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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 불교론

by 성공의문 2014. 2. 25.




슈타이너의 불교론


니시카와 류우항 편역

번역 : 엘토포

 

 

부처의 니르마나카야(應身) 

불교의 영적 전통은 고타마 붓다에게서 정점을 이루었다. 부처는 그때까지 수많은 윤회전생을 되풀이해온 존재이다. 기원전 6세기의 육화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 육화를 통해서 고타마는 비로소 부처가 된 것이다. 그 이전에 그는 보살, 즉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였다.

 

수천 년에 걸쳐서 사랑과 자비를 고차의 영적 영역에서 인간 가운데로 흘려보내는 임무를 가진 존재가 훗날 인도에 부처로서 육화한 보살이다. 물질계에 있는 인간은 사랑과 자비를 자신 안에서 스스로 찾아낼 수 없었다. 보살들은 비의입문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로 상승하여, 그곳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보리수 아래에 좌정한 보살이 부처가 되었을 때, 지구 전체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때 인간으로 살았던 부처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나타난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상세히 말한 것이 팔정도이다. 부처가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자신 안에서 생생하게 인식함으로써 인류는 부처와 장래에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 그때 이래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위대한 부처를 따라 팔정도를 실천하는 생활을 보냈다.

 

당시 부처가 체험한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까지 많은 사람들이 팔정도를 심혼의 능력으로 만들 정도로 성숙하고, 그 시점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의 것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부처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쏟아 부었다. 그 이래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은 인류 안에서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인류에게 가져오는 일을 사명으로 한 부처는 물질체를 버리고 떠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란 최후의 육화를 의미한다. 부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타마로서 육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때 이후로 부처가 된 보살에게는 물질체에 육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에테르까지 육화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영시만이 이 부처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물질체를 갖지 않는 모습을 니르마나카야(應身)라고 부른다.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과거 보살로서 받은 사명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니르마나카야 안에서 활동한 부처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라고 하는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응신불(應身佛)은 ‘만약 내가 힘을 빌려주면 이 아이는 인류를 크게 전진시킬 가능성을 물질체 안에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니르마나카야를 하나의 닫힌 몸으로 표상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힘에 불과했던 것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니르마나카야이다. 우리 안에 사고, 감정, 의지의 능력이 결합하고 있듯이 이 존재의 조직은 고차세계에서 어느 존재의 개아를 통해서 서로 맺어져있다. 영시자는 응신불에 속한 여러 존재들을 지각한다.

 

이와 같은 관계를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응신불이 예수에게로 내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영적세계로부터 천사 무리가 내려와 양치기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시자는 예수 위를 떠다니는 응신불을 보았을 것이다. 나이가 든 현자 아시타가 이제 막 태어난 부처를 보고 이 보살은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인도의 전설이 있다. 이 현자는 자신이 이미 늙어서 그 아이가 부처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아시타는 재육화하여 다시 노인으로서 아이인 예수를 만난다. <누가복음서> 제2장에 기록되어있는 시므온이 바로 그이다. 신전에서 예수를 만나 보살이 부처가 된 것을 보고 ‘주여, 이제 이 종이 평화롭게 가게 해주십시오. 나의 눈은 당신의 구세주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시타=시므온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것을 5백년 후에 본 것이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보살 (1905년 10월 1일, 베를린)  

지상의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그 경험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알고 있으며,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자를 보살(보디삿트바)이라고 부른다. 보디, 지구의 붓디를 충분히 자신 안에 받아들인 인간이다.

창조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지구의 모든 앎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 뒤에야 인간은 비로소 보살이 된다. 예를 들면 부처나 조로아스터는 보살이었다.

첫 번째 튀어 오름(카마)이 힘으로서 화성 위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인간이 육화하기 직전에 인간에게 덧붙여진다. 두 번째 튀어 오름(마나스)이 수성에서 아틀란티스의 제5아인종, 원 셈인에게 내려왔다. 이 새로운 추진력은 보다 고차 존재들, 여러 혹성의 응신(니르마나카야)을 통해서 지상에 가져오게 되었다. 그 존재들은 화성에서 카마를 가져오고, 수성에서 마나스를 가져와 덧붙였다. 응신(應身)들은 보살보다 한 단계 고차존재이다. 보살은 끊임없이 진화를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져오는 일은 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응신들 뿐이다. 응신들 보다 한 단계 위에 피트리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서있다.

일곱 단계의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신들, 두 번째 피트리, 세 번째 응신, 네 번째 보살, 다섯 번째 순수한 인간, 여섯 번째 인간, 일곱 번째 사대원소존재가 있다.

-《비의의 기본요소》중에서

 

 

부처와 보탄 (1908년 8월 14일, 슈투트가르트) 

보통 인간은 고대의 불분명한 의식 가운데서 천사를 지각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는 그리스인이 제우스 안에서, 게르만인이 보탄 안에서 신성으로 간주한 존재이다.

보탄은 과거 비의입문자로서 어느 인체 안에서 살면서 신성한 비밀의식에서 가르침을 펼쳤다. 보탄은 충분히 깊게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그 인간그룹 안으로 육화할 수 없었다. 그 인간그룹은 진화로부터 뒤쳐졌고, 그 때문에 물질계를 무가치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계를 가치 있는 신성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번뇌의 장소, 고통의 장소로 보았다. 그들은 물질계로부터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한 지복이라고 고찰하고 있었다. 이 보탄의 개체는 실제로 게르만 민족의 비밀의식 가운데서 가르침을 폈다. 이 개체는 훗날 같은 사명을 위해 부처로 다시 나타났다. 이 세계와 고차세계의 관계를 중계했던 부처라고 하는 개체와 과거 유럽에 존재하면서 북구에서 보탄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개체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부처의 사인  (1908년 8월 16일, 슈투트가르트) 

「부처가 돼지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동양학자는 부처의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기술로부터 평범한 것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비교(秘敎)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 기술은 부처가 동시대인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부처는 바라문교의 신성한 비밀을 너무 많이 세상에 전했다. 너무 많은 신비학을 세상에 전했기 때문에 부처는 죽은 것이다. 감추어진 것을 전하는 자가 죽음을 맞이하듯, 부처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것을 이와 같은 이미지로 말하고 있다.

선정불(禪定佛)로 판단되는 존재는 바로 역사상 실존했던 부처의 에테르체, 신들에 의해 붙들린 에테르체, 보탄의 개체에 의해 붙들린 에체르체이다.

-《우주・지구・인간》중에서

 

 

보탄과 부처 (1908년 9월 12일, 라이프찌히) 

육안으로는 아틀란티스인의 신체를 어느 정도까지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에테르체 안까지만 육화하는 존재도 있었다. 대기가 수증기로 가득했던 당시 어떤 존재가 육화했다. 인간이 물과 안개로 가득한 대기권에서 살고 있던 당시 아직 육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존재가 훗날의 보탄이다.「인간이 이 광액체(光液體) 물질에 육화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이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띄고 물질계에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지구가 경화되어 인간도 경화된 모습을 취하게 되자,「나는 이러한 단단한 물질 속으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보탄은 생각했다.

보탄은 지상에서 떨어진 비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렀다.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정화하여 고차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될 때까지 진화를 이룬 인간이 재육화하는 일이 있다. 그 같은 식으로 부처는 보탄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었다. 게르만 신화에서 보탄이라고 부른 존재가 부처로서 다시 나타났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은 물질계를 아주 조금 밖에 고려하지 않은, 물질계는 고통의 장소이고 물질계로부터 해방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부처 안에서 보탄 존재가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보탄의 가르침을 가장 깊이 이해한 것은 아틀란티스에서 늦게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신화와 밀의》에서 



부처와 보살과 선정불 (1909년 4월 16일, 뒤셀도르프) 

레무리아 시대에 인격의 신들이 인간 존재를 통해서 말하고,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대천사들이 말하고, 후 아틀란티스 시대에는 천사들이 말하고 있다.

외견상으로는 인간이라도 물질체에 이르기까지 자신 내부에 인격의 신들을 짊어진 인물을 동양에서는 선정불(禪定佛)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정불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의 신들이 물질체까지 침투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에테르체까지 대천사가 침투한 인물은 보살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천사가 물질체・에테르체・아스트랄체를 관통한 존재를 인간―부처라고 부른다. 선정불・보살・부처라고 하는 세 가지 위계가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한 명의 부처뿐만 아니라 많은 부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지상을 걷는 부처의 배후에 보살, 그리고 선정불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면 선정불과 보살이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하강하지 않은 채 보살이 에테르체에 침투하는 정도까지만 하강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체에 침투할 정도까지 가지 않고 에테르체에 영감을 부여하는 것에 머무르는 존재를 추정해볼 수 있다. 에테르체 안에서만 충현한 보살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와 같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살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보살은 고차존재로서 인간―부처에게 특별한 영감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사에 의해서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에테르체 안에 대천사로부터 영감을 받는 인간―부처가 있는 것이다.

-《물질계에서 신령존재의 반영》 중에서



부처의 탄생 (1909년 6월 25일, 카셀) 

부처가 인도에 출현했던 시대를 다루어보자. 당시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날 부처와 같은 존재가 출현한다고 해도 특별히 존경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시대에는 달랐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탄생에서 다른 사람의 탄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깊이 이해한 동양의 문헌은 부처의 탄생을 기품 있는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위대한 어머니의 모상’인 마야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녀가 힘 있는 존재를 세상에 가져오리라 예언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존재의 탄생은 세상에게 있어서 일종의 조산(早産)이었다.


의미 있는 존재를 세상에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늘은 그 존재를 종종 조산(早産)시키는 일이 있다. 인간 안에 고차의 정신존재가 육화해야할 때, 시기가 무르익은 것처럼 철저하게 물질과 결합하지는 않는 것이다.


동양의 중요한 문헌에는 부처가 태어난 순간, 부처는 빛났고, 곧 눈을 뜨고 동서남북을 보고 일곱 걸음 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곱 걸음 뗀 것은 대지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보살에서 부처가 될 인생이다. 이 지상에서 나의 마지막 육화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물론적인 사람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기묘하게 여겨질 것이다. 정신적인 눈으로 모든 일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진실이다. 당시는 자연적(천성적)인 영시력으로 부처와 함께 무엇이 탄생했는지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 사람은 지금 말한 동양의 문헌에서 전하는 부처의 이야기를 기묘한 것으로, 전설이나 신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정신세계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부처의 탄생과 같은 사건은 개인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의미가 있고, 세계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힘을 발산하는 법이다. 세계가 정신적인 힘을 받아들일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처의 탄생과 함께 치유와 화해의 힘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요한복음서와 공관복음서》에서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 (1909.10.18 베를린) 

나단계 소년 예수로 나타난 인물, 즉 본래의 나사렛 예수 위에서 그 아이의 오라로 나타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를 볼 수 있다. 니르마나카야는 석가가 부처가 된 마지막 육화 이후에 입은 형태이다.

보살은 정해진 육화 아래에서 부처가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존재는 더 이상 지상의 육체로 육화할 필요가 없는 진화단계에 이른다. 더 이상 육화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성과이다.


그 육화이후 보살・부처는 더 이상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는다. 지상적・육체적인 육화를 하지 않고 에테르체(생명체)를 가장 낮은 신체적 본성으로서 육화할 뿐이다. 이 개체는 이후에도 에테르체 안으로 육화했다. 부처는 이제 물질체로 육화하지 않고 에테르체까지만 육화하는 것이다.


부처와 같은 개체가 육화하는 에테르체는 닫쳐진 단일한 공간이 아닌 관련이 없는 수많은 부분들로 되어있다.

그와 같은 보살・부처가 에테르체에 육화하여 다시 나타날 때는 한 무리의 존재라고 하는 모양으로 눈에 보인다. 「누가복음서」의 저자가 들판의 양치기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에서 이러한 한 무리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니르마나카야라고 부르는 이 에테르체가 나단계의 어린 예수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이 니르마나카야가 영감을 부여하고 부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교 안에 쏟아 부었다.


이것이 「누가복음서」안에서 부처의 니르마나카야인 천사무리로 쓰여 있다.

보살・부처 안에 육화한 개체는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시대에서 시대로 전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보살이 부처로서 존재했던 때 보살을 통해서 사랑에 관한 내용이 암시적으로 불어넣어졌다. 그로부터 인간이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점차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 이른바 팔정도의 가르침을 획득해나갈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과거 위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것이 부처가 지상에서 활동했을 때 처음으로 가르침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을 가져오는 것이 부처의 사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힘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사랑의 힘이 아래로 흘러 지상으로 내려온 태양 존재를 통해서 드러날 가능성이 주어졌고, 자비와 사랑의 가르침이 부처를 통해서 전해질 가능성이 주어졌다.


부처가 가져온 것을 위대한 법,「다르마」라고 부른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부처는 법을 혼이 그 법을 인식하고, 인간이 그 법을 자신의 심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형태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가져왔다. 모세는 법을 명령으로서 가져온 것이다.


부처는「그대들은 자신의 혼 깊숙한 곳에서 내가 말한 법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세는「하느님의 법이 이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앞으로 나아갔을 때 보살・부처는 이 가르침을 가져올 수 있었다.

-《복음서의 빛으로 비춘 인류생성의 심오한 비밀》 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 대한 부처의 의견 (1913년 10월 5일, 오슬로)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과 이념을 주고받은 결과 예수에게 부처나 나타났다. 그리고 예수와 부처 사이에 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다. 부처는 예수에게「만약 내 가르침이 내가 설파한 그대로 완전히 실현된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속세로부터 벗어난 청정한 승가를 만든 것은 잘못이었다. 에세네파 교단 사람들도 세간을 등짐으로써 정신적인 진화를 이루었다. 그들은 깨끗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다. 속세의 사람들을 희생해서 자신이 꺠끗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실현한다면, 에세네파 교단처럼 청정해진 사람들이 출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제5복음서》중에서


 

에세네파 교단에서 예수와 부처 (1913년 11월 4일, 베를린) 

에세네파 교단의 행동 방식은 부처가 세상에 가져다 준 것과 매우 닮아있다. 예수는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부처는「내가 인류에게 전해준 길로는 모든 사람이 신적・영적 세계와의 연관성에 이를 수 없다. 내가 설파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시하는 사람이 없다면 부처와 제자들은 보시를 받을 수 없다. 부처의 가르침은 어떠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육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5복음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