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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벨문학상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 인터뷰

by 성공의문 2008. 12. 9.


"문학을 통해 타자(他者)를 받아들이고 인격의 변화 일으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ézio · 68)는 한국을 사랑하는 프랑스 소설가다. 이화여대 해외 학술원의 석좌교수로서 올 한 해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그는 노벨상 발표 일주일 전까지 서울에 있었다. 오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기에 앞서 4일 파리의 자택에서 조선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한 르 클레지오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 1유로가 약 1200원이었는데,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여파로 인해 1유로가 거의 2000원이 될 정도로 원화 가치가 폭락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위로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보람' '정(情)' '매미' '삼국유사' 등의 한국어를 정확히 발음했다.

―언제 한국에 돌아올 건가.

"아마 2월이나 3월에 갈 것 같다. 이화여대 학술원과 상의할 일이 남았다. 호텔 숙박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그동안 이화여대에서 기숙사의 작은 방을 제공했었다. 사방이 흰 벽인 그 방은 집필실로 쓰기에 딱 좋았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소설 《허기의 간주곡》(Ritournelle de la faim)을 거기서 썼다."

―다시 오면 최소한 6개월 정도는 머물 것인가.

"그렇다. 한국을 떠나 있으면 한국어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매번 새롭게 익혀야 한다. 영어, 프랑스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쉽게 배울 수 있는 독특한 언어다. 한글 읽기를 깨치는 데 하루면 족하다. 한글은 매우 과학적이고 의사소통에 편리한 문자다."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이제 한국어까지 할 줄 안다니 놀랍다.

"아니, 아니(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한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다.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단어들로 '보람'과 '정'을 꼽을 수 있다. '보람'은 용기를 북돋우면서 희생도 요구하는 독특한 말이다. 영어와 프랑스어에는 합당한 번역어가 없다. '정'도 그렇다. 긍정적이면서 부정적인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내가 남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남이 정을 달라고 하는 것은 내게 부정적이지 않은가(웃음)."

―서울이 그리운가.

"그럼, 그럼….(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서울은 역동적인 도시다. 파리는 몇 년을 떠났다가 돌아와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서울은 두 달만 비우면 새 건물이 들어선다. 물론 서울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한강은 매우 크고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강이다. 서울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새들이 지저귀기 때문에 산책하기 좋은 언덕이 약 50군데나 있다. 특히 여름철에 '매미'가 노래하는 소리를 이화여대에서 들으면서 나는 현대문명과 농경사회의 혼합을 느꼈다. 서울처럼 매미 울음 소리가 자동차 소음보다 더 큰 수도(首都)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은 《삼국유사》도 읽었다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 《삼국유사》를 현재 프랑스어로 번역 중인 원고를 읽었고 영어판도 읽어봤다. 프랑스인들은 한국이 프랑스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잘 모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아주 다른 한국 문화의 원류를 담은 설화와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올 것이다."

―당신은 첫 소설《조서》에서 유년기는 자연과 소통하는 '유희적 우주'라고 강조했고, 다른 소설에서도 유년기의 의미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다.

"생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공부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을 도둑맞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당신은 오늘날 문학의 위기를 의식한 듯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던졌다.

"나는 '문학을 통한 세계 이해'를 사랑한다. 과학 서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때와는 달리 우리는 문학 서적을 읽으면서 '타자'(他者)를 받아들이게 되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격'(personalit�)에 변화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당신이 황석영의 소설을 읽을 때 당신은 그가 말하는 것에 무관심할 수 없고, 황석영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황석영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나는 동시대 한국 작가들 중에서 여성 소설가 한강(韓江)의 작품을 주목한다. 그녀는 언론이나 사회학 서적에서 읽을 수 없는 한국적 삶의 신산(辛酸)을 아주 간결하면서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또한 이승우의 소설도 주의 깊게 읽었다."

―12월 10일 스톡홀름에서 열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당신이 할 수상 연설의 주제는 무엇인가.

"문학에 관한 회의주의와 낙관주의를 함께 말할 것이다. 작가가 빈민들의 편에 서서 소설을 썼는데, 정작 그 빈민들은 소설책을 사 볼 여유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문학의 모순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아내가 문학의 낙관적 측면을 일깨워 줬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문자를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문학은 문맹 퇴치에 가장 좋은 수단이다. 모든 작가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 세계가 경제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경제 전문가가 아닌 작가들이 문제 해결에 직접 기여할 일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작가들은 부유한 나라를 향해 가난한 나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고통을 분담하라고 촉구할 수 있다."


르 클레지오는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68)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아내 제미아는 모로코 출신이다. 르 클레지오의 조상들은 프랑스 부르타뉴 지방에 살다가 대혁명 기간 중 가난을 피해 인도양의 모리셔스섬에 정착했고 이 섬은 후에 영국 식민지가 됐다. 부친은 나이지리아 등에서 20여 년 동안 의사로 활동했다. 그의 소설 《아프리카인》은 부친의 일생을 회상해 재구성한 작품이다. 최신작 《허기의 간주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살았던 모친의 체험에 상상력과 허구를 곁들인 소설이다.

르 클레지오는 1963년 첫 소설 《조서》로 유럽의 현대 문명을 비판,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미국 등을 떠돌아 다니면서 '유목작가'로 변신해 제3세계의 다양한 신화와 역사 탐구를 바탕으로 선진국 주도의 획일적 세계화를 비판했다. 40권이 넘는 작품 중 《홍수》 등 10여 권이 1960년대 말부터 한국어로 꾸준히 번역돼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새로운 출발과 시적 모험, 감각적 황홀의 작가이자, 지배 문명 너머 혹은 그 저변에서 인류를 탐구하는 작가'라며 2008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조선일보파리,박해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