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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네가지 희생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바젤, 1914년 7월 1일

GA 152



현대문명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그리스도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정신과학(the science of the spirit)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새로운 그리스도 인식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인 봉인을 책임지고 있는 많은 곳에서 이 새로운 인식을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헌신(unselfishness)의 학파가 현재 우리문명에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책임감 쇄신(갱생, 부활)과 도덕적 생활의 심화는 헌신의 수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찾아오며, 현시대 상황 하에서는 모든 것에 충만한 진실 된 헌신에 대한 이해를 얻는데 승리한 자들만이 이 학파를 통해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진화 전체를 통틀어서 그리스도가 지상에 출현하여 드러낸 헌신의 이해보다 더 깊은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헌신의 학파를 경험하는 것이며, 우리 내면의 모든 이타적 성향에 온기와 활력을 부여하고, 활기 없는 혼적 삶(soul life)을 능동적으로 각성시키는, 조용히 우리의 혼에 들어와 인간을 발달시키는 그런 모든 동기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물론의 영향 하에서 먼 미래에만 완전히 깨달을 정도로 인류의 본성적인 헌신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하지만 골고타의 신비를 명상함으로써, 그 지식을 우리의 모든 감정(感情)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우리의 혼(soul-being) 전체에 헌신의 소양(덕성, education)을 다시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지구적인 진화를 위해 행한 일들이 헌신의 근본적 충동에 포함된 것이며, 그가 인간 혼의 의식적인 발달을 위해 되려고 한 것(존재)은 헌신의 학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골고타의 신비와 그것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기적은 잘 알고 있듯이 지구의 물리적 진화과정에서 단 한번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존재는 단 한번 인간의 몸을, 나사렛 예수의 몸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행위는 3번의 준비단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보다 앞서 3번의 유사한 성질의 무엇인가가 지상이 아닌 영계(the spiritual world)에서 일어났으며 우리는 어떤 의미로 아직 물리적인 면으로 성숙되지 못한( 충족되지 못한) 3번의 골고타의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와 바오로 서간에 언급되어 있듯이 오직 4번째만이 물리영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이 사건은 3번의 초지구적(영계) 행위에 의해 준비 되었는데 한번은 고대 레무리아 시대에, 두 번은 아틀란티스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비록 이 3번의 준비단계가 지구를 초월한 영계의 영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힘들은 지구로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이 힘들이 인간진화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는데 힘을 쓸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생활, 세계에 대한 이해에 관해, 또 의식혼의 모든 활동에 관하여 우리는 우선 헌신(獻身, selfless)적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우리 문화가 가지는 의무입니다. 인류는 점점 더 많이 헌신적이 되어야합니다. 지구적인 인간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올바른 삶의 미래는 거기에 놓여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적 삶은 헌신으로 가는 길 위에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어떤 것에 관련해서 본질적 헌신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도덕적, 지적, 정서적 삶에서 인간 존재의 어떤 부분이 여전히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구적인 인간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만약 비슷한 정도의 이기심이 우리의 감각을 붙잡을 수 있다면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감각들은 지금 성실히 이타적 방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에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눈을 통해서 봅니다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눈의 존재를 느낄 수 없고 눈이 헌신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게 됩니다만 눈 그 자체는 우리의 지각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우리의 눈이 이기적이라고 해봅시다.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파란색에 접근한다면 눈은 파란색을 통과시키는 대신 눈 내부에서 즉시 색을 소진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서 일종의 흡인력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눈이 도덕적, 지적, 정서적 삶에 대해 현재 우리가 가진 만큼 이기적이어서 스스로의 내부에서 빨강의 영향을 경험하고 싶다고 바란다면 우리는 날카롭게 찌르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눈이 이기적이었다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인상은 우리에게 흡인되거나 찌르는 고통을 줄 것입니다.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럽게 의식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성은 보는 과정 없이도 색과 빛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눈은 인식과정에서 이타적으로(헌신적으로) 침묵하며 다른 감각 또한 같습니다.


우리의 감각들에 헌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고대 레무리아시대에 루시퍼가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감각들은 이 헌신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의 눈을 떠라」라고 말한 정신(spirit) 은 인간이 지구적 삶의 영역으로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루시퍼의 영향 하에서 발달되었다면 거기서 인간의 눈은 이기적인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상마다-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같았겠지만-인간은 「오- 그것이 나를 찌른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는 주위 환경에서 빨강을 지각하지 못했습니다. 또는 「오 무엇인가가 내 눈으로 흡수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파랑을 의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러한 흡수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레무리아 시대 이 인간성에 대한 위험은 나중에 골고타의 신비를 통해서,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육화(incarnate)했던 존재에 의해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초기시대의 경우 그는 스스로를 대천사(archangel)중 하나에 혼을 불어 넣은 것으로, 저는 육화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레무리아시대를 통해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고차의 영계에서 살고 있던 존재가 - 일종의 세례 요한의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신의 혼의 힘들을 바칠 대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지상의 인간진화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해방되었습니다. 이 영향의 결과물이 우리 감각의 안정화와 조화로움이며 이로 인해 우리들은 자신의 감각에서 헌신을 발견하고 그 감각을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이해하고 세계질서에 감사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이러한 고대를 되돌아 볼 때 인간이 감각적 존재로써 고통 없이 주위 자연의 모든 장엄함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희생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대천사로 자신의 혼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는 인간에게 이기적 감감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이것이 골고다 신비로 이끄는(이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인류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마주대할 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볼 때, 동물, 광물, 식물계에서 태양이 비추는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 인류는 이 깊고 중요하고 종교적인 느낌들을 점차 발달시키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내가 나를 둘러싼 주위를 볼 수 있도록 그 세계에 존재하고, 나의 감각이 고통의 원천이 아니라 장엄한 세상을 지각하게 하는 도구라는 것은 골고다의 신비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희생에 힘입은 것이다.”라는 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견지로 자연에 대한 모든 관찰과 향유에 그리스도가 충만해질 시대를 앞서 살펴본다면, 사람들은 상쾌한 봄과 여름의 따뜻함, 또는 자연에 대한 그 외의 모든 기쁨 안에서 자신이 새로워질 때 스스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모든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감각 내부의 그리스도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아틀란티스진화 제1기에 이기심이 -이번에는 루시퍼와 아리만을 통해서- 인간 유기체의 다른 부분, 즉 생명기관을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생명기관에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찰해봅시다. 그 본질적 성질은 무엇일까요. 기질성 질환(organic disease)에 의해 해를 입었을 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심장, 폐, 위 등 생명기관의 이기심 때문에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사람은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신에게 심장이나 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관이 이기적이 되어서 우리 내부에서 자신의 독립된 삶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통상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각각의 기관들은 우리 내부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생명기관이 육체의 헌신적인 종으로 남을 때만이, 위장이나 폐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할 때만이 우리의 평범한 조직(구성)은 물리적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우리를 유지시킵니다.


왜 기관의 이기심으로부터 병이 생기는지는 다른 기회를 통해 고찰하기로 합시다. 오늘 토론은 정상적인 상태에 한정할 것입니다. 루시퍼와 아리만에 의존했다면 이미 아틀란티스 시대에 전혀 다른 상태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각 기관은 이기적으로 될 것이며 그 결과는 지극히 이상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외부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 같은 무엇인가를 보았고, 그것이 그의 생명기관과 어떤 종류의 관계에 있다고 가정합시다. 언젠가 우리의 기관과 외부 세계의 이러한 관계는 순수한 과학적 연구 주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다른 과학이 정신과학과 제휴하게 된다면, 인간이 나무에서 버찌를 따서 먹을 때 특정한 기관과 관계하는 무엇인가가 그 버찌와 함께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과일들은 다른 기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유기체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그 유기체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루시퍼와 아리만이 아틀란티스 시대에 그들의 의도를 성취시킬 수 있었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버찌를 딸 때 버찌와 관계가 있는 기관이 도가 넘치는 탐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기적인 기관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른 모든 기관들 또한 똑같은 이기심으로 그것에 저항하려고 싸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유해한 것이 있다고 합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인간성에 유익한 것이 있으면 인간성에 해로운 영향을 주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독이 있는 식물에 접근하거나, 또는 어느 기관에 유해한 것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한 기관에 화상을 입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와 마주대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먹을 것이 아닌 우리를 둘러싼 공기를 고찰해봅시다. 대기의 각 원소들이 우리의 여러 기관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루시퍼와 아리만의 의도대로 되고 그 상태가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기관을 만족시키는 것에 대한 동물적 욕구, 또는 모든 유해한 것들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에 의해 세상을 이리저리 쫓겨 다녔을 것입니다. 만약 기분 좋은 냄새를 향하거나 메스꺼운 것을 피해서 강제로 우리를 고무공이나 장난감처럼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그런 육체기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신을 발달시켜야할지 상상해보십시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우리의 생명기관을 복종시키고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은 제1아틀란티스 시대에 영계에서 일어난 위대한 사건의 결과이며 이것이 골고다의 신비를 향해 취해진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스도적 존재는 다시 대천사로 자신의 혼을 불어넣었고, 지구의 대기 속으로 빛이 비춰진 이 행위에 의해서 생명기관을 조화와 균형이 있게 하고 그것들을 헌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 사건이 없었다면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심한 병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온전히 건강한 상태로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전망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영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로 충만해질(채워질) 수 있을 때 인간성이 의지하고 있는 영적존재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경건함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물리적 인간으로서 헌식적인 기관들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이 세계에서 스스로를 발달시킨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내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도록 나의 기관들을 변화시켜(conditioned)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이렇게) 본질적이고 가장 포괄적 의미에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주시하는, regard) 법을 배우게 되고, 우리는 「내가 아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실제적인 골고다 신비 이전 세 번의 예비단계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성의 완전한 진화를 준비했습니다.


마지막 아틀란티스시기에 인간성은 세 번째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고, 감정, 의지가 이기심의 침투에 의한 무질서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것저것을 하려고 생각하고 의지의 이런 저런 충동에 따랐을 것이고 그러는 동안 그의 사고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감정은 또 다른 방향으로 그를 몰아댔을 것입니다. 인간진화에 있어서 사고, 감정, 의지는 결합된 혼의 헌신적인 구성원이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시퍼와 아리만의 영향 하에서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독립적으로 이기적이 된 사고, 감정, 의지는 그리스도의 조화로운 작용을 산산이 찢어놓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아틀란티스진화 종말 무렵에 3번째 그리스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적 존재가 스스로 대천사에 혼을 불어넣었고 그로 인해 영계에서 발생한 힘은 사고, 감정, 의지의 조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실제로 물리적 태양광선이 식물의 생명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상에 작용해야하는 것처럼 태양령(Sun Spirit)은 지금 설명했듯이 지구를 초월한 영역으로부터 지상으로 반영되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그리스도 사건이 없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치 분노에 내몰린 것처럼 그는 감당할 수없는 욕망과 의지의 활동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이기적 이성(지성, reason)이 분노에 미친 의지에 의해 초래된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조소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지라도 그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가 3번째 대천사의 혼을 외적모체로 취한 제3그리스도 사건에 의해서 이런 일을 피 할 수 있었습니다.


인류는 인간의 정열과 인간의 사고가 영계로부터 하강한 힘들에 의해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서 조화롭게 되었는가에 대한 얼마간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이 기억의 흔적(기호, 표시)은 바르게 이해되고 있지 않습니다. ‘드래곤을 정복한 성 죠지’나 ‘드래곤을 전복한 성 미카엘’은 그리스도가 대천사로 자신의 혼을 불어넣었던 3번째 그리스도 사건의 상징입니다. 발아래 짓밟힌 드래곤은 사고, 감정, 의지에 혼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드래곤을 정복한 성 죠지나 성 미카엘 또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삽화들에 시선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제3의 그리스도 사건을 지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틀란티스 시대의 말기 영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훌륭한 신화로 재창조해낸 그리스인은 태양령을 인간의 사고, 감정, 의지를 조화롭게 만든 존재로서 숭배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 태양령이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에테르적 영의 형태로 혼을 불어 넣었습니다.」에서 그 형태는 오늘날 우리가 대천사라고 부르는 형태입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미쳐 날뛰게 했을지도 모르는 사고, 감정, 의지에 인간 혼의 음들(tones)이 조화롭게 울리게 하는 당신의 수금(竪琴)으로 질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렇게 태양령은 미쳐 날뛰는 열정들(passions), 즉 때때로 지구 내부로부터 올라와 표면을 깨고 증기(노여움, fumes)로 분출했던 그 열정들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이 그러한 정열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오직 이들 증기(망상, vapor)만이 인간에게 작용했다면. 사고, 감정, 의지는 인간의 내부에서 미친 듯이 사납게 날뛰었을 것입니다. 그리스인은 퓨티아를 그러한 증기(vapor) 위에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증기는 지구 내부에서 솟아오를 때 루시퍼와 아리만을 통해 정열을 혼란으로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퓨티아의 위에 아폴로가 빛을 비추고 미쳐 날뛰는 정열을 정복하여 그녀는 무녀(여사제, sibyl)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아폴로, 태양령은 3번째 희생단계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이었고, 아폴로 신에 의해 주어진 퓨티아의 힘 아래 인간들의 정열의 조율(조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행위의 결과를 인식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리스인에게 아폴로는 드래곤에 대항해 승리를 거둔 미카엘이나 성 죠지로 표출된 존재였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의 비상한 발언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비록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교의 대표자들이 이 발언을 이단이라고 단정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존중해야합니다.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라클리테스(heraclites),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기독교도였다. 골고다 신비가 실제로 성취되기 이전에 가능한 유일한 종류의 기독교교도였다」오늘날 신학자들은 더 이상 그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교 초기 수세기동안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이 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아폴로에 대한 물음에 신비적인 영지로부터 「 미래에 지상의 인간으로써 살게 될 위대한 태양령은 마치 대천사의 형태로 혼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아폴로로 나타난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4의 신비, 지구적인 신비, 골고다의 신비입니다. 3번 대천사형태로 혼을 불어넣었던 그리스도적 존재가 이른바 요르단 강에서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나사렛 예수의 몸으로 육화했습니다.


나는 이 위대한 존재가 3번 대천사의 형태로 그리고 인간으로 육화(incarnation)했다는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대천사로의 입혼(ensoulment)과 인간으로의 육화 사이에 그가 천사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좀 더 정연한 진행인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정신과학의 진술을 허구라고 주장할지라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뒷받침하는 증거로부터 이것을 모을지도 모릅니다.(여러분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그리스도가 하이어라키(hierarchy : 대천사)에서 하이어라키로 하강하지 않고 나중에 인간으로 하강한 것은 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결코 이론적인 조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연구에 의해서 이끌어낸 사실은 그리스도가 3번 대천사의 형태를 선택하고 네 번째는 천사형태를 생략하고 인간의 몸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미래의 연구에 남겨두겠습니다.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릅니다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다음은 4번째 단계의 골고다의 신비로 루시퍼와 아리만이 인간의 자아(ego) 또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려던 또 다른 위험을 이 신비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레무리아시대에는 루시퍼를 통해서 감각기관이 무질서로, 제1아틀란티스시대에는 생명기관이 혼란과 부조화로, 그리고 후기 아틀란티스시대에는 혼의 기관, 사고 ? 감정 ? 의지의 근간이 되는 기관이 위협받았습니다. 후 아틀란티스기에는 인간의 자아 그 자체가 위험에 빠졌습니다.


이 때에 자아 또는 ‘나’는 인간진화에 있어서 살아있는 인자로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이 자아가 우주의 힘들의 장남감이 되지 않도록 둘 사이의 조화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아가 우주적 힘들의 노리개가 되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자아는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고 있을 수 없도록 발달되어, 혼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바람, 공기, 물로부터 발생한 온갖 종류의 엘리멘탈(elemental) 힘으로 인도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을 폭력적으로 여기저기로 내몰았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시빌(Sybils)」에서 그는 인류를 위협한 존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솜씨로 다가올 에고의 혼란, 그로인해 비록 모든 가능한 영지(wisdom)가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제어하는 일도 방향을 잡는 일도 불가능한 혼란을 느낀 인간형태를 표현했습니다. *엘리멘탈적 존재들에게 맡겨진 자아를 표현한 그림에서 여러 혼란의 정도를 미켈란젤로가 어떻게 그렸는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또 다른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그는 예언을 묵상하는 인물을 그렸으며 그 표정은 우주를 향해 자아의 완전무결함을 보호하는 것들의 빛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에게서 자아를 향한 압박과 긴박함을,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서 자아 그 자체를 통한 혼란의 괴로움을 볼 때 우리는 깊이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또한 이 공간에 서있는 존재는 그리스도, 인간의 몸으로 육화한 그리스도이며. 그는 세상에 태어날 자아에게 조화와 질서를 가져와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신과학은 이 인간 자아가 4번째 그리스도 사건, 골고다의 신비를 통해서 진실한 헌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우리에게 각인시킬 것입니다. 이미 감각은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 내안의 그리스도다.」이미 생명기관은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 내안의 그리스도다.」 인간은 그의 도덕적 지적 삶에서「내가 아닌 내안의 그리스도다.」라는 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또 다른 기회를 통해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오컬트적 증거들을 제공하기 위해, 정신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지적 삶 안에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이 헌신(selflessness)의 학도가 되기 위해, 정신과학에 대한 토론을 통해 발설되는 말 하나하나에서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기위해 나는 오늘 이것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하나 더 말해둘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1909년부터 우리가 뮌헨에서 신비극을 상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무대에 올린 극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좋은지 나쁜지 고찰해 볼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 일어난 일들은 어떤 영적인 힘, 인간이 단지 지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접근하지 않는 힘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도나흐에서 일하며 다양한 종류의 단단한 목재를 조각하고 있기 때문에 강한 근육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힘을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 우리의 혼적인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우리가 영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영적인 일은 우리의 제어 하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에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물리적으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재능이 아닌 몸의 근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근육의 힘이 혼의 외부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우리 외부에 있는 많은 영적인 힘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피상적인 비판자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보다. 당신은 영적세력이 외부로부터 당신에게 온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 자신의 내적 존재로부터 상승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내가 바보라고 생각하게 놔둡시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굶주림과 한 조각의 빵을 구별하지 못하는 교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영적 힘들이 어떻게 외부로부터 인간 내부로 흘러들어오는지 알고 있습니다. 굶주림이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빵을 창조한다고 하는 이념은 -미친 사람밖에 믿지 않겠지만- 우리가 가진 혼의 힘들이 영적활동을 위해 필요한 힘들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는 것만큼 허황된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은 반듯이 우리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굶주림이 우리의 내부에 있고 빵은 외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듯이 영계에서 살고 있는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 무엇이 있고 외부로부터 무엇이 오는지 알고 있습니다. 1909년 이후부터 신비극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용히 발전시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영적 힘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성취되어진 것에 영적인 눈(a spiritual eye)이 머무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이것은 내가 직접적인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정신과학을 연구하고 있던 초기에 한 지인이 우리를 찾아왔으며, 그녀는 당시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을 정열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그녀는 인간의 진화, 우주의 신비, 재육화(reincarnation), 카르마에 관한 것들을 헌신과 정열을 가지고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훌륭한 미의식을 보탰습니다. 가르치는 장소이든 대화의 장소이든 이 사람과의 경험 하나하나에는 아름다움이 배어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당시 소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방에 서로 아우성칠 필요가 없었고 우리가 지금 많은 청중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당시에는 나와 다른 두 명 이렇게 3명이서 의논한 것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 말한 멤버는 1904년에 물질계를 떠나서 영계에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후에도 발달을 지속합니다. 1907년 회의에서 우리가 『에레우시스의 신비(Mystery of Eleusis)』의 슈어(Schure)의 재건을 상연했을 때, 영적 영향은 조금도 지각 할 수 없었습니다. 1909년에 영적인 영향이 시작되어 그 이후부터 점점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객관적으로 또한 그녀의 독창성으로 미루어 그것이 사랑하는 친구의 개성(개체성, individuality)이라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계로 옮겨간 그녀는 신비의식(Mysteries) 속에서 심미적이고 비교적(esoteric)인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우리가 성취하는 모든 것에 수호천사로써 활동했습니다. 우리들은 보호받는다고 느꼈으며,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의 지상적 활동으로 흘러드는 것이 영적 인격의 경계(watchfulness)의 표출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으로 위를 향해 눈길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인격과 대화하게 되었을 때 -어떤 상호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그녀는 우리가 지구의 진화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고에 충만해질수록 우리를 향한 길을 더 쉽게 찾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그녀가 반복한 것을 지상의 말로 옮겨 놓는다면, 물론 영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당신들이 정신과학을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말의 표현으로 만드는 방법을 항상 추구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에게 가는 길을 쉽게 찾아낸다.」


그리스도 충동( The Christ impulse)은 우리를 위해 초물질적인 세계에서의 삶과 지상적인 삶 사이의 살아있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계로부터 인간을 위해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적 조성을 3번 정돈했습니다. 그리스도는 3번 개입하여 인간의 감각 기관, 생명 기관, 혼의 기관을 헌신적(unselfish)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과제는 「내가 아니고, 내 안의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말의 이해를 통해 도덕적, 지적 삶에서 헌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신과학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의 말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 정신과학의 사명은 살아있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지상의 활동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낸 것을 알고 있는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자의 이해와 일치하게 됩니다. 만약 죽은 자들이 가장 가까운 보호자로써 지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힘을 쏟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 충동이 침투하여 영화된 가장 강렬한 저들의 혼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태양정신으로써 골고다의 희생을 통해 초물리세계로부터 사람들의 혼에서 거주지(dwelling)를 찾아내기 위해 하강했습니다. 정신과학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혼에서 어떻게 거주지를 찾아내는가를 전하는 메시지여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지상적 혼에서 그의 주거지(adobe)를 찾아낸다면 그 때 그리스도의 힘은 지구의 오라로부터 그가 인류의 구제를 위해 버린 세상 속으로 역류하여 전 우주가 그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침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과학에 우리자신을 완전히 몸담음으로써 골고다의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것을 고찰하고, 더욱 그것을 미래의 인간성의 지식적 도덕적 삶을 위한 헌신의 학파(a school of unselfishness)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골고다의 신비에 대한 정신과학적 선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삶에 들어오려고 애쓰는 정신과학적 충동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충동은 모든 사람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에 침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국가만을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위대한 태양정신으로 그는 전 지구에 속해 있고, 국가와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충동과 골고다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기를...! 그 때에는 어쩌면 오늘날 반기독교적 그리고 이단으로 각인되어진 것이 가장 기독교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들이 골고다의 신비에 대한 단순한 지식적 이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혼 전체로 파악하려는 능력을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정신과학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영적 흐름의 일원으로써 우리들은 지금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필수불가결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허락된 저들의 혼에 귀속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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