공식화하자 특히 왕실에서 그 필요성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왕실에서는 많은 왕자와 공주들이 출생했다. 이들을 시집·장가보낼 때는 사전에 궁합을 보는 일이 필수적인 일이었고, 궁합을 보기 위해서는 생년월일시와 같은 인적사항이 노출되어야 하는데, 그 신상정보를 외부에 함부로 공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명리학 전문가를 왕실 전용 관료로 선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던 것 같고, 결국 명과학 교수라는 직책이 과거 가운데 하나로 채택된 것 아닌가 싶다. 


명과학 교수의 인원은 2~4명이다. 3년마다 돌아오는 전국 규모의 과거시험에서 이 숫자만 뽑았으니 매우 적은 인원만 채용한 셈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왕실 전용 사주 상담사들이라서 근무처도 서울의 궁궐 내에서만 근무했다. 지방에 출장간다거나 일반인들의 사주팔자를 보아 주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허가 없이는 궁궐밖 사람과의 접촉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왕실의 비밀이 유출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명과학 교수라는 직급은 잡과에 소속돼 낮은 편이었지만, 그 업무적 성격상 왕실 내부의 은밀한 정보를 접촉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직급이 낮다고 해서 함부로 볼 자리가 아니었다. 이들의 임무는 여러 가지였다. 공주나 왕자의 궁합을 보는 일, 합궁(合宮)할 때 그 날짜를 택일하는 일, 궁궐 내에서 왕자나 공주가 출생할 때 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 사주팔자를 기록하는 일. 건물 신축을 할 때 길일(吉日)을 잡는 일, 임금의 명에 따라 대신들 개개인의 사주팔자가 어떤지를 보는 일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합궁일(合宮日)을 살펴보자. 사주팔자에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양대 요소는 입태일(入胎日)과 출태일(出胎日)이다. 입태일(入胎日)은 정자와 난자, 그러니까 부정(父精)과 모혈(母血)이 결합되는 날짜로 합궁일이 된다. 출태일(出胎日)은 그 사람이 태어난 날, 정확하게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가위로 자른 시각을 말한다. 탯줄을 자르는 바로 그 시각에 천지의 음양오행 기운이 아이에게 순간적으로 들어온다. 


사주팔자는 바로 그 탯줄을 자르는 시각에 들어온 음양오행 기운의 성분을 10간 12지로 인수분해한 것이다. 입태일은 ‘IN PUT’되는 시점이고, 출태일은 ‘OUT PUT’되는 시점이다. 문제는 출태일 못지않게 입태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료(?)를 투입할 때 과연 어느 시점에 투입하느냐에 따라 제품의 질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그 투입 시점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방정식의 핵심은 아이의 부모가 될 사람 사주를 먼저 본 다음 그 부모 사주의 약점과 강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成三問이 成三問이 된 까닭 


예를 들어 아버지 될 사람의 사주가 불(火)이 지나치게 많은 사주라고 하자. 사주에 불이 많은 기질은 엔진은 좋은데 브레이크가 약해 오버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브레이크를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 브레이크는 물이 된다. 그러므로 화(火)가 많은 사주는 반드시 수(水)가 보강되어야 한다. ‘수’가 많은 달은 1년 중에서 음력으로 10월·11월·12월이다. 이 3달은 해·자·축(亥·子·丑)으로 상징되는데, 공통적으로 수(水)를 나타낸다. 


‘화’가 많은 사람이 합궁할 때는 기왕이면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날짜도 같은 원리다. 음력이 표시되어 있는 달력을 보면 날짜마다 10간 12지가 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뱀(巳)·말(午)·양(未)의 날 일(日)은 화에 해당한다. 화가 많은 사람이 합궁할 때 가능하면 날짜는 피한다. 대신 수가 많은 돼지(亥)·쥐(子)·소(丑)의 날(日)을 택한다. 음양오행의 패러다임에 의하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주기에서 이 날짜가 수의 기운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날짜 다음에 시간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루 12시간(24시간) 중에서 해시(亥時)는 밤 9시에서 11시이고, 자시(子時)는 밤 11시에서 새벽 1시이고, 축시(丑時)는 새벽 1시에서 새벽 3시까지다. 화가 많은 사람의 합궁 타이밍을 잡을 때는 기왕이면 이 시간을 잡는 것이 좋다고 본다. 결혼한 공주나 왕자가 첫날밤을 치를 때는 명과학 교수가 잡아준 날짜와 그 시간에 맞추어 성교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요즘에도 결혼할 때 신랑의 사성(四星·사주팔자)을 한지에 적어 신부집에 미리 보내는 풍습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출산 타이밍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단종 때 사육신으로 유명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 출산에 관해 구전으로 전해지는 비화다. 성삼문의 어머니가 성삼문을 임신하자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갔다. 딸의 진통이 시작되자 이제 막 산실에 들어가려는 부인에게 친정아버지(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였다. “자네 산실에 들어갈 때 다듬잇돌을 들고 가소. 아이가 나오려고 하거든 이 다듬잇돌로 산모의 자궁을 틀어 막아 아이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네. 다듬잇돌로 막고 있다 내가 ‘됐다’고 신호를 보낼 때 아이가 나오도록 해야 하네.” 


다듬잇돌이란 옛날에 빨래를 두드릴 때 사용하던 직사각형의 넙적한 돌을 말한다. 성삼문의 외할아버지는 명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외손자가 태어나려고 하는 사주팔자를 계산해 보니 예정보다 2시간 정도 늦게 태어나야만 외손자의 사주가 좋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산모의 진통이 극심해지면서 아이의 머리가 조금씩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정어머니(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산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편에게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대답이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지금이면 됐습니까?”하고 또 물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다듬잇돌로 아이가 못나오게 막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머니가 세번째로 외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밖에서 ‘더 참아라’했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산모는 성삼문을 낳고야 말았다. 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삼문의 외할아버지에게 ‘3번 물었다’(三問)고 해서 이름을 성삼문(成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만약 산모가 더 참고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삼문은 39세에 죽었는데 1시간만 늦게 태어났더라도 환갑까지는 살았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삼문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다듬잇돌로 막는 처방을 한 덕택에 39세까지 살았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10대에 요절하고 말 운명이었다고 역술가들은 말한다. 어느 시간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명리학에서 팔자(八字) 가운데 두자(二字)가 바뀐다. 특히 태어나는 시(時)의 간지(干支)는 그 사람의 말년 운세와 관련된다고 해석하므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인위적으로 출생시간을 조절하는 제왕절개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궁궐 안에서 근무하는 명과학 교수의 업무 가운데 중요한 일 하나가 왕자들의 사주팔자를 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임금은 많은 자식을 낳았다. 그러므로 많은 자식 중에서 과연 어느 왕자(大君)가 왕권을 이어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뭇사람들의 지극한 관심사였다. 물론 장남에게 우선순위가 있지만 조선왕조의 왕권 승계 과정을 보면 장남이 승계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명과학 교수는 임금의 핏줄들, 그러니까 대군들의 출생연월일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대권의 향방에 관한 1급 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갑이라는 왕자가 군왕이 될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소문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명과학 교수의 의견이 여론의 향배에 중요한 비중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왕자들의 운명을 알고 있다고 여겨진 명과학 교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력투쟁에 말려들 소지가 많았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어떤 대군은 사람들의 인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하기 위해 명과학 교수에게 압력을 넣어 가짜 사주팔자를 유포시켰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되면 반대파에서는 그 명과학 교수를 제거하기도 하였다. 


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의원(醫員)과 함께 명과학 교수는 왕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전에 개입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의문사한 경우가 11건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만큼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치열했다는 증거다. 이 권력투쟁의 와중에 궁궐의 의원은 반대파의 음식에 독약을 타고 명과학 교수는 자신이 지지하는 대군의 사주를 조작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었으므로 그에 관한 기록들이 별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역술계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궁궐 내에서 근무하던 어의(御醫)는 정년퇴직하고 밖에 나가 개업할 수 있었지만, 명과학 교수는 정년퇴직 하더라도 궁궐 밖에 나가 개업하거나 사람을 만나 사주 상담을 해주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고 한다. 명과학 교수는 왕실의 대외비(對外秘)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년퇴직하고 난 후에도 행동에 제한이 있었던 셈이다. 


때문에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만약 전·현직 대감들이 궁궐 밖에서 명과학 교수들과 허가 없이 어울리거나 접촉하다 그 소문이 임금에게 들어가면 역모(逆謀)를 꾸미는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명과학 교수는 단순하게 사주팔자만 보아주는 직업이 아니라 때로는 대권(大權)의 향배에도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로부터 정치가와 점술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 있다는 잠언이 이런 대목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四柱八字와 조선시대 반란 사건 


조선왕조실록에서 ‘팔자’를 검색하면 많은 기사가 나오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기사들의 대부분이 반란사건과 관계 있다는 점이다. 각종 반란사건에 가담한 죄인들의 취조 과정에서 사주팔자 이야기가 많이 튀어나온다. 왜 다른 대목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다 하필이면 반란사건과 관련된 대목에서 집중적으로 팔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사주팔자는 어떤 방식으로 반란사건과 연결될 수 있었을까? 조선 초기인 단종 1년(1452)에 발생한 이용(李瑢)이란 인물의 역모 사건을 보자. 이용은 왕실의 여러 대군(大君) 가운데 하나였다. 역모사건 취조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맹인인 지화가 이용(李瑢)의 운수를 보고 망령되게 군왕의 운수라 하였고, 이현로(사주 전문가:필자주)가 이용에 대해 말하기를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운명이며 임금의 팔자’라고 하였다. 또한 풍수도참서(風水圖讖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하원갑자(下元甲子)에 ‘성인이 나와서 목멱정(木覓井)의 물을 마신다’ 운운 하였는데 서울의 백악(白岳) 북쪽이 바로 그곳이어서 참으로 왕업을 일으킬 땅이니 그곳에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용이 그것을 믿고 그곳에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호칭하여 도참(圖讖)에 응하려고 하였으며, 또 여러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군만 되고 말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맹인 지화가 주상의 팔자와 의춘군의 팔자를 비교해 점을 쳤다.” 


당시 대군 가운데 한명이었던 이용이 역모를 시도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본인의 사주팔자에 대한 확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확고한 신념 없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쿠데타를 어설프게 시도할 수는 없다. 이용의 경우에는 그 신념을 형성하는 기반이 바로 자신의 사주팔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신념의 기반은 정의감도 해당될 수 있지만 때로는 운명론도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반란사건의 구체적 실상을 추적하다 보면 직·간접으로 사주팔자를 믿고 가담한 사례가 수십 건이나 발견된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군왕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점지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왕권천수설(王權天授說)이다. 하늘의 뜻이 과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풍수도참과 사주팔자였다. 필자가 보기에 풍수도참과 함께 사주팔자라고 하는 담론체계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역사의 정권교체 과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온 단골메뉴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조선시대 반란사건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이 바로 숙종 23년 승려들이 이씨왕조 전복을 시도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주로 금강산에 거주하던 승려들이 주동이 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중국인 출신 운부(雲浮)라는 인물이 있었다. 운부는 당시 나이가 70이었다. 천문·지리·인사에 통달하여 그 식견과 경륜이 제갈공명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금강산 일대의 승려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운부는 금강산 일대의 승려들을 규합하고 황해도의 장길산 세력과 합류한 다음 정씨(鄭氏) 성을 가진 정도령을 내세워 역성혁명을 시도하였다. 운부와 장길산이 연결된 이 반란사건은 1970년대 반란사건 전공이던 영남대 정석종 교수에 의하여 연구 정리되어 그 자료가 소설가 황석영씨에게 제공되었다고 한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실제 있었던 이 자료를 기본 뼈대로 하여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것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씨가 쓴 소설 ‘운부’(雲浮) 역시 이 사건을 모델로 하였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건이었다. 


조선시대 금강산은 당취들의 본부였다. 조선시대 반체제 승려 세력들의 비밀결사를 ‘당취’(黨聚)라고 부르는데, 출가 승려들이 굳이 반체제라는 결사를 조직하게 된 배경에는 이씨왕조(李氏王朝)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작용하였다. 불교를 탄압하는 억불(抑佛)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취들은 제육(돼지고기)을 씹으면서 이씨 정권을 저주하였다. 돼지고기를 씹은 이유는 이씨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생년이 을해생(乙亥生) 즉 돼지띠였다는 데 있다. 


고려 말에 ‘돼지가 나무 위로 오르는 사람이 신왕조를 세운다’는 도참이 유행하였고, 아닌 게 아니라 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생년이 을해생이었던 것이다. 을(乙)은 목(木)이고 해(亥)는 돼지를 가리키므로 을해(乙亥)는 돼지가 나무 위로 오르는 모습이기도 하다. 당취들이 돼지고기를 씹는다는 것은 돼지띠인 이성계를 저주한다는 의미다. 당취들은 또한 ‘미륵(彌勒)사상’을 신봉하였다. 미륵이라는 한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이(爾) 활(弓)로 힘(力)을 길러 바꾸자(革)’는 의미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10년전 당취 후예로부터 직접 들은 바 있다. 돼지고기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미륵을 신봉하던 당취들의 본부는 전국적으로 2군데 있었다. 


하나는 금강산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산이다. 두 산 모두 여차하면 숨기에 좋은 깊은 산이다. 역대 조선의 도인들 가운데 가장 도력이 높았던 인물들을 출신지별로 정리해 보면 금강산파와 지리산파로 압축될 정도로 금강산과 지리산은 많은 비화를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당취들이 토색질하던 악질 부자들을 잡아다 그 죄질에 따라 참회(懺悔)시킬 때도 ‘금상산 참회’와 ‘지리산 참회’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 참회는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고, 지리산참회는 병신 만드는 참회였다. 숙종조에 활동한 운부는 그러한 전통을 가진 금강산 당취의 총사령관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이 사건의 공초 기록을 보면 운부의 생년과 운부가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려 했던 정도령의 사주팔자가 밝혀져 있다. “운부 및 이른바 정진인(鄭眞人)의 사주를 물으니, 이영창이 말하기를 ‘운부는 정묘생(丁卯生)이고, 진인(眞人)은 기사(己巳)년 무 

진(戊辰)월 기사(己巳)일 무진(戊辰)시에 태어났다’고 하니,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중국 장수인 묘생(卯生)의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팔방(八方)을 밟고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운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에 태어났다면 바로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 격이다. 숭정황제(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 편집자주)의 사주에는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 격이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자가 되었는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격이 둘이나 있으니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다.’(숙종 23년 1월10일 기록) 


사주팔자의 사주(四柱)는 네 기둥이란 뜻이고, 팔자(八字)는 여덟 글자라는 뜻이다. 연·월·일·시를 네 기둥으로 보고, 한 기둥에 두 글자씩으로 되어 있으므로 모두 여덟 글자이다. 운부를 중심으로 한 금강산의 승려세력이 이씨왕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한 정도령은 틀림없이 보통사람이 아닌 하늘이 내린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 비범한 인물의 사주는 평범한 사람의 사주와는 다른 특별한 사주였을 것이다. 그 특별한 사주가 바로 기사·무진·기사·무진(己巳·戊辰·己巳·戊辰)이었다. 


명리학을 아는 사람이 이 사주를 보면 과연 비범하다. 첫째, 연·월·일·시의 지지(地支)가 사진·사진(巳辰 ·巳辰)으로 되어 있다. 사(巳)는 뱀이고 진(辰)은 용이다. 뱀에서 용으로 변하여 뜻을 이룬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중국 숭정황제의 사주가 이렇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에는 중국 황제들의 사주도 회자(膾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천간(天干)을 보면 기무·기무(己戊·己戊)로 되어 있다. 기(己)와 무(戊)는 오행으로 볼 때 모두 토(土)에 속한다. 오행 가운데 토는 중앙을 상징하고, 중앙은 동서남북을 통어하는 제왕의 기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주의 천간(天干)이 이처럼 모두 토로 이루어진 사주는 제왕의 덕을 갖추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음양오행 사상으로 인간과 우주를 총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도표인 태극도. 반체제적 이념·성격 가진 命理學 


셋째는 지지의 구성을 거꾸로 보면 진사·진사(辰巳·辰巳)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사년(辰巳年)은 조선의 술객들 사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역성혁명가들의 이론서라 할 수 있는 ‘정감록’의 내용 가운데에는 ‘진사(辰巳)에 성인출(聖人出)’이라는 유명한 대목이 있다. 현재에도 주역이나 음양오행에 밝은 식자층들 사이에서는 자주 회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는 ‘진사년(辰巳年)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예언이다. 즉 진년과 사년에 변란이 일어나 그때 새로운 지도자인 정도령이 출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감록의 틀에 맞추어 보면 2000년인 경진(庚辰)년과 2001년인 신사(辛巳)년도 예사로운 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넷째는 조선 후기 숙종조에 오면 명리학이 보통 식자층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서자평의 명리학은 그 책을 입수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워 여간한 학문을 가진 상류계층이 아니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분야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일반인들이 반란 지도자의 사주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사주가 사회 저변에 유포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정도령의 이 사주는 다분히 조작된 사주일 가능성이 높은데, 유의할 점은 사주 조작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려고 시도하였다는 부분이다. 당취 지도부에서는 정도령의 사주팔자 자체가 엄청난 대중적 설득력을 지닌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주팔자가 반란사건과 관련해 등장하는 이유는 명리학 자체가 계급차별에 대항하는 대항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아니더라도 사주팔자만 잘 타고나면 누구나 왕이 되고 장상이 될 수 있다는 기회균등 사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풍수사상도 마찬가지다. 일반 서민도 군왕지지(君王之地)에 묘를 쓰면 군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풍수의 신념체계 아닌가. 


조선 후기 서북지역에서 발생한 홍경래난의 주모자들이나 동학혁명의 전봉준도 모두 사주와 풍수에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주팔자는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풍수도참설과 결합되면서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한 대중동원 메커니즘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모이는 사랑채에서는 정감록이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고,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방에서는 ‘토정비결’이 가장 인기였다는 이야기는 바로 풍수도참과 사주팔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례다. 


사주팔자의 구성 원리는 철저하게 음양오행의 우주관에 바탕 해있다. 만물은 음(陰) 아니면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음과 양에서 다시 수·화·목·금·토의 오행(五行)으로 분화되고, 오행이 다시 만물을 형성한다는 설명체계다. 사람의 사주도 크게 보면 양사주(陽四柱)냐 음사주(陰四柱)냐로 분류된다. 양사주면 활발하고 음사주면 내성적이라고 본다. 


음양으로만 이야기하면 너무 간단하니까 좀더 세분해 이야기하면 오행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수가 많은 사주는 정력이 좋고 술을 좋아한다든지, 화가 많은 사주는 언변이 좋고 담백하다고 보고, 목이 많은 사주는 고집이 강하고, 금이 많은 사주는 결단력이 있고 냉혹한 면이 있고, 토가 많은 사주는 신중한 대신 금전적으로 인색하다고 보는 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출생 후 이름을 지을 때도 오행에 따라 지었다. 이름을 지을 때는 그 사람이 출생한 연 월 일 시를 먼저 따진 다음, 만세력(萬歲曆)을 보고 네 기둥을 뽑는다. 사주팔자를 뽑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보고 불이 너무 많은 사주 같으면 뜨거움을 식히기 위해 이름을 지을 때 물 수(水)자를 집어넣는다. 사주가 너무 차갑다면, 차가움을 완화하기 위해 불 화(火)를 집어넣는다. 사주에 목이 너무 많으면 목을 쳐내야 하기 때문에 쇠금(金) 변이 들어간 글자를 이름에 집어넣는 식이다. 


반대로 사주팔자에서 목이 너무 약하면 목을 보강하기 위해 나무 목(木) 변이 들어간 글자를 사용하거나, 목을 생(生)하게 해주는 수자를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불이 많은 사주팔자에는 물이 들어간 이름자를 지어주면 불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이름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을 지을 때 오행의 과불급(過不及)을 고려하는 이와 같은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돈을 받고 활동하는 대부분의 작명가들이 이름을 지을 때 고려하는 제일차적인 요소는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보고 오행의 과불급을 따지는 일이다. 


족보(族譜)의 항렬(行列)을 정할 때도 오행의 원리에 따랐다. 조선시대는 대가족제도이고 대가족제도에서 위아래를 구분하는 기준이 항렬을 정해 놓고 이름을 짓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항렬이 나무 목(木) 변이 들어가는 식(植)자라고 하자. 아버지 항렬은 불 화(火)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영(榮)이나 영(煐)자가 그 예다. 


나의 항렬은 흙 토(土)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규(圭)자다. 나의 다음 항렬은 쇠 금(金)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종(鍾)자다. 쇠 금(金) 변 다음 항렬은 물 수(水) 변이 들어가는 글자 중에서 정한다. 예를 들면 영(泳)자다. 이러한 로테이션에는 법칙이 있다. 오행의 상생 순서(相生順序)가 그것이다. 오행의 상생 순서는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이기 때문이다. 수생목에서 수는 목을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수를 부모로 보고 목을 자식으로 보았다. 이하 마찬가지다. 


충남 예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 임금을 배출하는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민사소송 사건의 60%가 묘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이었을 만큼 풍수는 우리 생활에 밀착된 사상체계였다. 산을 보는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민사소송 사건의 60%가 산송(山訟)에 관계된 사건이라고 한다. 산송(山訟)이라 함은 명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소송사건을 일컫는다. 그만큼 풍수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풍수에서는 산의 형태를 오행의 형태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수체(水體)의 산은 물이 흘러가는 모양이고, 화체(火體)의 산은 불꽃처럼 끝이 뾰족뾰족한 산. 예를 들면 영암의 월출산 같은 산이다. 종교인들이 기도를 하면 ‘기도발’이 받는 산이라고 한다. 목체의 산은 끝이 삼각형처럼 된 산으로 문필봉이라 불렸다.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400~500년 된 명문가의 종가집이나 묘자리를 수십 군데 답사해 보니 그 중 70%가 그 앞에 학자가 배출된다고 하는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었다. 70%는 우연이 아니고 풍수적 원리를 고려해 일부러 이런 곳을 잡은 결과다. 금체(金體)의 산은 철모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산이다. 이런 산세에서는 장군이 나온다고 한다. 토체(土體)의 산은 책상처럼 평평한 모양을 한 산이다. 제왕이 나온다는 산이다. 박대통령 할머니 묘 앞에는 토체의 산이 안산(案山)으로 포진하고 있는데, 한국의 지관들은 대부분 박대통령이 토체의 산 정기를 받았으므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날을 정할 때도 이와 같은 5가지 형태의 산의 모습을 따라 정하였다. 장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자, 조선시대 각 지역의 정보교환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예를 들어 그 지역의 주산(主山) 모양이 수(水)체일 경우에는 1일과 6일이 장날이다. 숫자 중에서 1과 6은 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만약 주산의 모양이 화체일 경우에는 2일과 7일이 장날이다. 목체일 경우에는 3일과 8일, 금체일 경우에는 4일과 9일, 토체일 경우에는 5일과 10일이 장날이다. 즉 장날을 정할 때도 원칙 없이 아무렇게나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행의 원리에 따라 질서정연 하게 배치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지역일지라도 그 부근의 주산이 금체라는 사실을 알면 장날이 4일과 9일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음양오행 사상으로 인간과 우주를 총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도표가 바로 ‘태극도’(太極圖)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다시 오행이 나오고 오행에서 만물이 성립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도표가 태극도다. 태극도는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의 우주관을 압축시킨 그림으로써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모두 태극도에 관심을 가지고 저술을 남긴 바 있다.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남영의 태극도여통서표(太極圖與通書表), 송구봉의 태극문(太極問), 우암의 태극문(太極問), 한강의 태극문변(太極問辯), 사미헌의 태극도열문답(太極圖說問答), 화서의 태극설(太極說), 노사의 답문유편(答問類編) 등이 모두 그것이다. 주자성리학에서 도를 통했다는 의미는 바로 태극도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태극도는 조선시대에 중시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명리학의 기본원리가 바로 태극도라는 사실이다. 태극도는 명리학의 기본 골격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사주팔자를 보는 명리학자의 우주관이나 성리학자의 우주관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태극도의 음양오행 원리에 의해 역사의 변천이나 왕조의 교체,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해석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태극도에서 파생한 두 아들이 성리학(性理學)과 명리학(命理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리학은 인간 성품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고 명리학은 사람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나 같은 부모 밑의 두 아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성리학은 체제를 유지하는 학문이 되었고, 명리학은 체제에 저항하는 반(反)체제의 술법이 되었다. 성리학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양지(陽地)의 역사(歷史)가 되었고 명리학은 달빛의 조명을 받아 음지(陰地)의 잡술(雜術)이 되었다. 임금이 주재하는 궁궐 내의 학술세미나에서는 성리학이 토론의 주제가 되었고, 금강산의 험난한 바위굴 속에서 이루어졌던 당취들의 난상토론에서는 명리학이 단골 메뉴였을 것이다. 


명리학과 성리학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다 보니 진단과 서자평의 인간관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진단은 태극도를 중국 화산(華山)의 석벽에 각인하여 후세에 전한 인물이다. 태극도가 성리학자들에게 전해진 계기는 진단의 덕택이다. 그는 북송(北宋) 초기의 저명한 도사(道士)다. 후당(後唐)때 무당산(武當山)의 구실암(九室巖)에 은거하며 신선술을 연마하였으며, 북송 초기에 화산으로 옮겨와 살면서 여러 은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때 화산에서 같이 수도한 인물이 바로 명리학의 완성자인 서자평이다. 태극도의 진단과 명리학의 서자평은 같은 화산에서 인간관계를 맺으며 수도한 사이였다. 사람의 인연이란 이처럼 멀고도 가깝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맥락에서 서자평의 명리학이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학과 명리학이 같은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상호 보완적 관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사주팔자. 이는 개인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하는 점술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체계로 작동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신비적인 것이 곧 합리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조용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