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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세계화 - 대재앙인 이유

by 성공의문 2008. 11. 4.

밀턴 프리드먼으로부터 연유된 자유주의 경제학의 파탄은 '세계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허상의 파탄을 의미한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누가 세계화를 주창했고, 누가 세계화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며, 파탄난 세계화를 대체할 근본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세계화에 대한 맹신은 강남 사는 부모들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자식들의 혀를 잘라서라도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줄 정도 였다. 세계화는 제국주의적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 발전국가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만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전파할 뿐이다. 그들은 자국의 산업이 유치산업 단계일 때 보호론을 주창했고, 산업이 경쟁력을 가졌을 때는 타국에 개방을 강요했다. 개발도상국들이 불평등을 호소할 때 그들은 세계는 평평하다며 개도국의 주장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세뇌된 학자들이 파워엘리트로 자리잡은 개도국은 미국의 개가 되어 신식민지화 정책의 선봉이 되었다.

이명박은 미국 대선이 초읽기에 들어간 마당에 한미 FTA 통과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미 대선의 승자가 확실시 되는 오바마는 한미FTA 협상에 문제가 있다며 재검토를 시사한 마당인데 이러한 기초적인 정보조차 무시하는 이명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외려 우리는 부시의 강요로 인한 한미FTA의 굴종적 협정 자체가 무산된 것을 뛸 듯이 기뻐해야 할 상황인데 말이다. 다자간 무역협정은 헴이 센 나라의 저발전국에 대한 각개격파식 침략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고려대 최윤재 교수의 아래 글 <세계화, 거짓말 그리고 대재앙>은 세계화의 허구성을 간략하게 요약해냈다. 일독할만 하다.

-포카라-



세계화, 거짓말 그리고 대재앙


개방할수록 경제가 발전한다?  첨단기술 덕에 세계화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세계화로 국경과 거리가 사라지고 여러 나라의 경제 제도가 통일된다? 세계화의 ‘사실과 진실’을 밝힌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가 시끄럽다. 이런 때 세계화 문제를 꺼내는 것이 한가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차분히 세계화 같은 근본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세계화가 잘못 작동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은 철지난 좌파나 쇄국주의자가 아니다. 주류 경제학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먼을 비롯해 하버드 대학의 로드릭과 게마와트, 컬럼비아 대학의 바그와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의 리머 등 저명한 경제학자가 세계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정부든 기업이든 학교든 살아남고 싶으면 어서 문을 열라는 말을 들어왔다. 조급한 마음에 영어를 많이 섞어 쓰고 외국인을 모셔다가 자리 채우는 것만으로 세계화를 잘한다고 떠벌리는 소동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책 도 넘쳐난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 프랜시스 케언크로스의 <거리의 소멸ⓝ디지털 혁명>, 다니엘 예르긴의 <시장 대 국가> 같은 책은 세계 곳곳의 사례를 들어가며 세계화 담론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책을 필독 교양서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실은 세계화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퍼뜨리는 위험한 책들이다. 예를 들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따르면, 정부는 이제 정치를 접고 경제만 생각하며 세계화가 시키는 대로 이른바 ‘황금 구속복’을 입어야 한다는데,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의 게마와트 교수 표현을 빌리면, 그런 말을 믿고 정부정책으로 삼는 것은 ‘쓸데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세계화는 호들갑을 떨며 서둘러 할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봐야 한다. 세계화를 위해 국내 문제를 선뜻 희생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내 문제를 보면서 세계화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 때문에 이런 말 꺼내기가 조금 쉬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새삼 나온 말은 아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세계화 이야기는 원래 제대로 된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잘못된 속설이 너무나 많다.



세계화 수준, 100년 전과 비슷


세계화 속설에 따르자면, 통신·컴퓨터와 운송 수단 등 첨단 기술이 발달해 지구는 이제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 되지 않는 ‘작은 동네’가 되었으니, 세계화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상당수 주류 경제학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첨단 기술은 세계화 본질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세계화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전화나 인터넷조차 그렇다. 1930년 뉴욕에서 런던으로 3분간 통화하는 데 350달러였다는데, 요즘 인터넷 전화의 경우는 세계 어디든 공짜에 가깝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지구촌 구석구석의 사람들과 매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 속사정을 다 알까? 천만의 말씀이다. 세계 어디서고 전화나 인터넷은, 그리고 사람들 관심은 여전히 대부분 같은 무리, 같은 동네, 같은 나라 안에서 끼리끼리 맴돌 뿐이다. 지구 반대편은커녕 바로 이웃에서 벌어지는 일조차 깜깜한 때가 많다. 첨단 기술은 편의 수단이기는 하나, 그 때문에 세계가 한 동네처럼 좁아졌다는 것은 너무 부풀린 이야기이며 자칫 세계화 불가피론을 부추기는 잘못을 범한다.

개방과 세계화는 기술보다는 정책에 따라 달라져 왔다. 많은 나라에서 1960년대부터 무역자유화를, 그리고 1990년대부터 자본자유화를 정책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과 인도,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가 시장경제에 새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보다 정책이 세계화를 가져왔기에 그 세계화는 잘못될 수도, 멈출 수도, 거꾸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그런 기미가 보인다.


 
 

돌이켜보면 세계화 수준은 첨단 기술이 없던 1900년대 초반에도 이미 높았다. 그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화는 크게 뒷걸음쳤는데, 이는 첨단 기술이 후퇴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화가 많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수준은 100년 전과 같거나 조금 높을 뿐이다. 예컨대 2005년에 세계 인구 2.9%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는데 그 비율은 1900년에 이미 3.0%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국인 직접투자 비율도 1990년대에 와서야 1900년대 초반 수준을 회복했다.

세계화의 상징으로 꼽히는 또 다른 유명한 예를 보자.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보내면 지구 반대편 인도에서 받아 곧바로 처리해 돌려준다. 전에 없던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인도와 미국이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떠넘길 수 있는 일은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인도 같은 저개발국에서 그런 일을 맡아줄 만큼 교육 수준이 높고 영어가 통하는 노동자도 얼마 되지 않는다. 11억 인구가 1500가지도 넘는 말을 하는 인도에서 힌두어 인구는 3억명이 넘는 반면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인구는 20만명도 채 안 된다.

능력이 되는 노동자라면 오히려 영국이나 캐나다에 넘쳐난다. 그러나 그쪽은 임금이 높아서 미국 기업도 선뜻 맡기지 못한다. 인도도 앞으로 잘살게 된다면 그런 일을 맡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도가 인터넷으로 미국 자료를 처리해주는 것은 한국이 예전에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역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국경과 거리가 사라져간다는 속설도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동떨어진다. 먼 나라보다 가까운 나라와 더 많이 무역한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중력모형’이라 부르는 이론인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개방적인 미국-캐나다 국경이나 유럽연합 내 국경조차도 아직 무역의 자유로운 흐름을 적잖이 막고 있다. 교역량뿐 아니라 전화와 인터넷 사용량마저도 거리와 국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세계화가 여러 나라의 경제제도를 통일시킨다는 것도 잘못된 속설이다. 노동, 복지, 기업·금융 관계, 조세 등 많은 제도는 선진국 사이에서도 차이가 크며, 어느 것이 낫고 못한지 따지기 어렵다. 특정 형태의 세계화를 거부한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노르웨이와 스위스는 유럽연합 가입을 줄곧 거부하지만, 국민소득이 미국보다 훨씬 높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은 29개국 가운데 아직도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뿐이다. 특정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는다고 세계화와 담쌓는 것은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안에서 이뤄지는 다자간 협정과 달리, FTA 같은 양자간 협정은 특히 협정국 사이에 경제력 차이가 클 경우 ‘평등한’ 협정을 맺기 어렵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세계화 속설은 이처럼 많은 점에서 사실을 왜곡하는데, 경제학자들이 세계화 속설을 문제 삼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속설이 무분별한 개방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국내 경제와 국제 경제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국내 경제에는 ‘정부’가 있지만 국제 경제에는 정부가 없다. 경제에 시장만 있으면 되고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 차이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세계화 속설은 위험하다. 시장은 정부 없이 혼자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며칠 전 조셉 스티글리츠가 명언을 내놓았다.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과 관련한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구실은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다. 안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부는 국방과 치안으로 재산권을 보호한다. 통일된 화폐를 만들고 그 가치를 유지해 상거래를 돕는다. 금융과 환경 기준을 마련해 감독한다. 각종 상거래 제도와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해 거래의 안전을 보장해준다. 식품과 의약품 따위의 안전을 개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정부가 기준을 마련해 검사하고 강제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멜라민이나 광우병 물질을 각자 골라내가며 먹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독과점을 규제하고 환경기준을 마련하며 지나친 소득 불평등을 고친다. 이러니 정부가 없으면, 또는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면 시장은 잘 움직이지 못한다.

국제 경제가 그나마 돌아가는 것은 각 나라에 정부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아우르는 국제 정부가 없기에 국제 경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시장의 안전성이 국제 경제에서는 모두 다 허술해진다. 국제 정부 대신 국제 기구가 여럿 있기는 하지만 하는 일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국제 기구는 각 나라 정부에 권고할 뿐 강제하지 못한다. 강제하는 것은 결국 각 나라 정부의 몫이며, 나라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리게 되면 문제 해결은 어렵고, 되더라도 더디다. 국제무역기구가 생기면서 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강대국이 억지를 부리면 대책이 서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는 국제 경제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속설에 따르면 국경 너머 훨훨 날아다니는 국제 자본을 끌어들여야만 경제가 살 수 있고, 그 자본은 국내 규제를 풀어야만 끌어올 수 있다. 자본은 자유를 좋아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는 대로 자유를 안겨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지금 투자할 돈이 모자라거나 규제가 심해 투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불확실성이 높아 그런 것이다.

금융은 정부가 안전을 최종 책임져야 할 대표 부문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요즘 하루하루 더해간다. 금융은 겉으로는 돈을 주고받는 일이지만 속으로는 위험을 사고파는 일이어서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금융의 건전성은 그 건전성을 남이 믿어주느냐에 크게 달려 있고, 한번 문제가 터지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간다. 때문에 금융에는 여러 안전장치가 꼭 있어야 한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겪으면서 여러 나라에서 예금보험, 지불준비금, 자기자본 요구조건과 자산규제, 금융감독, 최종대부자 기능 등 많은 안전장치를 마련했고, 덕분에 금융시장은 그 뒤 많은 나라에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고 발달해왔다.

그런데 이 안전장치들이 아주 허술해지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국제 금융시장이다. 국내 금융과 달리 국제 금융에서는 관할권과 책임소재가 나라 사이에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라 간 협조도 쉽지 않다. 선진국에서도 문제지만 특히 심각한 것은 후진국인데 국내 금융시장과 정부의 금융감독 기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많은 후진국에서 서둘러 금융시장을 개방했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한 경우가 한국을 비롯하여 많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후진국에게 금융 개방에 앞서 국내 금융부터 정비하라고 요구할 정도다.

 



 다른 하나는 파생상품 시장이다. 전통적인 금융상품과 달리 파생상품은 그 성질상 자산 규모조차 잘 파 악되지 않으며, 선진국에서도 그동안 감독과 규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파생상품은 원래 위험을 넓게 퍼뜨려서 안전하게 하는 장치다. 그러나 안전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더 위험하게 움직인다. 바로 도덕적 해이다. 눈길에서 거북이 걸음을 하던 차가 마른 길을 만나면 속도를 높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탓에 파생상품은 오히려 위험을 퍼뜨리는 매개체가 되었고 그것이 요즘 크게 터진 것이다. 이에 전통적인 국내 금융뿐 아니라 국제 금융과 파생상품을 적극 감독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선진국에서부터 커졌다.


대비책 없는 세계화는 ‘독’


개방이 국내 경제에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무역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역을 개방하면 국내 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국제 시장 변동에 따른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국제 경쟁이 높아지면 작은 변화에도 일자리를 그만두거나 옮길 일이 많아진다. 이를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해주지 못하면 고용불안과 소득불평등 확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쇠고기 시장 개방에 묻어오는 광우병 물질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묻어오는 ‘투자자 국가 제소권’ 같은 독소 조항도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다. 나아가 외국 자본을 국내 사회기반시설 투자에 함부로 참여시키는 것은 공공서비스 기반을 허물고 독점 이윤을 허용할 염려도 있다.

세계화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를 하되 개방에만 정신이 팔려 위험 대비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대비책 없는 세계화는 약 대신 독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세계화를 성공시킨 선진국의 비결이기도 하다. 하버드 대학 로드릭 교수가 선진국을 비교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개방을 많이 한 나라일수록 정부 규모가 크다. 시간적으로도 세계화가 확대됨에 따라 정부 규모가 커져왔는데 특히 사회안전망 확충이 두드러진다. 세계화 위험에 대비하다 보면 정부가 할 일이 세계화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지는데, 이 점은 외부 충격에 약한 작은 나라일수록 더욱 중요하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개방 정도는 이미 높지만 정부 규모는 작다. 그만큼 국내 경제는 세계화에 따른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는데 정부는 그 위험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다. 국민 삶은 그만큼 고단하다. 사회안전망은 장기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요즈음 세계화 대책뿐 아니라 내수경기 대책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폭풍우가 몰려올 때는 문 열고 나가기에 앞서 집안의 빈틈부터 찾아 메우는 것이 순서다.

 시사IN 59호 / 2008.10월 27일 / 최윤재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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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의 외침 “이제 행동보다 말을 할 때다”


촘스키·월러스틴·지젝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던 지식인이 현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이들은 자유·행복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외쳐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누구는 ‘금융의 대량살상무기’ 파생금융상품이 문제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수 언론은 파생상품 규제에 반대했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연준) 의장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아서 레빗 전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의 이름도 나왔다. 부시 행정부의 구제금융안을 놓고는 우파 일각에서 ‘사회주의적’이라거나 ‘큰 정부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동안의 정부 개입이 이같은 사태를 초래했다며 이참에 시장에 대한 정부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놓고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지식인들이 갖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좌파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부동산 거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아니라 그동안 금융자유화와 규제 완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돼온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현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월스트리트에 세금을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일상 공간인 메인스트리트를 구제하라고 주장한다.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위기의 직접 원인이 부동산 거품의 붕괴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 뿌리는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금융자유화의 승리’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자유화 조처로 막대한 이익을 본 금융기관이 이제는 국가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며 월가의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촘스키는 최근의 경제위기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의 종말과 연결 짓는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 에 따르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이며, 미국의 경제 역시 국가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시장 근본주의가 추동한 금융자유화는 한 시대를 마감하겠지만 국가 자본주의 자체는 전혀 위협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미국 제국 몰락의 징후인가

반면 하워드 진 미국 보스턴 대학 명예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 “미국 제국의 몰락으로 향하는 길 목에 있는 주요 중간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지난 10월2일 영국의 일간 가디언 웹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2001년 9·11사태가 미국 제국 몰락의 첫 번째 징후라면 “무능과 탐욕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유명한 거대 금융기관들에 납세자들이 낸 세금 7000억 달러를 쏟아붓기로 (공화·민주) 양대 정당이 서둘러 합의한 것”이 또 다른 징후라고 지적했다.

세계체제론을 주장해온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 대학 석좌교수는 지금의 경제위기가 단순한 경기침체(recession)가 아니라 전세계적 불황(depression)의 시작이라고 단언한다. 장기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논해온 월러스틴은 10월15일 미국 빙햄턴 대학 페르낭브로델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논평을 통해 파생상품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석유 투기세력을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이며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월러스틴은 현재의 불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펴온 논리대로 장기적 수준의 헤게모니 주기와 중기적 수준의 콘트라티예프(경기 사이클) 파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먼저 장기적인 헤게모니 주기를 보면 미국은 1873년 영국에 대항하는 국가로 떠오른 뒤 1945년 헤게모니를 완전히 구축했고, 1970년대 이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월러스틴은, 미국의 헤게모니는 부시 대통령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추락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으며 미국이 여전히 강대국이지만 수십 년 안에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 질서는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콘드라티예프 파동은 이와 좀 다른데 세계경제는 1945년 이후 기록적인 호황 국면을 이어가 1967~1973년 최정점을 찍은 후 하향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 하향세는 그전과 달리 오래 지속되어왔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이사회, 국제통화기금(IMF), 유럽과 일본의 협력자들이 주기적으로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게 월러스틴의 설명이다.

1987 년 주가 폭락, 1989년 저축대부조합 파산,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1998년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사태, 2001~2002년 엔론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세계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고 그 덕분(?)에 콘트라티예프 하강 국면이 길어졌을 뿐이다. 월러스틴은 하지만 이같은 개입에는 본질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지금 그 한계에 도달했다고 지적한다.

 
 

월러스틴의 전망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현재의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대체할 새 질서는 무수한 개별 투쟁의 결과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질서인지를 예측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는 아닐 것이지만 양극화되고 위계적인 더 나쁜 것일 수도 있고, 비교적 민주적이고 평등한 더 좋은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지금 시기 지구적 차원에 벌어지는 주요 정치투쟁이다.”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더 급진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포스터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상 극심한 위기 중 하나에 직면했다.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나쁜 적이 없었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 위기는 “금융시장에 돈을 쏟아붓거나 금리를 낮춘다고 해결될 수 있는 유동성 위기가 아니며 ‘미국식’ ‘자유시장’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총체적인 몰락의 징조이다”라고 평가한다.


부자들 도와주는 게 사회주의?


그는 또 미국과 유럽의 은행 국유화를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로 혼돈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단지 “전면적인 부채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취한 임시 조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터는 지금의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이 온전히 노동자 계급의 몫일 수밖에 없으며 좌파는 “고장난 체제를 수리하려 들 게 아니라 경제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도 흥미롭다. 지젝은 <런던서평>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 9·11 직후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미국민에게 한 연설에서 공통점을 끄집어낸다. 부시 대통령이 두 연설에서 모두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 그리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신속하고도 단호한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지젝은 또한 부시 대통령이 미국적 가치―9·11 당시에는 개인의 자유 보장, 지금은 시장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바로 그 가치들을 부분적으로 보류할 것을 미국 국민에게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제금융안을 놓고 벌어진 ‘사회주의’ 논란에 대해 지젝은 “금융구제안이 정말로 ‘사회주의적’인 조처라면 아주 기발한 것”인데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자들을, 돈을 빌리는 쪽이 아니라 빌려주는 쪽을 도와주는 것이 목적인 ‘사회주의적’ 조처이기 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데 복무한다면 ‘사회주의’도 괜찮다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덧붙였다.

지젝은 국가의 개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현재 금융위기마저도 사실은 국가 개입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에 대한 대책으로 금리를 내려 부동산으로 자금을 끌어들인 결과 현재의 금융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그가 든 아프리카 말리의 예는 자유시장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말리에서는 면화 재배와 축산업이 가장 규모가 컸는데 서구 열강이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규칙을 강요하는 바람에 두 산업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면화재배 농가를 보호하는 데 말리의 1년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고, 유럽연합은 또 1년에 소 한 마리당 500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시장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으며 항상 정치적 결정에 의해 규제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진짜 딜레마는 ‘국가 개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국가 개입이냐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정치, 즉 우리 삶을 지배하는 조건을 규정하는 투쟁이다. 지젝은 금융구제안을 놓고 벌이는 토론은 우리의 사회적·경제적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며 “이제 행동을 할 게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워드 진도 ‘자유시장’이라는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한 번도 자유시장을 가져본 적이 없고 정부의 개입은 항상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 는 “7000억 달러를 부실 금융기관에 지원할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주는 것이 대안이다”라며 주택 소유자가 모기지론을 갚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연방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자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86세인 노장 역사학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독립선언문이 약속한 것, 바로 만인의 생명·자유·행복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라는 것을 선동하고 조직하라. 그런 과감한 접근만이 미국을, 제국이 아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을 지킬 수 있다.”

시사IN 59호 / 윤재설(자유기고가)